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속의 흰머리뫼 문학과지성 시인선 306
박남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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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스런 질문을 던지게 한 시인이 있었다. 80년대 해체주의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무렵에 만난 박남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형식에 대한 파괴와 도전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현상이나 처음 시도되는 것도 아니었다. 장르에 대한 도전과 파괴는 시인들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초절정 경직 사회였던 제 3공화국이 무너지고 박정희가 저격당하자 사회는 한동안 무질서와 혼란속에 빠져든다. 그것은 부정적 상황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질적 전화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기득권과 정치권력에 의한 군부독재는 지속되는 현실을 많은 사람들은 목도하게 된다. 5 ․ 18 학살의 원흉 전두환이 정권을 잡게 되는 충격적 사건을 맞는다. 이런 혼란 속에서 문학이라는 장르와 시의 의미를 고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노동 운동이 정점에 달하면서 박노해와 백무산, 김신용과 같은 대중적 노동자 시인이 등장했고 순수시는 혼란과 자기 파괴를 거듭하고 있었다. 박남철은 1984년 <지상의 인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야유와 풍자, 신랄한 비판과 독설을 퍼붓는다. 기존의 도덕과 질서, 형식에 대한 파괴를 통해 독자들에게 충격 요법을 선사하고 있다. 시대를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학자들의 몫이라면 박남철은 그 시대를 온몸의 촉수를 동원해서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혹은 거부하고 혹은 비틀어 놓고 있다.

  그의 시 일부를 발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집 전체와 통어하는 독자들의 감수성을 해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를 덮을 때까지 그가 이끄는 혹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시절을 더듬어 스스로를 ‘가짜 시인’이라 명명하는 박남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박덕규와 함께 첫 시집이자 공동 시집인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를 발표하고 두 번째 시집 <지상의 인간>을 내놓은 박남철은 이후 <반시대적 고찰>에서는 더더욱 극명한 시에 대한 분열적 태도와 해체시라 분류될 만한 시들을 발표한다. 그때 갓난 아기 사진이었던 아들 ‘해미르’가 이제 수험생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은 그의 가족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이 가져온 변화를 미세하게 감지한다.

독자놈들 길들이기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 놈들에게 - 차렷, 열중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한 놈들이……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 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 박남철, 지상의 인간,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36, 1984, 64페이지

  피터 한트게의 연극 <관객모독>을 연상시키는 이 시는 가히 충격이었다. 충격은 단순히 충격으로 끝나지 않고 논리와 질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스무살 내게 점점 다른 시선과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구체적 모색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박남철이 모든 독자들에게 권유했던 고정관념과 기존질서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었고 야유와 풍자의 목소리였다. 그 방법도 여전히 유효하고 때때로 절실하게 요구된다. 과거의 수많은 예술에 대한 도전들 다다를 비롯해 초현실주의와 현대 예술의 다양한 방식들이 여전히 반시대정신을 요구한다.

  ‘파괴’를 넘어서 ‘무시’에 가까운 문학적 태도와 논의는 독자들에게 충격요법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일탈하려는 사람들과 목숨걸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동시적 경고에 해당되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예술도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넘나든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의미 없어 보인다.

  다만 세월과 시간의 벽을 넘어 ‘어디 머리가 약간 모자라는 돌고래 한 마리도 꼬리에 걸리’는 것이 시인의 운명인 듯하고 말하는 박남철의 변화가 주목된다.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시집을 찬찬히 읽어가며 나이와 시간이 주는 변화를 기대해 본다. 단순히 늙은 시인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이제는 동해바다의 고래를 잡으러 떠날 정도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나 싶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시외 전화까지 걸어와서, 자꾸 ‘죽음’이란 말을 입에 올려서 - 그는 지금 오랫동안의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 나는 제법 차분하게 “죽음이란 없다!”고 단언해주었다.

  죽음이란 없다.

  그대가 그대의 태어난 순간을 모르듯이, 그대는 그대가 가는 순간도 모르리라.

