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에나는 우유 배달부!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상상초월 동물생활백서
비투스 B. 드뢰셔 지음, 이영희 옮김 / 이마고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다윈의 진화론은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기존의 가치체계와 과학적 질서의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과학의 발전과 진보는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한 계단씩 올라섰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지식 체계와 세계관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줄곧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다윈의 자연선택은 기본적으로 개체 차원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믿어왔다. 반론이나 다른 차원의 이론이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동물행동 연구가들의 지속적인 연구 결과 자연선택은 개체 차원이 아니라 ‘집단선택’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비투스 B 되뢰셔의 <하이에나는 우유 배달부>라는 우스꽝스런 제목의 책은 최근의 이론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하고 있다.

  솔로몬 왕이 끼고 있던 반지를 돌리면 동물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제목을 가져와 <솔로몬 왕의 반지König Salomons Ring>라는 원제가 삽화가 곁들여져 <하이에나는 우유배달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책 표지나 편집 의도는 친근하고 재미있는 과학 상식 백과의 분위기를 내고 있지만 어쩐지 가벼워 보인다.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용과 조금 동떨어져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케팅을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어떤 분야의 책이든 저자의 수고로움은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수십 년 간 온몸으로 쓴 흔적과 노력들이 곳곳에 땀방울로 맺혀있다. 동물행동을 연구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 지루하고 긴 인내력의 싸움이며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의 대화이다. 끊임없는 관찰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면밀하게 분석하고 검토한 결과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고 원인과 결과를 이끌어 내며 자연의 경이로움에 고개를 숙이는 과정이 연구 성과로 나타난다. 다른 과학 이론과 달리 동물행동 연구이론들은 그래서 모두 귀납적이며 가변적이다. 또 다른 행동을 보이는 개체가 나타날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행동 패턴을 완벽하게 관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실험실에서 발견한 어떤 결과보다도 긴 시간을 견디며 위험을 무릅쓴 과정들이 인상적이다.

  동물들의 언어능력, 결혼제도, 암컷의 지위, 자녀 양육법, 유희 본능, 영장류들의 인간적인 모습, 죽음에 대한 의식, 생존 전략, 사막 생존법, 겨울나기, 폭력성, 균형 메커니즘, 비밀 병기를 거쳐 조화로운 삶의 기술로 책을 맺고 있다.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며 긴 여행을 다녀 온 것처럼 나른하고 피로한 느낌이었다. 마치 책으로 보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들을 다룰 수는 없지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동물들이 자연 생태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들의 행동과 삶의 과정 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책은 마치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거대한 망원렌즈처럼 보인다. 지구 곳곳에 위치한 동물들의 세계는 잘 짜여진 교향곡처럼 완벽하고 조화롭게 연주되고 있다.

  인간의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면 동물들의 삶을 알아야겠다. 위험한 존재로서 자연을 파괴하며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에게 자연을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보아야 할 것 같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서부터 그들의 공동체 생활의 지혜를 살펴보는 일은 마치 인류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커다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하며 하찮은 존재인가 하는 극단적인 의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수십 년 간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인간이 알지 못하는 동물의 세계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역할에 충실하다. 그 과정을 통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이 이 책의 내용이지만 단순한 보고서의 형식을 넘어선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이 독자들의 몫이다. 그것은 바로 솔로몬 왕의 지혜이다. 그 지혜의 원천이 바로 동물들의 세계라는 말이다. 개체 중심의 자연 선택이 아니라 집단선택의 차원에서 접근해야하는 문제이다. 조화로운 삶을 이끌어내는 공동체적 삶의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결국 동물들에게, 자연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놓여 있었다고 읽는다면 지나친 오독일까?

  이 책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의미로 읽든 결국 그것도 독자의 몫이겠다. 흥미 있는 자연과학 서적임에 틀림없는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동물들의 행동이 보여주는 의미는 사회학적, 인문학적 가치와 의미로 끊임없이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도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우유통을 매고 배달에 나선 하이에나의 애교스런 표지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인간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책이다.


