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야마다군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 / 대원DVD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신문에서 보는 4컷만화를 보는 듯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기존의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과는

완전히 스타일이 달라서 선호가 극명히 갈릴 것 같다.

 

터프한 할머니와 전형적인 소심한 샐러리맨 아버지

늘 깜빡 잘 잊는 건망증 심한 어머니, 사춘기의 아들과 너무 어른스러운 딸

이들 가족이 펼치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마치 우리 집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해 준다.

TV채널을 가지고 다투고 식사 메뉴로 고민하고

아침마다 출근, 등교전쟁을 벌이는 등

우리가 늘 반복하는 일상의 단면을 잘 그려냈다.

만화책으로 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애니메이션으로 보기엔 좀 너무 담백(?)한 것 같아

조금은 아쉬운 생각이 드는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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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36년(인조 14) 12월∼16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로 일어난 조선·청나라의 싸움.

본문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册)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중국황제의 생일)·정조()·동지()·천추(: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 등의 사절(使)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과 혼연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1639)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출처-네이버

김훈의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인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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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 틴케이스 스틸북 한정판 (2disc) [미니아트북 포함]
잭 스나이더 감독, 도미닉 웨스트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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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그리스 정복에 나서고 이에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최고의 전사 300명과 함께 테르모필레에서 결전을 준비하는데...

 

프랭크 밀러의 원작만화를 영화화한 작품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정말 리얼하게 잘 그려냈다.

지형을 이용한 스파르타의 전략과 태어날 때부터

강인한 전사로 길러진 그들의 죽음을 각오한 용맹함에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도 패전을 거듭한다.

기적에 가까운 승리가 손 앞에 잡힐 듯 하던 스파르타군은

그들이 내친 스파르타인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데...

 

역시 이 영화의 압권은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사실감 넘치는

전투씬이다. 조금은 잔인했지만 그래서 더욱 실감났고

특유의 색감은 프랭크 밀러의 만화를 영화화한 '씬시티'를 연상시켰다.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과 맞서는 300명의 스파르타군

그들의 무모하지만 조국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비장함이

그들을 영원히 죽지 않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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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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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더풀' '공중그네'에 이은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 시리즈 제3편

엽기 의사 이라부와 섹시 터프한 간호사 마유미의

강박증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엽기 치료는 계속되었다.

 

전작인 '인더풀'과 '공중그네'에선 그야말로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각종 강박증에 시달리는 환자들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압권은 이라부의 엽기 행각이었다.

정말 이 사람이 정신과 의사인지, 아니 정상의 성인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그가 보여준 탁월한 치료효과 때문에 그를 명의(?)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부의 새로운 활약상을 담은 면장선거는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베맨'이라 불리며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고 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신문사 대표이사이자

일본 최고 인기 프로야구 구단주의 이야기 '구단주'

 

성공한 청년 재벌 사업가이면서도 너무 효율성을 추구해 

일본의 알파벳인 '히라가나'를 잊어버리는 '안퐁맨'

 

세월을 이긴 미모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늘 살 찔까봐

한시도 몸을 가만 두지 못하는 여배우 이야기 '카리스마 직업'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작은 섬에서 면장자리를 놓고

두 파가 벌이는 치열한 선거전을 그린 '면장선거'

 

이 책이 기존의 이라부 시리즈의 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아마 실존 인물들을 풍자한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면장선거를 제외한 앞의 세 단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구단주'의 나베맨은 딱 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구단주를 연상시켰다.

(물론 그 사람에 대해선 잘 모른다.)

'안퐁맨'은 잘 모르겠지만 '카리스마 직업'의 여배우는 옮긴이의 글을 보니

'실락원' '도쿄타워' 등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구로키 히토미였다.

 

권력, 재력, 인기 등을 가진 실존 인물들을 풍자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반발을 살 것 같지만

아무 걱정과 고민이 없을 것 같은 그들도

우리 보통 사람들처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

나름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마지막의 면장선거는 우리의 현 정치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로 두 패로 나눠져 못 잡아먹어 안달인 모습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면장선거에서

이라부는 바로 국민을 상징하는 존재와 같았다.

