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거리 헤매기 -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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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사러 간다는 핑계로 외출하여 런던 거리를 헤매자. 울프를 따라 중고서점에 들러 연필을 사자. 햄릿을 읽자.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보고 여기 저기 쏘다니고 사람들과 건물들과 자연을 관찰하자. 집안의 천사도 함께 죽이고.
첫 꼭지인 표제작과 마지막 꼭지인 [여성의 직업]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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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에 관하여

질병은 얼마나 흔한 것인지, 병이 일으키는 정신적 변화는 얼마나 엄청난지, 건강의 빛이 스러질 때 드러나는 미지의 영역은 얼마나 놀라운지, 약한 독감에 걸리면 얼마나 황폐하고 삭막한 영혼이 드러나는지, 체온이 조금 오르면 어떤 절벽과 풀밭이 화사한 꽃들로 어른거리는지, 병을 앓을 때면 우리 내면의 얼마나 굳센 참나무 고목들의 뿌리가 뽑히는지, 이를 뽑을 때면 어떻게 죽음의 구덩이에 굴러떨어져서 머리 위로 차오르는 소멸의 물결을 느끼다가 천사들과 하프 연주자들이 눈앞에 있을 거라고 느끼며 깨어나서는 치과의 의자에 앉은 채 수면으로 떠오르다가 "입을 헹구세요. 입을 헹구세요."라는 치과의사의 말을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환영하는 신의 인사로 착각하는지를 생각해 볼 때,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을 자주 해야 하므로, 이런 일과 무수히 다른 것도 생각할 때, 질병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로서 사랑이나 전쟁, 질투옆에 놓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참 이상하다. - P66

여성의 직업

글을 써서 받은 보수로 페르시아 고양이를 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있을까요? 하지만 잠깐 기다리세요. 글은 무엇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내 글은 어느 유명한 남자의 소설에 관한 것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것을 쓰는 동안 책을 논평하려면 어떤 환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환영은 여자였지요. 그녀를 잘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유명 - P131

한 시 「집안의 천사의 여주인공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 주었습니다. 내가 논평을 쓸 때면 그녀가 나와 내 글 사이에 끼어들곤 했지요. 나를 성가시게 하고 시간을 허비시키면서 몹시 괴롭혔기에 마침내 나는 그녀를 죽였습니다. 더 젊고 더 행복한 세대에서 자라난 여러분은 그녀에 대해 들어 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집안의 천사가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요. 가급적 간단하게 그녀를 묘사해 볼까요? 그녀는 강한 공감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단히 매력적이지요. 지극히 이타적입니다. 가정 생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매일매일 자신을 희생합니다. 닭고기가 나오면 다리를 집습니다. 외풍이 들어오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앉지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 나름의 마음이나 소망이 전혀 없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소망에 공감하도록 생긴 여자입니다. 무엇보다도(이 말은 할 필요도 없지만) 그녀는 순결합니다. 그녀의 순결함은 그녀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그녀의 홍조는 그녀의 큰 기품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의 말기에는 집집마다 천사가 있었지요. 내가 글을 쓰게 되었을 때 처음 몇 단어를 쓰자마자 그녀와 맞닥뜨렸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종이에 그녀의 날개 그림자가 드리워졌지요. 그녀의 스커트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습니다. 내가 유명한 남자의 소설을 논평하려고 펜을 손에 쥐자마자 그녀는 미끄러지듯 내 뒤에 와서 속삭였습니다. ‘얘야, 넌 젊은 아가씨야. 남자가 쓴 책에 관해서 쓰고 있구나. 공감을 보이렴. 다정하게 대하고, 아첨도 하고 속이려무나. 우리 여성의 온갖 기교와 간계를 발휘하렴. 네게 자기 나름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무나.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해.‘ 그 - P132

러고 나서 그녀는 내 펜을 잡아 이끌어 가려는 듯했습니다. 이제 내가 언급하려는 행동은 어느 정도 내 공이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 공은 내게 일정한 수입(연간 500파운드라고 할까요?)을 물려줘서 내가 생계를 위해 순전히 매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해준 훌륭한 조상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고 그녀의 목을 움켜잡았지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죽였습니다. 내가 고발당해 법정에 선다면, 내 행동은 자기방어였다고 변명할 겁니다.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나를 죽였을 테니까요. 그녀는 내글에서 심장을 잡아 뽑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펜을 종이에 대는 순간 알았듯이, 자기 나름의 마음이 없다면, 인간관계나 도덕, 성에 관해 진실이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할수 없다면, 소설에 대해서도 논평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여자는 이런 문제들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룰 수 없다고 집안의천사는 주장합니다. 성공하려는 여자는 상대를 매혹하고, 회유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나는 그녀의 날개 그림자인지 빛나는 후광이 내 종이에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잉크병을 들어 그녀에게 던졌습니다. 그녀는 여간해서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허구적 성격이 그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지요. 환상을 죽이기는 실체를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우니까요. 내가 그녀를 해치웠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늘 되돌아왔습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죽였다고 우쭐해했지만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와야 했습니다. 그많은 시간에 그리스어 문법을 배우거나 모험을 찾아 세계를 방랑했더라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는 경험이었지요.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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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거리 헤매기

