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다녀갔듯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295
김영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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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손길은 그것이 스치기만 해도 아름답다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김영태의 시는 아름답다. 이제 칠십의 나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간결하며 투명하다. 평생 미술과 음악, 무용 등 예술 전반에 관한 폭넓은 안목과 관심으로 삶을 이야기한다. 86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한 아이는 꽃처럼
   밤에 피어 있다
   무척 두려울 것이고
   처음으로 꽃으로 밤에
   피고 있다

   장례식 날엔 비가 내렸다
   멜빵끈을 잡은 환도도 서 있다
   그 옆에 죽은 리스도 서 있다
   솔 답배를 거꾸로 물고
   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대여섯 명                                - ‘결혼식과 장례식’ 전문

시집 표지의 자화상의 변화 모습만큼이나 시간이 훌쩍 흘렀고 시는 더욱 새롭다.

  
하염없이 내리는
   첫눈
   이어지는 이승에
   누군가 다녀갔듯이
   비스듬히 고개 떨군
   개잡초들과 다른
   선비 하나 저만치
   가던 길 멈추고
   자꾸 자꾸 되돌아보시는가       - ‘누군가 다녀갔듯이’ 전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시인은 그의 전 생애를 말하고 있는듯하다. 세월의 무게가 아니라도 이 한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상상해보면 삶과 죽음의 세계가 동양적 세계관에서 이야기 하듯이 이분법적,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길고 가는 부드러운 곡선처럼 그렇게 하나가 되어 이어져 있는 느낌이다.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다
   인간은 나이들어
   한 장의 뒷모습을 두고 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 지나간 뒤에
   남아 있는……           - ‘뒷모습’중에서

라고 말하는 시인의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제 생을 정리하고 마감하는 시편들이 곳곳에 보여 오히려 슬프다. 그것은 넉넉함이고 부드러움이고 편안함이며 아름다움이다. 하지만 슬프게 닿는다. 생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내면적 고백보다 오히려 무심한 듯 스쳐지나가듯 툭툭 내뱉고 던져놓고 모른척 하는 말하기 방식이 이제 비로소 김영태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더러운 것들 많은 세상에
   중광은 걸레처럼 살다 갔다
   미친 듯 반성하듯 붓 한자루로
   인사동 선천집
   토란국에 빠져다가 기어나온
   동갑내기 떠돌이 파계승은        - ‘괜히 왔다 간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고 말하며 이승에서의 삶을 ‘소풍’에 비유한 시인 천상병과 ‘괜히 왔다 간다’고 말하고 떠난 중광 스님, 이제는 김영태가 그 동갑내기 떠돌이 파계승을 추억한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는 것일 뿐이다. 모든 문학적 관심이 인간과 삶의 문제이겠으나 그 풀이 방식의 다양성만큼이나 늘 새롭고 반갑고 즐거운 것이 또한 문학이 아닌가.

  
앞머리 짧게 친
   화등잔만한 눈
   망사옷 속
   가슴을 숨기지 못한
   너무 시퍼런
   길이 만나는 곳
   너무 시퍼래서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르는
   저 스무 살!                         - ‘길이 만나는 곳’

  이 시를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다. 그것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길이 만나는 지점을 김영태는 스무 살 튀어 오를듯 젊고 신선한 여자의 가슴 속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싸구려 곁눈질이 아니라 놀라운 생명의 발견이며 생에 대한 열정일 것이다. 수많은 길들 속에 정답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처럼 내게 주어진 길을 Ч??열심히 걷다 지치면 쉬어 가리라.


200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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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미학 -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미와 교코.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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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처럼 진초록의 산길을 더 없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기훈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속도가 만들어준 바람을 만지작거리며 행복하게 노래를 따라 부른다. 행복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듯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선악과(善惡果)를 먹은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성경의 창세기 3장6절. 영화 ‘주홍글씨’는 이 자막으로 시작된다. 모든 유혹과 쾌락의 정점을 보여주었던 영화로 기억된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일부이며 드러냄과 감춤의 묘한 대비이다.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쪽과 저쪽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 삶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서양미술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성의 미학>은 인류의 근원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미술에 나타난 인류에 대한 욕망의 역사를 보여준다. 진중권의 부인 미와 교코는 남편과 함께 욕망과 쾌락의 미학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몸, 쾌락, 남녀, n개의 성.

