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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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속 위반 스티커와 부고의 공통점은 상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현실 속으로 날아든다. 과속이나 주차 위반, 버스 전용차로 위반의 경우 과거의 기억 속에서 현실과의 접점을 찾아내지만 부고는 훨씬 강한 충격으로 삶을 순간적인 혼돈에 빠트린다. 시공을 초월해서 과거를 헤매다가 현실로 돌아오거나 메트릭스 밖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친구의 부음은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전해졌다. 오늘 오후에.

 죽음은 종교만큼이나 숭고하거나 거룩한 삶의 종착점이다. 연속적인 세계관에서 생각하면 죽음은 생의 연장이며 또 다른 삶의 형태일 수 있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일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동양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의 마감이며 존재의 소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야말로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없어질 때의 고통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말을 한다. 나 살아 있다고, 그 사람이 죽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불교에 대한 오해와 종교 일반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은 불신과 갈등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와 무관하게 종교에 대해 올바로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오래된 전통적인 불교도 우리에게 오해의 대상이기는 마찬가지다. 호국 불교, 기복 불교로서 오로지 현실에서의 복덕과 행운을 기대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경우 그 종교는 반드시 왜곡된 형태로 중생을 미혹하게 한다. 불교를 올바로 알고 이해하는 일은 종교인으로서 기본적인 자세일 뿐만 아니라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허와 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당위가 생긴다. 왜냐하면 종교는 현실의 도피처도 아니고 종교와 현실이 종속 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역사는 물론 서양의 역사에서 종교가 인간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 종교인의 자질 문제, 종교를 이용한 정치의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어찌됐든 현실 세계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승불교와 대승 불교에 관해서는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이 좋은 안내서가 된다. 비종교인의 관점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숭산의 글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틀을 엿볼 수 있는 입문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에 비해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강해>는 불교의 핵심 경전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진수를 선보인다. 여러 판본과 원전의 철저한 해석과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설픈 전문가는 맞대거리 하기가 힘든 것이 도올 저작들의 특징이다. 이 책 또한 해박한 도올의 설명이 특유의 어법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지나쳐 요설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해석은 주관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기독교 교리와의 공통점 뿐만 아니라 종교 자체에 대한 기본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비판적이고 냉정한 분석과 논리적인 주장은 새겨 들을만하다.

“형체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지 말라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결단코 여래를 보지 못하리.” - P. 401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선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있어도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생에 대한 집착과 외물에 대한 유혹은 쉽게 벗어버릴 수도 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곧 해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 방법과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곳에 열반은 자리한다. 어떤 형체나 음성으로도 여래를 감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불상들과 목탁 소리에도 여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순간을 사는 인간과 영원을 꿈꾸는 종교는 여전히 불협화음으로 불화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이 낳은 가장 비극적인 형태의 종교들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 제대로 알고 바르게 믿을 수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나도 종교를 가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070315-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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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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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하고 나른한 일상이 끝없이 펼쳐질 것 같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평화로운 수면 아래 오리의 발짓만큼 숨가쁘고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이다. 정확하게 그만큼 일하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움직이며 마치 수면위에 그림처럼 떠다니는 청둥오리의 우아함은 부럽지 않다. 처량하고 슬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다. 나도 너도 다들 그렇게 그만큼씩만 바쁘게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바닥에 땀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권여선의 새로운 소설집 <분홍리본의 시절>은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켜켜이 쌓여온 먼지들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있다.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살면서 느꼈던 위기의 순간들은 사실 나의 위기일 뿐이었다.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타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모든 일들이 나에게 비롯되었다는 낭패감.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은 불투명하고 쇳소리가 난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지만 주인공들이 모두 삐걱이는 일상과의 불화를 나타낸다.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의 삶이 특별히 불행하거나 환경이 특수하다고 볼 수 없다. 넓은 의미에서 평범한 불행과 일상들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주인공이 화를 낼까?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 소리를 외면하는 것도 나쁜 독자의 요건이라면 나는 나쁜 독자다. 소리 지르는 사람에게 애정을 보이지 못하고 측은지심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내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 무언가 문제가 있는 내면의 풍경이다. 그것이 나의 내면이라도 어쩔 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다. 다만 소리내지 않고 슬쩍슬쩍 엿볼 수 있도록 곁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타인의 불행과 슬픔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전달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보여지는 고통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표적으로 ‘가을이 오면’의 여주인공과 ‘약콩이 끓는 시절’의 여주인공이 겪는 내면의 풍경은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못한다. 공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결정적 단서도 없고, 그것을 무시한 채 소설 속에 침잠시킬만한 문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내면이 삭막해지면 소설이 읽혀지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바라보는 눈이 변화하는 것인지, 소설이 독자를 끌어안는 방법이 달라져 가는지 모르겠다.