자아의 직선 길을 벗어나 오솔길로 일탈하는 것보다 즐겁고 경이로운 일이 있을까! 가시밭과 두꺼운 나무 밑을 지나 우리 인간이라는 저 야수들이 사는 숲의 오지에 이르는 오솔길을.
그것이 사실이다. 달아나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다. 겨울날 거리를 헤매는 것은 가장 큰 모험이다. 그렇지만 우리 집층계에 다시 다가가면서 옛 소유물이, 옛 편견이 우리를 감싸고, 거리의 수많은 모퉁이에서 흩날렸고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등불에 부딪힌 나방처럼 부딪쳤던 자아를 보호하고 에워싸는 것을 느끼면 편안해진다. 여기에 다시 익숙한 문이 있다. 여기에 우리가 두었던 대로 의자가 돌려져 있고 수반과 카펫의 갈색 고리 자국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다정하게 살펴보고 경건하게 만져 보자.) 도시의 보물더미에서 건져낸 유일한 전리품, 연필 한 자루가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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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정원을 나가는 길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 세기는 19세기였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새 보금자리는 그래스미어라는 작은 호반 마을 끝자락의 한 오두막집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기운찬 남매는 윌리엄즈워스(William Wordsworth)와 도로시 워즈워스(Dorothy Wordsworth)였다. - P136

두 사람이 북부 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 그리고그 전에도, 그 후로도 또 다른 여러 곳을 걸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일이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은 전에도 있었다. 더 먼 길도 있었고 더 험한 길도있었다. 영국 시골 지역에서 가장 험한 풍경들(산맥, 벼랑, 황야, 폭풍, 바다, 그리고 폭포)이 경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 시인 남매가 태어나기 거의 30년전부터였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정인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른 것은 19세기가 시작되기 14년 전이었다. 많은 평자들은 워즈워스와 그의동행들이 보행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으로 만들었고, 이로써수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1세대 낭만주의자들이 보행 그 자체를 위한 보행, 즉 자연 속을 걷는 즐거움의 계보를 만들었다는것, 이로써 문화적 행위로서의 보행과 예술적 경험으로서의 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P137

19바뀌었다. 크리스토퍼 허시(Christopher Hussey)는 스토 저택(휘그당의 정치적 수도)이 정치를 정원 건축으로 옮겨놓았다고 말한다. "양식화된 설계가 느슨해지면서, 정원의 자연이 그 시대의 인본주의와 한편이 되었고,절도 있는 자유에 대한 신념과 한편이 되었고, 자연스러운 것들에 대한존중과 한편이 되었다. 또한 사람 한 명이든 나무 한 그루든 개체에 대한믿음과 한편이 되었으며, 정치가의 독재든 원예가의 독재든 독재에 대한혐오와 한편이 되었다." 그 시대의 훌륭한 조경 건축가 대부분이 이정원에서 일했고, 수많은 훌륭한 시인들과 작가들이 이 저택을 방문했다. 스토 정원은 한 번 고쳐질 때마다 수십 에이커씩 주변 토지를 합병하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어느 정원 역사가가 요약하듯 "30년 사이에 그의 취향은 계단식 잔디밭, 조각상, 직선로의 규칙적 배치를 선호하는 취향에서 […] 삼차원의 풍경화로, 이상적 자연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취향으로 바뀌었다." - P151

한때 견고한 요새의 일부로 설계되었던 귀족계급의 정원이 바깥세상과의 경계를 서서히 없애나갔다. 정원이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갔다는것에서 알 수 있듯, 그 무렵 잉글랜드는 과거에 비하면 많이 안전해진 곳 - P153

