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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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현대소설(살아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안 읽히기 시작한 지 오래다. 사적 영역에 머물러 감정 과잉으로 심리 묘사와 미문에 집착하거나, 인물 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에 이르지 못하거나, 구조적 모순과 시대정신에 천착한 작품을 찾지 못했거나, 특정 직업과 상황에 몰입해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소설들이 많아서라고 위로해 보지만 전적으로 ‘나’라는 독자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도 읽지 않은 소설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에 도전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픽션을 다루는 작가의 산문집을 멀리한다. 사적인 영역에 대한 무관심과 작품으로만 만나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에세이의 형식을 빌린 ‘소설론’이다. 소설 작법 혹은 소설에 관한 명상이라고 해도 좋고 소설의 기능과 역할 혹은 개성과 특징이라고 해도 좋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리타니 고진을 새삼스레 떠올릴 필요도 없다. (참고 : 우리시대 지식논쟁_'근대 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1. 이제 '그들만의 문학'...근대문학은 끝났다, 조영일 2. 근대문학 종언론은 상상 혹은 소통일 뿐, 최원식 3. 종언 '위기'를 근대문학의 '기회'로, 권성우)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리얼리즘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자리를 잡았나 살펴보라. 근본적으로 체제와 시스템을 뒤흔들만한 비판적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 놓인 ‘공감’은 이기적 욕망과 숱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비평의 종말은 자연스러웠으며 한국의 문예비평은 그들만의 리그로 축소됐다.


정용준은 소설을 쓰며 소설을 가르친다. 소설의 성격과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 경험을 살피고 자신의 소설 작법을 소개한다. 창작수업과 일반적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만한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가끔,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은 회의적 생각이 든다. 기초적인 방법론과 첫발을 내딛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는 필요하겠으나 결국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적 책읽기와 비판적 글쓰기로 귀결돼야 하지 않을까. 


자연과학을 제외하고 문학과 사회과학 혹은 예술 영역은 학문적 체계와 이론을 배우고 익히는 단 하나의 길이 정해져 있지 않다. 인지주의 학습 곡선을 따라가며 성실하게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가는 방법도 있고, 쾰러의 통찰설에 걸맞게 계단식으로 단번에 쑥쑥 자라는 사람도 있다. 축적된 내공과 경험과 사유의 깊이는 지극히 개별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관점에 따라 열정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은, 아니 문학은 점점 위태롭다. 어쩌면 텍스트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며 본능은 입체적이다. 추상적 기호, 2차원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텍스트의 모호함은 지난하고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은 작가와 독자 모두 무언가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과 꿈이 있어야 가능하다. 


꿈 없는 잠이 이어진다. 목적 없이 걷고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일상이 지나간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삶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행복한 삶’에 가까운 게 아닐까.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 경험을 우리는 자주 하지 않는가. 안다는 건, 알고 싶다는 열망과 너무 차이가 크다. 질문과 성찰이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고,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문학은, 아니 소설은 단순한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또 다른 현실이며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다.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사가 펼쳐지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인물과 개연성과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많이 팔리는 책이 아니어도 좋고, 모두 공감하지 않아도 좋다. 소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쉬어갈 수 있는 벤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고독한 독서가 주는 효용을 생각하면 소설가의 역할도 저마다 다를 테다. 소설이 ‘만세’라고 외쳐도 좋다. 아니, 소설가는 그럴 수 없다면 쓸 수 없으리라. 독자는 그 소설가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낼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하며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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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픽션 - 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스튜어트 리치 지음, 김종명 옮김 / 더난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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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어떻게 추락하는가. 도발적인 질문이 계속되지 않으면 오류와 무지는 뉴스와 상식으로 둔갑한다. 지치지 않는 문제 제기는 건강한 사회의 척도다. 계속되는 질문과 비판적 시선 앞에 실체적 진실이 잠시나마 드러날 뿐이다. 사이언스도 픽션이 될 수 있다. 과학자도 소설을 쓴다. 스튜어트 리치가 말하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이성과 합리, 논리와 근거가 통계 조작과 무수한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어떻게 일그러질까.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척도는 재현성과 투명성이다. 어떤 실험 결과, 유력한 과학 잡지에 실린 논문이 재현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그 실험과 통계 분석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도 괜찮을까.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 분야에서 엇갈리는 서로 다른 주장은 하물며 ‘내가 옳다’는 주장 자체가 무의미하지 않은가. 서로 다른 관점, 엇갈리는 주장 속에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과학적 태도가 우리 일상에서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코미디 프르그램 <브래스 아이Brass Eye>에서 인용한 “그것이 과학적 팩트다. 증거는 없다. 하지만 과학적 팩트다.”라는 문장이 ‘과학은 사회적 활동이자 인간의 실수를 드러내는 도구’라는 서문 앞에 붙어 있다. 무지는 학교를 다닌 기간이나 학위의 문제가 아니다. 직업과 나이, 종교와 인종과 성별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가장 객관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과학의 ‘픽션들’을 살피는 동안 참담해진다. 인간은 얼마나 미성숙하고 한없이 부족한 존재인가. 그래서 누군가는 종교를 찾고 오직 모를 뿐인 세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거나 가슴 뛰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 건 아닐까. 