 ‘분홍 시절의 리본’은 윤대녕의 소설에서 보았던 장면이 연상되어 소설읽기에 방해가 되었다. 윤대녕의 단편 ‘못구멍’에서 보았던 ‘구멍’들의 반대편에서 그 구멍들을 들여다보는 것같은 착각은 순전히 개인적인 관점이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소설에서 분홍 리본의 추억은 아스라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단 하나의 이미지나 기억만으로도 타인을 규정해버리는 버릇을 고치는 못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분홍 리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현실 속에서 수없이 부딪히는 환상 혹은 나비.

 나머지 단편들,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에서도 작가는 일관되게 일상과 불협화음을 보이는 주인공들의 내면 풍경을 묘사한다. 그들이 겪는 심각한 현실과의 부조화는 겉으로 보기에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갈등과 고통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 틈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모든 사람들과 생활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과연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 궁금하다.

 단 한 순간의 실수와 헛발질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다만 허공에 붕 떴다가 착지하는 순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와 너, 여기와 저기 모두가 무화된다. 소설에서, 혹은 현실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찾으려는 그 무엇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곳에나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양다리를 걸쳐 보아도, 그 경계를 넘어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07031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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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1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잘쓰시네요...리뷰 잘봤습니다.

sceptic 2007-03-1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잖아요...과찬이신거...^^...드팀전님의 리뷰는 예술이죠...전 그렇게 정성들여 꼼꼼히 쓸 수 없어요...^^

프레이야 2007-03-15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균열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인상적인 글귀입니다.
책표지 또한 멋지네요^^

sceptic 2007-03-1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내문제고 나부터 시작해서 실마리가 보이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얼음장수 2007-03-23 0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러봅니다.
저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약콩이 끓는 동안'을 읽고 꽤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작품집 끌리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낯선 사람들
김영현 지음 / 실천문학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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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강물처럼 흘러왔다’는 작가의 말이 잔잔한 물결에 작은 파문처럼 일렁인다. 김영현의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아니 어떤 소설이 동물에 대한 탐구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면 할말이 없지만 이 책은 김영현이 바라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비의감을 드러낸다. 종교와 결부되어 왜 태어났니를 물어보면 참 난감하다. 인간의 탄생에는 선택이 없다.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죽음은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에 해답을 달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그 대상이 신이어도 아니어도 좋겠지만 문제는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는 데 있다. 신산스런 삶에 때때로 환한 빛이 비춰지거나 제 길을 찾은 듯해도 길은 이내 끊겨버리고 벼랑이 기다리고 있다.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이후 처음인가 싶어 책날개를 살펴보지만 그간 김영현의 책을 읽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그의 소설은 참으로 낯설고 생경하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에 대해 분류할 수 없다. 다만 특별한 경우와 예외적인 상황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런 것들이 소설 속에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 현실감을 상실하거나 비현실적인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재현에 불과하다. 물론 표현하는 태도나 언어의 사용 방식에 따라 일상에 탄력이 붙고 재미와 웃음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은 스토리 자체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무딘 감각들을 일깨우며 발뒤꿈치를 간지럽게 한다.

 한 집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나. 그런 것들이 소설이 될 수 있나. 더구나 김영현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추리 소설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나 은유는 죽어 있고 익숙하고 짐작할 만한 표현들은 독자를 지루하게 한다. 문장에 탄력이 떨어져 스토리를 중심으로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정상에 올라 소리 한 번 지를 목적으로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겸허를 배우지 못하는 등산이 즐거울 리 없다. 독자는 소리를 지르기 위해 산 정상에 서지 않는다.

