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갤러리란 인터넷상에 떠도는 쟝르 소설과 연관된(물론 따른 재미있는 사진도 가능) 사진들을 모을 예정입니다.그냥 한번 재미 있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과학기술 발달과 상상력의 결합
서구에서 통속적인 스타일의 SF잡지들이 전성기를 누리게 된 1930년대를 기점으로 SF작가들의 상상력은 현실을 추월하기 시작했습니다. 발달하는 과학기술과 더불어 그 최전선의 생생한 정보들을 소화해내는 SF작가들은 그를 바탕으로 이미 머나먼 미래를 앞질러 살기 시작한 것이지요.

SF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편집자이기도 한 미국의 존 캠벨은 1930년에 <공중해적주식회사>라는 작품을 한 SF잡지에 발표했는데, 그는 이 소설에서 초고공 비행으로 대륙 간을 운항하는 거대한 여객기를 마치 독자들이 직접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해냈습니다. 또 항공교통이 발달해서 대도시 상공이 교통공해로 시달린다는 예측까지 내놓았지요. 그런가하면 E. E. 스미스라는 작가는 비슷한 시기에 초광속 우주선이나 무관성 추진장치 등, 당시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성이론의 한계까지도 넘어서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 바 있습니다.

SF작가들은 과학적 상상력 못지않게 그에 따른 사회적 영향의 예측에도 소홀하지 않았지요. 의사 출신인 데이비드 켈러는 이미 1920년대 말에 과학이 만능으로 발달한 미래 세계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주인공으로 묘사한 작품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는 또 현대적인 의미의 복합 데이타베이스 컴퓨터 시스템을 고안해내기도 했으며, 특히 오늘날에도 연구단계에 머물러있는 생체컴퓨터를 묘사하여 한층 더 앞선 상상력을 작품 안에다 형상화시켰습니다. 그가 이 작품에서 묘사한 인간들은 거대한 컴퓨터시스템의 단말기 역할들을 맡고 있지요.
2차 세계대전 중에는 SF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에 미국의 클리브 커트밀이란 작가가 한 SF잡지에 스파이를 주인공으로 다룬 첩보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병기는 다름 아닌 원자폭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폭에 대한 세부묘사가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이름아래 미 정부에서 비밀리에 진행 중이던 실제 원자폭탄 개발계획의 내용과 너무도 비슷해서 잡지의 편집장과 작가가 FBI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일반문학계에도 영향을 미치다
이처럼 SF라는 장르에서 비롯된 예리한 미래 예측의 시각은 점차 일반 문학계에도 영향을 끼쳐, 20세기 초반이 지나면서부터는 세계문학사상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굵직굵직한 걸작들이 미래소설의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를 들 수 있지요. 각각 1932년과 1949년에 발표된 이 두 소설은 오늘날 디스토피아 문학 분야의 대표작들로 꼽히면서 과학의 발달과 전체주의가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심도 깊게 고찰한 묵직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 이후 주류문학계의 작가가 미래소설의 형태로 자신의 전망을 제시하는 예는 더 빈번해지고 보편화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 영국작가 안소니 버제스는 1962년에 발표한 <시계장치의 오렌지>를 통해 청소년범죄가 흉포화 되고 국가기관이 인간성 개조작업을 벌이는 가까운 미래를 묘사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1971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로 훨씬 더 유명해졌지요. 또 버제스는 1978년에 발표한 <1985>라는 소설에서 급진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가까운 영국의 미래사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그 다음 선거에서 보수당에 100만 표 이상을 몰아주었다는 평가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SF와 영화의 만남
20세기 들어 새로운 예술매체로 각광받게 된 영화는 그 자체가 과학기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상의 촬영과 기록 및 감상에 기계장치가 반드시 필요한 분야니까요. 그동안 영화는 다양한 미래의 모습들을 수많은 SF영화들을 통해 펼쳐 왔는데, 특히 근년에 들어서는 특수효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거의 모든 영화들이 매우 실감나는 미래 사회의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여행> (사진 오른쪽 위) 은 일찍이 1902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영화의 제목입니다. 제목 그대로 달여행을 묘사했으며, 비록 과학적으로는 허술하지만 대중들로 하여금 앞으로 영화가 펼쳐 보일 시각적인 상상의 세계를 암시하기에는 충분했지요.