이었다.(서유럽의 여러 지역들도 잉글랜드만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안전해졌고, 영국 정원의 유행도 곧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길이 좋아지고 노상 범죄가 줄어들고 여행 경비가 저렴해지는 ‘교통 혁명‘이 일어난 것은 대략1770년 이후였다. 여행의 성격 그 자체를 바꾸어놓은 변화였다. 18세기중엽 이전의 여행기들에는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랜드마크 사이의 길에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데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완전히 새로운방식의 여행이 생겨났다. 성지순례나 실용적 여정에서 가는 길은 고생스러움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감상의 대상이 되면서 여행 그 자체가모종의 목적이 되었다. 정원 산책의 연장이 되었다고 할까. 여행길의 경험 그 자체가 목적지로의 도착을 대신해서 여행의 목적이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자연 전체가 목적지였으니, 이렇게 감상이 가능한 세상, 정원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세상에서는 출발이 곧 도착이었다. 보행이취미가 된 지는 오래였지만, 여행이 취미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걷는 여행 그 자체가 자연을 감상하는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확산되고 느린 여행 자체가 미덕으로 자리 잡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가난한 시인이 여동생과 함께 눈의 즐거움과 두 다리의 즐거움을위해 설원 크로스컨트리를 감행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P154

그림 같은 풍경의 강조나, 자연 관광의 등장은 자연 취향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 같지만, 이것들은 모두 18세기의 산물이다. 시인 토머스 그레이(Thomas Gray)는 1769년에 레이크 지방을 여행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로부터 2년 전에 처음으로관광객이 이 지역의 자연을 감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레이 역시 이지역의 자연 감상 기록을 남겼다. 18세기 말에 관광지로 자리 잡은 레이크 지방이 여전히 관광지로 남아 있는 것은 실제로 길핀과 워즈워스와나폴레옹 덕분이다. 예전이었으면 해외로 나갔을 영국 여행자들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혼란 탓에 자국 관광을 시작한 것이다. 관광지까지의 이동 수단은 처음에는 마차였고 나중에는 기차였다.(더 나중에는자동차와 비행기였다.) 여행안내서를 읽고, 자연을 둘러보고, 기념품을 사는 패턴이었다. 관광지에서의 이동 수단은 보행이었다. 처음에 보행은 최고의 전망을 찾기 위한 부수적 이동 수단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기가바뀔 무렵에는 보행 중심의 관광 상품이 생겨났고, 도보 여행이니 등산이니 하는 것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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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딜락, 미로, 기억 궁전, 신곡

5장 미로와 캐딜락: 상징으로 걸어 들어가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 P116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미로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모종의 여정을 상징한다. 통과의례의 여정 또는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고, 구원의 여정 또는 구혼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다. 그저 여정의 복잡함(길을 찾아가는 어려움, 길을 깨닫기까지의 어려움)을 상징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는 미로가 많이 등장한다. 크레타 섬에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전설의 미로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쓰는 동전에는 크레타 미로의 형상이 찍혀 있다. 실제로 발견 - P120

된 미로들도 있다. 사르데냐에는 바위 미로가 있고,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에는 돌사막 미로가 있다. 로마인들의 모자이크 미로도 발견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땅에 돌을 놓아 만든 유명한 미로가 500개가량 있다.(20세기까지 어부들이 출항하기 전에 미로를 걸으면 고기가 많이 잡히고 순풍이 분다는 믿음이 있었다.) 잉글랜드에는 잔디 미로가 있다. 미로는 젊은이들이 에로틱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예컨대 여자가 중앙에 가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달렸다. 미로의 굽이굽이 도는 길은 구애의 복잡함을 상징했다.) 잉글랜드에서 훨씬 더 유명한 미로로는 르네상스 정원의 미로를 후대에 귀족적 형태로 변형한 산울타리 미로가 있다. 미로에 대한 글을 쓴 많은 저자들은 미궁(maze)과 미로(labyrinth)를 구별하면서 대부분의 정원 미로를 미궁(maze)에 넣는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것이 미궁의 목적인 반면에, 미로(labyrinth)의 길은 하나뿐이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미궁이 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반면에 미로는 구원으로 가는 확고한 여정을 뜻한다는 것도 미로와 미궁의 차이다. - P121

이제는 책이 기억 궁전 대신 정보 저장소가 되었지만, 아직 책에는기억 궁전의 몇 가지 패턴이 간직돼 있다. 길이 책을 닮을 수 있듯, 책도 길을 닮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단테의 신곡은 그 최고의 예다. 영혼이 죽어서 가게 되 - P130

는 세 장소를 여행하면서 베르길리우스라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종의 저승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단테는 여행자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멋진 장면과 흥미로운 인물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 예이츠는이 걸작이 실은 기억 궁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실제로 이 책은 지형지물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곡의 여러 판본에 저승의 지도가 포함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곡을 여행기(『신곡보다 먼저 나오거나 늦게 나온 무수한글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장르)로 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이 걸어가는 길이 곧이야기의 길이 되는 것은 『신곡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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