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시선 242
신대철 지음 / 창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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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에 화제를 뿌렸던 영화 ‘실미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험한 소문으로만, 작은 목소리로 소리 낮춰 주고 받던 북파 공작원의 이야기를 다룬 소재부터 충격이었으며 그것이 실화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직도 우리는 진행형의 역사의 상처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아프면 아픈채로 시간이 흐르면 그 고통조차 잊고 살기 마련이다.




‘잠들지 못한 눈 무심히 재우는
일자형 눈썹 같은 산 능선에서
지글거리는 불덩이 가라앉히고
수평선으로 넘거가는 붉은 해를
어두워진 가슴으로 받아
밀물에 밀려나오는 사람들


실미도는 물안개에 지워지다 다시 떠오른다 


바람이 서풍에서 북풍으로 바뀔 때
엉클린 물결 거품 물고
날을 세운다, 날에 날을 갈아
단숨에 날아갈 듯
발뒤꿈치 들어올린 무의도로 달려온다              - ‘실미도’중에서


  이 시집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1부와 2부에서 서정과 현장성이 살아 넘치는 시세계를 보여준다. 몽골여행의 기록과 그곳에서 만난 한민족의 모습들이 피나는 역사의 진행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3부로 이어진다. 3부에서 시인은 자신의 아픈 상처들과 기억들을 풀어 놓으며 기나긴 침묵의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GP에서의 경험과 고통의 기억들은 개인적 상처와 진실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이며 보편적 진실로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의 다른 이름이라고 본다.


  광주 상무대에서 OBC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XX사단 GOP(General out post:일반전투전초)라 불리우는 철책선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한 나는 이 시를 읽는 감회가 남달랐다. GOP 근무를 마치고 내려오자 마자 수색중대에 전출 명령을 받고 1050고지에 있는 중대막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비현실적이다. DMZ(De-Militarized Zone) 지역에 두 개의 GP(일반전초)를 담당하는 부대였다. 3개월간 수색과 매복, 3개월간 GP작전 투입 훈련, 3개월간 GP근무의 반복 순환 근무였다. GP장의 임무를 수행했던 나는 다른 동기들과 달리 대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유사시를 대비하며 동고동락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사뭇다른 상황이었지만 영화 ‘프레데터’에 나오는 열추적 장치를 이용한 적의 이동 경로 파악과 손에 잡힐듯 보이는 군사분계선 너머 그들의 행동과 생활모습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GP에 들어와 처음 분계선으로 내려갔을 때 나는 비무장지대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에 당황했다.……나는 지금도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면서 살기 띤 침묵과 고독과 불안이 한덩어리가 되어 눈앞에 둥둥 떠다니던 그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사방에 파놓은 비트를 들락거리며 밤새워 공작원을 넘기고 기다리던 그 하루하루, 그때 나는 살기 위해서 틈만 나면 안전 소로를 확보하려고 자주 분계선을 넘나들었다.……그리고 악몽이 시작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공작원과 GP 요원들이 수시로 찾아왔다.……체험적인 진실과 창조적 진실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버렸다.……이 시집은 오랫동안 아물지 않던 그 몸부림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무장지대에 떠도는 젊은 영혼들에게 이 시집을 바치고 싶다. 


  물론 지금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던 비무장지대의 모습이지만 내가 전역한 후 선임하사와 이등병 하나가 지뢰를 밟고 발목 절단 수술을 받은 후 의가사 전역한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다른 소대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체험적 진실과 창조적 진실 사이’를 넘나들며 창작의 고통과 삶의 진실에 사이의 접점을 찾느라 전력을 기울였을 시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것이 설령 개인의 정신적 상처가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우리 역사의 단면일지라도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대를 향한 불가능할것 같은 사랑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
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

땅속으로 잠복호 밀어 넣고
얼핏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
목에 가슴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새벽

……<중략>……

잘 가라, 두 깃발 사이
우리 땅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그대여,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泳浩磯?

          -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중에서




2005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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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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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춘기 시절 가장 지독한 고민과 그리움이 있었을까? 문예반 활동을 하던 무렵 학교 축제에 그녀가 찾아왔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이 맘때 여학교와 시 합평회를 한 차례 가졌었다. 그해 여름 심상사에서 주최한 청소년 문학캠프에서 그녀를 두 번째 만났었다. 시화전에 출품한 판넬위에 노란 들국화가 붙어 있었다. 9월이었다. 열일곱 소년의 가슴에 봄이 왔다. 대학 3학년때 그녀는 시집을 갔다. 사춘기하면 떠오르는 얼굴이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아마 그 무렵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시절 책방에서 뒤적이던 ‘쇼펜하우어 인생론’이나 ‘니체 인생론’은 아직도 책꽂이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힘겨웠던(?) 사춘기를 가끔씩 떠올려준다. 그때 이 책 ‘소피의 세계’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내내 책을 읽었다.