초창기 영화들 중 미래사회의 묘사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1926년에 독일의 프리츠 랑이 감독한 <메트로폴리스>입니다. 3시간이 넘는 대작인 이 작품에서는 마천루가 즐비한 거대도시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오늘날 고층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대도시의 풍경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 계층 간의 갈등을 제재로 삼아 시각적인 묘사 못지않게 묵직한 주제 의식도 담고 있는, SF영화사상 최고의 고전 중 하나입니다.

현대사회 화두 다룬 걸작 탄생하다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SF영화들은 공포물이나 오락 활극류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1968년에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내놓은 대작 <2001년:우주의 오디세이>는 SF영화의 차원을 한꺼번에 크게 격상시켜 놓기에 이릅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달에 도달하기 1년 전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직접 우주선을 타고 가서 찍은 듯한 생생한 무중력 상태 묘사와 달 탐험 장면, 또 심오한 내용 등으로 인해 오늘날 SF영화의 테두리를 넘어서 세계영화사상 10대 명작의 하나로까지 꼽히는 걸작입니다. 실제로 우주여행을 한다면 어떨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 영화를 통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대두된 현대 사회의 큰 화두 중 하나로 핵문제가 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핵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미 1940년대부터 선보인 바 있지만, 영화사상 기억할만한 예언과 뒤이은 적중의 사례로는 1979년에 발표된 영화 <차이나 신드롬> (사진 왼쪽) 을 들 수 있습니다. 발표 당시만 해도 이 영화에서 다룬 핵발전소 사고는 어디까지나 경고의 의미 만을 담은 가상의 상황이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스리마일 섬의 핵발전소에서 유사한 사고가 실제로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SF라는 장르는 현대에 접어들면서 소설과 영화 모두 과학기술의 부정적인 면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회생활의 모습도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이처럼 PC가 보편화된 미래 사회는 예전의 SF작가들도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SF의 조류도 역시 1980년대부터 생겨나서, 오늘날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한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컴퓨터 정보통신망 사회에서 현실 세계와 컴퓨터 안의 가상공간인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구성의 작품들은 오늘날 서구의 SF에선 보편화된 것입니다. 사이버펑크는 과거 세대와는 달리 PC를 어릴 때부터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해왔던 인류의 신세대 문화라는 점에서 21세기의 사회상과 문화적 감수성을 짚어보는데 중요한 변수가 되는 현상입니다. 바로 그러한 감성과 세계관이 21세기 미래사회의 모습을 이룰 것이니까요.

최근 작품들, '미래사회 전망, 독자 몫으로'
이전에는 미래소설이나 미래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라고 하면 단순히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적인 획일성만을 지닌 내용들이 많았지만, 최근에 발표되는 작품들은 단순하게 재단할 수 없는 복잡다기한 성격을 지닌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다양한 미래의 가능성들을 제시하면서 독자나 관객들 각자의 해석에 맡기는 것이지요. 날이 갈수록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과 그에 따른 사회상의 변화는, 이제 우리들로 하여금 다음 세대를 위한 선택 이전에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선택이 불가피해졌음을 일깨워주는 듯 합니다.

By caspi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년 후를 예측한 최초의 미래소설
오늘날 ‘미래소설’은 원래 SF의 한 하위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취급될 만큼 질적, 양적으로 많은 성과를 쌓아나가고 있는 분야입니다. 이런 소설을 쓰려면 가까운, 또는 먼 미래사회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해야 하지요.

서양문학사에서 최초로 ‘미래의 역사’ 서술을 시도한 작품은 176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작자 미상의 <조지 6세의 시대:1900년부터 1925년까지>라는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집필 당시인 18세기의 정치적 문제를 20세기라는 미래의 배경에다 투영시킨 내용이지요. 또 1771년에는 프랑스에서 루이스 메르시에라는 작가가 <서기 2500년의 추억>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의 한 파리 시민이 서기 2500년에 깨어나 보니 모든 사회악이 일소되고 과학이 지배하는 유토피아가 되어 있더라는 줄거리입니다.

