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체험 상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윤대석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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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 간다는 말이다. 분리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우리는 늘 분리된 세계로 인식한다. 불연속적 세계관이나 통합된 하나의 눈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일직선상에 놓여 질 수 없다. 죽음과 어깨동무하고 늘 곁에 두고 함께 걸어가지만 호기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아침에 헤어지는 가족과의 만남이 마지막일 수 있다.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세계관과는 다르다. 모든 순간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다. 이 순간을 사랑하고 싶다.

죽어본 사람은 없다. 다만 죽음과 유사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혹은 잠시 죽음의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많다. 그 사람들은 특별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한 체험을 임사체험이라고 한다. 죽음의 경계까지 가본 경험, 거의 죽었다고 판단되었지만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 그것을 임사체험이라 부른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간혹 들어본 적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은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었다. 기억될 만한 책이다.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입각한 서술도 마음에 들었고 정확한 취재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전개도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신비주의 관점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을 전해주는 책도 아니고 과학의 시선으로 그것을 부정하는 책도 아니다.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만큼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고 있다. 왜?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단순히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익숙한 세계인 이 세상과의 이별때문일까. 소유한 것들에 대한 욕심일까.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련일까.

죽음 저편으로 갔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이쪽으로 보내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영원한 수수께끼고,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하) P. 401

정확하지 않지만 다치바나의 이 말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불안과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한 분석과 직접 취재를 통해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은 죽음 이후에 대해 설명한다.

임사체험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연구자들의 사례를 통해 터널체험과 체외이탈 등 공통적인 경험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이 책은 죽음의 세계에 접근하기 시작해서 실제 사례를 통해 임사 체험의 최대 쟁점인 ‘뇌내 현상설’과 ‘현실 체험설’에 대해 모두 점검한다.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서술되는 저자의 주장은 오류를 범할 때가 많다. 주관적이진 않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논거들 속에는 항상 반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그런면에서 다치바나의 방법은 신뢰할 만하다. 어느 쪽에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학이든 아니든 기준도 관점도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마지막 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삶의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을 찾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인가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논쟁을 하든, 종교를 갖든 버리든 상관없이 결국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죽음을 맞는 태도와 죽음 이후에 대한 자세도 삶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삶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죽음이야말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김열규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와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와 또 다른 방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나 죽음 자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보다 생에 대해 환멸을 느끼거나 삶의 목적과 방향이 모호한 나같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림자처럼 늘 우리 몸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을 두려워말자.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내 삶의 주인이 되려는 노력이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게는 결국 죽음도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에 충실하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본다.

‘네가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진짜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는, 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와 죽음이 만나는 일은 없다. 죽음에 대해 고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하) P. 404


061225-142(상), 061227-143(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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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7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한 해 죽음에 대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댓글도 썼다 지웠다 했답니다.
마음이 심란해지는 책이네요.

sceptic 2006-12-28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란 늘 그런 느낌이지만 다른 태도와 방법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어요. 저물어 가는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길...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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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학이 무척 바쁘다. 철학이 바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들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철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을 때 철학에 기대기도 한다. 철학이 바쁠 만도 하다.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는 제목이 너무 뻔해서 식상할 정도다. 철학이 영화도 만나고 예술도 만나고 바쁜 생활 속에 이번에는 당연히 만나야 할 ‘삶’을 만났다. 철학의 역할과 기능을 따져 볼 필요는 없다. 학문적 대상으로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버린 철학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철학자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우리들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새로움과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주고 고정관념을 하나 둘 쯤 깨뜨려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철학자다.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생활 속에서 당연히 마주치는 일들이 많다. 그 마주침과 부딪힘 속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르게 바라보고 거기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가장 훌륭한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아니 어떤 관점에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점이나 시점은 세상을 보는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 전제가 잘못될 경우 전체가 틀려버린다. 물론 다양하지 못한 하나의 관점은 가장 경계해야할 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다양한 논의들도 재미없다. 뚜렷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축복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들을 통해 철학의 흐름을 짚어주고 2부에서는 사랑과 가족 이데올로기 그리고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일상에 매몰되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일 가족과 부딪히면서 그것들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나거나 부자연스러울 때는 이유를 모른채 불만에 가득 차거나 화가 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얘기들을 건넨다. 그 말들이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다면 금상첨화다. 저자는 쉬운 말로 독자와 대화를 시도한다.