  몸 -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을 시작으로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여성의 바기나에서 비롯되는 욕망의 근원을 시작으로 여성의 가슴을 만지는 남성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보여준다.

  쾌락 - 훔쳐보기로 시작해서 신화의 모티브를 차용한 렘브란트의 ‘디아나, 악티온과 칼리스토’를 정점으로 성서의 ‘롯과 딸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보여주는 근친상간에 이르기까지 쾌락의 다양한 표현방식들을 제시한다.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와 교합하는 주피터를 주제로한 수간에 이르기까지 예술은 왜 외설과 다른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남녀 - 영화로도 잘 알려진 ‘롤리타’ 현상에서부터 ‘다에나’, ‘비너스’를 주제로 한 그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준다. 특히 사내와 정을 나눈 후 그 사내를 파멸시키는 여인들, 흔히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 부르는 요부로 그려지는 ‘살루메’를 주제로 한 여러 그림들의 다양한 해석과 화가들의 표현방식은 성서의 애매한 해석으로 이해불가능한 인간의 욕망들을 해석하고 있다.

  n개의 성 - 플라톤의 ‘향연’에서 보여주는 어린소년에 대한 사랑의 고결함을 시작으로 ‘아폴론과 히야킨토스’(장 브록)에서 보여주는 일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에 비해 여성들끼리의 동성애는 앵그르의 ‘터키탕’을 위시해서 부정적 대상으로 표현되어 온 남성중심의 의식세계를 통해 본질적인 차이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성기를 가진 ‘양성구유’를 주제로 한 그림으로 책은 마무리 된다.

  서양미술에 나타난 다양한 현상들을 시대적 배경과 사회 문화적 영향들을 고려해서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은 단순히 예술에 대한 이해와 감상 측면에서가 아니라 철학과 문학으로 접근할 수 없는 또다른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특히, 변함없는 인간의 욕망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의 차이는 지금도 앞으로도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에로스에서 출발하여 타나토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욕망을 생의 주제로 본다면 종교와 부딪히게 된다. 그것이 어떤 이름의 욕망이든. 삶의 목적과 생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는 단 한순간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까? 그것이 미학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우리가 부딪히는 이 잡다한 욕망들과 억압의 기제는 삶의 또다른 형태가 아닐까 싶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우리들에게 ‘금지’는 더 큰 쾌락을 위한 욕망의 경제학은 아니었을까?


200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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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시선 242
신대철 지음 / 창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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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화제를 뿌렸던 영화 ‘실미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험한 소문으로만, 작은 목소리로 소리 낮춰 주고 받던 북파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룬 소재부터 충격이었으며 그것이 실화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우리는 진행형의 역사의 상처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아프면 아픈채로 시간이 흐르면 그 고통조차 잊고 살기 마련이다.




‘잠들지 못한 눈 무심히 재우는
일자형 눈썹 같은 산 능선에서
지글거리는 불덩이 가라앉히고
수평선으로 넘거가는 붉은 해를
어두워진 가슴으로 받아
밀물에 밀려나오는 사람들


실미도는 물안개에 지워지다 다시 떠오른다 


바람이 서풍에서 북풍으로 바뀔 때
엉클린 물결 거품 물고
날을 세운다, 날에 날을 갈아
단숨에 날아갈 듯
발뒤꿈치 들어올린 무의도로 달려온다              - ‘실미도’중에서


