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point of view)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그를 세계적인 거장으로 각인시키며 일본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 전후 혼란스런 상황에서 제작된 <라쇼몽>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영화의 내용이 보여주는 다양한 시선들에 대한 가치 판단은 관객들에게 유보시켜 놓고 있다. 세상에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각기 믿고 있는 이야기들은 자신의 관점으로 편집된 기억일 뿐이다. 단순한 살인 사건처럼 보이는 이야기 뒤에 숨은 서로 다른 관점들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진실을 알 수 없다.


  이런 유(類)의 영화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사랑하는 두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관점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로 남녀의 차이를 논했던 작가도 있지만 헐리우드 영화 <슬라이딩 도어즈>, 독일영화 <롤라 런>, 프랑스 영화 <라 빠르망>은 그러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내는 영화로 눈여겨 볼만하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실은 객관을 가장한 주관적 해석일 뿐이다.


  관점은 사물을 바라보는 위치와 높이 그리고 각도에 의해 결정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관점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 틀이면서 사유를 시작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된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자아와 대상 혹은 주체 사이의 거리도 결국 이러한 시선들의 출발점에서 비롯된다.


Ⅱ. 동양과 서양의 거리

 

  1. 오리엔탈리즘과 대한민국

 

지금, 이것이 백인이 걷는 길이다.
대지를 깨끗이 하기 위하여 가는 때,
철로를 따라, 포도넝쿨 아래로
좌우에는 대밀림
우리는 그 길을 왔다 - 비에 젖고 바람에 날린 길 -
선택한 별을 길잡이로 삼아.
오, 백인이 손을 흔들며 그 큰 길을
걷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398페이지)

 

  키플링의 시를 재인용해 보았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태인으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세계인의 추앙을 받았다. 물론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욕을 했거나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이드의 주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서양인들의 사상과 주관적 인식의 틀을 깨트리려는 변혁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사이드가 말한 동양은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나 남아시아를 포함하지 않은 지역적 개념이다. 지역적으로는 중동 지역에 해당하는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통상적인 의미의 동양과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한다면 인류의 발전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중요한 관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을 이해하기 어렵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117페이지)

 

  오리엔탈리즘을 역사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뿌리박힌 무의식에 관한 부분으로까지 연장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구한말 신미양요를 필두로 외세에 의해 반강제적 개항이 이루어진 이후 한국인에게 미국, 즉 서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새로운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문화적 충격으로 이어졌고,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문명의 수준은 근대적 사회로의 이행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콤플렉스가 생겼고 아메리칸 드림이 탄생했다. 미국의 식민지와 다름없을 정도의 정치, 경제적 불평등 관계는 아직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서양과 다르다. 사물을 보는 방식도 다르고 인간 관계의 기본 틀도 다르다. 서양의 근대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자본주의과 국민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경우 주자학의 성립 자체가 이미 근대적 인간관의 성립이었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곧 서구인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 내부의 오래된 편견을 바로잡고 보편적 관점을 확보하는데 출발점이 된다.
    - 고명섭, ‘지식의 발견’(210페이지)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리엔탈리즘이 단순하게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식민지 지배방식으로 한정 지을 수만은 없다. 동양 스스로가 자기 검열에 빠져 행동을 제약하고 서양에 대한 옥시덴탈리즘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은 그보다 한 발짝씩 더 나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한다.


  가장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인식은 최근에 갖게 된 민족주의적 관점이다.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는 본고의 논점에서 벗어나는 거대 담론이지만 동양, 특히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서양, 즉 미국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과 콤플렉스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내며 서양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노력 속에서 차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본질적인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해왔다. 그 과정에서 지루하고 힘겨운 내적 동력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래서 사이드가 건네는 마지막 한 마디는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 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570페이지)

 

  2. 동양과 서양의 거리

 

