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시대가 변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이 고전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하는 책들이 많다. 노자가 바로 그렇다.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는 22세기든 23세기든 변하지 않는 세상과 삶에 대한 가치를 전해준다. 김용옥의 해설한 노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자’가 전하는 인간 삶의 정수 때문이다. 고리타분한 고전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책장을 넘겨보자.

고전을 해석하는 방식은 풀이하는 사람의 개인적 성향이나 삶에 대한 가치관,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를 풀이하기 전에 ‘동아시아 문명의 새로운 축’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도올은 책의 서두에서 21세기의 3대 과제를 ‘인간과 자연환경, 종교와 종교, 지식과 삶’의 화해로 제시했다. 이렇게 거시적인 안목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전망하는 태도는 ‘노자’를 풀이하고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수백년, 수천년 전의 사상을 오늘에 되새기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텔레비전의 폐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정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영향과 효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김용옥은 변명처럼 EBS를 통해 ‘노자’를 강의하게된 배경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겠지만 김용옥의 텔레비전을 통한 강의는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식의 대중화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방법으로 선택된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과연 그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가장 파급력 높은 매체를 통한 김용옥의 강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노자와 21세기 1>에서는 ‘노자도덕경’이라는 책에 대한 해설이 길게 붙어 있다. 1973년에 발견된 백서帛書와 1993년에 출토된 죽간竹簡의 연구 성과까지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노자’에 관한 한 가장 최근의 정확한 해설을 곁들였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랜 시절을 거치면서 가감된 부분들에 대한 설명은 노자의 근본 정신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구절 풀이에 대한 이견과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러 가지 논의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노자’가 전해주는 의미들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도올 특유의 어법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책은 쉽고 즐거운 마음으로 ‘노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1권에서는 우선 6장까지를 해설하고 있다.

道可道, 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名可名, 非常名.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有名, 萬物之母.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노자의 핵심 사상인 ‘도道’를 제 1 장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뒤집는 역설이다. 도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나? 아니 부르지 말고 규정짓지 말고 한정하지 말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일상과 유리된 모든 가치는 의미없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道’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이 책에 한발 다가서게 된다. 워낙 긴 시간동안 많은 사람에게 소개됐고 알려진 책이지만 진지하게 다시 한번 돌아보는 시간은 즐겁기만 하다.

天地不仁,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以萬物爲芻狗;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聖人不仁,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以百姓爲芻狗.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天地之間, 其猶橐蘥乎!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虛而不屈, 動而愈出.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제 5 장의 내용이 맘에 와 닿아 옮겨 적어본다. 천지는 인자하지 않고, 성인도 인자하지 않다는 말에 공감하는 이유는 뭘까 생각해 본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짝사랑은 부질없다. 세상 만물이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드러낼 뿐 자연은 결코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성인도 마찬가지다. 시혜적인 입장과 시선으로 동등하지 않은 관점으로 백성을 바라보는 성인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인상적인 부분들은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아니 해설이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유의 단초를 공한다. 노자와의 즐거운 대화가 계속 될 수 있도록 천천히 음미해야겠다.


061104-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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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1-04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용옥 씨를 보고 있으면, '도는 도고, 삶은 삶이다'라는 생각도 들어요.(헤헤)

sceptic 2006-11-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이 도인은 아니죠...^^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22 세트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이이화 지음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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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아놀드 토인비

   역사를 대할 때마다 내가 되새기는 가장 인상깊은 금언이다. 금붕어와 같은 인간의 기억력 탓일까? 왜 우리는 지나간 역사에서 현실적 문제들의 실마리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일까?

   개인의 저작으로는 가장 방대한 저술로 볼 수 있는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는 모두 22권으로 완결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이이화의 이력은 제도권에서 벗어나 있다. 제도적 규범에 따른 학문적 성취나 어느 교수 계보에 의한 편협성을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서술에 있어 보다 자유롭고 새로운 관점을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1권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에서는 인류의 진화와 우리 민족과 뿌리를 찾아 단군과 함께 민족의 근본에 대한 탐구로 흥미롭게 시작된다. 2, 3권에서는 삼국과 가야, 4권에서는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최초의 통일국가를 신라로 보아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결국 당의 힘을 빌어 신라가 통일했으나 북쪽에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발해를 세워 완전한 통일로 볼 수 없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현재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를 통해 삼국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리자의 편에서 서술되는 것이 당연하며 사관(史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보다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역사 해석이 다양하게 인정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5~8권은 고려시대의 역사이다. 『고려사』로 대표되는 역사를 바탕으로 지방 호족 세력이었던 태조 왕건으로부터 무신정권의 생성과정과 그 폐해를 당시 집권세력들간의 세력 다툼과 왕권의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몽골의 침략과 30년간의 끈질긴 항쟁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은 차라리 처절했다. 생존의 몸부림과 백성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936년에 건국된 고려는 1392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457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9~12권까지를 조선 전기로 나누어 조일전쟁(1592년 임진왜란), 조청전쟁(1637년 병자호란)이 마무리되는 1645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유럽의 중세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세종이라는 걸출한 임금을 배출하여 문화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지만 일본과 7년간의 전쟁을 통해 뒤이어 뿌리깊은 숭명반청(崇明反靑)사상 때문에 실리외교를 멀리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받고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물론 이때에도 집권세력인 양반들의 좁은 국가관과 맹목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이라는 명분 때문에 백성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다.
 