  다만 있 것은 생물학적인 공포와 개체 보존 본능만이 있으리라.

  니체가 ‘영겁 회귀’같은 것을 얘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지만, ‘영겁 회귀’같은 것도 없으리라.

- 본문 11페이지 <어제 누가>중에서


200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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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장 자크 루소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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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사상사는 사회사를 반영한다. 본능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이 길들여지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개인이 지닌 특수한 상황과 사회 제도가 결합되어 새로운 사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회에 적응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1712년 프랑스 태생의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난 장 자크 루소는 1761년 기념비적 두 권을 발표한다. 교육에 관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에밀>과 개인과 국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밝히고 있는 <사회계약론>이 바로 그것이다.

  루소의 생애를 이해하는 일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사상가나 역사가, 철학자 모두 자신의 삶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행한 개인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생활의 측면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나 사건들이 사상에 미친 영향들을 고찰해 보는 데 의의가 있다. 유복했다고 보기 어려운 유년시절과 나이 많은 바랑 부인과의 사랑, 일생을 같이 한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명의 자식이 모두 고아원에 버려진 사실들이 루소의 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그의 논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정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 책의 저작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밖의 개인사는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행, 불행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총 4부 4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주제와 제목을 통해 루소의 사상이 펼쳐지고 있다. 현재 상황과 다른 요소나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18세기 중반에 출판된 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18세기 중반 우리의 상황을 돌아본다. 정조의 재위 시절로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로 불리기도 하지만 개인과 국가 혹은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 자체를 거론하기 힘든 봉건적 사회였다. 서얼 출신의 양반들의 한숨 소리와 백성들을 옭아매고 있는 신분제도는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독소였다. 서양과 우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의미할 수 있겠으나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주장하는 계약은 개인과 정부 사이의 계약을 의미한다. 자연 상태의 반대 개념으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국민은 생명과 사유 재산의 보호를 위해 피지배자들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덕과 시민적 책임의식이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 개인의 의지가 전체 의사와 일치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일치가 지속적이며 항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전체 의사는 평등을 지향하는 반면 개인의 의사는 본질적으로 편파적인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P. 72 제2부 제1장 주권은 양도할 수 없다)는 말이 그 이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나 존 로크의 이론상의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 이러한 사상이 펼쳐질 수 있었던 토대 자체가 긍정적인 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아나키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의 필요성과 주장은 국가와 정부의 존립 근거를 이론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이 주체가 되고 국민 모두의 주권과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고민하고 개인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이러한 모든 시도는 유용하다. 한 사회의 발전과 국가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된 목적은 없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사회계약론>은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시금석이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국가와 민족, 시대와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개인의 이익에 어떤 방식으로 복무하느냐에 따라 또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등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항존한다. 우리가 고민할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거나 정체되어 있는 제도에 대한 점검과 그 기본 틀을 고민해보는 거시적 안목이다. 내 앞의 떡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있다. 물론 합의되지 않거나 이기적 모순에 빠질 위험을 배제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달려왔다.

  이제 한번쯤 되돌아보고, 아니 자주 되돌아보고 점검하고 살아 숨쉬는 관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자유는 모든 기후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 그러므로 자유는 모든 나라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P. 178 제3부 제8장 모든 국가에 동일한 정부 형태가 접목되는 것은 아니다)는 루소의 말을 다시한번 되새겨 본다. 우리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와 정부 형태는 우리 스스로가 항상 고민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과일이 아닐까 싶다.


200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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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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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온 길을 자꾸만 뒤돌아본다. 내가 받았던 교육과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초, 중, 고를 거치면서 만났던 많은 선생님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학교교육을 추억하기도 한다. 학교는 지식 전달을 위한 교과 교육과정보다 잠재적 교육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공간이다. 그 시간과 공간들 사이에서 내가 배웠던 도덕과 윤리들을 떠올려본다.

