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여성과 일

베로니카와 클라우디아가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개발사회학 연구원자리를 얻은 후에도 우리는 이 토론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우리의 접근방식을 ‘빌레펠트 접근 방식‘이라고 했으나 나중에 자급 접근으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이렇게 부르고 있다. 많은 남성 동료가 우리의 자급 접근에 동의했지만 여기에 가사 노동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못했다.
이 논의에 따르는 많은 실제적. 이론적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1978~1979년 빌레펠트에서 "자급, 개발, 축적"이라는 주제로 다양한국제회의가 열렸다. 나는 1979년에 이 회의에 한 번 참석했다.
이 회의 이전 이미 우리 셋은 가사 노동과 자본주의에 관해 논의하며 여성·농민·어린이·비농민 남성을 포함한 사람들의 자급 생산을 전자본주의적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자본 축적에 확실히 기여하는 비공식 부문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예비 이론을 만들었다. 우리의 가설은무급 가사 노동, 식민지 사람들의 노동, 천연자원을 통한 자유로운 생산 역시 자급 생산에 속하며 자본 축적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P175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노동이야." 베로니카는 말했다. "가사노동은 소위 비자본주의 부문에 표면적으로 속할 뿐이야. 자본주의는농민, 식민지, 자연을 대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가사 노동을) 착취하고합리화하는 거야."
로자 룩셈부르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가
‘자급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설명할 방법을 보여주었다. - P177

08 인도로 돌아가다

나는 이런 가내 공업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노동 형태임을 이해했다. 사실 이는 어떤 자본가에게나 최적이었다. 이것이 바로내가 이런 현상을 ‘노동의 가정주부화‘라고 한 이유였다.
심지어 자유화 · 민영화한 보편적 경쟁이 원칙인, 오늘날의 세계화한 경제에서도 이런 유형의 노동은 여전히 자본 축적에 수익성이 가장높다. 이제 남성들도 이런 ‘가정주부화한 노동을 해야 한다(Bennholdt-Thomsen, Mies and von Werlhof, 1983 참고). 유일한 차이점은 노동자들이오두막이 아닌 현대식 아파트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미지의 기업, 외주를 맡긴 기업가, ‘자유로운‘ 세계 시장에 있는 소비자를 위해 온갖 노동을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누구도 ‘가정주부화한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유연한 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게 더 괜찮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노동관계의 조직과 목적은 70년대 후반 나르사푸르의 여성 레이스 작업자들의 경우와 동일하다. ‘노동의 가정주부화‘는 자급과 자본 축적에 관한 우리의 논의에서 중요한 용어가 되었고 여전히 논쟁적 개념으로 남아 있다. - P182

사실 나는 결혼을 원치 않았다. 페미니스트로서 나는 결혼을 함정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도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혼인 신고 없이도관계를 유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이는 우리의 관계가 장거리로제한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아내로서 인도로 영구 이주하거나 인도에서 의존적 아내로 살기 위해 독일의 유급 일자리를 포기하고싶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적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나라로 이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친구들이 제국주의 국가에서 왔다고 나를 비난했을 것이다. 나는 서구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들의 억눌린 증오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이를 매일 경험하고 싶지않았다. 이것이 내가 결혼 후에도 독일에 머물며 1년에 한두 번 사랄만방문하기로 한 이유였다. 사랄 또한 인도를 떠나 독일로 이주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제 나는 우리가 관계 초기에 ‘장거리 결혼‘을 유지한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자문한다. 사랄이 독일로 이주한 것은 1982년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국, 하이데라바드 독일문화원의 보수가 높은 교사직을 떠나 독일로 와서 실업에 직면했다. 모두 나를 위해서였다. - P202

09 자급 - 미래를 위한 관점

나와 친구들은 함께 연구하고 세계 정치와 경제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며, 자급 관점은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의 출발점으로 적절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관점을 대표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일반적으로 자급은 빈곤, 저개발, 고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베로니카 벤홀트톰젠, 클라우디아 폰 베를호프, 나는 이 용어를 초기 여성 운동의 맥락에서 자본주의의 특징, 즉 재화의일반 생산과는 모순인 노동 및 생산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1970년대 후반 나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자급 또는 삶의 생산은 삶의 직접 유지 외에 다른 목적이 없는 일을 모두포함한다. 자급 생산은 상품 및 잉여 가치 생산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자 - P205