  13~15권은 조선후기, 곧 17세기 중기(1646년)부터 18세기 후기(1800년)까지 150년 가량의 시대사를 담고 있다. 조선후기의 걸출한 두 임금 영조와 정조가 그나마 위안을 준다. 문화군주로 일컬어지는 정조의 개혁에 대한 열망과 문화적 역량에 힘입어 유럽의 르네상스에 견줄만한 변화가 있을 법하다가 죽음과 더불어 또다시 문벌정치에 휘말리게 된다.

   16~19권에서는 조선의 종말과 초기 한국의 근대사를 담았다. 뿌리깊은 당쟁과 파벌싸움, 지역간의 알력은 그 연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고 그 후유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까지도 몸소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역동하는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힘의 논리에 의해 강제적으로 문을 열게 된다. 이 무렵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빠른 속도로 세계 열강들의 발달된 물질 문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 미국등은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앞세워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뒤이어 한국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변화를 모색하지만 바닥난 국가의 재정과 낙후된 군사력 등 세계 무대에 주체적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일본과 청의 간섭과 위협아래 예정된 수순처럼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20~21권에서는 한국사의 식민지 시대를 다루고 있다. 3·1운동을 위시하여 끊임없는 국내외의 독립운동과 친일세력의 모순속에서 결국 우리는 35년간 치욕스런 식민지 시대를 보내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에 힘입어 제 2차 대전의 패전국으로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도 러시아와 미국의 분할점령이라는 또다른 식민지의 형태로 말이다. 정리하면,


1권~4권 : 선사시대부터 남국신라?북국 발해까
5권~8권 : 고려시대13권~15권 : 조선 후
16권~19권 : 조선 근대
20권~22권 : 식민지


로 나눠 총 6차분 22권으로 완간되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집권자와 승리한 자의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서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せ?서술은 물론이고 소홀히 다루기 쉽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당시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데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놀이와 풍속 등 당시의 생활의 한 단면들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아 실감나는 역사로 읽혀졌다. 학교 교육을 통해 굳어져버린 역사적 용어와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이해없이 단순 암기 내지 반복 숙달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일관된 관점으로 우리 역사 전체를 조망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벌어졌던 민족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은 물론 무정부주의를 표방했던 인사들의 행적까지도 가감없이 비중있게 다루어 새로운 시각으로 독립운동의 일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내년이면 해방 60주년을 맞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벗어난지 겨우 60년. 이 짧은 격동의 세월속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몸살을 앓으며 한걸음씩 힘겹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며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21세기 벽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할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똑바로 읽어 왔으며 그 교훈들을 차치하고라도 과거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모습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부끄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소위 모든 위정자들은 시대의 소명을 부르짖기 앞서 현재의 우리들 모습을 과거를 통해 돌아보고 이땅의 민중들의 모습을 직시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의 개혁과 투쟁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며 소외된 이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나눔의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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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 - 전4권 -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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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한 헝가리 출생 문학사가이며 예술사회학자이다. 최초의 독일어판이 1953년에 출판되었으며, 66년에 <창작과 비평>에 연재되다가 81년에 완역되었다. 이후 1999년에 개정판이 출판되었다. 백낙청, 염무웅, 반성완의 번역작업이 고된일이었을듯 싶으나 나로서는 좋은 책을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대체 문학과 예술은 따로 분리될 수 있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가치를 떠나 분리될 수 있을 정도의 부피와 무게를 가지고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인가가 더욱 의문스러웠다. 제목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문학과 예술은 선사시대 인류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인류가 발생되어 끊임없는 종족보존 욕구와 생존의 몸부림 속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처절한 삶의 투쟁속에서 꽃피기 시작했다고 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가족에게 1차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학교나 사회를 통해 2차적 욕구들을 채워나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학과 예술을 접하고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또다른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게 된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겪게되는 일반적인 패턴이다. 나만 그랬나? 하지만 과거에 문학과 예술의 경계는 당연히 모호했으며 예술가의 존재 또한 현재와는 달랐다. 시대와 관점, 그리고 학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과 생활은 그렇게 혼재되어 있었으며 생활과 밀접한 관계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의 효용성과 실용성을 따지기 이전에 말이다. 발터 벤야민(W. Benjamin)이 옳게 지적했듯이 예술작품을 낳는 데는 두가지 상이한 동기가 있다. 즉 단순히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과 남에게 감상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은 언제부터 남에게 감상될 목적으로 존재했을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선사시대,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세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이 책은 이렇게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역사시대의 순서에 따라 후대에 이름 붙혀진 각 사조의 명칭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지은이는 서양사와 서양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으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것이 처음부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양서로 시작한 책이 잠시라도 집중력을 떨어뜨리거나 ‘빡빡한’ 서술에서 한눈을 팔게되면 책의 첫머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지은이는 명쾌하고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과 예술이 사회적 관점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혹은 역으로 사회 현상들이 문학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차분히 분석해 내고 있다. 결국 문학도 예술도 사회적 인간에게 특정 영역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혀있는 사회, 역사적 환경과 문학과 예술의 관계를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닌 저자가 명쾌하고 치말한 논리로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소 딱딱하지만 너무나 큰 즐거움이었다. 결국 내가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안목은 어떤 문학과 예술이든 1930년 신비평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작품 내적 의미에만 충실하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또한 당연하겠지만, 사회적 맥락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의 흐름들을 짚어가며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눈을 조금 뜰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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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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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친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 진은영,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에서 -