쉽다는 것이 가볍거나 얇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숨많은 철학자와 고전을 쉽게 풀어 인용하고 씨줄과 날줄로 묶어 절적하게 배치하는 것은 당연히 저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거기에 자신의 철학적 성찰까지 담아내야 한다. 가벼운 내공으로 만만하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 삶은 만나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마지막 3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과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그리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철학사를 안다고 해서 철학책을 읽었다고 해도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쓸데없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국밥이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타자’라는 놀음판의 ‘따짜’와 다르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타자의 개념을 몰라도 좋다. 다만 ‘타자는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데리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진정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 내와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살아 숨쉬는 동안 끊임없이 해야하는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방법을 찾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생각들이 가슴과 다리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생활 속에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06122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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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 미토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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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학교제도는 기회를 평등하게 한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분을 독점하고 말았다. - P. 29

시대를 초월해서 냉정하고 정확한 진단과 비판은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는 기분이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말들이지만 시대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결코 만만찮은 선견지명을 느끼게 된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는 21세기 더욱 유효한 울림으로 들린다.

세상에 학교를 없애자면 참 많은 사람들이 일단 굶어 죽는다. 학교에 기대거나 기생하는 사람들이 인구의 절반쯤 될까? 잘못 접근하면 일리히의 주장이 반문명론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행복은 자건거를 타고’ 오는 것처럼 ‘학교 없는 사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도 있다. 전일제 출석에 의한 획일적인 공교육를 실시하는 학교의 폐지를 주장하는 저자를 과격하게 볼 수도 있으나 이 책에서 조목조목 분석과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학교는 할말이 없어 보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에 몸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황당하게 들릴만한 저자의 주장은 뼈아픈 자기 반성이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에 기초한다. 학교가 굴러가는 시스템이나 비효율적 보수적 관리 체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학교 교육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교육을 ‘인적 자원’의 양성으로 보는 수단적 개념으로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학교교육의 맹신은 사회화 과정에서 배제와 수용이라는 결정적인 칼자루가 된다. 60년대 실천적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아비투스와 더불어 학교교육도 사회의 계급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부르디외나 아비투스가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겹침점이 많다. 특히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라 일컬던 시대에 그 나라에 살던 사람들은 학교교육을 통해 계급 상승을 꿈꾸었겠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는 지금과 같다.

저자는 학교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한다. 극단적 선언으로 들린다. 현실성이 있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그가 말하는 비판의 초점을 눈여겨 보고 반성적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인의 능력과 인간적 본성을 떠나 학벌 위주의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은 비참하기까지 하다.

모든 ''위선적인 공익사업'' 중에서 학교는 가장 교활하다. 고속도로망은 자동차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뿐이었으나, 학교는 스펙트럼의 우측 끝에 몰려 있는 일군의 근대적 제도 전체를 창출해낸다. 고속도로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낭만적이라고 일축할 정도로 끝내주는 것이겠지만 학교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즉시 냉혹하다든지 또는 제국주의자라고 공격받는다. - P. 106

날선 칼날 위에 서서 미래를 조망해 보아야 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소모되는 사교육비와 전 생애를 통해 학교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따져보자. 공부를 하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그에 대한 대안은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자. 국가의 존재처럼 학교의 존재는 무소불위의 권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기형적으로 교사의 권위와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문제와 처방은 다양하게 논의되겠지만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은 우리들이 학교 밖에서 학습한 것이다. 학교 아동은 교사가 없더라도, 아니 오히려 때때로 교사가 있을 때라도 대부분의 학습을 자력으로 행하는 것이다. 대단히 비극적인 일은 대다수의 사라들은 전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결국 학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
누구나 학교 밖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들은 교사의 개입 없이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사랑하는 것, 느끼는 것, 노는 것, 저주하는 것, 정치에 관여하는 것 및 일하는 것을 학습하는 것이다. - P. 58

아동들이 학습한 것의 대부분은 결코 교사로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다. - P. 59

어떠한 훌륭한 교사라도 잠재적 교육으로부터 학생을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 P. 64


교사의 역할과 한계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저자의 지적은 단호하다.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교사의 역할이 축소되는 이유와 저자의 주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학생들이 교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한 회의에 공감한다. 책임 회피의 차원이 아니라 극단적인 신뢰도 철저한 불신도 모 위험하다.

현대의 학교를 기초로 하여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역설적이다. 학교의 교사가 재판관, 이데올로기스트 및 의사의 기능을 한 몸에 다 갖추어 가질 수 있?때 사회의 기본적인 양식은 원래 인생을 위한 준비과정 자체에 의해 왜곡되게 된다. - P. 62

어떠한 제도도 학교만큼 능숙하게 참가자들에게 현대 세계에 있어 사회의 원리와 사회의 현실 사이에 있는 깊은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장치는 없을 것이다. 학교는 세속적이며 과학적이고 또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의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합세하고 있다. - P. 80