급 생산의 목적은 ‘삶‘인 반면 상품 생산의 목표는 ‘돈‘으로, 이 돈은 더 많은 돈 또는 자본 축적을 ‘생산한다.
이런 생산 양식에서 삶은 말하자면 우연한 ‘부작용‘일 뿐이다. 자본주의 산업 체제의 전형은 무상으로 착취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자연이나 천연자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3세계 농민의 노동뿐만 아니라 여성의 가사 노동, 자연의 모든 생산성 역시 포함된다(Mies and Bennholdt-Thomsen, 1999, pp. 20~21).

만일 인류가 상품 생산에만 의존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 그런다면 미래는 없을 것이다. - P206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은 세계 모든 시장의 개방을 목표로삼았다. 이는 가난한 국가의 농민뿐만 아니라 소규모 산업체도 망가뜨렸다. 이들은 서구와 달리 복지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않는다. 다국적기업은 이들의 곤경을 자양분 삼아 섬유, IT, 자동차 공장을 세우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지불한다. 이런 특별경제구역과 세계 시장용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최대 90퍼센트가 젊은 여성이라는 사실은임금 삭감의 본질은 성별 문제임을 보여주며, 이는 오늘날 성주류화(정책 기획의 초기 단계부터 성평등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을 파악하고 이를 전제로 모든 - P208

일반 정책과 제도를 시행하는 것. 1995년 베이징 유엔여성회의를 계기로 전 세계로 확대했다-옮긴이)에 대한 많은 논의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살충제와 인공 비료를 거부하고, 오래된 형태의 생태 농업을 고수하고 재발견하며, 전통을 지키고, 의식적으로 다국적 기업을 거부함으로써 자급의 기반-물, 유전적·문화적 다양성을 빼앗기는 데 저항하고 있다. 인도의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방글라데시의 파리다 아크테르(Farida Akhter), 아프리카 여성들은 여성이 저항을 조직하고 자급의 기반을 유지하는 최전선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P209

11 이후 운동과 캠페인

그러나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내 삶에 걸쳐 처음에는 한 방향으로 가다가 상황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 ‘붉은 실‘이 있다. 나는 이실을 꾸준히 따라갔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하던 장소로 되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는 많은 문제에 내가 - P227

처음에 인식한 것보다 깊은 차원이 있음을, 그리고 같은 문제가 다른역사적 맥락에서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마리아,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질문, 유토피아와 지배 체제의 대안에 관한 질문, 과학과 기술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그렇다. 이렇게 문제가 반복되는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을 세웠다. 어떤 것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다양한 논리와 체계를 미로나 구불구불한 강으로 묘사하려고 한다. ‘모든 면에서동시에(From all sides at once)‘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 P228

유전학자인 쾰른 대학교의 페터 슈타링거(Peter Starlinger) 교수가 쾰른응용과학대학교에서 유전공학의 이득과 위험에 대해 강의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느 시점에 자신이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Oppenheimer)처럼 반응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지 물었다.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후 핵분열을 발견하지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물음에 그는 "뭐, 후회하려면우선 그 일을 해야 할 겁니다"라고 답했다. 이 대답은 내게 주류 과학의 완전한 윤리적 파산을 보여주었다.
나는 과학이 여성 운동의 시작과 대조적으로 가치 중립성의 가정에따라 여성과 주체성을 배제하며 기초 연구에서는 원칙적으로 도덕성이없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덕과 윤리의 역할은 과학 연구의 적용에 한정한다. 윤리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할 뿐이라는 유전자 아카이브의 평가는 정확했다. 먼 장래를 내다보는 윤리는 기초 연구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 P235

12 여성 평화 운동에서 에코페미니즘으로

나는 성별에 따른 분업의 사회적 기원에 관해 처음 글(Mies, 1983b)을 쓰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상응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두 관계의 특징은 모두 위계, 폭력, 지배다. 유전공학 및 재생산 기술 반대를 비롯해 여성 운동과정에서 많은 사례를 통해 이 통찰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어떤 러시아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남성은 생명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자연과 적을 정복하고 싶어 합니다"(Mies and Shiva, 1993, p. 15). 핵미사일의 자국 배치에 항의하던 시칠리아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자연 및 외국에 대한 폭력 - P258