  이 시집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1부와 2부에서 서정과 현장성이 살아 넘치는 시세계를 보여준다. 몽골여행의 기록과 그곳에서 만난 한민족의 모습들이 피나는 역사의 진행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3부로 이어진다. 3부에서 시인은 자신의 아픈 상처들과 기억들을 풀어 놓으며 기나긴 침묵의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GP에서의 경험과 고통의 기억들은 개인적 상처와 진실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이며 보편적 진실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광주 상무대에서 OBC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XX사단 GOP(General out post:일반전투전초)라 불리우는 철책선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한 나는 이 시를 읽는 감회가 남달랐다. GOP 근무를 마치고 내려오자 마자 수색중대에 전출 명령을 받고 1050고지에 있는 중대막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비현실적이다. DMZ(De-Militarized Zone) 지역에 두 개의 GP(일반전초)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3개월간 수색과 매복, 3개월간 GP작전 투입 훈련, 3개월간 GP근무의 반복 순환 근무였다. GP장의 임무를 수행했던 나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대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유사시를 대비하며 동고동락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사뭇다른 상황이었지만 영화 ‘프레데터’에 나오는 열추적 장치를 이용한 적의 이동 경로 파악과 손에 잡힐듯 보이는 군사분계선 너머 그들의 행동과 생활모습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GP에 들어와 처음 분계선으로 내려갔을 때 나는 비무장지대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 당황했다.……나는 지금도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서 살기 띤 침묵과 고독과 불안이 한덩어리가 되어 눈앞에 둥둥 떠다니던 그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사방에 파놓은 비트를 들락거리며 밤새워 공작원을 넘기고 기다리던 그 하루하루, 그때 나는 살기 위해서 틈만 나면 안전 소로를 확보하려고 자주 분계선을 넘나들었다.……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공작원과 GP 요원들이 수시로 찾아왔다.……체험적인 진실과 창조적 진실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버렸다.……이 시집은 오랫동안 아물지 않던 그 몸부림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무장지대에 떠도는 젊은 영혼들에게 이 시집을 바치고 싶다. 


  물론 지금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던 비무장지대의 모습이지만 내가 전역한 후 선임하사와 이등병 하나가 지뢰를 밟고 발목 절단 수술을 받은 후 의가사 전역한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다른 소대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체험적 진실과 창조적 진실 사이’를 넘나들며 창작의 고통과 삶의 진실에 사이의 접점을 찾느라 전력을 기울였을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것이 설령 개인의 정신적 상처가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우리 역사의 단면일지라도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대를 향한 불가능할것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
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

땅속으로 잠복호 밀어 넣고
얼핏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
목에 가슴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새벽

……<중략>……

잘 가라, 두 깃발 사이
우리 땅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그대여,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泳浩磯?

          -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중에서




200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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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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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시절 가장 지독한 고민과 그리움이 있었을까? 문예반 활동을 하던 무렵 학교 축제에 그녀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이 맘때 여학교와 시 합평회를 한 차례 가졌었다. 그해 여름 심상사에서 주최한 청소년 문학캠프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었다. 시화전에 출품한 판넬위에 노란 들국화가 붙어 있었다. 9월이었다. 열일곱 소년의 가슴에 봄이 왔다. 대학 3학년때 그녀는 시집을 갔다. 사춘기하면 떠오르는 얼굴이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아마 그 무렵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시절 책방에서 뒤적이던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나 ‘니체 인생론’은 아직도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힘겨웠던(?) 사춘기를 가끔씩 떠올려준다. 그때 이 책 ‘소피의 세계’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내내 책을 읽었다.

  생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막막함을 경험해 본 사람은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실존주의자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는 철저한 감각적 현실적 존재로 생을 맞이하게 된다. 보편적 삶의 모습이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교사답다.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을 수 있는 철학의 문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기 위한 그의 고민과 노력이 감동적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현학적 취미나 지식의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존재의 모습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인문학의 기본 소양을 文․史․哲이라고 하지만 두 장르가 결합되는 경우는 대개 문학과 역사다. 철학과 문학의 만남은 작가의 사상에 반영된 주제의식의 발현이거나 작품 내적 구조의 치밀한 구성일때가 많다. 이렇게 직접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시도가 가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소설속에 두 주인공 소피와 힐데의 역할 인식은 다름아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행위와 그 의미 찾기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고3 3월 모의고사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한 지문이 출제되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에 따른 문제들은 오답율이 50%를 넘었고 깊은 좌절과 한숨의 공감이 넓게 퍼져 나갔다. 윤리 시간을 통해 암기한 단편적 철학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물론 이 책을 읽은 학생이 있었다면 정답을 맞췄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청소년기에 읽고 고민해야할 문제들과 경험해야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중앙 공원의 분수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일요일의 오후는 한가로울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무엇으로부터 생겨 났을까? 수수께끼같은 질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혹은 즐겁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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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thanks to~