이라부의 맘을 얻는 쪽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상태에서

이라부는 양쪽에서 뇌물과 향응을 받으며 즐기다가

결국은 양쪽의 로비에 지쳐 장대 눕히기의 승자를 밀어주겠다는

황당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라부의 제안으로 양쪽은 부정선거에서 벗어나 진정한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면장과는 아무 상관없는 장대 눕히기를 하지만...ㅋ

그래도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던 섬마을이 오랜만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우리의 대통령 선거도 이러면 얼마나 즐거울까

국민 모두가 즐겁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가 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라부와 같은 사람이 등장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벌써 세번째를 맞이하는 이라부와의 만남

솔직히 전편들에 비해 재미는 좀 떨어졌다.

이라부의 처방에 익숙해져서이지 않을까 싶다.

약도 계속 먹다 보면 내성이 생겨 점점 강한 처방을 해야 하듯이

이라부의 처방도 더 엽기적(?)이 되어야 재미를 줄 것 같다.

아니면 쇠 대야를 휘두르며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마유미를 이라부와 대등하게 부각시키는 방법도

이라부 시리즈를 계속될 수 있는 처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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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벌어졌던 페르시아군과 그리스 연합군 사이의 전쟁으로 레오니우스 왕을 비롯한 그리스 연합군 대부분이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페르시아군에게 전멸당하였다.

본문

마라톤 전투(Battle of Marathon, BC 490)에서의 패배 이후 그리스로의 세 번째 침공을 준비하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Darius Ⅰ, 재위 BC 522~BC 486)가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Ⅰ, 재위 BC 486~BC 465)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크세르크세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만큼 그리스 침공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나갔다.

기원전 481년 드디어 30만의 페르시아 군사는 그리스를 향해 육로와 바다로 동시에 진격해나간다. 이를 전해들은 그리스 진영(그리스 본토와 에게해의 폴리스들)은 코린토스에 모여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방어태세에 들어간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항하고자 테르모필레(Thermopylae)라는 지역을 이용한 군사작전을 세운다.

테르모필레는 마케도니아 해안에 위치한 좁은 골짜기로 그리스로 가자면 꼭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많은 군사들이 동시에 진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장소였다. 따라서 아테네의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8?~BC 462?)는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해상전투를 통하여 페르시아 해군을 먼저 무찌를 전략을 세웠다. 즉, 테르모필레에서는 육상결투를, 아르테미시온(곶)에서는 해상결투를 통해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려했다. 

작전에 따라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 재위 BC 487~BC 480)를 총지휘관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천명은 테르모필레 지역으로 파견된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BC 425)는 페르시아 육상 부대를 100만 여 명, 그리스연합군을 만 여 명으로 이야기했으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테르모필레 지역에 도착한 후 며칠간 그리스 진영을 정찰한 페르시아 군대는 도착 5일째 되는 날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테르모필레의 좁은 골짜기로는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진격하기 어려웠으므로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의해 번번이 저지를 당하고 만다. 그러던 중 그 지역의 한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군대에게 그리스 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밀고한다. 이에 페르시아 군은 밀고받은 우회로를 이용해 뒤에서 갑작스런 공격을 가한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은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레오니다스의 병력 천명(스파르타 정예군 300명 및 기타 연합군)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 페르시아군대에 맞서야만 했다.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사들은 페르시아에 강하게 저항했으나 뒤쪽에서 급습을 받은데 연이어 페르시아 지원부대의 전방 공격까지 받게되자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인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해 레오니다스를 비롯한 군사전원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항전과 전사는 훗날 비문("지나는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과 전설을 통해 널리 숭상되었다. 한편 분산되어 있던 연합군도 곧 페르시아군에게 제압당한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사기가 높아진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까지 뚫고 아테네로 진격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 BC 480)에서 그리스군에게 크게 패하고 만다.

출처-네이버

영화 '300'의 전투가 바로 테르모필레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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