  생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막막함을 경험해 본 사람은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실존주의자가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우리는 철저한 감각적 현실적 존재로 생을 맞이하게 된다. 보편적 삶의 모습이고 그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교사답다. 가르쳐 본 사람은 안다. 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거나 관심이 없을 수 있는 철학의 문제들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기 위한 그의 고민과 노력이 감동적이다.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동기를 유발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려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현학적 취미나 지식의 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존재의 모습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책은 없었다. 인문학의 기본 소양을 文․史․哲이라고 하지만 두 장르가 결합되는 경우는 대개 문학과 역사다. 철학과 문학의 만남은 작가의 사상에 반영된 주제의식의 발현이거나 작품 내적 구조의 치밀한 구성일때가 많다. 이렇게 직접 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린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 시도가 가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소설속에 두 주인공 소피와 힐데의 역할 인식은 다름아닌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심연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행위와 그 의미 찾기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의 숙제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고3 3월 모의고사에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관한 지문이 출제되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그에 따른 문제들은 오답율이 50%를 넘었고 깊은 좌절과 한숨의 공감이 넓게 퍼져 나갔다. 윤리 시간을 통해 암기한 단편적 철학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물론 이 책을 읽은 학생이 있었다면 정답을 맞췄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청소년기에 읽고 고민해야할 문제들과 경험해야할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다.

  중앙 공원의 분수가 하늘 높이 솟아 오르고 있다. 하늘은 흐리고 일요일의 오후는 한가로울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세상은 무엇으로부터 생겨 났을까? 수수께끼같은 질문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진지하게 혹은 즐겁게 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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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thanks to~

sceptic 2007-11-22 09: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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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와 바로크 라루스 서양미술사 7
피에르 카반느 지음, 정숙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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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반개혁 사실주의는 카라바조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성 마태의 소명’에서 보여주는 광선에 의한 뚜렷한 화면분할과 명암의 대비는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끈다. 그만큼 강렬하지만 성직자는 즉각 거절해 버린다. 그의 또다른 작품 ‘성 바울로의 개종’은 건장한 말의 입체감과 더불어 빛에 의해 말에서 떨어진 기사의 몸짓을 강조하고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루이14세의 영광, 베르사유의 궁전 예술은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사치스럽과 화려한 공간을 보여준다. 권력으로 치장된 예술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것에 값하는 당시 시민들의 삶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지 않는다. 루이 14세의 질투를 일으켰다는 ‘루이 르 보, 보-르-비콩트 성’은 인간의 건축 양식에 대한 경외감이다. 당시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떠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절대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개별 건축과 회화들의 아름다움은 본능적 충동에 가깝다.

  A.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와 같은 저작은 주변 상황과 이성적, 철학적 배경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지만 라루스 출판사의 <서양미술사>시리즈는 이 처럼 시대별로 각기 다른 저자가 국가별 시대별 대표적인 예술장르와 개별 작품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분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맥락과 흐름으로 서양 미술사를 일괄할 수는 없으나 보다 구체적인 개별 작품들을 이해하고 작가의 역할과 특히, 종교와 신화 그리고 권력자와 밀착되어 있던 당대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데 충실하고 있다. 그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흐름과 이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는다. 한 작품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물론 한 사회의 예술에 대한 안목이며 미래의 발전에 대한 밑거름이 되겠지만, 유키 구라모토의 ‘여행의 나날들(2002)’을 들으며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일 것이다.

고전주의와 바로크 양식이라는 두 가지 경향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하나는 경제와 이성의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과 풍부함의 양식이다.
전자는 중엄하며 지속적인 형식을 선호하고, 후자는 퍼져나가는 뒤틀어진 형식을 우선적으로 여긴다.
이 두 경향 사이에는 쇠퇴도 변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한 감각성을 갖는 두 가지 형식들이다. - 외제니오 도르스

  위에서 인용한 말은 고전주의와 바로크라는 두 양식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스페인, 플랑드르 그리고 네델란드의 예술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집약한 설명이다. 들라크르와가 “회화의 호메로스다.”라고 평가한 루벤스의 천재성은 17세기 플랑드로 지방의 회화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16세의 소녀와 결혼한 53세의 화가 루벤스는 ‘사랑의 정원’으로 그 행복의 절정을 헌사했으며 풍부한 색감과 빛의 의한 명암대비, 인물들의 자연스런 표정은 그에게 내려진 모든 찬사를 갈음한다.

