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모든 사색과 정치적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그 어떤 혁명도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P. 142


 카알 마르크스(Karl Marx).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화 되었다. 그가 함유하는 의미는 상황과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인류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신이 아닌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주저없이 그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이든 말이다. 21세기에 불러보는 그의 이름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손꼽히는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은 마르크스에 대한 선명하고 분석적인 평가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 아탈리는 마르크스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독일의 철학자, 유럽의 혁명가, 영국의 경제학자, 인터내셔널의 스승, 자본의 사상가’로 구분된 그의 생애를 따라가며 방대한 자료와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냉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마르크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수많은 인용들과 자료들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고 그것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과 평가는 독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낸다.


 평전이 가지는 미덕이 설득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선입견은 독자들마다 다를 것이다. 단편적인 이야기들과 다른 책들에서 만난 마르크스의 왜곡된 모습들이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다. 750여페이지에 달하는 긴 여행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의 참 모습을 만나게 된다.


 19세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공산당선언(1848)’이후 마르크스는 어떤 형태로든 거의 모든 인류에게 깊은 인상과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 되었다. 그 영향의 파장은 물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유효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쓴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억할 만한 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여전히 유요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꼼꼼한 자료 분석과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에는 주관의 범주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를 영웅시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19세기를 살았던 한 개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조국을 등지고 살아가면서 가난과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그의 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세 명의 자녀를 앞세웠고 두 명의 자녀는 자살한 마르크스의 개인적 고뇌와 세상에 대한 고민은 책을 읽는 내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지적 기반을 살펴보고 사상적 추이를 더듬는 일은 현재성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그의 예언적 사상과 현재와의 접점을 찾아내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마르크스의 망령을 되살려 어쩌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좌우의 대립을 넘어 그가 보여준 혁명적 사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레닌과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오독했고 이용했지만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마르크스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은 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지구상에 첫 번째 세워졌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붕괴되었고 중국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과 쿠바 등 여전힌 진행중인 혁명에 대한 실험과 평가는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다른 점이 많다.


 수학공식처럼 들어맞는 현실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세상은 인류의 영원한 지향점의 의미만 지닌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어쨌든 그가 떠난 빈 자리를 채웠던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를 반박하고 비난하고 오해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다.


 마르크스의 생애를 반추하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그의 아내 예니가 아니라 친구 엥겔스다. 친구 혹은 사상적 동지 이상의 특별한 관계였던 그들을 표현하기조차 힘들다. 엥겔스가 아니었다면 마르크스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엥겔스가 마르크스를 길러낸 것은 아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관계인 두 사람, 특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가졌던 마음이 더 많이 궁금해졌다.


 우리는 지금 이기적 자본주의와 왜곡된 자유주의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여전히 필요하다. 그가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말도 아니고 19세기 식으로 혁명을 꿈꾸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미처 상상도 못한 자본의 소유 형태나 노동의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가졌던 ‘인간’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스’라는 상품에 대한 현재적 유용성에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자크 아탈리가 마르크스를 통해 읽어낸 것이다.


 어떤 자유의지도 소멸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생각이든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원인과 책임 요소들, 메커니즘과 행위자들, 계층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며,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이다.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런던의 빈궁 속에서 죽은 자식들을 놓고 슬퍼하면서 최선의 인류를 꿈꾸었던 그를. 그러면 미래의 세대들은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고,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 P.741



06111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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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0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으려고 2주 전부터 벼르고 있었는데 읽지를 못하고 있었네요. 근데 여기에서 님의 리뷰를 먼저 읽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sceptic 2006-11-2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부끄럽습니다...꼭 읽어보실만한 책으로 추천합니다...님의 취향을 알 수 없으나 천천히 음미할 만합니다.
 
