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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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우리 문화의 근대성은 모두 서양에 빚지고 있을까?’하는 물음이 생긴다. 근대의 개념조차 모호하며 문화적 지평은 고사하고 그 뿌리조차 척박한 이유는 일제 식민지의 유령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닐까?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영국의 투틀리지 출판사의 야심작 시리즈 1권이다. 세계의 지성들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라는데 앞으로도 읽어볼 만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린비에서 출판한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1권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었고, 2권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었다. 그 이후에는 읽은 책이 없지만 두 권 모두 값진 책이었다. 출판사에서 펴내는 시리즈는 대개 1, 2권에 승부(?)가 결정된다. 이 책의 구성과 형식이 독특하다. 지젝의 사상과 저작을 중심으로 그의 논의를 정리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용어와 개념 정리는 친절하게도 각 단원마다 요약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중간에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의 사진과 개념을 설명으로 덧붙이고 있는 것도 지루하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처럼 학문의 한 분야를 개척한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젝은 적이 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해체주의자, 푸코주의자, 페미니스트들, 데리다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들 모두 제젝을 싫어한다. 그것은 지젝이 라캉주의자로 스스로 선언한 데서 연유한다. 학계는 늘 지젝보다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비판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사유의 하나”라고 불리는 지도 모른다.

  영국인 저자 토니 마이어스는 슬로베니아 출신 지젝을 ‘끊임없이 놀라는 사람,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 진실로 구멍을 드러내는 부정어법, 할리우드 영화광, 프랑스 철학통, 대통령 후보’이며 ‘오늘날 가장 탁월한 사상가’라고 정의한다. 1981년에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의 사유는 예사롭지 않다. 독자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없다는 이유로 탁월한 철학자로 평가받지 못하지만 그 자리를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로 보충하고 있다.

  지젝은 변증법이라는 사유의 형식 혹은 방법론을 헤겔에게 제공받았다. 그의 작업에 실천적 영감을 제공한 사람은 마르크스다. 지젝이 시도하는 것은 마르크스적 사유 전통,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의 분석틀과 개념용어를 제공하는 역할은 라캉이 맡는다. 그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상징계와 실재계의 개념이다. 그는 이 두 세계의 접속지점에 ‘주체’ 개념을 위치시키고 그것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라캉, 세 명의 철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체’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셰링이나 루이 알튀세, 오토 바이닝거 등을 동원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를 비판하고 라캉의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에 대한 오해를 설명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21세기형 사상가로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숨쉬고 일상에서 접하는 대중문화와 정치현상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독특한 방식의 사유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키취적 문화 게릴라쯤으로 평가될 수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이라는 한국어판 출판을 기념하며 보냈다는 지젝의 최근 글로 책을 끝맺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조만간 지젝을 다시 만나야겠다. 정치적 성향과 세상에 대한 대응 방식으로 한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주목받는 대표적인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의 사상과 행보에 주목받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일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듯 싶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분노하며 부시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히치콕이나 할리우드 영화에 나타난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과 현대인들의 다양한 정신세계를 분석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슬라보예 지젝 사상적 변모와 흐름을 소개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200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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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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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들풀 냄새가 배어 나오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다. 빈 공간을 채우던 적막이 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창밖을 떠돌고 있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하루하루 바쁜 생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늘 잠깐의 여유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행복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책 속에는 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만 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현실 세계의 존재감 정도는 전해준다.

  감히 ‘사랑’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귀기울여 들어볼 자세는 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이야기해도 나는 진지하게 바라볼 자세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작품은 1982년 처음 구상되었고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모든 작품을 모든 순간에 구상한다. 존재하고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어떤 형태로든 작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읽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듯이.

  ‘사랑’처럼 진부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마르케스는 어떤 의미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 나는 그 행간을 짚어 볼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언어의 소리와 의미-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느낄 수 없어 번역소설은 늘 2% 부족한 감상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늙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본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귀기울여 들어볼 뿐이다.

  단편도 장편도 아닌 150페이지 분량의 다소 어색한(?) 길이와 빛바랜 나무 등걸같은 활자의 색은 책을 읽는 내내 낯설다. 민음사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낯선 지명과 가보지 않아 상상하기 힘든 더운 날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은 남는다. 온몸에 습기가 달라붙는 더위인지 바싹마른 고온인지 알 수 없고,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전달 방식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처럼, 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불멸>처럼 장편이 전해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아내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소설이다.

