I.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point of view)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각인시키며 일본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전후 혼란스런 상황에서 제작된 <라쇼몽>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영화의 내용이 보여주는 다양한 시선들에 대한 가치 판단은 관객들에게 유보시켜 놓고 있다. 세상에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각기 믿고 있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편집된 기억일 뿐이다. 단순한 살인 사건처럼 보이는 이야기 뒤에 숨은 서로 다른 관점들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런 유(類)의 영화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관점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로 남녀의 차이를 논했던 작가도 있지만 헐리우드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 독일영화 <롤라 런>, 프랑스 영화 <라 빠르망>은 그러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는 영화로 눈여겨 볼만하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실은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관점은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와 높이 그리고 각도에 의해 결정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점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 틀이면서 사유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된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자아와 대상 혹은 주체 사이의 거리도 결국 이러한 시선들의 출발점에서 비롯된다.
Ⅱ. 동양과 서양의 거리
1. 오리엔탈리즘과 대한민국
지금, 이것이 백인이 걷는 길이다.
대지를 깨끗이 하기 위하여 가는 때,
철로를 따라, 포도넝쿨 아래로
좌우에는 대밀림
우리는 그 길을 왔다 - 비에 젖고 바람에 날린 길 -
선택한 별을 길잡이로 삼아.
오, 백인이 손을 흔들며 그 큰 길을
걷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398페이지)
키플링의 시를 재인용해 보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태인으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세계인의 추앙을 받았다. 물론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욕을 했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이드의 주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양인들의 사상과 주관적 인식의 틀을 깨트리려는 변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사이드가 말한 동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나 남아시아를 포함하지 않은 지역적 개념이다. 지역적으로는 중동 지역에 해당하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의미의 동양과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한다면 인류의 발전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중요한 관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하기 어렵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117페이지)
오리엔탈리즘을 역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박힌 무의식에 관한 부분으로까지 연장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구한말 신미양요를 필두로 외세에 의해 반강제적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 한국인에게 미국, 즉 서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문화적 충격으로 이어졌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문명의 수준은 근대적 사회로의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콤플렉스가 생겼고 아메리칸 드림이 탄생했다. 미국의 식민지와 다름없을 정도의 정치, 경제적 불평등 관계는 아직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서양과 다르다. 사물을 보는 방식도 다르고 인간 관계의 기본 틀도 다르다. 서양의 근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과 국민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우 주자학의 성립 자체가 이미 근대적 인간관의 성립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곧 서구인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 내부의 오래된 편견을 바로잡고 보편적 관점을 확보하는데 출발점이 된다.
- 고명섭, ‘지식의 발견’(210페이지)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리엔탈리즘이 단순하게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식민지 지배방식으로 한정 지을 수만은 없다. 동양 스스로가 자기 검열에 빠져 행동을 제약하고 서양에 대한 옥시덴탈리즘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그보다 한 발짝씩 더 나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가장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인식은 최근에 갖게 된 민족주의적 관점이다.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는 본고의 논점에서 벗어나는 거대 담론이지만 동양, 특히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서양, 즉 미국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과 콤플렉스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서양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서 차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본질적인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해왔다. 그 과정에서 지루하고 힘겨운 내적 동력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이드가 건네는 마지막 한 마디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 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570페이지)
2. 동양과 서양의 거리
동양과 서양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다. 리처드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과 서양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생각의 차이를 그려내고 있다. 이 차이는 추상적으로 문화의 차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차이를 말한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동양과 서양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차이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특별하고 단순한 상황에서 개개인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일반화 될 수 없다. 차이는 차별을 만든다.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발상은 위험한 줄타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스벳의 실험들과 그의 논의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차별을 위한 차이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는 언어적 거리의 차이를 지워내기 위한 작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술집 종업원 보복 구타 사건은 한국적 사고방식과 뿌리 깊은 동양적(?)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강준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예언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은 2005년 초 신년사를 통해 “동료와 선후배 간의 의리는 한화의 소중한 핵심가치”라며 “조직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직원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지만, 개인의 이익과 욕심만 앞세우는 직원은 외면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연의 이런 ‘의리 경영론’에 대해 한화측은 “일터에서 의리를 지키지 않는 직원은 고객에게도 믿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이 김 회장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기는 한데, ‘내부고발’은 어떻게 본다는 건지 그 점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게 아쉽다.
- 강준만, ‘인간사색’(227페이지)
거의 조폭 신년사에 가까운 김승연의 말은 한국의 그룹 총수로서 그가 보여준 언행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심리 상태조차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동서양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김승연이 대표적 개인은 될 수 없으나 동양 사회, 특히 한국 사회의 중핵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로 한정 짓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동양의 동양적 특징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나 한국도 그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가 진행된다. 이에 비해, 서양은 유럽계 미국인이나 미국계 동양인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심리 실험의 경우, 실험실에서 생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심리실험의 오류들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저자가 지적하는 관점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차이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분명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름의 의미가 분명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와 문화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르냐가 논의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 차이가 빚어내는 다양성에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 한다. 획일화된 논리와 세계화의 망령은 전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논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세상을 지배한다. 동양과 서양의 가치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그 반응의 다양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겠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유지, 보존,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화의 다양성과 삶의 보편성은 분명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보편성 속의 특수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차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상반된 관점의 극복을 위해
동양의 정신적 영역과 가치 그리고 서양의 물질적 가치인 과학기술이 결합된 형태를 이상적인 인류 문명의 모델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이분법적 논리이다.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 등 인류 문명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발명품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또한 서양의 학문들은 서양의 정신적 가치를 뛰어넘는 인간 이성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고 선후를 따질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에 무게 중심을 두기는 더더욱 어렵다. 동양과 서양은 나뉘어져 있는 두 개의 세상이 아니다.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동양은 대부분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괴물이 탄생했고 서양인의 오만은 인간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반성으로 돌아왔다. 끊임없이 종교와 영토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로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로 접어든 인류의 삶의 모습이 단순한 물질적 가치 이외에 어떤 목적과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인류의 미래를 묻는 수많은 질문들 속에는 늘 모범 답안이 내재해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지역구분이나 인종과 국가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다. 최근에는 촘스키의 아나키즘을 책으로 엮어낼 만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모든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치를 해야 자신이 사는 터인 자연에 합치된다. 우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아가 기성의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자유는 당연히 반항과 부정을 내포한다.
- 박홍규, ‘아나키즘 이야기’(47페이지)
다소 엉뚱한 제안일 수 있겠지만 인류는 무한한 혁명과 안정 속에서 역동적으로 문화와 역사를 진보시켜 왔다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가치와 문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문화적 다양성과 삶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자연스럽고 발전적인 사회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 가치와 발전에 대한 논의는 좀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죽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든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문화적 다양성과 가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자치와 자연을 모토로 전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우리들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가치를 혼합해서 나누어 가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III. 어디로 갈 것인가
페스팅거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 상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이제 동양과 서양은 더 이상 그 지리, 정치, 사회, 문화적 거리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분법적 구분과 논의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의 이동이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대립과 갈등의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동양의 관점이라는 상반된 관점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기준과 가치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태어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인류는 진화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진화가 단순한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적 가치의 진화로 진일보해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의 차이와 생활의 차이 혹은 과학 기술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는 차원으로 관점을 이동해야 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 상태나 사고방식의 차이를 밝혀내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미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동양과 서양은 차이가 없는 인간이다. 그 차이를 밝히는 것은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