070513-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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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딜레마 여행 -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사고 실험 100
줄리언 바지니 지음, 정지인 옮김 / 한겨레출판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은 독자들에게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Essays in love>라는 원제나 <on love>라는 미국판 제목의 책을 보고 우리나라 독자들은 얼마나 그 책을 찾았을까? 우리나라에서 1995년에 <로맨스>라는 시덥잖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가 말아먹고 2002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중역된 같은 책은 제목 때문인지 몰라도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이다. 이 책은 제목이 눈길을 끄는 제목이 아니었다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보통’ 붐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쾌한 딜레마 여행>의 원제는 <The pig that wants to be eaten>이다. 일생일대의 목표가 인간에게 잡아먹히기를 원하는 돼지가 있다면 우리는 육식을 하면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다. 아무튼 제목 때문인지 이 책은 제법 팔리는 모양이다. 딜레마는 진퇴양난이라는 한자성어와 가장 잘 어울린다. 논리학의 용어로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다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어울리는 말이다. 책의 성격과 내용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무려 100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고대 철학자들이 제시했던 갖가지 역설에서부터 현대적인 의미의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황들을 제시한다. 유사한 말들이지만 모순과 역설, 딜레마와 관련된 수많은 사례 모음집과 같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경주부터 영화 메트릭스에 이르기까지 흥미 있는 주제들을 실제 사례와 상황을 만들어 간략하게 제시하고 그와 관련된 책이나 이론들을 표시해 놓았다. 그 다음 저자의 간략한 설명과 내용에 대한 검토와 분석이 뒤따른다. 길어야 2~3페이지 분량으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보다는 집중력을 요구한다. 길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쉽고 단순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짧고 긴 여운을 남긴다. 철학자의 대중화 노력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철학 입문서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무수히 많은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익숙한 상황과 뻔한 일들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인 생각에 뇌를 맡긴다. 돌아보거나 의심하지 않고 타성에 젖은 사고방식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금방 그것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개인의 이익이나 매너리즘에 젖은 생활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귀차니즘과 이기주의 완벽한 결합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 돼지와 유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진다.

  ‘이성이 빠진 상상력은 공상에 지나지 않고 상상력 없는 이성은 빈약하다’는 저자의 머리말은 이 책의 특성을 요약하고 있다. 상상력에 의한 상황 설정이나 가상 시나리오가 모두 이성에 의해 판단하고 분석해 보아야 할 문제로 가득하다.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실제 현실 상황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책에서 예로 들고 있는 장면들은 그렇게 지금 우리들 현재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간단한 문제가 남는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거나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그러나 그 순간 모두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환한 미소를 짓거나 승리의 기쁨 따위를 누릴 수 없는 딜레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고 다시 한 번 눈여겨보는 태도를 갖으라는 무언의 충고. 기계적인 선악의 판단 기준과 사회적 통념이 만들어 낸 기준들이 우리들의 감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속에서 오로지 단 하나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이 나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단지 우리의 현재 믿음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 P. 24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다’라는 말은 흔히 나쁜 행동에 대한 빈약한 합리화라고 여겨진다. - P. 35

  저자의 충고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말들에 밑줄 긋다가 포기했다. 책 전체가 던지는 모든 질문들은 지금까지 언급했던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놓칠 수 없는 역작이니 이 책을 꼭 읽으라는 조언이 아니라 어떤 책이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특별한 책이 된다. 너무 많은 사고 훈련은 오히려 뇌를 지치게 한다. 100번 쯤 얻어터지고 나면 나중에는 코피가 난다. 지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07051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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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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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며 아쉬움이 그 첫 번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현실 저편의 다른 세상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강 깊은 당신 편지>를 통해 만났던 김윤배의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는 치열한 현실과 거리를 둔 시편들을 묶었다. 삶과 유리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관점으로 시를 평가하는 것은 때로 온당치 못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들이든 나름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보된다면.

  이 시집의 여행과 관련된 시편들은 가슴을 졸인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들과 그 곳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감정들은 독자의 가슴에 버겁게 안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는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감당해야하는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는 현실 속의 여유와는 다른 것일까?

백령도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지켜보다 스스로 바다의 안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사람은 생의 허무에 시달리거나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길어 올리든 상관없이 특정한 장소에서 품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시인의 개성이 된다. 그 개성이 독자와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특별한 감정의 일반화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밋밋함이나 특수성 자체가 가지는 거부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나와의 관계와 상호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인지가 문제이다.