  90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포주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부탁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살아온 주인공에게 얼마남지 않은 생에 대한 선물로 처녀를 주문한 것이다. 14세의 소녀를 맞이한 주인공은 손도 대지 않은채 하루 밤을 보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추 공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는 잠이 들어 주인공을 기다렸던 것이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델가디나’란 이름을 붙여주지만 그의 본명도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독자들은 알 수가 없다. 익명성이 모호함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는 독특한 생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신문 칼럼니스트로서 명망있는 늙은이로 그려지지만, 특별한 인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생에 대한 고독과 비애 때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소녀의 무의미한 몸짓이 보여주는 생의 신산스러움 때문이다.

  소설 전편에서 두 인물의 대화는 드러나지 않으며 노인의 심리와 내면의 독백을 통해 소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덤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선입견으로 14세 소녀에 대한 90세 노인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소설 읽기는 실패하고 만다. 나이를 잊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최초로 느끼는 열정과 그것을 통해 느끼는 생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나는 또다른 삶을 들여다 본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극단적인 나이를 통해서 오히려 극명하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14세 소녀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를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인가. 소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변화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그곳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다.

  언어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이유와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때로 고통스럽게 때로 힘겹게 소설을 읽는다.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정말로 ‘진부’한 의미를 찾을 생각은 없다. 다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라고 전하는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대가의 소설속 주인공이 남긴 한 마디가 제 나름의 의미를 갖고 한 조각 퍼즐이 되어 내 생의 어디쯤엔가 끼어 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스럽겠다.

  여전히 비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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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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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더 이상 이 책을 평가하는 것 지나친 주관으로 여겨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다소 서정적인 제목으로 장영희 교수의 칼럼 모음집을 읽었다.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3년간 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다. 눈부신 햇살이 아침 창을 두드릴 무렵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향 좋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드커버와 그림을 곁들여 멋을 낸 것도 맘에 들지 않았고 수필 형식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미국과 영국 문학 중심의 책 선정도 맘에 들지 않았다.

  1급 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중․고 교과서 집필, 번역가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의 치열한 삶의 모습에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며 혹은 일상 생활에서 겪은 소소한 경험들이 작품들과 밀착되거나 생동감있게 엮이지 못하고 인식론적 접근으로만 그친데 대한 아쉬움이 많다. 저자가 신문의 칼럼 형식으로 원고지 10매의 제한된 분량과 시간적인 압박을 받았음을 고려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식힐(?) 책으로 고른다면 문안하겠다.

  수필 형식의 책을 돈주고 사서 아깝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같은 일을 반복한다. 동질감을 나눌 수 있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때가 많지 않다. 편협된 가치관이나 주관적인 세상에 대한 잣대가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로 3년간의 칼럼을 마무리하는 저자는 유방암 치료후 척추암으로 투병중이다. 보다 깊이 있는 그녀의 글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하고 유려한 문체는 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쁜 신문 <조선일보>에 연재된 칼럼이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견과 무관하게, 좀 더 꼼꼼하게 책을 고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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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니콜 튀펠리 지음, 김동윤.손주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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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와 함께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모더니티에 대한 디드로의 선언으로 19세기 미술은 문을 연다. 1848년 제2공화국 선언부터 세잔이 사망하는 시기까지의 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있는 이 책은 급격히 다양해지고 팽창하는 유파들을 이전시대처럼 명명 지을 수 없고 <19세기 미술>이라고 묶었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장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아르데코 등이 혼재했던 시기였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종교와 권력에 복무하던, 권위와 신화에 종속된 예술이 아니라 화가의 시선과 자연의 빛이 주는 느낌과 역할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예술을 창조하기로 마음먹은 최초의 화가 쿠르베는 ‘올랭피아’, ‘아틀리에’ 등을 통해 현대성을 말한다. 특히 ‘오르낭의 장례식’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현실속의 소시민,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실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 옆에 나체의 여성을 그림으로서 부르주아 전원풍 목가의 불순함을 그려내고 있어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는 니세포르 니엡스에 의해 최초로 사진이 발명됐던 시기로 미술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드가나 로트렉은 사진을 통해 크로키나 동작의 목록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시선의 포착과 인간의 인식 작용 사이에 놓인 간격을 가늠했다. 또한 사진은 일본판화와 같이 프레임, 앵글, 원경, 전경 등 새로운 공간구도를 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의 일본 미술은 인물과 인물의 배치법인 화면 공간구성법과 배색법은 모네, 드가, 반 고흐, 고갱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풍경화 장르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19세기 후반은 프랑스에서 혁신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생피에르, 영국의 조지프 터너, 존 컨스터블 등의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인상, 떠오르는 태양’으로 유명한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면 “풍경이 자아내는 감각의 측면에서 인상주의적이다”라고 한 카스타냐리의 말로 표현된다. 피사로, 세잔, 기요맹,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그룹은 본격적인 현대성을 발현하기 시작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 떼 나는 밀밭’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죽음을 예견한듯 보인다. ‘해바라기’의 작가로, 생 레미 프로방스 정신병동에 감금된 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동시대와 20세기 화가들에게 복잡한 영향을 끼쳤다. 야수파에게 생생한 터치를 인상주의에는 색채의 상징적 역할을 전수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과 고통스런 질병 속에서 그가 빚어낸 예술혼이 그의 그림을 빛나게 하고 있다. 십수년 전에 읽었던 그의 평전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중적인 그림일 수 없으나 경외감을 가지고 그의 그림을 대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생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강렬한 색감과 붓의 터치는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더할 수 없는 여운을 주었었다.