미래소설의 기념비적인 성과는 근대에 접어들어 이룩된 바 있습니다. 1888년에 미국의 언론인출신 작가 에드워드 벨라미가 쓴 <회고:2000년에서 1887년까지> (사진 왼쪽)는 19세기 이후의 모든 유토피아 소설들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이자 동시에 사회정치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화제작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떤 사고로 1887년부터 기나긴 잠에 빠져들었다가 2000년에야 깨어나는데, 그가 다시 눈을 떠 보니 세상은 사회복지와 완전고용이 실현된 유토피아로 탈바꿈해 있더라는 내용입니다. 사회 통계 숫자까지 꼼꼼하고 치밀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출간 즉시 사회주의적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마스터플랜으로 받아들여져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에서는 이 작품의 사상을 추종하는 정치조직까지 결성되어 전국에 160군데가 넘는 지부를 두었다고 합니다.

H. G. 웰즈, 미래소설 고전 발표
영국 작가 H. G. 웰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타임머신>은 1895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일반화시킨 시초가 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타고 80만년 뒤라는 까마득한 미래 세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가 도착한 미래 세상의 모습은 일만 하는 사람들과 놀고먹기만 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나뉜 한 편의 악몽 같았지요.

사실 미래소설 작가로서 웰즈가 평가받는 작품은 1933년에 발표한 <다가올 세상의 모습> (사진 오른쪽)으로서, 제목만 보아도 곧 알 수 있듯이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색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룬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서기 1929년부터 2106년까지 펼쳐지는 가공의 미래사가 작가의 과학적 엘리트 사상에 기반을 둔 사회진화론적인 줄거리로 펼쳐집니다. 이 작품은 오늘날 미래예측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영화로도 두 차례 이상 제작된 바 있습니다.

1907년에 미국의 잭 런던이 발표한 <강철군화>는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대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는 걸작입니다. 일명 ‘소설 자본론’이라고도 불리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은이의 사상적 관점을 바탕으로 먼 미래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가까운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대비시키며 묘사한 내용입니다. 작가가 이 책에서 묘사한 가까운 미래란 집필 당시로부터 5-10년 뒤, 즉 20세기 초의 미국 사회를 그린 것으로, 거대 자본이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디스토피아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대중문학 장르로서의 sf 소설
오늘날 대중문학 장르로서의 SF를 논할 때 그 창시자로 꼽히는 인물은 미국의 휴고 건즈백인데, 그가 발표한 최초의 SF 역시 미래소설입니다. 그는 1911년에 자신이 발행하던 잡지에 <랄프 124C41+> (사진 왼쪽)라는 소설을 연재한 바 있습니다. 기본 설정은 서기 2660년에 랄프 124C41+라는 한 천재과학자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벌이는 낭만적인 활극으로서, 이 작품에서 묘사된 미래사회는 오늘날 SF가 보여주는 미래 예측의 전형적인 본보기라 할 수 있습니다. TV전화, 형광조명, 신소재, 자기녹음, 마이크로필름, 스테인레스 스틸, 전송신문, 태양전지 등등에서부터 우주여행, 반중력, 인공동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들이 모두 이 작품에서 예언되고 있지요.
우주여행 수단으로 로켓을 생각해낸 최초의 인물은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1916년에 발표한 <달세계 도착!>에서 서기 2017년의 미래를 배경으로 로켓에 의한 우주여행을 묘사했습니다. 자신의 과학적 소신을 소설이라는 형태로 밝힌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지요.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로봇,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
흔히 로봇이라고 하면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것을 연상하지만, 차펙이 (사진 왼쪽)에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로봇은 유기물질로 만든 인조인간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로봇 외에도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휴머노이드 등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로봇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대신해서 일련의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 및 전기, 전자장치의 복합체이지요. 이러한 로봇은 더 이상 SF에만 등장하는 용어가 아니라 산업현장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꼭 인간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겨야만 할 필요는 없으며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화성으로 보내졌던 무인 탐사선 패스파인더호(사진 아래 가운데)도 일종의 로봇입니다.
사이보그(cyborg)는 ‘사이버네틱 오가니즘(CYBERnetic ORGanism)’의 약자로서 1950년대에 의학자들에 의하여 창안된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장기로 대체하여 외계와 같이 가혹한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든다는 SF적인 발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엔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신체 일부의 기능을 잃은 사람들에게 인공장기를 달아주는 실용적인 방향으로 정착되었지요. 인공심장이나 인공뼈는 물론이고, 의안이나 의수, 또 콘택트렌즈나 인조 속눈썹, 가발 등을 쓴 사람도 엄밀히 말하자면 사이보그라 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나 사이보그는 이처럼 오늘날 단순한 SF용어가 아니라 과학용어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는 ‘외형상 인간과 닮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움직이지 않는 인형을 두고는 이런 말을 쓰지 않으며,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고하는 로봇을 의미합니다. 로봇이 넓은 의미의 자동장치를 가리킨다면, 안드로이드는 겉보기에 인간과 매우 흡사한 로봇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인조인간을 등장시켜 애수에 찬 휴머니즘을 그린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런너><사진 아래 왼쪽)에 나오는 안드로이드들이 좋은 예지요.
휴머노이드는 인간을 닮은 물체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말인데, 흔히 외계인의 모습이 인간처럼 두 팔, 두 다리가 달렸고 직립보행을 할 경우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무튼 안드로이드나 휴머노이드는 아직 SF용어의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는 단계랍니다.