  서울대학교에 국민윤리교육과가 1981년에 설립되었고 이후 전국 각 대학에 같은 학과가 개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국민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교육할 방법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국민윤리교육’을 위한 학과가 설립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 후 25년 흘렀고 전국도덕교사모임을 필두로 그간의 반성과 성찰이 헛되지 않길 바란다. 김상봉 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저간에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책이다. 도덕 교사를 위한 강연과 도덕교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물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알고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면화되지 못화고 겉도는 이 도덕과 윤리에 대한 얄팍한 고민의 뿌리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한권의 책이 우리나라 도덕 교육 전반에 대한 대안과 모색의 결정판이 될 수는 없다. 김상봉이 밝히고 있듯이 각론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생산적인 공방은 어쩌면 도덕교사들, 혹은 학생들과 국민들 모두의 자각과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일 것이다. 다만 거시적 안목에서 도덕교육의 목적과 철학적 측면의 성찰조차 없었던 지난날에 대한 비판과 뼈아픈 자각만으로도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어린 시절 시험을 보기 위해 암기했던 도덕적인 행동과 타인을 위한 배려들, 그리고 학력고사를 위해 달달 외웠던 서양의 철학자들의 이름과 한 줄로 요약해서 외웠던 그들의 사상이 윤리와 도덕의 전부였다. 제대로 된 교육이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교과별로 상이한 대답과 교육 목적이 제시될 테지만 도덕교과는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도덕교육은 착한 노예를 기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 한 번도 긍지 높은 자유인을 기르기 위한 도덕교육이었던 적이 없었다. 노예가 아무리 착하다 하더라도, 노예적 삶이란 결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이상일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엄연한 시대정신이라 믿는다. 인간을 자유인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오직 착하게만 만들려는 것은 언제나 불온한 시도이다. - P. 13

  대한민국의 도덕교육의 문제점을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시도되었던 그 ‘불온한 시도’들에 대한 면면을 밝히는 작업이 이 책이 갖는 의의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확립된 ‘국민윤리교육과’의 전통과 맥락이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그 시절 교수들에 의해 확립된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를 위한 선전 도구로서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민족과 국가에 대한 맹목을 선전하고 내면화했던 도덕교육은 개인의 고귀하고 소중한 가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순종적이고 선량한 국민을 위한 교육은 이제 그만 가라. 갈등과 투쟁도 때로는 필요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선택을 위한 고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은 필요하다. 지금의 도덕교과는 학제 간 접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사회학과 심리학, 철학과 문화 예술에 이르기까지 잡탕 찌개를 연상시키는 주장을 했던 어느 교수의 말처럼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을 어미학문으로 해서 도덕교육의 목적을 바로 세우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 책은 전국의 도덕 교사를 위한 책이 아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교육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삶에 대한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있어야 도덕 교과의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도 그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뇌사상태에 빠진 도덕교육에 대한 심각성을 외면한다면 아이들의 미래도 행복의 의미도 삶의 태도도 여전히 지금과 같을 것이다.

  저자는 “‘학교는 중요한 진실을 회피한다’(노암 촘스키, 강주헌 옮김,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2001, P. 38) 그 대신 학교는 국가가 승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진리라고 주입한다.”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계급재생산’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공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수많은 논의와 주장 속에는 여전 평준화 문제나 수월성 교육의 문제가 등장하고 기여 입학제나 특수 교육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주장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라고 본다. 무엇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들을 좀 다른 방식으로 해 볼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도덕교육이 넓은 의미의 철학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신이 노예상태에 빠지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편협한 당파성에 빠지지 않고 모든 문제를 균형 잡힌 전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현실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완전성의 이념 아래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 203

  김상봉의 주장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일독을 권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다고 해서, 시간만 흘러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삶이 내게 준 교훈이다. 오늘 하늘이 맑다고 해서 내일도 맑을 것이라는 맹목과 순종을 학교는 오늘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도덕이 이런 것은 아닌지.