  폴 세잔은 현대 예술, 특히 큐비즘과 야수파의 문을 연 프랑스 회화의 거장이다. 야수파는 색채를,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은 구성을 중시했다. ‘생트 빅투아르 산’과 ‘사과와 오렌지’ 등을 통해 색채와 형태의 엄격한 균형에 바탕한 그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큐비즘과 야수파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인 상징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보이는 모습을 넘어서 숨겨진 현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윌리엄 헌트, 로세티, 존스, 드샤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천국의 문’과 까미유 클로델과의 연인으로 너무나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들은 사랑과 삶에 대한 염세주의적 개념은 보들레의 ‘악의꽃’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폴 고갱의 <백마>는 색채 사실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움을 선택한 그림으로 평가 받는다. 타이티에 말년을 보낸 고갱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원시적 상징성은 후세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건축에서 보여주는 절충주의와 예술의 총체로서 ‘아르누보’라 명명되는 세기말 징후는 당연해 보인다. ‘예술과 사회를 엮어줄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술을 창조하려는 생각’이 아르누보를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영국의 ‘아츠 앤 크래프트’, 프랑스의 ‘성찰적 미학’ 그리고 개인 주택으로까지 발달되는 과정들이 이 시기 만물과 만인을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소개가 간략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로 그의 건축 화보집을 보다가 스페인으로 뛰어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소개가 미흡해서 아쉽다.

  이렇게 폴 고의 죽음과 더불어 19세기는 막을 내리고 20세기 시작되었다. 고갱은 원시적 예술표현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큐비즘 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될 아프리카 가면의 ‘발견’에 화가들이 민감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의 그림은 미술의 영역이 존재론적 측면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20세기 미술의 성찰을 예견하고 있다.



200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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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에디나 베르나르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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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부터 시작된 미술 여행이 이제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나누어 일별하는 일만이 남겨져 있다. 20세 초반부터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까지의 기간동안 세계사는 급박한 소용돌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과 혼란 그리고 새로운 전망에 대한 모색을 가능하게 한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일어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에 관한 세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 을사 늑약이 체결된 잊지 못할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근대 미술은 폴 고갱과 세잔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술의 한계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과학적 혁명을 반영하며 정신분석학에 기여한 무의식과 니체, 베르그송 등의 철학적 직관들이 이 시대의 미술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한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으나 나름의 특징을 짚어 낼 수도 있겠다.