이후 나는 "체르노빌이 여성과 자연에 초래한 결과에 관한 회의에참석해 일본 페미니스트들도 ‘어머니‘ 문제로 분열했음을 알았다. ‘좌파‘ 페미니스트들은 이들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어머니로서 자기들만의 원자력 기술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고 비판했다.
‘어머니 문제‘로 많은 여성이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기술 진보를 여성 해방의 도구로, 비판 없이 바라보는 것이 명확해졌다. 보부아르가 - P260

생각한 해방은 여성이 월경, 임신, 출산을 의미하는 ‘야생의 성적 주기를 통제하고 정복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남성 세계의 문화적 성취배제당할 것이라는 이해에 기반한다. 보부아르는 통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도구뿐만 아니라 여성과 그녀의 신체 사이 관계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은 자신을 둘로, 즉 통제하는 머리인 ‘인간‘ 부분과 하체인 ‘동물‘ 부분으로 나누어야 한다. 이런 도구적 접근 방식에 대한 숭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서도, 특히 자기 몸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놀랍고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지금도 기술과 진보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보부아르의 도구적 해방 개념을 비판하자 내가 기술과 진보에 적대적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내가 환경 운동에 참여하고 서구식 소비 모델이 세계의곤과 환경 파괴의 원인이라고 고발하자 더 심해졌다. 나는 소비로의 해방: 생태적 페미니즘 사회를 향한 길》 (Mies, 1987a)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했다. 본의 소비자 이니셔티브가 이 책자를 출판했다. 나는 이런 비판이 오늘날 더 타당해졌다고 생각한다. - P261

몇 년 전 반다나가 남편,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쾰른에 있던 나를방문했을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반다나는 미국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하고 양자 이론에 관한 논문을 쓴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책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선물했다. 그녀는 나중에 썼듯이 이책으로 페미니즘에 눈떴다. 그때까지 그녀는 페미니스트도 생태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공동 저서 《에코페미니즘》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70년대 핵물리학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나는 여름 훈련 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특권 있는 소수인 원자력 관련 기관의 일원이라는 데 ‘도취해‘ 있었다. 그러나 의사인 여동생은 핵의 위험성에 대한 내 무지를 폭로해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우리는 핵 전문가로서 핵반응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았지만 방사선이 생명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지못했다. 방사선 감지용 배지와 보호복은 단지 회원제 클럽에 가입했음을 상징하는 의식용 복장에 불과했다. 신진 핵물리학자로서 내 무지를 깨달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고 속았다고 느꼈으며 이론물리학 연구로 전환하게 되었다(Mies and Shiva, 1993, pp. 22~23).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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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우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여성성의 신화》(1963)
생각에 대한 욕망

04 인도로 출발하다

이런 움직임은 영국 통치하에서도 여러 사법 개혁으로 이어졌다.
1795년과 1802년 벵골에서는 여아 살해를 법으로 금지했다. 또한 1829년에는 사티를 금하고 1856년에는 과부의 재혼을 허용했다.
마하라시 카르베는 이런 개혁주의 사상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도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 아들 돈도 카르베는 이라바티의 남편이 되었다. 마하라시 카르베는 푸네에 미망인을 위한 학교를, 뭄바이에 인도 최초의 여성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한국의 이화여자대학교와 함께 당시 세계 최초의 여대였다. - P120

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역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이라바티 카르베와 같은 강한 인도 여성들이나, 힌두교나 이슬람교의 가부장적 규범에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더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여학생들에게 감명받았다.
소규모 실증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남성 대부분은 자기 경력을위해 독일어를 배운다는 것이었다. 반면 여성 상당수는 어학을 공부하면서 혼담을 미루기 위해 푸네에 왔다.
인도에 처음 체류하는 동안 내게 생긴 의문은 한편으로는 사회 규범,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 여성들의 실제 행동에 대한 것이었고 독일로 돌아와 이를 논문 주제로 삼았다. - P121

