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 - 청소년들아, 김만중을 만나자 만남 4
김만중 지음, 무돌 그림, 림호권 옮김, 박소연 / 보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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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글로 소설을 쓰는 남자사람 양반이라니. 서포 김만중도 시대와 불화한 사람이구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영광을 얻는 권선징악적 구도에 꿈에 나타난 귀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옛이야기지만 의외로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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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시종의 물음에 다만 한숨만 길게 쉬더니 자기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목숨이 길지 짧을지, 복이 많을지 불행이 많을지는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제 내 신세를 생각하면 불행을 내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옛말에 ‘하늘이 만든 불행은 피할 수 있어도 자신이 만든 불행은 피할 수 없다‘ 하였다. 누구를 탓하겠느냐. 이제 내 어디로 가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겠느냐."
어린 시종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말을 골라 부인을 위로하였다.
"옛날 영웅들과 지조 높은 부인들도 곤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니다. 지금 아씨께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밝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굽어살피고 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바람이 검은 구름을 몰아내어 해와 달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찌 잠깐의 불행으로 귀중한 몸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 P91

<사씨남정기》가 쓰인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김만중이 남해에 유배되었을 때로 짐작된다. 홀로 지낼 어머니가 걱정된 김만중은 글 읽기를 즐기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소설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이 뒤에는 다른 의도도 숨겨져 있다.
당시 숙종은 첫 왕비가 죽자 새로운 왕비 인현왕후를 맞이했다. 인현왕후가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 숙종이 총애하는 후궁 장씨가 아들을 낳고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아직 인현왕후가 젊기에 성급하게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끝내 장 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 씨의 지위를 희빈으로 높였다. 줄곧 반대하던 서인 세력은 결국 파직되거나 유배 보내졌다. 결국 인현왕후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서인 세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던 김만중 또한 유배를 가게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사씨남정기》의 등장인물을 당시의 실제 인물과 연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총명함과 판단력을 잃었던 유연수는 숙종을, 현숙한 정실부인이었으나 쫓겨나게 된 사정옥은 인현왕후를, 첩으로 들어와 아들을 낳았으나 사정을 쫓아내려고 갖은 악행을 저지른 교채란은 장희빈을 떠올리게한다. 당시 사람들도 이 소설을 읽고 우리와 같은 것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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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낫짱, 김하강입니다
김송이 지음, 김두현 그림 / 보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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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의 조선인 차별 뿐만 아니라 만국에 공통된 계급 차별 여성 차별에도 눈 뜨는, 차별에 폭력으로 맞서기보다 배움으로 깨우쳐 나가는 재일조선인 여성 청소년의 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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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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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인가 에세이인가. ‘하얀’이 아닌 ‘흰’ 것에 대한 한강 작가 단상을 따라가며 한강 작가의 속도 대로 천천히 읽게 된다. ‘흰’에는 고요한 슬픔이 잔잔히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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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
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 P55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깨달은 것 같은 마음.

그럴 때 거울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그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서먹서먹했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P96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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