  색에 의한 혁명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충동에 대한 이들의 거리낌 없고 심오한 분석은 에드바르 뭉크와 표현주의 화가들, 신즉물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 화가들, 심지어 초현실주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0세기 첫 번째 미술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야수파는 색의 자율성과 화가의 감정적 개입을 인식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티스, 드랭, 루오, 블라맹크, 칸딘스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창가 풍경, 탕헤르’에서 보여주듯이 푸른색에 대한 마티스의 집념은 색채의 강렬함과 더불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야수파와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야생의 실존주의적 분노”, 미술가들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비극적 성찰이 결합된 것이다. 스페인의 고야, 영국의 블레이크, 독일의 프리드리히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리위의 소녀들’, ‘카를 요한의 저녁’, ‘절규’ 등으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은 이런 한 유파의 특징을 넘어 근대 미술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봄 햇살은 우울한 등불로, 한가한 풍경은 음산한 분위기로 표현하며 어둡고 복잡한 감정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그림은 현대인의 불안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이해된다. 앙리 루소와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눈에 띈다. 주로 초상화와 양식화된 누드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의 인물들은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추종자로 일컬어지는 샤갈의 그림들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유파로 규정지을 수 없을만큼 강렬했고 자유로웠다.

  형태에 의한 혁명으로 명명되는 입체파와 미래파, 절대주의자, 구축주의자들은 형태의 재구성을 통해 이전의 운동들이 진행해온 색에 의한 혁명의 성과를 심화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앞선 세기들의 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20세기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각의 현실이 아니라 관념의 현실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입체파의 특징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첫 번째 입체파 회화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고국 스페인의 수난 당하는 바스크 지역에 헌정하는 걸작 ‘게르니카’는 고통과 죽음과 공포를 직각의 선과 대각선의 대비에 의해 혼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마르셀 뒤상, ‘전쟁’을 그린 오토 딕스, ‘붉은 광선주의’를 그린 라리오노프, ‘호밀 수확’을 그린 말레비치 등 미래파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역시 뒤틀린 현실과 급변하는 사회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의식들을 반영한다.

  “회화 앞에 물질의 해체에 관한 전망이 열리고 있다” - 바실리 칸딘스키
  “조형적 수단은 무채색이 아닌 원색으로 이루어진 직각의 면과 프리즘이어야 한다.” - 피터 몬드리안

  추상의 시대를 연 것은 칸딘스키다. 마넬리의 ‘서정적 폭발’, 클레의 ‘붉은 풍선’, 되스부르크의 ‘역-구성’, 리트벨트의 ‘적색과 청색의 의자’, 등은 청기사와 신조형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전에 보여지던 회화와 또 다른 충격과 느낌을 전해준다. ‘넌 날…’이라는 작품으로 뒤샹의 화려하고 복잡한 심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학에서 기원한 다다이즘은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형이상학적 실내’를 그린 조르지오 키리코를 기준으로 삼은 현실주의 또한 인간 무의식의 변형된 모습들을 비춰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화가중 한사람데 ‘가면을 벗는 우주’ 한 작품 만이 소개되고 있다. ‘욕망의 수수께끼’, ‘깨어나기 1초 전 사과-석류 주위의 꿀벌 한 마리의 비행에 의해 야기된 꿈’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를 온몸으로 보여준 화가이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가장 엄격한 신조형주의를 고수한 몬드리안은 추상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였다. ‘왕의 슬픔’을 그린 앙리 마티스는 원색에 기초한 강렬한 색채와 푸른색에 대한 관심으로 독특한 미의식을 창조해 내었다. 그 밖에 조형과 국제적 양식들은 현재에 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진다.

  1929년의 대공황은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위기이기도 했다. ‘인터내셔널’을 그린 그리벨, ‘실업자’를 그린 그로메르를 통해 구상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사회적 사실주의와 노동자의 비참함에 대한 직접적 증언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랜트 우드, 에드워드 호퍼로 대표되는 미국의 회화나 라틴 아메리카의 회화는 간략하게 소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리베라 디에고의 그림 한 점만을 소개하고 있다.

  히틀러의 등장과 중국의 대장정, 제 2차 세계 대전과 원폭에 의한 종전 등 20세 초반의 지구는 끓는 물과 같았다. 염세주의와 부조리의 철학이 유행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존에 대한 불한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이전 세기와 비교할 수 없는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바로 근대미술에서 이야기 했던 20세기 초반의 모습이었다. 사회와 인간의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미술을 바라보고 화가를 이해하며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시대의 불안한 여유는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200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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