  참된 도덕성은 소극적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약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을 돌보려는 마음에 존립한다. - P. 300


2005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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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논증이다 - 탁석산의 글쓰기 2 탁석산의 글쓰기 2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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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말하기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생각을 글에 담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즉흥적이고 감정이 앞서는 말하기는 글쓰기보다 훨씬 효과적인 수단일 때가 있다. 하지만 언어외적 요소들이 말의 내용을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특히 실용적 글쓰기에서 논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소홀하게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논리적 검증’과 ‘논리적 증거’가 뒷받침 된 설득력 있는 글을 보면 빈틈을 찾기 어렵고 내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신문 칼럼이나 사설을 보다가 ‘울컥’하는 경우가 많다. TV논평도 마찬가지다. 번지르한 말주변이나 화려한 수사로 자신의 주장을 담아내지만 논리는 모호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논거로 변죽만 울리다 끝이 나는 글들이 많다. 감정에 호소하거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설과 칼럼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신문이 더 이상 훌륭한 글쓰기의 모범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2권은 <핵심은 논증이다>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렇다 핵심은 논증이다. 얄팍한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싶다. 당연한 이야기들과 명확한 논리를 무시한 글쓰기가 범람하는 시대에 필독서로 권할 만하다. 다만 국문과나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국어교사들이 글쓰기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면들이 학생들에게 소홀하게 지도된다는 탁선생의 편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구성된다. 전제는 결론의 근거가 된다. 흔히 말하는 논거가 되는 것이다. 결론을, 즉 주장을 하기 위해 명확한 근거를 내세우는 것이 논증이다. 그렇다면 논증은 어떠해야 할까? 논증의 네 가지 조건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 책의 3장을 살펴보자.

좋은 논증의 네 가지 조건

전제와 결론이 관련이 있어야 한다.
전제는 참이어야 한다.
전제는 결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반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연해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실제 글쓰기 상황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다. 논술을 포함한 많은 글들이 개요작성 없이, 즉 설계도 없이 지어지는 집과 같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글들이 그렇게까지 전략적일 필요는 없지만 전문적인 글쓰기에 발을 들여 놓거나 적어도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칼럼의 필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거쳐야 하는 글쓰기 과정이다.

  분량과 상관없이 이 책은 한 명의 멘토를 내세워 글쓰기 전반에 관한 쉽고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은 판형과 시원한 편집, 그리고 캐릭터를 이용한 흥미유발, 무엇보다도 분권으로 시리즈물을 만들어내는 ‘김영사’의 얄팍한 상술 혹은 대단한 마케팅 전략이 돋보이는 책이다. 상당히 딱딱하고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을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고 이런 방식으로 책을 구성하는 것도 특별한 비법이라고 인정한다.

  논증이란 결론과 전제로 구성되고, 전제와 결론은 반드시 문장이어야 하며, 전제와 결론은 지지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논증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논증은 논리적인 글쓰기의 기본기를 닦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며 핵심적인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잊지 않고 실전에 활용하는 일이다. 실제 상황에서 총을 쏘지 못하면 아무리 해박한 군사학 지식도 무용지물이 된다.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글쓰기 상황을 위해 한번쯤 읽어둘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지독한 몸살감기도 시간이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약발이 떨어진 아침, 환하게 밝아오는 하늘이 부담스럽다. 온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써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건강하고 밝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기 바랄 뿐이다. 또다시 우리들 몫의 시간들이 미래를 점령하고 있다.


200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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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은 논술이 아니다 - 탁석산의 글쓰기 3 탁석산의 글쓰기 3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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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법 개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게 아니라 배부른 돼지들 몇 마리가 꽥꽥거리고 있다. 그 소리에도 귀기울여야 하나? 민주국가에서는 소수의 의견도 중요하니까? 사학재단을 사유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아이들을 맡겨왔다. 재단 전입금이 중등의 경우 2%, 대학의 경우 8%에 불과한 학교들이 신입생 선발을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말에 지나가던 미친개가 웃었다는 뉴스 속보는 없었을까? 개방형 이사제의 3분의 1에서 4분의 1로 개악되어 통과된 것도 그 효과가 의심스러워 탐탁치 않은데 사학 재단들이 보이는 반응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더구나 모 정당의 대응방식과 국회에 들고 나온 구호의 내용은 역사에 길이 남으라!
 