  동양과 서양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더 멀다. 리처드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과 서양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생각의 차이를 그려내고 있다. 이 차이는 추상적으로 문화의 차이라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심리적 차이를 말한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그 차이를 설명하려는 노력은 동양과 서양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차이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특별하고 단순한 상황에서 개개인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제각각이다. 이것은 일반화 될 수 없다. 차이는 차별을 만든다. 동양과 서양을 나누어 생각하는 이분법적 발상은 위험한 줄타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스벳의 실험들과 그의 논의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차별을 위한 차이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는 언어적 거리의 차이를 지워내기 위한 작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술집 종업원 보복 구타 사건은 한국적 사고방식과 뿌리 깊은 동양적(?) 인간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강준만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예언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은 2005년 초 신년사를 통해 “동료와 선후배 간의 의리는 한화의 소중한 핵심가치”라며 “조직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는 직원은 미래가 보장될 것이지만, 개인의 이익과 욕심만 앞세우는 직원은 외면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연의 이런 ‘의리 경영론’에 대해 한화측은 “일터에서 의리를 지키지 않는 직원은 고객에게도 믿음을 줄 수 없다는 것이 김 회장의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아주 좋은 생각인 것 같기는 한데, ‘내부고발’은 어떻게 본다는 건지 그 점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게 아쉽다. 
    - 강준만, ‘인간사색’(227페이지)

 

  거의 조폭 신년사에 가까운 김승연의 말은 한국의 그룹 총수로서 그가 보여준 언행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심리 상태조차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동서양이 차이를 보여주는 대목으로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김승연이 대표적 개인은 될 수 없으나 동양 사회, 특히 한국 사회의 중핵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로 한정 짓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동양의 동양적 특징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나 한국도 그 영향권 안에 놓여 있다는 전제하에 논의가 진행된다. 이에 비해, 서양은 유럽계 미국인이나 미국계 동양인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심리 실험의 경우, 실험실에서 생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와 심리실험의 오류들은 눈감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저자가 지적하는 관점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차이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분명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름의 의미가 분명하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와 문화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어느 것이 옳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르냐가 논의의 중심에 서야 한다. 그 차이가 빚어내는 다양성에 눈과 귀를 집중시켜야 한다. 획일화된 논리와 세계화의 망령은 전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논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세상을 지배한다. 동양과 서양의 가치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그 반응의 다양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측면에서 연구의 가치가 있겠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유지, 보존, 발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화의 다양성과 삶의 보편성은 분명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보편성 속의 특수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차별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상반된 관점의 극복을 위해

 

  동양의 정신적 영역과 가치 그리고 서양의 물질적 가치인 과학기술이 결합된 형태를 이상적인 인류 문명의 모델로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이분법적 논리이다. 인쇄술과 화약, 나침반 등 인류 문명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발명품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해졌다. 또한 서양의 학문들은 서양의 정신적 가치를 뛰어넘는 인간 이성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고 선후를 따질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에 무게 중심을 두기는 더더욱 어렵다. 동양과 서양은 나뉘어져 있는 두 개의 세상이 아니다.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적 과정에서 동양은 대부분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괴물이 탄생했고 서양인의 오만은 인간적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반성으로 돌아왔다. 끊임없이 종교와 영토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로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21세기로 접어든 인류의 삶의 모습이 단순한 물질적 가치 이외에 어떤 목적과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인류의 미래를 묻는 수많은 질문들 속에는 늘 모범 답안이 내재해 있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지역구분이나 인종과 국가의 구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다. 최근에는 촘스키의 아나키즘을 책으로 엮어낼 만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인간은 그런 모든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스스로 자치를 해야 자신이 사는 터인 자연에 합치된다. 우선 부모와 교사 그리고 종교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아가 기성의 도덕과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리고 권위와 절대, 관념과 사상, 조직과 전체, 편견과 허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자유는 당연히 반항과 부정을 내포한다.  
    - 박홍규, ‘아나키즘 이야기’(47페이지)

 

  다소 엉뚱한 제안일 수 있겠지만 인류는 무한한 혁명과 안정 속에서 역동적으로 문화와 역사를 진보시켜 왔다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가치와 문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문화적 다양성과 삶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자연스럽고 발전적인 사회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본다. 다만 그 가치와 발전에 대한 논의는 좀 더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죽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든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문화적 다양성과 가치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자치와 자연을 모토로 전 인류가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 미래를 위한 우리들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의 가치를 혼합해서 나누어 가진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III. 어디로 갈 것인가

 