  공감은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몸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몸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는 범주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시는 읽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들은 공통점이 있다. 사소하지만 몸의 기억력은 특별하다. 잊고 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뇌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어렵지 않게 긍정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이성과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좌뇌와 우뇌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거나 현실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그 기억은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선택적인 추억이 된다. 그 몸은 절망의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욕망과 몸의 결합은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면 흐르는 물에 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자판 두드려
말을 만들고 말을 구부려 생각을
들여다본다 말이 탱탱해지고 말이
벌어지고 말이 말속을 파고들어
비명을 지른다 말의 변형으로 시작되는
몸의 기억은 욕망으로 얼룩진다
말들이 서로를 강간하며
길들여지는 몸의 기억으로
나의 욕망은 평생 피 흘린다
쉽게 길들여지는 슬픈 내 몸
광활한 어둠이어서 새들 깃들이고
진흙 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나를 길들인 것들, 쉽게 나를 걸어나갈 때
생각은 언제나 자판 너머 저만치 오고
몸이 먼저 부르는 몸은
절망의 노래로 온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이 혹독하든 행복하든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사랑이고 전체인 경우도 많다. 얼마나 커다란 기다림과 그리움었기에 메마른 시간위로 소금의 결정 알갱이들이 눈에 띌까. 산다는 것에 대한 한숨과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를 견뎌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기다림과 그리움에 있다. 살아가가는 모든 것들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 끝 모를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 뒤에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로 해서 기다림은 계속된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0705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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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5-1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전히 그 혹독한 기다림 위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잘 읽는다는 말씀을 문득 드려봅니다.

sceptic 2007-05-1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기다림은 혹독함이 아니라 행복한 기다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1
김윤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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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는 시들을 대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리움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희망이며 아쉬움이 그 첫 번째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이라는 현실 저편의 다른 세상에 대한 생경함 때문이다. <강 깊은 당신 편지>를 통해 만났던 김윤배의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는 치열한 현실과 거리를 둔 시편들을 묶었다. 삶과 유리된 문학의 효용성이라는 관점으로 시를 평가하는 것은 때로 온당치 못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들이든 나름의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당위성만 확보된다면.

  이 시집의 여행과 관련된 시편들은 가슴을 졸인다.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풍경들과 그 곳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감정들은 독자의 가슴에 버겁게 안기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과는 다르다. 내가 느끼고 감당해야하는 안타까움에 공감할 수 있는 여유는 현실 속의 여유와는 다른 것일까?

백령도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지켜보다 스스로 바다의 안개가 되어버리는 순간을 경험해 보면 사람은 생의 허무에 시달리거나 현실의 버거움에 지친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느낌을 길어 올리든 상관없이 특정한 장소에서 품었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시인의 개성이 된다. 그 개성이 독자와 공감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특별한 감정의 일반화 과정에서 범하게 되는 밋밋함이나 특수성 자체가 가지는 거부감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나와의 관계와 상호 소통의 가능성이 열린 것인지가 문제이다.

  공감은 기억과 경험에서 비롯된다. 사람마다 몸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몸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는 범주이다.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시는 읽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기억들은 공통점이 있다. 사소하지만 몸의 기억력은 특별하다. 잊고 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건 뇌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이 낯설지만 어렵지 않게 긍정한다.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 이성과 감정의 상호 작용 속에서 좌뇌와 우뇌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억은 그대로 현실로 재현되거나 현실은 기억으로 치환된다. 그 기억은 아름다움과 결합되어 선택적인 추억이 된다. 그 몸은 절망의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욕망과 몸의 결합은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온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재능이 없다면 흐르는 물에 제 몸을 맡겨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몸의 기억

몸의 기억은 생각을 앞선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자판 두드려
말을 만들고 말을 구부려 생각을
들여다본다 말이 탱탱해지고 말이
벌어지고 말이 말속을 파고들어
비명을 지른다 말의 변형으로 시작되는
몸의 기억은 욕망으로 얼룩진다
말들이 서로를 강간하며
길들여지는 몸의 기억으로
나의 욕망은 평생 피 흘린다
쉽게 길들여지는 슬픈 내 몸
광활한 어둠이어서 새들 깃들이고
진흙 소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다
나를 길들인 것들, 쉽게 나를 걸어나갈 때
생각은 언제나 자판 너머 저만치 오고
몸이 먼저 부르는 몸은
절망의 노래로 온다