비판을 위한 비판, 대안 없는 비판에 대해 우리는 냉정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학교를 폐지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렇다면 매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는 현실과 끊임없이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에 대한 방법들이 학교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년대계인 교육에 관한한 모두가 전문가이다. 그렇다면 학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관심은 당연하지 않은가. 국가 수준의 교육의 목적과 개인의 행복과 유리된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접근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문제제기를 통해 개선될 것인지 아니면 경쟁과 이기적 욕심으로 버텨 볼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결정에 달려있다. 단순한 시선과 지엽적인 해결책으로 한방에 풀어낼 수 없더라도 현실적인 대안들을 내놓아야 할 시기는 벌써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오늘도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06122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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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20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획기적이네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이가 적응을 못하고 겉돌때마다 제가 생각했던 내용들이 들어있어요.
우리 애한테 과연 학교나 선생님이 필요한지 끊임없이 생각해왔고
과감히 학교를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학교에 안가면 큰일나는줄 알아요.
그런 사회에서 저도 살아왔기에 아이의 두려움을 잘 알지요.

짱꿀라 2006-12-2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자체와 선생님은 필요하다고 보여지는데........
아이들이 가정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생활이라고 할까요.

드팀전 2007-03-26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익숙하여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학교.
학교라는게 선구적 비판자들에 의해 기존 체제를 안정화 시키고 반란의 싹을 가라앉히고 순응하는 자들의 홈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또한 계급의 재생산 역할까지...오늘 한겨레 신문에도 농촌 아버지와 강남 아버지의 학력 비교기사가 실렸지요.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 버린 내용인지라...
딜레마가 좀 있어요.학교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무정부주의적 방식으로 교육제도를 거부하기 힘들다는 점이지요.좀 더 자유로운 세계를 위해 결국 공교육이 개선되야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국가 기구의 양보를 담보해야하고 양보라는 형태로 또 다른 포섭이 이어지는 것이니까...

sceptic 2006-12-21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래 집단과의 사회화나 교사의 역할 모델도 중요하긴 하지만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집단적 학교교육에 대해 일리히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타협과 양보라고 할 순 없지만 지금 학교교육 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것은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은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오늘 아침 한겨레에서 이 관련 기사를 봤습니다. 학교교육을 통한 계급의 고착화가 가장 큰 문제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팀전 2006-12-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얽힌 실타래입니다.교육문제는.
(<미국민중사>를 읽다보니 이반 일리치의 <디스쿨링 소사이어티>.위의 책이 언급되더군요.70년대 교육계에서 시도된 탈제도화 논의 중 한권으로..)
^^ 그냥 웃는 이야기인데 '제도 변화를 통해 해법을 찾자'는 -표현은 다르지만 이와 유사한-말을 저 역시 도망갈 때 없으면 생활 현장에서 가끔 쓰는데...쓰면서도 참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님의 말씀이 틀렸다거나 이상하다는게 아니라..그 표현을 제가 가끔 쓰면서 혼자 속으로만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단 이야기군' 하며 꿀꿀해 하던 제 모습이 떠올라서 이야기해봤습니다.

sceptic 2006-12-22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하신 이야기지만 웃을 수 만은 없는 지적 맞습니다...^^ 무책임해 보이지만 개인의 능력에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모두의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공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실적 대안을 찾고 온몸으로 모든 문제들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적당한 핑게가 아니라 모두가 안고 있는 서민들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사한 문제가 터지거나 작은 참여나 실천의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의견을 보이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뷰를 도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누군가 <부의 미래> 리뷰가 팔리고 있다는 제보를 해줬다.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개인적인 공부 혹은 인식의 힘을 키워나갈 목적으로 쓰는 리뷰에 무슨 '저작권'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도 우습지만 그걸 팔아먹는 놈은 더 불쌍하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생은 왜 바보가 되었는지 말한 것을 잘 듣지 않았나보다. 해피캠퍼스라는 곳에서 감상문이나 리포트를 돈을 주고 거래한다. 처음 안 사이트지만 그곳에서 내 리뷰가 건당 1,500원에 28건이 거래되었다. 금액으로는 42,000원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한심스럽고 당황스럽다.

자본의 힘은 놀랍고도 무섭다. 책을 읽지 않고 감상문이나 리포트를 사려는 학생들이 있으니 파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다. 과연 그들은 왜 대학생이 되었나?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생겼나, 공급이 있으니 수요가 생겼나? 자료를 구입한 회원의 학교 정보까지 뜬다. 고려대, 동국대, 강남대, 서경대...부끄러운 이 땅의 대학생들이여...

누군가의 제보로 알게되었지만 겨울밤 입맛이 씁쓸할 뿐이다.