“언제부터인가 내 삶이 엉터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너의 삶이 엉터리라는 것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너라도 이 경계를 넘어가주었으면. 그래서 적어도 도달해야 할 무엇이 있다는, 혹은 누군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어떤 존재 증명과 같은 것이 이루어지길……사람들은 왜 내겐 들을 수 있는 귀만을 허락했냐고 신에게 한바탕 퍼붓는 살리에르의 한탄과 비애를 전하지만, 사실 얼마나 배부른 소린가? 모차르트와 동시대인이라는 거, 그거 축복 아닐까?” 하고 시비거는 시인의 후기를 읽으며 별 것도 아닌 것들에 감사하고 객관적 시각에선 하찮은 일들에 목숨거는 우리들, 아니 나의 모습에 또한번 고개를 튼다. 어쨌든 나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힘이 남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비가 내”릴 때마다 창밖을 내다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 살지 않을 주소 불명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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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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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존재하는 형식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문학은 삶,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동시에, 문학은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는 시간의 신기루 위에서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다.”

작가의 말에서 방현석은 자신의 문학관을 간략하게 피력하고 있다. 40대 중반의 작가가 등단한지 15년이 지나 우리들의 존재형식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는 조심성을 내비치는 것은 지나친 겸손이라는 생각과 함께 영원한 숙제라는 생각도 든다.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네 편의 중단편을 묶어놓았다. <존재의 형식>, <랍스터를 먹는 시간>, <겨우살이>, <겨울미포만>이 그것이다. 존재의 형식과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겨우살이는 전교조 해직교사였던 주인공의 시선을 빌었고 겨울미포만은 노동운동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미국의 부시정권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에 바쁘지만 국제사회의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라는 느낌이다.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뒤를 캐고 다닐만큼 미국은 모든 반대세력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현재 이라크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의 군인들은 이라크 재건과 평화유지를 위해 파병되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겨우 베트남 종전 30년이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금붕어 수준일 뿐이다. 지나간 과거와 역사에서 교훈과 반성을 얻지 못하는 미국의 더러운 야망을 손가락질 할 뿐. 미국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국 군인은 이라크 침략 전쟁에 동참하게 된 현실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네 편의 소설 모두 후일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존재의 형식>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서 활약했던 영화감독의 이야기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전력을 지닌 주인공의 이야기가 병치되어 있다. 어느 시대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소설 속에서 그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서로가 가진 상처의 깊이와 아픔이 주는 현재적 의미를 되돌아 볼 뿐이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그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따이한(한국군)의 만행 때문에 몰살당한 한 마을을 찾아가는 주인공은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영웅적 전사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 마을의 또다른 생존자 노인을 통해 아무 상관없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쥐여준 총을 잡고 싸우다 죽어간 따이한이 더 불쌍하다는 회상을 들려준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베트남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략전쟁은 미래의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고통받는 이라크 국민들의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겨우살이>는 전교조 해직 교사였던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 사회를 본다. 학교의 규정 때문에 정식으로 임명받지 못한 가장 반장스러운 반장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인공의 둘째누나는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으마 가해자는 4만원짜리 교통범칙금 딱지 한 장을 떼고 돌아가 찾아오지 않는다. <겨울 미포만>은 8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의 현장 변화와 조직원들의 이반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포조선소 사건이후 와해되는 노동 운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노동귀족’이라는 이름의 고임금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속물적 자본주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사회의 구석구석 어디 아프지 않은 곳이 있으랴. 문학의 본질과 역할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도 오히려 이런 한권 한권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그 해답을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방현석씨의 다음 소설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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