로봇, 인간의 정체성을 되묻다
먼 미래에나 닥치게 될 일이지만, 외형이나 능력 면에서 인간과 똑같은 로봇이 등장한다면 인간의 정체성이나 휴머니즘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일견 공상으로만 여겨질 그런 상황을 추론해보는 이유는, 그런 설정을 통해서 지금 현재의 인간에 대한 반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SF에서는 이와 같은 구성을 즐겨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의 수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에 아시모프가 1976년에 발표한 중편 <2백 살을 맞은 사나이>가 있습니다. 바로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사진 왼쪽)의 원작이지요. 로봇이 한 가정에 들어와서 집사 노릇을 하며 가족처럼 살아가는데, 제작과정상의 이상으로 로봇의 전자두뇌가 스스로 자기계발을 해나갑니다. 그리하여 로봇은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고 독립해서 혼자 살게 되며, 나중에는 외모도 인간과 똑같이 개조해나갑니다. 원래 함께 살던 집안사람들과는 100년이 넘도록 대를 이어 끈끈한 정을 이어나가면서 법적으로 독립도 보장받고, 제한적이나마 자유도 누리게 되지요.
그러나 그가 추구하는 단 하나의 목표는 바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어느 인간도 이룩하지 못한 뛰어난 과학연구로 인류에게 커다란 공헌을 하고 널리 존경을 받게 되지만, 결코 인간으로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뜻을 함께하는 몇몇 사람들과 세계의회에서 인간의 정의를 놓고 힘겨운 법적투쟁을 벌이다가, 그는 마침내 최후의 수단을 택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원래 기계로 된 부속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도 금속 부품을 모두 빼고 완전한 유기체로 바꾸는 수술을 받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결과 자신의 양전자두뇌와 유기질 신체는 부조화를 이루어 그는 200살이 되는 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가 간파한 인간과 로봇의 차이였습니다. 로봇은 개조를 통해 수명을 무한대로 늘일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유한한 삶을 타고난 존재인 것입니다.