  교육에 대해 얘기하라면 4천만가지의 해법이 나올 것이다. 국민 모두가 교육부 장관으로 손색이 없을만큼 전문가 집단으로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평생 학교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글을 겨우 깨치기 시작하면 학교문제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것은 대학입시로 통한다. 교육 문제의 본질은 대학입시로 귀결된다. 대학의 서열화, 즉 대학입시 제도의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든 교육 현안들이 지나간 유행가요 씹다버린 껌만큼 지루하게 여겨진다. 대입제도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2008학년도 입시부터 내신의 중요성이 강화되고 수능에서 표준점수와 백분위 점수가 사라지며 문제은행 제도가 도입된다. 학기별, 과목별 상대평가로 내신 등급제가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으며 수능은 과목별 등급만 통보된다. 대학은 수능에서 같은 등급을 얻은 학생들을 내신과 논술로 선발할 수밖에 없다. 점차 독서이력철이 생활기록부에 포함되기 때문에 온 나라가 논술 열풍과 독서 광풍에 시달린다. 한글을 배우면서 부모들의 독서 전쟁이 시작되어 어린 시절의 독서습관을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마치 영어와의 전쟁처럼. 매체의 발달과 유초등 학습지, 출판 시장은 활황이다. 상장된 웅진은 떼돈을 벌었고 전통적인 교육열과 자식사랑으로 도서시장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으로만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다.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방법이 있는가를. 제도 개선이 우선이겠으나 독서와 논술의 문제는 냉정하게 점검하고 판단해야 바보가 되지 않는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3 권은 논술에 관한 이야기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도 미국의 에세이도 아닌 우리 나라 대학에서 만들어낸 돌연변이 변종 논술에 관한 이야기다. 이 논술은 다른 논술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학생과 학부모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은 자연히 알게된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목전에 다가온 입시를 두려워말고 그 실체부터 분명하고 선명하게 파악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논술은 논술이 아니다>는 제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고개가 아플 정도로 끄덕였다. 어떤 책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혹은 평소 자신이 하던 짓과 일치하는 부분이나 공감하는 부분에 흐믓해지는 경우가 있다. 구체화 시키지 못했거나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논술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이야기들이 완전히 일치한다. 시원스럽고 통쾌한 마음으로 읽었다.

  주변에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예비 수험생이 있다면 무조건 선물하라고 권할 만한 책이다. 200여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우리나라 대입 논술이 어떤 것인가는 모두 담겨있고, 가장 정확하고 쉽게 분석되어 있다. 논술이 논술이 아닌데도 논술이라 떠드는 많은 사람들이 착잡할 것이고 그 거대한 산에 가로막혀 막막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길잡이와 등불 역할을 충분히 할만하다. 논술은 논리적인 서술의 준말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은 논증을 포함해야 한다는 말이다. 각 대학의 논술은 논제와 제시문에 모든 논리가 숨어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확인해서 논증을 만들어내면 된다. 사실 공교육에서 짐지고 있는 쓰기 교육이 체계적으로 평소에 이루어지기만 해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늘 이상과 현실의 불협화음 탓이라고 돌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를 하는 이유가 대학 입시를 위해, 특히 논술이라는 거대한(?) 목표 때문이라면 학생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독서와 논술에 대한 어른들의 반성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필독 도서 목록들을 펼쳐들고 책을 팔거나 새물결인지 헌물결인지 하는 단체에서 시행하는 엽기적 ‘독서인증제’에 휩쓸리지 않고 제대로된 삶을 위한 책읽기와 아이들의 생각 키워나가는 바른 글쓰기에 대해 어른들이 먼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나 소설을 쓸 작가가 될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는 늘 쓰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기록이든 아니든 의사 소통과 표현 수단으로서 글쓰기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다. 좋은 책과 만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낫다. 한 눈으로는 책을 보고 한 눈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우리 모두는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나부터 반성할 일이다.


200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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