  페스팅거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믿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은 동양과 서양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나 심리 상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이제 동양과 서양은 더 이상 그 지리, 정치, 사회, 문화적 거리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분법적 구분과 논의가 더 이상 의미 없는 기준이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의 이동이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대립과 갈등의 관점이 아니라, 서양의 관점과 동양의 관점이라는 상반된 관점이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기준과 가치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태어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인류는 진화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 진화가 단순한 생물학적 진화가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적 가치의 진화로 진일보해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의 차이와 생활의 차이 혹은 과학 기술의 차이나 문화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극복하는 차원으로 관점을 이동해야 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 상태나 사고방식의 차이를 밝혀내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미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동양과 서양은 차이가 없는 인간이다. 그 차이를 밝히는 것은 또 다른 미래를 위한 준비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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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 2007-06-0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차고 유익한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공감하며 보았습니다. 저도 평소 좋아하던 주제라...그런데 제목에서 <생각을 지도>는 <생각의 지도>의 오타겠지요..^^;;

sceptic 2007-06-0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돌아보지 않는...오타 수정 고맙습니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들이 학교 밖에서 학습한 것이다. 학교 아동은 교사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때때로 교사가 있을 때라도 대부분의 학습을 자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결국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이반 일리히, 학교없는 사회 : P.58

  근대적 의미의 학교는 제국주의의 근대 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국민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 이념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는 국민을 교육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어린 시절부터 학습하고 질서와 규율을 명분으로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국민을 양성한다. 해방이후에도 교육의 근간과 뿌리는 여전하다. 군사 정권시절에는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심지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국민윤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직도 중학생이 되면 ‘도덕’을 배운다.

"학교는 중요한 진실을 회피한다" - 노암 촘스키, 강주헌 옮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2001, P. 38) 학교는 국가가 승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입한다. 김상봉, 도덕교육의 파시즘 :  P. 69

  아직도 학교에서는 두발을 단속한다. 제각각 다른 머리의 길이가 옷깃을 닿지 않아야 한다는 애매한 규정이나 여학생의 머리 길이 제한 등은 이미 2005년에 국가인권위원에서 학생들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하고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권고를 교육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벌어지는 지각과 두발 단속의 학교 현장을 가만히 들여다 봐야 한다. 교육과정에도 없는 애국조회가 아직도 시행되는 수많은 학교를 보자.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교장과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들의 생각을 들어보자.

  올바른 가치관의 함양과 민주시민으로서의 질서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학교에서는 과연 주어지는가? 학교 교육은 이대로 좋은가? 대안 없는 비판이나 한숨 섞인 푸념이 아니다. 온몸으로 실천하며 공교육의 방법과 제도를 비판하고 대안을 찾아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작년에 나온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에서 나는 단 한 줄을 가슴에 새겼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이 한 마디를 부제로 달고 <호모 쿵푸스>가 나왔다. 공부하는 인간이란다. 많은 학생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책의 제목을 달고 나왔으나 이 땅의 모든 학생과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강제로 읽히고 싶은 책이다.

  어떤 책이든 한 사람의 독자로서 한 권의 책을 읽고 가슴으로 받아들이거나 머리로 생각하는 장면이 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가슴으로 읽었다. 무덥던 어느 날, 혼자 앉아 밥을 퍼먹으며 책장을 넘기다 울컥했다. 눈물이 날 뻔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바라 살아왔던가하는 자책과 이 땅의 교육 현실을 꼬집는 고미숙의 이야기는 날선 칼날이 아니라 은근한 손길로 구석구석을 쓰다듬으며 아픈 곳을 콕콕 찔러댄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너 왜사니?

  ‘이념이란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한 마디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 있다.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무엇이 제대로 된 공부인가? 장정일의 ‘공부’를 비롯해서 최근에 불고 있는 ‘공부’ 열풍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과연 왜 공부를 해야 하며, 무엇이 공부이며, 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책에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저자 나름의 진단과 해석과 대안들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유동 시절의 ‘연구공간 너머’에서 지금의 남산 시절까지 그녀가 겪은 시간들과 공부 방법들을 단순하게 개인적 차원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규 교육 과정이나 공교육의 제도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부에 대한 열망과 또 다른 방식의 삶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의 말은 현실에서 비롯되었고 실천적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이나 사회의 지향점에 대한 반성적 성찰들은 각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과 시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고미숙은 이 책에서 ‘교육’ 그리고 ‘공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파괴적이고 반문명적인 선전선동이 아니다. 현재의 공교육이 보여주는 문제점들을 정확히 짚어내며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학교’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보여준다. 고미숙은 이 책을 인용하며 현실적 대안이 공교육의 폐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힘겹게 그녀가 살아내고 있는, 온몸으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교육이나 삶은 어떤 것이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현실적 대안들을 구체화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현실과 부딪히는 많은 문제점들 그리고 교육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까지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수많은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문제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철학적 물음과 연계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콩도르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 P. 66