푸네 독일문화원에서는 이런 봉기에 대해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비정치적이었고, 계급·카스트·가부장제 체계와 그 결과를 목격하고 경험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나중에는 "일단 계급 투쟁을 보았다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마르크스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같은 일이아니라는 사실을 페미니스트가 되어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
이것도 푸네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사서인 파렉(Parekh)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신이나 내 코앞에 책을 한 권 들어 보였다. 바로 미국에서 여성 운동의 시작을 알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의 《여성성의 신화》(1963)였다. 파렉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이 그녀에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었고 인도와 독일에서 관찰한 많은 것이 분명해졌다. 또한 앞으로 여성해방이 나의 주제가 될 것임을 깨달았다. - P127

05 고향에 돌아오다 - 새로운 연구와 교육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항상 앞으로, 뒤로는 절대(FORWARD EVER-BACKWARD NEVER)‘라는 좌우명에 따라 세계로 뛰어들었다. 이 신조는1960~1970년대 전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뒤로 가야하나? 그럴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뭘 할 수 있을까? - P130

나는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전후 서독의 많은 젊은이처럼 나도 역사에서 이 부분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1960년대 학생 운동으로 이 주제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었다. 나는 큰 흥미를 느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Marx and Engels, 1845a)와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1845b)를 읽었으며, 후자에서 독일의 이상주의를 비판한 부분이 영감을 주었다. 특히 그의 제11 테제는 주요한주제가 되었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Marx, 1845b, pp. 14~15).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제와 《독일 이데올로기> 전체가 새 시대의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전의 관념론적 개념을 버리고 교회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명확한 이론적 토대를 발견했으며, 형이상학적 관점을 역사적·유물론적 관점과 맞바꿨다. 또한 모든 종교가 역사 속에서 발전했다는 것과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 주요 종교가 왜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억압하는지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억압과 고통을 겪었지만 전에는 이 경험을 설명할 개념이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제공했다. - P133

우리 여성에게는 신이 없다 - P144

뭄바이에서는 타타사회과학연구소(TISS) 교수인 수마 치트니스(SumaChitnis)가 여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녀는 내 논문에큰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가 자기 계급과 계층의 여성들이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였기때문이었다. 그들은 아내, 며느리, 어머니 역할과 학생, 노동자, 정치활동을 하는 여성의 역할을 결합했다. 이런 여성의 역할 다양성은 당시 독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델리에서 학생을 비롯한 여성들을인터뷰할 때에도 같은 현상을 목격했다. 인도의 미혼 여성은 생존 수단도 사회적 지위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부분이 직업을 갖고 싶어했다. 내가 놀란 점은 이 가부장적 국가에 교수와 고위직으로 일하는 여성이 독일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었는데, 더욱 놀라운 점은 남성이 여성상사 ‘아래서 일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전체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인도는 특히 가부장적인 국가로 보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그럴 때면 인도 여성은 ‘강한 여성‘이 - P149

고,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특권층 또는 그런 카스트에 속한다고 답했다. 나는 오늘날 인도 남성들이 인디라 간디와 같은 ‘강한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도 사회의 기본구조가 여전히 모계 중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중시하는 유산은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 P150

우리 교수진의 프로젝트 과정에서 혁신성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학생들에게 집단을 형성해 (처음에는 프로젝트 집단에 남녀가 함께 있었고 여성만의 프로젝트는 없었다), 청년 노동, 성인 교육 및 훈련, 노숙자 관련 분야, 나중에는 여성 및 사회교육 분야에서도 진행할 프로젝트를 선택하도록했다. 기존 기관의 전통적 인턴십과 달리 우리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만들어야 했다. 즉 이들의 활동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뿐만아니라 해방적 특징이 있어야 했다. 또한 이런 프로젝트의 해방적 목표는 대상 집단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적용했다. 내가 이해하기로 집단 작업, 공동의 실천과 성찰, 프로젝트 보고서를 위한 협력은 파울루프레이르가 말한 것처럼 자유의 실천이었다. 이 프로젝트 기반 연구 과정은 대학을 지배하던 개인주의와 경쟁에 대한 압박을 극복하는 효과적 방법이었고, 학생들은 사회 문제에 대해 직접 배울 수 있었다. 이는팀워크를 위한 역량과 사회적 창의력을 기르고, 이론적 통찰력을 얻기전에 경험적 지식을 습득하고, 이론 연구에 현장이 필수적임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나는 이론을 먼저 배우고 이를 실행하는 기존 순서를 뒤집은 것이었다. 내게는 현장이 이론에 선행한다. - P152