누구나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며 산다고 착각하지만 대개 ‘생각’의 방법과 태도가 한없이 부족하다. 안다는 믿음이 편견과 오해를 만들고 집단 최면에 사로잡힌다. 각종 건강식품부터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거쳤다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허비하며 사는지 모른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짚어내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각자의 상식, 모두의 팩트, 변함없는 진실은 언제나 안녕하지 못하다. 


저자는 과학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고 그 반복 재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짐바르도와 밀그램의 심리실험으로 포문을 연다. 과학의 위기를 자초한 과학자들의 대표적 사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의 황우석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다. ‘조작, 편향, 부주의, 과장’이라는 네 가지 문제점을 통해 실수와 오류를 은폐하려는 학자들의 속내를 들여다본 후에 잃어버린 과학의 정신을 되찾는 길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삐뚤어진 현실은 현상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대개 공명심, 권력, 이해관계와 결탁한 자본주의 논리가 숨어 있다. 넓은 의미의 정치적 요소가 발견되는 과학계의 허구는 특히 위험해 보인다. 우리는 과학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인류 문명의 발달과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최소한의 객관적 지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의 말처럼 과학자는 “바라는 것도, 애착도 없어야 한다. 단지 돌과 같은 심장을 가져야 한다.”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심장은 돌이 아니고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주관적 판단과 편견, 감정이 뒤섞인 인간의 과학은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각종 실험과 통계로 입증된 이론, 권위 있는 잡지에 교차 검증이 끝난 논문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보편주의에 입각해서 사심없이 공동체를 위해 조직적인 회의주의를 채택하자는 머튼 규범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어떤 조직에서 일이 진행되고, 정부에서 정책이 시행되고, 국회에서 입법활동이 이뤄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현실은 더욱 심각해 보인다. 과학적 엄밀함까지는 아니어도 머튼 규범의 필요성 정도는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진실, 각자의 상식, 각자의 공정, 각자의 정의, 각자의 논리가 오늘도 상대방을 겨누고 공동체를 지옥으로 이끈다. 과학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최소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지 않을까. 한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은 어디서부터인지 몰라서 모두 숨죽여 엎드려 있는 건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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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보겠습니다 - 내부 고발 검사, 10년의 기록과 다짐
임은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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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한여름 김밥과 같다. 상하기 쉬운 음식처럼 부패는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다. 감시와 견제 없이 건전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본능에 가깝고 제어 장치 없는 권한과 통제력을 개인의 선의에 도덕적 책임감에 의지하는 조직은 거대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대한민국에서 유일무이한 영속적 합법적 권력 조직인 검찰은 정권의 부침, 경제 상황과 무관하게 상명하복,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몰상식한 문화를 자랑처럼 외치면서도 무엇이 잘못이냐고 반문하는 조직이다. 