  우리가 제대로 교육받았다면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고미숙은 책을 말한다. 독서를 뛰어넘는 방법은 없다. 특히 ‘고전’을 암송하며 문리를 터득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진정한 공부방법에 대해 말한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책장을 덮었다.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인가?”라고 묻는 그녀의 질문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동안 누구에게나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분량도 많지 않고 내용도 어렵지 않으니 누구에게나 가볍고 편안하게 읽힐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교육과 독서와 가장 많은 공감했던 이 책을 자신있게 권할 것이다. 삶은 끊임없는 혁명의 과정이며 우주와 생의 신비를 깨닫고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억압과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고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 그것이 곧 혁명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시작하는가? 공부로부터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탐구하는 공부. 이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자만이 구조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다. - P. 199

070603-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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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7:07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비로그인 2007-06-04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로부터 시작한다......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sceptic 2007-06-04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다닐때는 그렇게도 지긋지긋하더니...이제 진짜 공부를 좀 해보려고 마음 먹어 봅니다...

2007-06-04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6-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은글 읽으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저 범생이와 아주~~~~거리가 멉니다...^^
 
국경꽃집 창비시선 275
김중일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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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불편한 시가 싫어진다. 그 불편함은 내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 시의 언어와 이미지가 이성이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서걱이는 모래바람처럼 시의 언어들이 모래알처럼 뭉치지지 않고 흩어지는 시는 견디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변화가 오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유행처럼 버질 무렵 시의 내용과 형태가 완전히 너덜거릴 때까지 콘크리트 벽에 문지르던 시절이 있었다. 의도와 이미지만 남고 시는 사라졌다. 종류는 다르지만 언어의 틈새와 의미의 간극을 짚어내는 건조한 시들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선함도 생의 감각이나 통찰도 전해주지 못하고 삐걱이며 겉돌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중일의 <국경꽃집>은 시간과 사람 그리고 기계 사이를 넘나들며 다양한 변주를 울리고 있다. 상상력의 측면에서는 탁월하지만 생경한 이미지와 혼란스런 시점의 이동이나 황망한 공간이동 현실에서 벗어난 서술들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그치고 있다. 시를 읽는 느낌이야 백인백색이니 물론 주관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성의 어느 지점을 자극하거나 언어의 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현실과 동떨어진 거리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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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엎드려서 낮잠을 자고 있었어. 꿈결인가……어느 익숙한 손길이 내 둥글게 구부러진 등과 어깨를, 흐느끼며 거칠게 잡아흔드는 거야. 도대체 뭐지? 눈을 떴을 때, 나는 국경꽃집 카운터에 앉아 있었어.
  - ‘국경꽃집의 일일’중에서

  표제어가 되고 있는 국경꽃집은 시인에게 경계선으로 금기의 선으로 보여진다. 국경은 눈에 보이는 실선이 아니라 마음안에 자리잡고 있는 가상의 선이다. 넘지 못할 금기의 선은 아니겠지만 경계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이 된다. 모호한 시간과 공간의 경계 속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팔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풍경일 것이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환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워주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김중일은 그 경계선에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안개처럼 모호한 영상만 가슴에 남는다. 