  살아가는 모든 과정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것이 혹독하든 행복하든 기다림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고 사랑이고 전체인 경우도 많다. 얼마나 커다란 기다림과 그리움었기에 메마른 시간위로 소금의 결정 알갱이들이 눈에 띌까. 산다는 것에 대한 한숨과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를 견뎌내게 하는 힘은 여전히 기다림과 그리움에 있다. 살아가가는 모든 것들은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그 끝 모를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도 삶의 과정일 것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같은 기다림과 그리움 뒤에 네게로 가는 길이 있다고 해서 너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로 해서 기다림은 계속된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소금밭으로 변한 호수 위에 내가 섰다
수심 깊이 숨어 있던 그리움들의
부활, 너와 나를 종단하던 시간이
순장의 수수만년을 기다려
수정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현장
흰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한 시간 속에
네가 없다 소멸 위에 꽃 핀
참혹한 시간이 있을 뿐
대지는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스며들기를 기다려
네게로 가는 길을 냈을 거다
시간이 작은 수정의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기다림이란 저런 거다
죽은 시간 위에 소금의 결정으로 부활하는 사랑
나는 지금 그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0705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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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철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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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철학자도 아닌 사람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철학을 바라보는 눈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온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것을 다루는 태도 또한 한 개인의 주관과 객관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다양한 책들 속에서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지니며 그 책의 특징이 된다.

  남경태의 <철학>은 독특하다. 이 책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넓은 범주에서 살펴보면 서양 철학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시대 구분에 의해 통시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기원과 출발에서부터 가지를 치고 잎을 피워나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철학의 주변을 한 번씩 짚고 넘어간다. 그 과정이 번잡스럽거나 잡다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서 언급되는 사회 문화적 상황이나 정치 경제적 여건들이 철학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는 정도다. 깊이가 없어 보이지만 큰 맥락과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론의 관점을 1부에서 이야기한다. ‘대상’이 그것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고민에서 출발한 철학의 면면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인간론이라는 큰 주제로 철학의 역사를 더듬는다. ‘주체’에 해당되겠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와 철학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점검하며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을 중심으로 3부를 구성하고 있다. ‘주체-인식-대상’의 축을 세계론과 인간론 그리고 인식론의 발달 단계에 따라 철학자들의 주장과 핵심 개념을 엮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모호한 말장난에 속은 느낌도 없다. 4부에서는 세 단계의 결론이고 기존 인식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5부에서는 가타리와 들뢰즈 그리고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의 철학적 문제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시대별로 구분하여 백화점식으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철학적 특징과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염려가 없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적인 조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개념들이 미끌어지고 가로지르면서 철학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통찰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개념들이 2,500년을 가로질러 철학사 곳곳에 그 흔적들을 묻어놓고 있지만 현대 철학으로 넘어오면서 그 영향력과 범주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현상이나 개념들이 전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들을 저자는 종횡무진 철학사를 넘나들면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깊이는 알 수 없으나 단순하고 피상적인 지식과 얄팍한 개념의 이해만 가지고서는 가당치도 않은 작업이다. 거기에 이 책의 장단점이 모두 녹아 있다.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수박의 모양과 색깔만 보이고 맛을 본 적이 없다는 아쉬움을 깊게 남기는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과 용어들이 난무하고 그들의 말이 짧은 구절로 인용되기 때문에 감질나서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하면서 부분적으로 옥의 티가 보이기도 한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소개하는 부분 같은 대목이 그렇다.

250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서양 철학사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세계에 관한 올바른 앎을 얻는 과정”이라고 요약된다. 여기 포함된 세 가지 계기, 즉 ‘인간-인식(앎)-세계’를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더 근대적인 형태로 변환하면 ‘주체-언어(또는 감각, 경험)-대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 P. 545

  저자의 에필로그 앞부분이다. 이 책은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이라는 시리즈의 부제를 달고 있지만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철학’이야기다. 하지만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가진 특별함에 손이 갈 것이다. 단편적인 것들을 섞고 뒤집어 하나로 통합하는 관점이나 ‘가로지르기’가 2% 부족했던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두 번쯤 더 읽어야겠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탈현대 그 후의 철학이 궁금하다. 예의주시하며 읽어나가는 재미도 남다를 것 같다.

철학의 비판적 기능 역시 앞으로도 불변일 것이다. 철학은 탄생할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진리를 확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철학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한다. 언어의 모호함을 악용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탈현대 사유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P. 548

  개별적인 철학자들의 담론을 읽어나가면서 오래 기억될만한 문장이다. 철학이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현실을 주도하며 진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철학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의 변화를 수용하고 세계를 이끄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철학에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철학이 지닌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이며 가능성이다. 그것이 진정한 철학은 아닐까 싶다.


07050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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