06 여성 운동

쾰른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은 내게 우리 사회의 실상, 즉평화롭다고 생각하는 중산층 가족의 허울 뒤에 얼마나 많은 폭력, 특히 우리의 행동 이전에는 언급이 금기이던)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숨어 있는지 눈뜨게 해주었다. 또한 나는 일반적으로 ‘객관적 과학‘이라고 받아들이는 분야에서 이런 현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여성임을 가시화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성들은 주로 남성인 사회과학자들에게자신에게 고통을 준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수치심 때문인 경우가 많았고 의사나 경찰이 그들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사회과학자로서 밤낮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오는 분노와 걱정을 받아들이고, 이를 바꾸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행동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곧 전통적 • 경험적 • 정량적 사회 연구 방법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연대, 과학자이자 이론가로서의 주관성은 ‘객관적 과학‘에서 금기였 - P169

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을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나만의성 연구 방법론을 개발했다. 객관성에 대한 잘못된 주장과 함께 널리퍼진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 연구"(Huizer, 1973)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위한 방법론의 일곱 가지 기본가정을 개발했다. 이는 쾰른 폭력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의 경험에서 발전했다. - P170

쾰른의 폭행 피해 여성 쉼터를 위한 투쟁은 정치, 과학, 이론, 방법론과 관련해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후 내가 모든 연구, 교육, 정치적 투쟁에서 실천한 실행 연구는 우리가 연구하는 사람들을 대상이 아니라 공동연구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방법은 내 평생에 걸쳐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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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세계가 문을 열다 - 행복한 우연

내가 사랑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랑해야 이해할 수 있다는것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한 말처럼 "사람은 마음으로만 명확하게 본다." 내 친구 클라우디아 폰 베를호프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사물이 매우 다르고 분열되고 낯설게 보여도 사실 서로 연결된다는 이 통찰은 내 삶에 걸쳐 이어졌다. 내 ‘위대한 사랑‘ 이야기에 향수병과 타국에 대한 동경이라는 두 가닥의실이 합해졌다. ‘타자‘ ‘낯선 사람‘은 사르트르가 쓴 것처럼 ‘적‘ ‘지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자 ‘천국‘이다. 아득한 사랑은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내 사회 비판의 핵심이 되는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알려주었다. 이 용어는 사랑 이야기로 인해 내게 처음부터 명확한 국제적 차원이 있었다. 그러나이상주의적 사랑의 개념을 버리기까지는 최종 시험을 치르고 나서도 수년이 걸렸다. 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면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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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우리 마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를 따라 했다. 타보 디디는 일꾼이 많이 필요한 가을에 곡식 타작을 도왔다. 우리 집에서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그들은 항상 좋은 이야기와 농담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열심히 들었다. 나는 타보 디디의 이야기 하나를 기억하는데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펠 방언으로 말한 철학적 결론은 기억한다. "인간이 되는 건 쉽지 않아요."
중학교 때 작문 숙제를 하면서 이 문장을 제목으로 타보 디디와 필요한 만큼만 일한다는 그의 철학에 대해 썼다. 독일어 선생님은 이 글을너무나 좋아해 가지고 다니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인용했다. - P54

