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자전적 에세이다. 배울 점이 참 많은 에세이였다. 책의 맨 처음에 추천글에서 <불새>라는 만화 스포를 한다. 약간 벙쪘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몇 작품 봤다. 모두 좋았다. 그래서 <불새>를 구입해서 보고 있는데... 4권을 읽고 있는데 기대만큼 재밌진 않다. 17권 짜리 덜컥 구입한 건 실수였나ㅠ 믿고 구입했는데... 역시 항상 안전제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늘 '오늘은 몇 번이나 울었니?' 하는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가며 '오늘은 여덜 덟이나 되네' 하며 울상을 지었다. -p47
데즈카 오사무도 대단하지만 그의 어머니도 참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중학생 때도 데즈카 오사무는 괴롭힘을 당했다. 팬티까지 벗긴 후 복도로 몰아세우고 헐벗은 채로 선생님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고 한다. 심각한 괴롭힘이다. 이런 일상이 2년 가까이 계속되었다고 하는데 참 안타깝다. 데즈카 오사무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고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놀라운 점은 어머니는 위로하고 다독여 주지 않고 참으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점은 데즈카 오사무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응이 속상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상대가 어떤 말을 하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웃으면서 순간을 넘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 데즈카 오사무는 엄청난 인내를 배운 거 같다. 그리고 그 인내는 그의 일생동안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의 행동이 현명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나 선생이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괴롭힘이 없어질까? 드러나지 않게 계속 괴롭힐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시하거나 조롱하거나. 다른 학교로 전학가면 문제가 해결될까? 다른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까? 데즈카의 어머니처럼 매일 아이의 상태를 살피고 동요하지 않고 참으라고 말해준다면. 자식이 스스로 그 괴롭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을까? 데즈카처럼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든지 말이다.
데즈카의 집에는 200권에 달하는 만화책이 있었다. 아버지가 만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연기까지해가며 데즈카에게 만화를 읽어줬다. 이 환경이 데즈카를 만화의 신으로 만든 것이다. 만화책 덕분에 데즈카는 괴롭힘에서도 벗어난다. 반에서 일약 유명인, 인기인이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데즈카는 노트 한 권 분량의 만화를 그려 반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담임 선생님한테 걸려 노트를 빼앗겼다. 데즈카는 혼날 줄 알았는데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데즈카, 만화를 이렇게 잘 그리는지 미처 몰랐구나. 이제부터는 네가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껏 만화를 그리도록 해라."
선생님들끼리 데즈카의 만화를 돌려 보고 있었다. 데즈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이미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글짓기 만큼 아이들의 상상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도 드문 것 같다. -p78
<블랙 잭>은 도박만화인가 했는데 의료만화다. 무면허 천재의사 블랙 잭의 이야기다. <불새>보다 이걸 먼저 볼 걸 그랬다. 데즈카는 의사이다. 만화를 너무 좋아해서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 때 어머니의 조언이 컸다. 데즈카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고 어머니는 만화와 의사 먼가 더 좋으냐 물었다. 데즈카는 만화가 더 좋다고 대답했고 어머니는 그럼 만화가가 되어라 했다. 아마 대부분은 만화는 취미로 하고 의사를 택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미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좋아하고 재능도 있는 데즈카를 본 어머니라면 데즈카를 응원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머니는 만화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덕분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정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나중에는 '그래. 알았어.' 하며 그림을 봐 주지 않으셨다.
그때의 충격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p175
데즈카의 충격이 공감이 간다. 부모 노릇 참 어렵다. 그래도 저렇게 실망을 경험하게 하는 게 좋을지도. 역시 인생은 어렵다.
아래는 데즈카의 파산 위기를 도와줬던 카츠사이 켄조라는 기업가의 글이다.
또 한 가지, 그가 자택을 팔고 셋집으로 이사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 전날 밤, 갑자기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전화를 받자 그는 너무나 밝은 목소리로 '내일 셋집으로 이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400평이나 되는 대저택에서 부인과아이들, 부모님까지 모시고 좁은 셋집으로 이사하면서도 그의 말투에는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시름에 잠겨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내일부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거예요. 창작 활동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처음 자세로 돌아가야지요." -p193
보통 사람이라면 좌절할 상황이었지만 데즈카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그는 더 열심히 일하고 위기를 극복해냈다.
아래는 데즈카의 조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나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 비록 당시에는 행복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란 장기 레이스에서 그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고 방식이 통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p208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었다. 자기 중심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항상 잊지 말아야겠다.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게 된 책인데 참 좋았다. 역시 훌륭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에세이를 읽으면 배우는 게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