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절판


인간은 모든 사색과 정치적 활동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그 어떤 혁명도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목숨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42쪽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68쪽

그는 정신의 힘을 믿는 유물론자였으며, 경제는 역사의 기반이며 행동이 이론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인간을 신뢰하는 비관론자였다.-628쪽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학술적 저서들 속에서 사회주의는 망상이 아니며 현 사회의 생산관계들의 발전의 궁극적 목표이자 필연적 결과라고 처음으로 설명한 사람들이다." -683쪽

"정부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자유, 한 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자유가 아니다. 자유, 그것은 언제나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말한다. 일단 권력을 쥐게 된 프롤레타이랑에게 부과되는 역사적 과제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리에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창설하는 것이지, 모든 민주주의를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니다."-693쪽

베트남에서부터 가나까지, 기니에서 알제리까지 대부분의 해방 운동들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호치민에서부터 체 게바라에 이르는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화신들을 내세웠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상대적으로 덜 내세웠다. 이어지던 거짓과 변형의 추우이들 아래에 매장된 마르크스의 원문들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원용하지 않았다. -732쪽

어떤 자유의지도 소멸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생각이든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말고, 상반되는 관점들을 받아들이며, 원인과 책임 요소들, 메커니즘과 행위자들, 계층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며, 언제나 열여 있어야 하는 이유들을 말이다.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이유 말이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 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런던의 빈궁 속에서 죽은 자식들을 놓고 슬퍼하면서 최선의 인류를 꿈꾸었던 그를. 그러면 미래의 세대들은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 가게 되고, 그의 주된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될 것이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7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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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3 - 완결편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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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현실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자괴감. 하루 이틀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낭패감.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발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연 고전이 주는 지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善行無轍迹,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善言無瑕謫,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善數不用籌策,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잘 맺는 자는 끈으로 매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 27장

고수의 세계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공통점에 대해 공감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동작과 입으로 하는 말과 사유의 흐름에 막힘이 없고 자연스럽다. 하수는 고달프다. 시간과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더욱 힘들어진다. 부단한 극기의 과정과 대상에 대한 열정만이 그러한 경지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에 대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흠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논쟁적인 장면에서는 불가능하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모두에게 나쁜 사람이다.

樸散則爲器,                       통나무에 끌질을 하면 온갖 그릇이 생겨난다.
聖人用之, 則爲官長.         성인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하여 세속적 다스림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故大制不割.                       그러므로 위대한 다스림은 자름이 없는 것이다.
- 28장

그릇의 효용은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롯된다. 깍고 다듬고 파내어 비어진 공간만큼 그 그릇의 가치는 인정받는다. 비워야 얻을 수 있는 지극히 자명한 이치 앞에 고개가 숙여진다. 온전한 모습 그대로 끊임없이 이기적 욕망을 드러내는 자화상을 보는 것같아 부끄럽다. 정현종 시인의 시 <잃어야 얻는다>를 읽다가 두고 두고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양손에 떡을 쥐고 떡이 무겁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道常無名.                                       도는 늘 이름이 없다.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나무는 비록 작지만 하늘 아래 아무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제후 제왕이 이 통나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이 스스로 질서지워질 것이다.
-32장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것들은 규정된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노자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통나무와 이름은 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과연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바꿀 수 있을까? 스스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아직도 멀었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미숙의 선언대로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知人者智, 自知者明.                        타인을 아는 자를 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아는 자야말로 밝은 것이다.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타인을 이기는 자를 힘세다 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이기는 자야말로 강한 것이다.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족함을 아는 자래야 부한 것이요, 행함을 관철하는 자래야 뜻이 있는 것이다.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바른 자리를 잃지 않는 자래야 오래 가는 것이요,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자래야 수하다 할 것이다.
-33장

이 세상에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자신이다. 가학적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나쳐도 좋지 않다. 과연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의 한계는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숭산 스님의 말처럼 ‘오직 모를 뿐!’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는 늘상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다.
-37장

노자의 ‘道經’ 37장은 이렇게 끝이 난다. 38장부터 81장까지의 ‘㥁經’은 도경의 깊은 이해만으로도 충분히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도올의 말을 믿어야 할 것이다. ‘道’라는 것이 대체 뭐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느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 깊고 깊은 사유의 흐름을 꼼꼼히 따라가며 도올의 도움을 받았지만 암흑 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불빛도 없다. 현실에서 찾아지지 않는 ‘길’에 대한 아쉬움과 스스로에 대한 미련스러움에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성과 감성으로 해결되지 않는 삶의 이치와 ‘道’의 경지는 내 몫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들 모두의 곁에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렴풋한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렇게 어둠이 창 밖에 당도해 버리고 나면 반드시 빛이 있기 마련이다.