  봄 밤

이 밤 사장님이
지구 반대편 나스까 고원을 순시하신다

검은 도화지 위에 번진 도시의 불빛,
밤의 지분이 마드는 무정형의 불면

죽은 버드나무에 기대 우는
노파의 동굴같이 캄캄한 입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는 박쥐들

또다시 사장님께서 버드나무에게로
멀고 먼 손을 뻗으시어, 철컥, 철컥,
가는 잎 수천수만 개 재개발하시는 봄밤

결재문서 속 검은 셀로 지정된 표를 따라
칸칸이 지나가는 첫 번째 전동차

먼 출장에서
노란 택시를 타고 사장님이 돌아오신다

  사장님의 존재가 화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의미 이전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할 말이 없으나 현실의 지난함을 신화와 환상의 세계로 표현하는 것들이 때로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법이다. 시간이 흐른 후에 또다시 접한다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젊은 시인의 생경한 언어들은 ‘철컥, 철컥’ 마음의 문을 잠가 버린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시원하니 더 없이 행복하다는 식의 시만을 원하는 독자는 없다. 다람 새로움과 생각의 깊이 다양한 층위의 언어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을 기다리는 욕심많은 독자들을 위해 시인들의 고통과 불면의 밤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들을, 그 시간들을, 그렇게 태어난 시들을 기다린다.


07060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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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안팎
유희석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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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의 개념과 기점에 대한 논의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시대정신(Zeitgeist)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사회적 논리나 현상에 대한 시각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근대는 중세를 넘어서면서 비롯된 다양성에 대한 반성이자 인류의 진보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과정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는 탈근대에 관한 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근대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여러 분야에서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가 근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탈근대의 문제가 시기상조라고 여기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아직도 전근대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라고 하면 지나친 발상일까? 그렇지 않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적 현상이나 이론들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보이지 않는 공간들은 우리들 의식의 영역이다. 이러한 의식이 반영되어 눈에 보이는 현상들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문학이다.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은 문학 평론집이다. 수잔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비평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다양한 논란이 벌어졌지만 여전히 비평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진다면 독자와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져만 갈 것이다.

  간만에 펼쳐든 평론집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복합적이다. 개인적으로 김현 선생이 떠나고난 후에는 거의 평론집에 손을 대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몰입했거나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비평의 기능에 대해 다시 생각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김현의 글은 또 다른 종류의 문학으로 읽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단 이성적인 설득과 논리적인 타당성 저편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문장들이 큰 역할을 했다. 평론과 무관하지만 그의 <행복한 책읽기>는 지금도 가끔 꺼내 뒤적거려본다.

  비평의 시대가 가버렸어도 여전히 유효한 비평의 기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유희석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은 문학을 통해 시대 정신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정치한 논리와 예민한 감수성은 평론가가 지녀야할 덕목이다. 유희석은 이 책에서 이상과 김수영, 기형도와 고은의 시를 통해 근대 극복의 이정표를 제시하려는 시도를 한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소설가와 통일 시대를 중심으로 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 문학의 풍토와 환경들을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개별 작품들을 통해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간격들을 메워줄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내가 읽어낸 징후들은 근대의 극복의지가 아니라 시대 정신을 앞서간 흔적들이다. 현실을 뛰어넘는, 시공을 초월한 환타지가 아니라 미래의 가치와 현실을 뒤엎는 부정정신만이 살 길이다. 영문학자답게 보들레르와 근대, 근대성, 모더니즘, 리얼리즘에 관한 폭넓은 성찰과 비판적 글쓰기는 저자의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현재의 상황들을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서양문학과 근대 극복의 지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4부의 경우 현실 극복의 의지가 아니라 서양문학의 극복과 근대의 극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찾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빛만을 쫓던 시대의 문학가들은 행복했다고 말하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다양성과 복잡성의 혼돈 속에서 문학의 지향점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뚜렷한 목적과 분명한 목소리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폭넓은 시야와 다양한 목소리들은 언제든 우리의 사고의 폭을 넓혀 준다. 개별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중요하지만 시대나 상황을 통찰할 수 있는 흐름들을 읽어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다시 그의 평론집을 읽게 될지 알 수 없으나, 해석에 반대하나,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을 어렴풋하게 읽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책으로 기억할 것이다.


07053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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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어떻게 즐길까 살림지식총서 260
김준철 지음 / 살림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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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인을 어떻게 즐겨야하느냐는 질문은 우습다. 모든 음식은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된다. 그럼 이런 종류의 책은 어떤 목적으로 쓰여진 걸까?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호기심 때문이다. 내가 먹는 음식이 쉽게 만들 수 있거나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알고 싶어진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자주 먹거나 전통적인 음식이 아닌 경우에는 더욱 궁금하다.