그런데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났을까?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삶은어떻게든 계속될 거야"라고 혼잣말만 하지 않았다. 또한 기독교인 농부의 아내지만 "주님께서 베풀어주시겠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살기 위해 자연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것을 알았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소망, 열정, 철학이었고 그녀에게 용기와 활력을 주었다.
어머니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생태학이라는 단어도 몰랐지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큼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삶이 계속되려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함을 깨달았다. 오늘날 우리는 삶이그저 ‘자연스럽게‘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생태학적 재난의 증가는상품과 자본의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현대 산업 사회가 스스로 회복하는 자연의 능력을 파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인간,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비롯해 다른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특히 전쟁과 재난 이후-딸, 아들, 남편, 자연을 위해 삶이 계속되도록 책임진 사람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들이었다. 남성이 자연과 외국인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 그 뒤를 치우는 것은 여성이다. 우리는 가부장적 전쟁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그런 전쟁이 더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싸워야 한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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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자아도취?
고백건대, 나는 스스로를 좋아하며 내 삶이 정말 흥미로웠다고-그리고 지금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죄책감이나 공포감을 그다지느끼지 않고 농부의 자녀라는 열등감에 빠진 적도 없다. 이는 우리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라거나 옆집 아이들을따라잡으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은 덕분이다. 부모님은 학교 성적표에관심조차 없었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 충분하며 ‘더 나은‘ 사람이 돼야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이었고 상류층이 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이 우리에게 어떤 야심도 갖지 않은 것에 언제나 감사한다.
내 학창 시절 선생님들은 자신감을 키워주고 마을 밖에 존재하는 세계, 문학·외국어·철학·정치에 눈뜨게 해주었다. 그러나 나를 먼 세계로 떠나게 한 것은 외국인, 즉 파키스탄 선원을 향한 사랑이었다. 나는이 사랑 이야기에서 지금 아는 것을 모두 배웠다.
이 사랑 이야기가 내가 일찍부터 국제주의자가 되고 마르크스주의를발견한 이유였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제11테제, 즉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는 현재도 내 좌우명이다. 사랑은 사르트르의 생각처럼 타자가 ‘지옥‘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반대로 나는 그들이 삶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랜 권력 체제가 세운 장벽,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자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가부장적 지배에 관해서도 배웠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는 말은 이 장 - P13

벽에 대해 분석하고자 하는 욕구뿐만 아니라 활동가이자 학자로서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충동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를 여행했지만 나는 작은 마을의 농민 가족 출신임을 잊은 적이 없다. 이는 과도한 낭만주의와 돈키호테식 이상주의에서 나를 보호해주었다. 나는 식량이 슈퍼마켓이 아니라 흙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내 뿌리는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의 약속에 대한 면역력을 주었다. 세계화한 마을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이 약속은 ‘좋은 삶‘을 주지 못했다. 나는 삶을 통해 자급이 지구의 현재와 미래에 마을과 세계에서 삶을 유지할 단 하나의 희망임을 배웠다. - P14

01 고향

어머니의 낙관주의와 삶에 대한 의지는 구체적 사실에 기초했다. 그녀는 몸과 영혼이 건강했고 돈이 부족해도 비관하지 않았다. 그녀를 생각하면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가 남아메리카 빈민가에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가 떠오른다. "가난한 사람은 비관할 여유가 없다. 비관주의는 부유한 사람들의 사치다." - P34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삶을 되돌아보았고 "좋은 삶 아니었나?"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아는 큰언니 아그네스는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당신의 삶이 실제보다 더 좋게 보였으면 하신 것 같다고이야기했다. 언니는 어머니가 거의 매년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고, 온갖 말과 노래로 달래고, 기저귀를 빨고, 화목 난롯가에서 요리하고, 오트밀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았다. 비록 시간이 가면 손위 아이들이 어린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지만 보살핌의 부담은 여전히어머니의 어깨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행복한 삶‘이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는다.
이 ‘행복한 삶‘에는 내가 어릴 때 한 해 농사에 질서를 부여한 일요일과 휴일뿐만 아니라, 자연·일의 흐름. 가축을 포함해 일에 쓰는 ‘도구‘가 좌우하는 휴식의 기간도 들어갔다. 이때 우리는 부모님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우리친척은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무슨 경험을 했는지 궁금했다. 우리는이런 식으로 일찍부터 우리 가족과 마을의 역사, 나중에는 ‘더 큰‘ 세계사를 친숙하게 느끼는 감각을 키웠다. - P37

새로 경작한 땅에서 손으로 작업하면서 감각의 즐거움을 생생하게느낀 기억이 난다. 봄에 감자를 심는 일도, 수확 철인 가을에 예쁜 햇감자를 주워 모으는 일도 부담인 동시에 기쁨이기도 했다.
이런 작업은 꼭 필요했다. 이는 공장에서 하는 것처럼 소외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일의 과정을 모두 배웠고 그 결과물은 우리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일은 우리 존재의 기반이었다. 그럴 때 일은미가 생긴다.
일의 필요성에 대한 이런 통찰-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을 것이없다-은 지나치게 반발하지 않고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의 개념이 그 부담과 기쁨을 동시에 나타내도록 유지하고 재정립하는 것은 여전히 나의 중요한 정치적 목표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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