0611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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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선(善)이 '착하다'도 되지만 '잘'이라는 말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친구들끼리 농담으로 공부를 잘해야 착한 어린이가 되는거라 이야기했던것이 생각납니다.

sceptic 2006-11-1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진담되는 현실이 좀 황당하기도 하죠...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이라 쫌 많이 찔리네요...
 
노자와 21세기 - 2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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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2권은 7장부터 24장까지의 내용이다. 인상 깊은 구절들을 적고 F9를 누르면서 한자로 변환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지 알 수 없지만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독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들은 그들의 삶의 형태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만큼이나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天長地久,                              하늘은 너르고 땅은 오래간다.
天地所以能長且久者,               하늘과 땅이 너르고 또 오래갈 수 있는 것은,
以其不自生,                           자기를 고집하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 7장


피 흘리며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유덕화의 모습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스팔트를 다리는 오천련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영화 <천장지구>는 깊은 인상을 남긴 청소년기의 영화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유일한 상태가 사랑의 빠진 인간의 감정이 아닐까? 비극적 사랑이 보여주는 안타까움에 관객들은 가슴을 졸였었다. 노자가 다시 태어나 이 영화를 보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와 상황을 불문하고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바람직한 상태나 상황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는 법이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이든 사랑이든.

上善若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處衆人之所惡,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故機於道.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 8장


노자 도덕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구절 중의 하나지만 역시 기가 막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에 곳에 처하려는 노력은 인간에게 가식일 수 있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정한 ‘道’의 실체는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인간이 닮고자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누구나 그럴 수 없다. 겉멋 든 표현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천의 구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단순 무식한 노력과 기본적인 심성에만 기댈 수는 없다.

五色令人目盲,                       갖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五音令人耳聾,                       갖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하고,
五味令人口爽.                       갖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한다.
- 12장


색과 소리와 음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때로는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욕망들을 경계하는 이런 표현들이 거북하다. 에피큐러스 학파의 진정한 쾌락이 금욕주의로 흐르듯이 지속 가능한 영원한 쾌락을 위한 자기 극복은 필요하다. 하지만 범인들의 입장에서는 고문이다. 내 방식대로 현실의 모습 속에서 노자를 이해하고 풀이하는 나같은 수많은 독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맘에 새기고 뼈에 사무쳐도 실천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외물에 미혹하지 않는 경지는 하루 이틀에 완성될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다.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 단지 훈련만으로 가능하다면 조금씩 흉내내고 싶다.

大道廢, 有仁義.               큰 도가 없어지니 인의가 있게 되었다.
慧智出, 有大僞.               큰 지혜가 생겨나니 큰 위선이 있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육친이 불화하니 효도다 자애다 하는 것이 있게 되었다.
國家昏亂, 有忠臣.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라는 것이 있게 되었다.
- 18장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와 관계의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움에 근거한 통쾌한 역설! 바로 이런 구절이 노자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인의, 지혜, 효와 자애로움 그리고 충신을 뒤집어 바라보는 시원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던져주는 18장의 의미는 색다르다. 가슴으로 읽는 구절이 다르겠지만 이 구절은 발상과 표현에 주목한다.

絶學無憂.                        배움을 끊어라! 근심이 없을지니.
- 19장


공부하기 싫은 놈들을 위한 최고의 변명이 될 수 있으니 주의요망!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希言自然.                        말이 없는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故飄風不終朝,                  그러므로 회오리 바람은 아침을 마칠 수 없고,
驟雨不終日.                     소나기는 하루를 마칠 수 없다.
孰爲此者? 天地!               누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하늘과 땅이다!
- 22장


한 편의 시와 같이 아름다운 부분이다. 회오리 바람이든 소나기든 천지가 만든 것은 영원할 수 없으니 인간이야 말해 무엇하랴. 논란이 많은 해석에 대해 도올은 자신의 주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같은 문외한이야 어느 판본을 인용해서 비교하든 중요하지 않다. 미미한 해석상의 오류도 그렇다. 다만 지금, 여기 나의 문제를 비춰보는 거울의 역할을 할 따름이다. 어차피 모든 독서의 과정은 지독하게 이기적이다.