  최근 들어 술에 대한 기호와 취향도 고급화되어 가고 있다. 폭음과 과음이 미덕이었던 시절도 가고 목적과 상황에 맞는 주류를 선택하고 음미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 중에 와인은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술로 인식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술의 종류와 맛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미감은 사용할수록 발달하고 미세한 맛의 차이가 술의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기 때문에 알고 마시는 것도 모르고 마시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거의 맛의 차이가 없는 소주나 맥주와는 차이가 많다.

  와인은 포도주를 발효시킨 술이다. 맛은 물론이고 향이 어우러져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보통 포도 산지를 기준으로 와인을 부르는데 그만큼 와인의 원료인 포도의 산지가 중요하다. 식사와 함께 하는 술인 와인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스파클링 와인과 디저트 와인, 드라이 와인과 스위트 와인, 영 와인과 올드 와인으로 구분한다. 술에 관한 전문가인 저자 김준철은 이러한 와인의 특징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와인은 격식보다 지식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와인에 붙어 있는 라벨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면 와인에 관한 지식은 충분하다. 그만큼 어렵고 복잡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와인의 원산지 명칭이다. 수확년도와 브랜드도 중요하다. 와인 공부의 최종 단계라고 하는 라벨 읽기는 많이 마셔보고 관심을 가져야 읽혀질 것이다. 시험공부 하듯 암기하거나 단순한 관심만으로는 읽혀지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깊은 애정과 진심어린 관심만이 상대를 파악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의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먹는 포도나 주스는 미국식으로 유럽의 와인용 포도와 구별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필록세라라고 하는 벌레 때문에 유럽의 와인 산업이 거의 맛이 갔을 당시 미국식 포도의 뿌리와 접목해서 극복한 역사는 포도의 종류를 헷갈리게 한다. 잡종 포도의 맛과 향도 이전의 포도와 비슷했을지 궁금하다. 풍부한 일조량과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포도는 결국 자연의 선물이다. 포도 농사가 잘 지어진 수확년도에 따라 맛과 향이 결정되고 결국 와인의 품질을 결정한다. 그렇게 자연이 준 선물을 가지고 인간의 정성과 노력이 빚어낸 술이 와인이다.

  프랑스에서는 철저한 품질 관리를 위해 테루아르마다 등급을 매긴다. 포도를 수확하는 토양과 기후 등 관계 시설 전반을 통칭하는 테루아르는 지역별로 조합을 만들거나 품질에 책임제를 도입하여 와인 명산지로서의 자부심과 명성을 유지해 간다. FTA의 영향으로 최근에는 칠레의 와인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미국 와인 시장을 점령할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와인에 대한 관심과 품질 개선으로 프랑스를 따라 잡고 있지만 여전히 종주국 프랑스 와인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보졸레 누보라는 와인이 매년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발매되곤 한다. 오크통에서 숙성시키지 않고 당해에 생산한 와인을 숙성시켜 가장 맛있을 때 병에 판매하는 방식이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특성에 맞는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끝임없는 경쟁과 새로운 맛과 향에 대한 도전은 인간의 미감을 위한 축복이다.

  그저 술의 한 종류일 뿐인 와인이지만 포도의 종류와 생산지의 기후와 특성, 생산 방식, 맛과 향의 특성 등을 알고 있는 만큼 맛이 달라지기도 할 것 같다. 저자는 일단 즐겁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식에 어울리는 와인을 맛있게 즐기면 된다고 말한다. 와인을 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자리라면 지나친 격식과 예절보다는 와인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오히려 와인을 즐기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

   레드 와인이든 화이트 와인이든 즐길만한 마음의 여유와 같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즐거울 것이고 음식과 상황에 따라 적당하게 즐길 수 있을 정도와 지식과 돈이 있다면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주 선물을 주고받고 마실 기회가 늘어가지만 도대체 뭘 모르고 있는 건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 한번쯤 가볍게 읽어 볼만한 책이다. 관심은 아는 데서부터 시작될 테니까 말이다. 신이 인간에 준 최고의 술이라는 플라톤의 말은 지나치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070528-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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