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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ㅣ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평점 :
먹구름의 장막을 걷어내듯 시원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읽혔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흘려’ 본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눈물이 날 뻔 했던 책들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지금까지 학교만 다녔다. 배우러 그리고 가르치러 뻔질나게 학교 교문을 드나들며 난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가르쳤나하는 자괴감에 눈물이 날 듯 했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넘어 이 사회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실천이다’는 J. 네루의 언설로도 설명될 수 없는 내면의 고백이었고 삶에 대한 개인적 목표로도 설명될 수 없는 답답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칼마르크스(Karl Marx) <루이 보나파르트 브루메어 18일>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업이다.
-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탱크레드>
라는 명제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시작된다. 사이드는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학문과 영국의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로 대표되는 정치를 통해 지식과 권력 - 앎과 힘의 관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인용이 이 책에서 비판되는 오리엔탈리즘의 두 가지 속성 - 인식과 실천을 대변하고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이자 지배방식’이다. 이것이 어떻게 미국과 유럽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발생, 발전, 전개라는 논리에 따라 3부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박홍규의 번역이기 때문에 더욱 빛난다. 저자인 사이드는 문학평론가이다.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한 사이드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과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는다. 그의 삶의 행로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아우른다.
사이드의 관심이 그의 생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처럼 이 책에서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중동과 이슬람에 대한 서양의 사고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7, 8세기부터 비롯된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적 근원을 파헤치고 실증적 자료와 문헌들을 통해 그 허구적 성격을 사이드 특유의 해박한 지식과 번득이는 예지로 풀어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역사서도 아니고 사회비평과 관련된 개설서도 물론 아니다. 그저 사이드가 제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따라가며 인간의 성향과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까지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누가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러한 현상들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수많은 질문과 반성을 유도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취급되는 크로머의 <현대 이집트>라는 책은 일본에서 1911년에 번역되어 한국지배의 기본이 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멀리 존재하는 그들만의 논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 가시처럼 박혀, 치유되지 않은 생채기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에도 더욱 유효하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등 숱한 현실적 문제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관습화되어 생활과 사고방식 곳곳에 숨어 삶의 목표와 사유 방식 자체를 통제하고 변질시킨다.
유럽에게 이슬람은 치료될 수 없는 정신적 외상(trauma)이었다. 17세기말까지 ‘오토만 제국의 위협’이 유럽의 주위를 둘러싸서 모든 기독교 문명에 대한 끝없는 위험을 표상했다. 곧 유럽 문명은 그러한 위협이나 전설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도 미덕이나 악덕도 모두 병합하여, 스스로의 삶의 옷감 속에 짜넣어 흡수했다. (본문 117페이지)
처음부터 논의의 초점이 명확하고 문학가로서 지성과 비판 정신으로 무장한 사이드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한 권의 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슬람 국가 이외의 지역이 논의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이 편협하다고 볼 수도 없다.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상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종교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대립과 갈등 측면에서 문헌학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있으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식으로 동양인들에게 자리잡고 있는가하는 논의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책을 맺고 있다.
내가 독자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은, 오리엔탈리즘?대한 해답이 옥시덴탈리즘 곧 서양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의 ‘동양인’은 자신이 이전에 동양인이었기 때문에 쉽게 - 너무나도 쉽게 -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동양인’ - 곧 ‘서양인’ - 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도, 아루런 거리낌도 없을 것이리라. 만일 오리엔탈리즘을 아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 유혹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설령 그것이 어떤 지식이든지 간에또는 어떤 곳,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필경 과거 이상으로 지금이 그것을 생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본문 570페이지)
이후에 1995년판 후기가 이어지고 박홍규의 ‘옮기면서’라는 역자 후기가 붙어 책은 800페이지에 달한다. 흥미있는 것은 1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박홍규 교수의 ‘옮기면서’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빛이 되는 이유는, 본문은 물론이려니와 박홍규의 적절한 역주, ‘옮기면서’에서 보여주는 냉소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신랄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이다. 그것은 삐딱한 지성이 내지르는 허튼 소리가 아니며 덜떨어진 얼치기 교수의 사회 비판적 투정의 목소리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심각한 경고의 목소리로서 내 영혼을 울리고 갈고리처럼 살을 후벼 파는 자성의 목소리로 삶의 자세와 태도를 되돌아 보게 한다.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박홍규 번역의 증보판 <오리엔탈리즘>에 최고의 상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래 간직하고 두고 볼만한 좋은 책 한 권을 책꽂이에 더하는 기쁨은 덤으로 얻었다.
2005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