바로크 양식은 위대한 예술이 쇠퇴할 때마다 태어난다.
고전적인 표현 예술에서 요구사항들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었을 때에,
바로크 예술은 마치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처럼 나타나게 된다. - 니체

  렘브란트의 ‘야간순찰’을 보면 3세기 동안 예술사가들이 의아하게 여기는 소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대위와 민간 경비대 소총수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표정으로 금빛 후광으로 끼어들어 있다. 화가만의 비밀스런 장치가 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으니 그의 목적이 여기 있었을까? 네덜란드 회화의 관심은 베르메르에게 집중된다. 물론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이지만. 영화를 보기 전까지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화가와 소녀는 실제 작품을 연상시키며 영화의 완성도와 더불어 그림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주었다. 왼쪽 귀에 걸린 반짝이는 진주귀걸이와 맑고 큰 두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듯 어깨 너머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그 표정과 눈빛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르누아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은 ‘델프트’의 노란 벽이 주는 시간의 영원성은 문외한인 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프랑스의 부셰와 영국의 게인즈버러를 위시하여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되는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과 회화들 그리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방한 신고전주의를 소개로 이 책은 시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이어질 낭만주의를 기대해 본다.


200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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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제라르 르그랑 지음, 박혜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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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고전주의와 바로크에 이어지는 낭만주의까지 미술을 통해 살펴보는 역사는 인류의 고뇌와 삶의 양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근대와 함께 출발한 낭만주의 미술은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극복(?)하면서 시작된다.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낭만주의와 충돌하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이 양식들은 이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까지 숨가쁘게 넘어오고 있다. 1789년 회화가 논쟁의 중심에 있을 때 혁명은 시작되었다. 다비드는 혁명을 통해 그의 명성을 더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거둔 성공은 ‘마라의 죽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확한 구도와 과학적인 세부묘사, 은은한 채광과 단순한 색채의 조화, 마라의 표정은 실제 그림을 보았을 때의 감동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게되는 1800년을 전후하여 전쟁과 혁명, 미술과의 관계가 예술가들의 갈등으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배경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의 방식대로 그림의 주제에 영향을 미치고 추방을 당하거나 살롱과 아카데미를 장악하는 정도의 변화가 이어졌다. 다비드에 이어 그로가 선두에 나서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등장한다. 앵그르, 제라르, 퓌슬리의 그림들은 전시대와 구별되는 나름의 색깔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개별 사건과 신화의 내용들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키며 예술가 나름의 해석을 더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외된 화가 고야처럼 악마와 뭉글어진 얼굴 형태의 그림들과 더불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낼 수는 없을 듯하다.

  “그림과 감정은 같은 사물을 표현하는 두 개의 다른 단어이다”라고 말한 컨스터블의 말처럼 1817년 루이 18세가 완전히 파리로 돌아오자 공포정치의 희생양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달라진다. 체제의 변화는 그 안에 숨쉬는 예술가들의 사상과 활동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게 된다. 개선문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를 조각한 뤼드의 작품이나, 다비드 당제의 부조 작품들은 조각에서 또다른 생동감을 보여주고 있다. 군주제에 대립하는 경향의 대변자가 되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정치적 해석을 배제하고서라도 어두운 색조와 인물들의 동선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실제 250명이 탄 메두사호가 침몰하고 150명 중에 겨우 15명만이 구조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명성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프랑스에서 출판된 원본을 볼 수 없으나 책의 가격과 화보의 수를 고려하면 생략된 화보가 있을 듯한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앵그르의 ‘앙젤리크를 구하는 로제’에서 보여주는 선명함은 여전히 사슬에 묶여있는 여성의 몸의 곡선에서 배어나오는 관능미를 감출 수 없어 보인다. 폴 위에의 ‘황혼의 트루빌 해변’은 강력한 빛으로 야생의 거친 면모를 보여준다. 데생을 무시했기 때문에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들라크루아를 비난한 앵그르는 대다수 아카데미 비평가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당했다. 그 이유는 ‘비극성’이 부족하고 절충주의를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해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통해 형태를 색채로 분산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윌리암 터너의 영국과 독일, 스페인에서 몇몇 화가들이 이 시기의 특징들을 보여준다. ‘단장하는 에스더’를 그린 사세리오, ‘붉은 옷을 입고 독서하는 소녀’를 그린 코로 ‘돈키호테’를 그린 도미에 등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이제 서서히 근대의 폭넓은 개념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것은 슐레겔이 “낭만주의는 여전히 생성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생성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그 본질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듯이 예술의 시대구분으로서의 협의의 개념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들을 반영해 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나는 ‘내 예술과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느 칼스텐스의 말은 낭만주의 예술가의 강령으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전후하여 1800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1817년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우리나라의 그것처럼 민중들에게는 더없이 혼란스런 시기였고 신산스런 삶의 고통스런 현장이었으리라. 당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로서 미술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매김되고 그 역할을 다했는가는 예술 외적 논의의 대상만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본격적으로 ‘소설’이라는 장르가 시작되는 시대, 그래서 ‘로망스(romance)’와 ‘노블(novel)’이 탄생하고 다양한 장르의 현대성이 잉태되었던 척諛?바로 여기쯤이 아닌가 싶다. 빅토르 위고의 ‘크롬웰’ 서문과 ‘에르나니’ 논쟁으로 서서히 근대의 문이 열리는 시대, 미술비평의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며 시인의 명성도 얻은 보들레르의 이야기들은 미술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뭐라 특징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19세기의 미술과 근대, 현대 미술이 다가오고 있다. 맛있게 음미해 볼 일이다.