대체로 조직 문화가 병들고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의 환부가 일상적 관행으로 여겨지는 집단에 속한 구성원은 내면 깊숙이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101호’를 거친 사람들처럼 조직의 논리와 강점, 전통과 문화의 이로움에 대해 피를 토한다. 그렇게 내면화된 무소불위의 자기 무오류성은 언제나 ‘법과 원칙에 따라’를 붙여 선량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해도 대통령을 보좌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오만함으로 무장한다. 선택적 정의와 지연된 정의로 단련된 법 기술자들이 사건 뭉개기와 집요한 표적 수사와 기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그들만의 리그와 권력의 사유화에도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부 국민들을 오히려 ‘개돼지’로 명명하며 자신들의 논리와 공정과 정의를 응원한다는 오만을 합리화한다. 박수부대로 동원되는 레거시 미디어와 언론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부나방들의 합작품이 양산하는 현실은 참담하다. 거대한 무지와 맹목적 지지가 사회를 병들게 한 역사적 사례를 일일이 나열할 필요도 없다. 비판적 사고가 없는 인류의 악행을 다시 거론할 이유도 없다. 


이것은 진영논리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든 문재인 정부든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던 임은정 검사에게 붙여진 별칭들이 황당했을 것이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내부 고발자 임은정의 목소리가 다른 조직, 다른 집단에서 없었던 건 아니다. 이해관계에 얽힌 그들은 조용히 수많은 임은정들을 묻었다. 나름의 논리와 나름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입을 막고 목을 비틀었다. 행정기관, 공공기관, 군대, 학교, 기업 어느 곳 하나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까. 상호 이익을 나누고 묵묵히 눈빛을 교환하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그들을 엿 먹이지 않았는가. 


왜 나서서 불편하게 하나, 너만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거야,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느냐, 누군 몰라서 그러지 않는 줄 아느냐, 나도 젊었을 땐 그러지 않았다,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안다, 지금은 니가 뭘 몰라서 그렇다, 전체 조직을 생각해…… 우리는 그들 곁에서 침묵하지 않았는가. 알고도 외면하지 않았는지. 당신들은, 아니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임은정 검사는 “정권은 유한하나 검찰은 영원하고, 끈끈한 선후배로 이어진 검찰은 밖으로 칼을 겨눌 뿐 내부의 곪은 부위를 도려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188쪽)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문이 열릴 때까지, 벽이 부서질 때까지 저는 두드릴 것이고, 결국 검찰은 바뀔 것”(227쪽)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가 그들의 권력에 복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비판과 견제 없는 권력을 ‘국민’에게 위임받을 수는 없다.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들의 오만함이 때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의 고용인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걸까.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자기 혁신 없이 병든 환부를 도려내지 못하고 그들만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를 오염시키고 더 나은 세상이라는 꿈을 버리게 한다. 그래도 검사 임은정은 외친다. 계속 가보겠다고. 고장난 저울은 고쳐 쓰는 게 상식과 공정과 정의가 아닌가?


검찰의 저울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울을 고치라고 계속 외쳐주십시오. 검찰이 고치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으면, 더는 고장 나지 않을 테고, 편향적이고 불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다소나마 주저하지 않겠습니까? -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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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빈곤 사회 -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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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는 아렌트의 새로운 정의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다. 사유하는 주체로서 스스로 생각하라는 칸트의 계몽주의 모토가 필터 버블, 확증편향의 정보 홍수 시대에 더욱 필요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면 악인, 즉 나쁜 사람이 된다는 논리의 비약이 가능해진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레거시 미디어에 기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사는 건 편안하지만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명제 “지식은 권력이다knowledge is power”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권력은 지식이다power is knowledge”로 뒤집는다. 이것은 라틴어 격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Nullius in verda”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권력과 미디어, 정치와 종교의 협업 플레이는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뇌 구조를 뒤튼다. 지식권력의 중심에 선 미디어와 냄새나는 신문과 기자들이 어디 한 둘인가. 알고리즘으로 유형화된 정보만 편협하게 흡수하는 정보 탐색은 균형을 잃고 삐뚫어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비판 정신이 결여된 미디어보다 심각한 건 필터링 없이 노출된 정보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태도다.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자신의 선택과 판단력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사 빅포르스가 『진실의 조건』에서 밝힌 명제 중 하나는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사실이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진실은 떼거지로 우기거나 군중심리에 올라타거나 우매한 다수의 밴드왜건 효과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식과 진실을 다수결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집단지성으로 포장된 다수의 횡포가 언제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건 아니다. 