현재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로봇들과는 달리, 아직 ‘로봇’하면 영화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간형 로봇, 즉 안드로이드들이 연상되기 마련입니다.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무자비한 전투기계이며, 앞서 언급했던 <블레이드 런너>의 안드로이드들도 제한된 수명의 굴레를 벗기 위하여 인간에게 반기를 든 인조인간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로봇공학의 3원칙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지요. 그러나 로봇의 창조자와 조종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며, 결국 로봇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은 인간의 어두운 면이 투사된 결과들인 셈입니다.
인격을 지니고 스스로 사고하는 로봇은 아직 SF에서만 접할 수 있지만, 그들은 작품 속에서나마 인간 못지않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갈구하며 인간보다 나은 휴머니즘을 보여줍니다. 과학기술과 유전공학의 발달로 마침내 인간이 ‘신의 손’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과연 ‘인격을 갖춘 로봇’을 만들어도 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휴머니즘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보다 완벽한 인성(人性)을 지닌 로봇들에게서 ‘타락한 신’으로 단죄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By caspi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자동인형’에서 ‘로봇’으로
‘로봇(robot)’이라는 말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에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펙이 발표한 희곡 <로섬의 만능 로봇 (R.U.R.:Rossum's Universal Robot)>에서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체코어로 ‘법정노동(法定勞動)’을 뜻하는 ‘robota’ 라는 말에서 끌어 온 것이지요. 세계적인 작가이며 노벨상 후보로도 몇 차례 올랐던 차펙의 이 희곡은 일찍이 1925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당시 시인이자 소설가로 활동했던 박영희가 <개벽>지에 ‘인조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네 번에 걸쳐 연재했지요.

그러나 로봇이라는 말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동인형(automata)’등의 이름으로 로봇의 개념은 이미 널리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시계제조업자가 정교한 기술로 만든 움직이는 인형 등이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왔고, 특히 19세기 막바지부터는 광범위한 대중적 인기를 끌어 모으게 된 영화의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세계 최초의 영화는 1895년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에 로봇을 등장시킨 영화 <어릿광대와 꼭두각시>가 프랑스의 멜리에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로 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또 SF소설의 소재로도 수없이 채택되어, 차펙이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1920년대에는 이미 로봇이 낯선 개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로봇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널리 퍼지게 됩니다.

인격을 지닌 로봇
한동안 로봇은 SF 안에서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이나 기분 나쁘게 인간을 닮은 자동인형, 또는 창조주인 인간의 지위를 위협하는 일하는 기계 정도로만 다루어져 일반적인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8년에 미국의 SF작가 레스터 델 레이는 <사랑스러운 헬렌>이라는 단편소설을 SF잡지에 발표하면서 로봇에도 나름대로의 ‘인격’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과 똑같은 지성과 감정을 지닌 여성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과 사랑을 나눕니다.
로봇에게 고유의 인격을 부여한 최초의 SF소설인 이 작품에 이어, 다음해인 1939년에는 역시 미국의 SF작가 엔도 바인더가 다른 SF잡지에 <아담 링크>(사진 오른쪽)라는 로봇 시리즈물을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살인누명을 뒤집어 쓴 로봇이 우여곡절 끝에 혐의를 벗고, 뜻을 함께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일반 대중들이 로봇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작품은 그 뒤 아시모프를 비롯한 많은 SF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로봇공학의 3원칙
흔히 ‘로봇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SF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그 유명한 ‘로봇공학의 3원칙’을 창안해 낸 것은 1940년 경, 유명한 SF편집자였던 존 캠벨과 작품 구상을 토론하는 과정에서였습니다. 로봇의 윤리헌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지요.
제 1 법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 2 법칙 :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 1 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이다.
제 3 법칙 :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 1 법칙과 제 2 법칙에 거스를 경우는 예외이다.

오늘날 이 원칙은 단순히 SF의 영역을 넘어서서 로봇(인공지능)공학자들까지 진지하게 연구할 정도입니다. 그전까지 SF에나 등장하는 신비스런 차원에 머물렀던 로봇은 로봇공학의 3원칙에 의해 비로소 엄밀한 공학적 고려의 대상물로 자립성을 획득한 것이지요.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아직 3원칙을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인공두뇌를 만들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실용화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일본의 한 SF독자모임에선 로봇공학의 3원칙이 오늘날 이미 정착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들에 따르면 로봇공학의 3원칙은 넓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가전제품의 3원칙’이라고 합니다.
제 1 법칙 : 위험하지 않아야 한다.
제 2 법칙 : 사용하기 쉬워야 한다.
제 3 법칙 : 튼튼하고 수명이 길어야 한다.

실제로 위 법칙들은 로봇공학의 3원칙과 대응하는 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 가전제품을 만드는 제조회사들이 제품 개발 시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원칙들이기도 한 만큼, 어떤 의미에서 아시모프의 로봇공학의 3원칙은 이미 구현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