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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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울 것 같아서 책을 들지 못하고 몇 달 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막상 다시 읽으니 울음이 나지 않았다. 요즘 눈물이 없어져서인가. 각오를 해서 인가. 읽는 내내 무척 담담하게 읽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끈질기게 묻는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기억에 대해. 인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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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 P134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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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지전 보리 어린이 고전 16
김청엽 지음, 이서영 그림 / 보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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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도 유분수쥐. 과연 이렇게 개과천선 가능할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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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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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죽음을 끌어안고 사는 그들.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그들. 20대의 그들. 그들의 청춘.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가야 할 여수가 있다. 타야 할 야간열차가 있다.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달리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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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이윽고 자흔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일 밤, 열시 삼십오분 차예요. - P42

어둠의 사육제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그 중년 여자에게 친밀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날 나는 지하철에서 발을 밟혔다. 나는 머쓱한 얼굴을 한 그 발의 주인을 매정스럽게 쏘아보았다. 자선을 요구하면서지나가는 노인과 고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토큰 하나라도 그들에게 쥐여주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던 기억들을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처럼 회상했다. - P92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진짜 삶이 과연 한 발 한 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던 바로 그때 인숙언니는 떠났다. 나는 그녀로인해 내가 잃은 것이 돈과 신뢰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느끼고 있었다.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질주

인규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달리는 일이었다. 그는 고교 시절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일등을 하곤 했다.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는 매일 아침 독신자 아파트의뒷산에 난 등산로를 달리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도 그는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규는 계속해서 달리고 싶었다. 달리다가 숨이 차서 고꾸라지고 싶었다.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먹고 마셔온 것을 모두 토해낸 뒤 앰뷸런스에 실려 가고 싶었다. 인규는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죽을 때까지 마냥달리고만 싶었다. - P205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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