 인간 구원의 문제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고전에서나 사용했던 방법이다. 방법이 지루해서가 아니라 읽는 것이 즐겁지 않다. 독자 개인의 성향이겠으나 즐겁지 않은 책읽기에 누가 나서겠는가? 낯선 사람들은 정말 낯선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로 구속되는 동연과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에 있는 동생 성연을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한 소읍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그 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확인시켜 준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누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죄의 기준이 있든지 간에. 하지만 이처럼 파렴치한 인간을 정점으로 그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는 방식은 지루하고 감동이 없다.

 탐욕과 물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분명하며 인간의 삶은 과연 가치 있는가라는 질문은 성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소설이다. 종교적 관점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를 소설로 부딪히게 될 때 사람들은 당혹스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박자 늦게, 혹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 문제와 만나게 되길 바란다. 나의 바람일지 모르나 추리 소설 형식으로 충분히 흥미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무거운 주제에 비해 분량이 부족하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끈끈하지 못해 보인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가 있고, 시대와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후자를 다루고 있는 <낯선 사람들>은 읽을만 하지만 권할만하지 못하다. 이상하게 식상한 표현들과 죽어버린 은유가 눈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많았다. 소설의 내용과 형식 어느 쪽도 소홀이 할 수 없고 분리 될 수 없지만 어딘가에서 어긋나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2% 조금 넘게 부족한 소설을 만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더욱 어렵다.


070309-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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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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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의 막막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현실과 구별되는 환상을 꿈꾸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일까? 모든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280일간 태초에 인류가 발생하기 이전부터의 시간과 공간을 익히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의 모든 민족이 가지고 고유의 신화들 간에 공통성과 놀라운 유사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면 실제로 바벨탑이 세워졌고 언어가 달라지기 전의 기억들을 지금도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구 저편에 사는 장 보드리야르의 부고가 오늘 신문에 실렸다.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처음 접하면서 ‘호접지몽’과 영화 ‘메트릭스’가 떠올랐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이 현실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과연 원본 없는 환상과 실체 속에서 진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셉 캠벨은 신화에 일생을 바쳤다. 한 사람의 일생을 매료시킬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단순하게 신화의 아름다움이나 구조와 체계를 연구한 학자가 아니라 비교 신화학을 통해 각 민족이 지닌 신화의 속성이나 공통적 특질들을 찾아내고 그것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 물음들은 신화와 현실을 연결시켜야 하는 당위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씨줄과 날줄이 되어 현실 속에 상상의 빌미를 제공한다.

 도대체 신화는 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는지 궁금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러일으킨 신화에 대한 이상 열기는 단순히 서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에서 유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신화에 대한 무지를 탓할 일도 아니지만 신화가 지닌 힘을 과대 평가하기도, 간과하기도 어렵다.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가 나눈 대담을 엮은 <신화의 힘>은 신화학자 캠벨의 입을 통해 신화에 관한 궁금증과 현실 세계의 원형들을 보여준다. 빌 모이어스의 깊이 있는 질문과 캠벨의 적절한 답변들이 대화 형식으로 풀어져 있기 때문에 신화에 대한 개략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신화 이야기를 듣다가 캠벨 자신이 ‘인생’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P. 133

 인생은 개선한 사람이 없다는 단언에 절망한다. 이보다 나아지지도 않는단다. 이 부정적 현실 인식에 동의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같은 현상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생은 이대로도 충분히 놀랍고 굉장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환상일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알 수 없는 일이거나 사람마다 다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연구한 학자는 이렇게 현실조차도 신화와 같은 환상으로 보았는지 모른다. 캠벨은 죽음 저편에서 신화 속으로 들어갔을까?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하고 감탄하는 사람은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우파니샤드) - P. 375

 우파니샤드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대한 감탄이나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에 대한 고비를 넘어선 자의 깨달음처럼 여겨진다. 꽃이 예뻐보이면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라는데 해 지는 저녁 무렵 한참동안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사람들이 마치 종교의 그 무엇처럼 경건해지는 상태를 신의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신화의 어려움은 결국 모든 장면과 환상을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데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창작해 왔지만 언어의 한계 혹은 이미지의 한계는 신화가 전하고 싶은 내용의 저편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맥없이 끝이 난다. 마치 선문답을 하는 선승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영역에 신화는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신화의 한 부분은 아닌지.