강남순의 『질문 빈곤 사회』가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여전히, 아직도, 그대로인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반성과 성찰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욕망을 채우는데 충실한 삶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강남순은 우리 사회가 질문이 빈곤한 이유를 질문한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드러난 현상에 대한 비판이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에 가깝다. 권력과 언론에 묻는다, 타자의 얼굴에 묻는다, 관행과 대안에 대해 묻는다, 존재와 혐오를 묻는다, 희망과 생명을 묻는다. 


전체 다섯 개의 주제로 묶었지만 개인을 둘러싼 타자와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들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호기심과 질문을 땅에 묻었을까. 질문이 직업인 기자들조차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선진국 신화에 들떠 있는 건 아닐까. 개인의 삶에서 질문은 성적, 취업, 재테크에 대한 노하우로 한정되기 쉽다. 그러나 대체로 근본적인 질문은 삶의 목표와 가치에 닿아 있다. 방향없이 흔들리면 모든 게 불안하다. 부족하고 먹을수록 배고프며 가질수록 가난해진다.


숱한 철학적 개념과 사회학 이론이 등장하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자기 삶이 변한다면 얼마나 쉬울까. 든 사람은 빈 사람보다 굳기 쉽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쉼 없이 흔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없이 인간은 귀한 존재로 거듭나기 어렵다.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일상, 생각하고 질문하는 태도가 우리를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립isolation과 외로움loneliness을 창의적인 경험으로 전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렌트는 그것이 바로 고독solitude이라고 본다.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면서, 외로움을 고독으로 전환하는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외로움은 세상이나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이란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음’의 상태이다. -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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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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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왼손을 다친 산티아고 노인이 물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길이 5.5미터 무게 70킬로그램은 족히 넘을 듯 싶은 인생 물고기를 포기할 어부가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상황에 적응하고 현실을 타계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장기적인 목적을 세우고 삶의 가치를 고민하는 일은 등따시고 배부를 때 할 수 있는 법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선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이나 허탕을 쳤다. 85일째 손맛을 봤으니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 인간 삶의 숭고함, 위기를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 먹고사니즘을 너머 자기 극복을 통한 해방감 따위는 어찌보면 허울좋은 평론이 아닐까. 노인은 그저 배가 고팠고 거대한 청새치와 밀당의 짜릿함을 포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험한 순간이나 포기하고 싶은 고통이 없지 않으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누구나 견뎌야 하는 시간과 과정이 아닌가. 


소년 시절과 중년에 읽는 『노인과 바다』는 같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던 노인의 말과 행동, 신념이라기 보다 고집스러움, 물고기 한 마리에 매달리는 집착이 무엇을 말하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바닷가에 사는 소년의 일상과 미래가 따분해 보였고 지루한 스토리에 별 감흥이 없었다. 사춘기를 넘기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으며 헤밍웨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으나 아주 오랫동안 『노인과 바다』를 재독하지는 않았다. 이제 소년보다 노인의 나이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다시 읽는 소설에서 보이는 건 노인의 지난했을 삶과 현재의 일상, 대책 없는 미래다. 일상을 돌보는 소년과의 우정 혹은 애정이 그를 견디게 하지만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사는 노인의 삶이 보편적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질병은 나에게 태만을 허용하는 동시에 명령한다. 질병은 나에게 늘어진 자세, 여가, 기다림과 인내에 대한 의무를 선사한다. 그러나 사유로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질병의 가장 큰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상처를 입고 육체적 고통을 견디는 상황에서 노인은 혼잣말이 는다. 청새치에 대한 연민, 수많은 ‘죄’에 대한 명상, 바다에 대한 생각들이 이어진다. 혼자 견디는 시간이어서가 아니라 사유로 인도하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질병을 통해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통과 아픔을 거쳐 성숙하며 위기와 불안을 견디며 자기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불운과 역경과 고난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삶의 통과의례다.