06110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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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TV에 나와 묘한 억양으로 강의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어려운 내용이지만 재미있었고 실생활과 상관없이 듣고 즐길 수 있었어요.
이 글 중간 중간에는 저와 의견이 다른 부분이 있지만 마지막 문장은 제가 책을 파고 들때마다 하는 생각입니다.

sceptic 2006-11-09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모든 독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과정을 거쳐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니까요. 특이한 억양만큼 외모와 생각도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일반적이라는 통념에 대해서는 재고해봐야겠지만요.

비로그인 2006-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요,학문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만은 본받고 싶더군요.

sceptic 2006-11-12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합니다. 세상과 학문에 대한 날선 목소리는 본받을만하죠.
 
철학, 예술을 읽다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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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예술의 관계는 철학과 다른 어떤 분야와도 관계가 깊다.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 책을 읽어도 충분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만나게 된다. 철학아카데미에서 나온 <철학, 예술을 읽다>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한 사람의 주장과 분석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특정 분야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프리즘으로 햇빛을 들여다보듯 다양한 스펙트럼이 펼쳐진다. 풍성한 식탁에 차려진 철학과 예술의 성찬을 즐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서 예술을 ‘읽다’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다. 읽는 행위는 감상의 차원과 조금 거리를 둔 듯하다.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고 미적 성취를 이룬 예술에 대해 평가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술가의 입장에서 작품의 대상과 표현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도 다르다. 관점은 하나, 철학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예술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과 아름다움을 분석한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객관화할 수는 없겠지만 정형화된 예술에 대한 이해를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된다. 예술을 바라보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좀 더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가 이 책이 갖는 의미이다.

‘예술, 철학과 마주보다’라는 소제목의 1부에서는 예술 전반에 관한 논의들이 이루어진다. 고답적인 철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답답한 문제들이 아니라 다른 학문과 예술 전반에 관한 폭넓은 이해와 분석들은 ‘철학아카데미’의 성격과 자유로운 가로지르기를 보여주는 것같아 강의를 듣고 싶은 욕망이 스멀거리게 한다.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가끔 타당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광제를 비롯한 저자들(강사들)의 이야기는 알기 쉽고 친근하면서도 고정된 틀이 아니라 열린 토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다.

작은 주제들 뒤에 붙어있는 ‘더 생각볼 문제’와 ‘더 읽어볼 책’은 아주 유용하다. 단순히 읽고 그치기 쉬운 시민들을 위한 철학학교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특히 ‘더 읽어볼 책’을 통해 미뤄뒀던 책이나 새롭게 알게 된 책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는게 다 ‘공부’하는 것이고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책은 큰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1부가 총론에 해당한다면, 2부 ‘철학, 예술 사이로 걷다’는 각론에 해당한다. 미술과 음악, 무용, 문학, 연극, 건축, 사진,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재미를 더한다. 각 분야를 두루 읽는다는 것은 깊이 읽을 수 없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깊이와 넓이를 모두 얻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면 이 책은 깊이보다 넓이에 해당한다. 철학이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들을 어렵지 않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간 경계를 허무는 일에 인색하고 높고 견고한 담을 허물지 않으면 동종교배로 인한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모든 학문의 정점에 서 있는 철학의 경우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타 학문과의 교류에 힘써야 한다.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유와 통합은 어떤 분야를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보다 쉽고 친근하게, 그리고 새롭고 예리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들을 제시하는 책들을 독자들은 즐겁게 맞이할 것이다. 동양의 예술에 소홀한 점이 아쉬움이 남지만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협소했거나 중심 추를 바로잡지 못했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된다. 더 읽어볼 책이 늘어만 간다. 행복한 비명일까? 아는 건 없고 궁금한 건 점점 많아진다. 인식의 힘은 쉽게 길러지지 않으며 산책과 사유의 길은 멀기만 해 보인다.

오늘은 첫 눈이 내렸다.


06110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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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1-06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신곳이 어디세요? 여기는 눈 안왔는데. -_-

sceptic 2006-11-06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요?...거기요..ㅋ..아침에 잠깐 내리다 비가 왔어요...

비로그인 2006-11-0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며 쓸 말을 준비하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첫눈'이라는 말에 모든 생각이 지워졌습니다.
'철학'과 '예술'이라는 단어는 그리 쉽지 않음에도 한번 읽어 보고 싶게 리뷰를 쓰셨네요.

sceptic 2006-11-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호승의 '첫눈'이라는 시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

쉽지 않지만 흥미로운 시선들이 돋보이는 글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