모이어스 : 의미는 결국 언외에 있군요.
캠벨 : 그렇습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조건이 있고 제한이 있어요.
모이어스 : 그런데도 우리 이 하잘것없는 인간은 이 하찮은 언어에 머무는군요. 아름답기는 하나 모자라서, 그리려고 해도 그리려고 해도…….
캠벨 : 그래서 결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아…….”,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 P. 415


070308-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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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무덤 창비시선 272
엄원태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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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이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거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 ‘갯우렁’중에서

 나이 오십이 넘어 남자의 후반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간결하다. 상황이 달라지고 생이 흔들리면 갈라지고 푸석푸석한 쇳소리가 난다. 몸은 소모품이다. 한 생을 살다가 힘겹게 벗어놓고 가야할 무겁고 지겨운 지상에서의 갑옷이다. 몸이 늙고 병드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생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치스런 고통과 시련들은 각자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다. 생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들은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시인의 입장에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며 사물을 통해 바라보는 생의 감각을 느껴본다.

 물컹한 그리움도 그리움이고 송곳이나 드릴처럼 날카로운 그리움도 있을테지만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움 속에 견고함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있는 그대로의 외형만으로 그것, 혹은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연상법.

1

깊고 둔중한 고통이 등허리를 지나가며
내게 말한다,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

나는 네게 말하마,
고통마저 태워버린 너에게

내 아파서 너를 아프게 하는 게 더 아프구나!

- ‘불탄 나무’중에서

 불탄 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다. 생의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시편들 속에 엄원태의 감각은 살아 움직인다. 정지된 사물들에 대한 통찰과 평범하지 않은 시선들은 현실에서 부딪히는 감각들에게 신선함을 부여한다. 자아 성찰적인 잠언과도 같은 ‘겸허하고 깊어질 것, 자신에게 절실할 것’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말놀음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생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불에 타버린 나무는 이미 고통스럽지 않으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더 심란하다.

 그래서 현실에서 중심을 잡고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마음의 결들은 중심없이 흘러가고 뒤틀리고 굴곡진다. 몸의 중심만큼이나 마음의 중심은 더더욱 힘겹다. ‘꿈’이나 ‘사랑’이 그 마음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2

내게도 이를테면 중심이 하나 생겼다
내가 품어 키운 꿈이라 해도 좋고
뒤늦은 사랑이라 해도 좋다
내 몸이 네 몸이 아닌 지경,
그 지경이란 몸만이 알 수 있는 거다
마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흔해빠진 거니까

다만 너를 떠나지 않고
온전히 내게로 되돌려주는 것,
그건 이미 네가 아니다
그걸 어떤 중심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 ‘어떤 중심’중에서

 해 저문 겨울만큼이나 을씨년스런 풍경을 떠올려 본다. 삭막하고 메마른 하늘은 어쩔 수 없다. 손닿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미련은 떨치기가 어렵다. 저녁 일곱 시 - 빛에서 어둠으로 전화하는 그 순간들, 시간들에 대한 상념이 예사롭다.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비유된 너의 마지막 눈빛이 그러했다. 시인이 보았던 그 눈빛은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인지 너에 대한 그리움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내 남은 생의 시간들을 짐작해 볼 뿐이다. 엄원태의 <물방울 무덤>의 마지막 시.

저녁 일곱시

저녁의 창문들은
제 겨드랑이를 지나간 바람이나
이마 위로 흘러간 구름들을 생각하느라
골똘하게 고요하다

나도 하루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푸른 저녁 공기는
어떤 위안의 말도 전해준 바 없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위로받은 것이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흰 죽지 새의
쭉, 경련하듯 뻗은 다리의 헛된 결기를 보면 안다

저녁 일곱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이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07030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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