이를 통해 ‘겸손’을 배운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인정하는 태도, 열린 생각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85일째, 평생 물고기를 잡아 온 노인의 불운에도 끝이 보일 때가 됐다.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지만 “그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잃는다는 건 삶을 포기하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쿠바 아바나가 보이는 멕시코 만 인근으로 출항한다. 무역풍이 부는 9월의 바다를 헤밍웨이는 직접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마이애미로 향하는 하늘의 비행기의 경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다. 예전에 일했던 니콰라과 동부 모스키티아 해안의 카리브 해와 사자를 보았던 북대서양 카나리아 군도는 멕시코 만에서 멀지 않은 곳들이다. 바다는 노인에게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생애 무대이자 추억의 전부다.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


이런 바다가 남성성의 상징인 ‘엘 마르el mar’라 명명돼야 마땅해 보이지만, 노인은 여성성의 바다 ‘라 마르la mar’였다고 고백한다. 원형적 상징으로서 바다의 이미지가 독자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든 상관없다. 자연에 대한 공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삶을 영위해온 노인에게 바다는 애증을 느낀다. 물고기를 죽여 자기를 살려야 하는 생태계의 순환 논리 앞에 겸손하다. 역대급 태풍 소식에 한반도가 긴장하고 있다. 자연은 때를 알고 찾아왔다가 물러가는 게 아니라 인간이 적응하며 생존을 거듭했을 뿐이다. 


도시인의 삶은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삶이 들과 산과 바다에만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삶의 형태를 통해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하기 위해서 자연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편안한 노후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꽃을 찍는 나이, 푸른 바다와 하늘에 감탄하는 나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이를 대체로 나이들어감의 증거로 삼기도 한다. 자연스런 삶은 어디에나 있으나 부자연스러움을 우리는 문명, 발전, 성장이라고 말한다. 


불멍을 위해 캠핑을 하고 하늘멍을 위해 잔디밭에 눕는 사람들이 느끼는 여유와 만족감은 설명하기 힘들다. 누군가는 써핑을 하고 누군가는 등산을 가며 또 누군가는 낚시를 즐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모터보트로 강 위를 누빈다. 바다로 상징되는 자연이 노인에게 어떤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어부의 노력이 아니라 라 마르la mar의 품에 안겨 평생을 보낸 한 인간의 감동적 서사가 아닐까. 


문학의 보편성과 작가의 문체


문학은 대개 작가의 사상을 반영하고 사회를 투영하는 척도로 기능한다. 소년과 노인의 관계를 파악하고 머리와 꼬리만 남은 청새치의 결핍과 노인의 귀가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궁금하지 않다. 오독의 즐거움 또한 독자 각자의 몫이다. 짧고 간결한 단문 위주의 스타일리쉬한 문체를 가진 헤밍웨이는 나름의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드보일드 문체가 주는 효과는 담백함이다. 감정의 과잉이 없고 군더더기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는다. 압축과 절제는 글쓰기의 교본이 되기도 한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여백을 두되 허전하지 않다. 헤밍웨이는 당대 사회, 삶의 현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개성적인 인물과 특별한 사건을 통해 서사가 이어지는 소설의 재미는 텍스트 세대에겐 여전히 매력적이다. 현재적 유용성의 남아 있는 한 문학은 보편적 정서를 통해 인간 삶을 위로하고 개인이 겪는 혼란에 돌파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너만 그런게 아니라고, 모양과 빛깔은 다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 생을 살아간다고. 지식으로서의 문학, 흥미진진한 스토리의 재미가 무용하지 않으나 우리는 대개 보편적 인간의 삶에 대한 감동과 위로를 위해 책장을 넘긴다. 


모임에서 다룬 이야기는 각자의 메모와 각자의 기억 속에 또 다르게 적힐 것이다. 삶과 죽음, 소년과 노인, 바다와 노인, 열림과 닫힘, 낮과 밤이 주는 시간과 공간 사이 사이에 산티아고 노인과 마놀린 소년과 각자의 닉네임과 토론장의 열기와 귀갓길의 불빛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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