200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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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소녀 -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정순 옮김 / 현암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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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어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작가와 제목, 대강의 내용과 출판사 등 객관적 요소들을 두루 살펴보고 책을 산다. 그렇게 선택한 책이 기대했던 내용과 일치하고 그 이상의 감동과 재미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새로운 정보와 깨달음을 줄 때 독서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즐겁다. 하지만 단 한권의 책만으로 그 작가를 평가하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요슈타인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로 문명을 떨쳤지만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소설로 읽는 사랑철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오렌지 소녀>를 그의 두 번째 책으로 선택했다. <소피의 세계>도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청소년들을 위한 단상으로 읽혀 질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단순한 연애소설로 읽기 시작했을 때와 정반대의 느낌이다. 소설 형식으로 쓰였지만 이 책은 가장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사랑이야기다. 남녀간의 이성적 사랑을 운명이라 믿으며 정신 못차리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물론 그것이 생의 과정이고 가장 화려한 시절일 수 있으나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의 우연성과 감정의 변화를 냉철하게 짚어 나가고 있다.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정호승의 ‘첫눈’중에서)”라고 말하는 모든 연인들에게 사실 어떤 조언이나 감정의 절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다. 반대로 요즘이야 그런 감정의 편린들만을 따라가는 사랑을 하는 젊은이도 없다고 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오렌지 소녀>는 그의 다른 소설처럼 액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얀 올리브가 스무살에 만난 오렌지 소녀 베로니카와의 첫 만남, 두 번째 우연한 만남과 기다림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모든 사람들의 평범할 듯한 사랑이야기가 기본 서사 구조를 이룬다. 미술을 전공한 베로니카와 의사인 얀 올리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행복의 절정에서 네살바기 아들 게오르그를 남겨둔 채 죽음을 맞이한다. 이 모든 사실은 11년 뒤, 게오르그의 유모차 밑에서 발견되는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15세 소년 게오르그에게 11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에게 전하는 편지라는 독특한 형식의 이야기다. 물론 그 오렌지 소녀는 게오르그의 어머니 베로니카이다. 지금은 외르겐과 재혼해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게오르그는 차츰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야기 시작 부분에서 허블 망원경과 우주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죽은 아버지와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다. 우리들 삶의 과정과 생에 대한 아이러니가 우주의 변화와 아름다움 만큼이나 계속된다는 사실로 읽힌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과의 이별이라는 것은 생의 절대 진리이다. 그 규칙을 피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지금 이 모든 순간의 삶을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으나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미래의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로는 적당하다.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아들에게 인생에서 사랑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버지와 그 편지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고 드넓은 우주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것은 게오르그라는 소설속 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고 누구나 한 번쯤은 지독한 이별의 고통을 경험한다. 단순한 생의 규칙이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잃어야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는 직접 체험의 과정 속에서 더욱 빛난다. 본격적인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소설이었다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까? 학생들에게 적당히(?) 권할만한 가벼운 소설이라서 부담없이 피해간다. 본질적인 문제를.

 

 

200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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