sceptic 2007-11-22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라루스 서양미술사 7
피에르 카반느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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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반개혁 사실주의는 카라바조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성 마태의 소명’에서 보여주는 광선에 의한 뚜렷한 화면분할과 명암의 대비는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끈다. 그만큼 강렬하지만 성직자는 즉각 거절해 버린다. 그의 또다른 작품 ‘성 바울로의 개종’은 건장한 말의 입체감과 더불어 빛에 의해 말에서 떨어진 기사의 몸짓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루이14세의 영광, 베르사유의 궁전 예술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사치스럽과 화려한 공간을 보여준다. 권력으로 치장된 예술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에 값하는 당시 시민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루이 14세의 질투를 일으켰다는 ‘루이 르 보, 보-르-비콩트 성’은 인간의 건축 양식에 대한 경외감이다.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떠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절대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개별 건축과 회화들의 아름다움은 본능적 충동에 가깝다.

  A.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저작은 주변 상황과 이성적, 철학적 배경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지만 라루스 출판사의 <서양미술사>시리즈는 이 처럼 시대별로 각기 다른 저자가 국가별 시대별 대표적인 예술장르와 개별 작품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분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맥락과 흐름으로 서양 미술사를 일괄할 수는 없으나 보다 구체적인 개별 작품들을 이해하고 작가의 역할과 특히, 종교와 신화 그리고 권력자와 밀착되어 있던 당대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데 충실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흐름과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한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물론 한 사회의 예술에 대한 안목이며 미래의 발전에 대한 밑거름이 되겠지만, 유키 구라모토의 ‘여행의 나날들(2002)’을 들으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일 것이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이라는 두 가지 경향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하나는 경제와 이성의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과 풍부함의 양식이다.
전자는 중엄하며 지속적인 형식을 선호하고, 후자는 퍼져나가는 뒤틀어진 형식을 우선적으로 여긴다.
이 두 경향 사이에는 쇠퇴도 변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한 감각성을 갖는 두 가지 형식들이다. - 외제니오 도르스

  위에서 인용한 말은 고전주의와 바로크라는 두 양식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스페인, 플랑드르 그리고 네델란드의 예술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집약한 설명이다. 들라크르와가 “회화의 호메로스다.”라고 평가한 루벤스의 천재성은 17세기 플랑드로 지방의 회화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16세의 소녀와 결혼한 53세의 화가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으로 그 행복의 절정을 헌사했으며 풍부한 색감과 빛의 의한 명암대비, 인물들의 자연스런 표정은 그에게 내려진 모든 찬사를 갈음한다.

바로크 양식은 위대한 예술이 쇠퇴할 때마다 태어난다.
고전적인 표현 예술에서 요구사항들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었을 때에,
바로크 예술은 마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처럼 나타나게 된다. - 니체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을 보면 3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소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대위와 민간 경비대 소총수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표정으로 금빛 후광으로 끼어들어 있다. 화가만의 비밀스런 장치가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으니 그의 목적이 여기 있었을까? 네덜란드 회화의 관심은 베르메르에게 집중된다. 물론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이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화가와 소녀는 실제 작품을 연상시키며 영화의 완성도와 더불어 그림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주었다. 왼쪽 귀에 걸린 반짝이는 진주귀걸이와 맑고 큰 두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듯 어깨 너머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그 표정과 눈빛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르누아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은 ‘델프트’의 노란 벽이 주는 시간의 영원성은 문외한인 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프랑스의 부셰와 영국의 게인즈버러를 위시하여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되는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과 회화들 그리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방한 신고전주의를 소개로 이 책은 시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이어질 낭만주의를 기대해 본다.


200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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