<부의 미래> 리뷰 : 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ISBN=&CID=0&CNO=722704164&PCID=2398375&CType=3&CommunityType=AllView&page=&SortOrder=&IsListView=true&BranchType=0&PaperId=976626

팔리고 있는 <부의 미래> 리뷰 :  http://mybox.happycampus.com/cansasby/1729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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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06-12-2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당 사이트에 관련 자료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셔야겠군요. 대학이 완전히 취업훈련소로 전락해버린지 오래 됐으니 뭐... 학생들 탓만 할 일도 아닌 듯 싶네요. 사회 전체가 갈수록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sceptic 2006-12-2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취업훈련소가 되버린 대학과 기능인을 요구하는 사회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원인을 외부로 돌릴수만은 없겠지요. 해당사이트에 신고했습니다.

비로그인 2006-12-2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으로 페이퍼를 쓰셨는데 이런 내용이어서 안타깝네요.
리뷰란 쓰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것인데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지 한심스럽네요.

마늘빵 2006-12-20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제는 리뷰도용에서 리뷰거래까지 이루어지는군요. 어디까지갈지. 거참.

짱꿀라 2006-12-21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용에 거래까지 정말 세상이 요지경이네요.

sceptic 2006-12-2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그러게요. 좋은 내용으로 페이퍼를 시작해야 하는데...사실 페이퍼의 용도와 기능을 몰라 구경중입니다...^^

아프락사스님, santaclausly님 공분할 일이지요. 별일 아닌것 같지만 정말 찜찜하고 씁쓸한 일입니다. 해당 사이트에서 조치하겠다는 메일이 왔지만 사용자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돈벌이용 사이트도 문제가 많다고 책임질 것을 요구했지만 별 대책은 없어 보입니다.

Koni 2006-12-21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런 일도 있군요... 깜짝 놀랐어요.

sceptic 2006-12-21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냐오님, 이런 일도 있네요...저도 처음 안 믿어지더라구요.
 
바람의 사생활 창비시선 270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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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무늬들’ 중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그래서 난 시인들을 마술사라고 부른다. 그리움의 두께와 무게를 유리창에 낀 먼지로 보여준다. 밀어내도 잘 밀리지 않는 미련과 아쉬움을 시인은 물자국으로 표현한다. 손끝으로 만져보지 못한 내밀한 시간을 견뎌본 사람들은 안다.

이병률의 시집 <바람의 사생활>은 손을 베일만큼 날선 감수성으로 벼려져 있다. 생활 속에서 만져지는 모든 감각들이 살아나고 시간의 두께를 벗어난 언어들은 살아 숨쉰다. 우리들 마음이 가 닿는 곳과 가 닿지 않는 곳을 보여주고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한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 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 ‘봉인된 지도’ 중에서

그때 오래전부터 당신이 나를 미워했다는 사실이 자꾸 목에 걸립니다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저녁의 습격’ 중에서


시집을 읽다가 문득 눈길을 멈추고 심호흡을 가다듬는 구절이 나오면 사방은 정막하다. 시인의 보여주는 소실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득하기만 하다. 목구멍으로 밥을 떠넣는 모습이 보인다. 현실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시간들과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어떻게 비춰지는 것일까? 시인의 눈에 투영된 모습들은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 ‘아프게 하기’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적 유희와 다른 언어를 통한 사유와 사고의 확장은 시인의 손을 떠나 독자의 몫이 된다. 해박한 이론과 관념적 이해가 아닌 호흡과 숨결을 만나게 된다면 행복하다. 어떤 독자라도 웃으며 그 시와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된다. 이병률의 시는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눈은 내가 사람들에게 함부로 했던 시절 위로 내리는지 모른다

어느 겨울밤처럼 눈도 막막했는지 모른다

어디엔가 눈을 받아두기 위해 바닥을 까부수거나 내 몸 끝 어딘가를 오므려야 하는지도 모르고

피를 돌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흰 풍경뿐이어서 그토록 창가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애써 뒷모습을 보이느라 사랑이 희기만 한 눈들, 참을 수 없이 막막한 것들이 잔인해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비명으로 세상을 저리 밀어버리는 것도 모르는 저 눈발

손가락을 끊어서 끊어서 으스러뜨려서 내가 알거나 본 모든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 고백 같다, 고백 같다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서 쉽게 규정될 수 없을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눈발을 통해 비명 소리가 재워지고 뒷모습이 희미해지며 들리지 않게 고백하고 만다. 하얀 눈으로 뒤덮힌 아침, 창밖의 나뭇가지에 쌓인 흰 눈의 무게만큼만 무거워지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돌아본다. 그 시절 위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일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배후를 알고 싶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선언은 ‘봄날은 간다’이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당신’이라고 명명된 존재는 봄날과 함께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당신이 건설한 제국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히는 이 시 너머에 오롯이 앉아 있는 너의 모습을 본다.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연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06121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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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8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시와 님의 글이 잘 어울렸어요.
또 한편의 시를 읽는 느낌이에요.

sceptic 2006-12-19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러운 멘트를...-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