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가을호 - 통권 1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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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임에도 낮 기온이 20도에 이르는 이 가을에 기후위기에 대한 글들 만큼이나 트럼프가 당선된 이 시점에 반민주적인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아닌 추첨제, 시민의회 등 대안적 정치제도에 대한 글들이 주는 울림이 크다. 다음 호에선 트럼프로 인해 촉발될 여러 위기들이 언급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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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_기후위기 시대의 중심 가치, 돌봄

기후위기 시대에 돌봄에 대한 또다른 인식의 전환은 돌봄의 대상을인간에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미성에 의하면 기후돌봄은 ‘생태적 돌봄‘으로서, 돌봄을 비인간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난잡한 돌봄‘이라고 명명하는데 그 뜻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다. ‘난잡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식의 행동을 뜻하는데, 그만큼 인간, 비인간을 가리지 않고무차별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용어다.
이때 돌봄의 대상은 심지어 생물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즉 사물도 돌봄의 대상이 된다. 우석영이 소개한 철학자들은 사물도 생물처럼 잠재역량과 생기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제인 베넷에 의하면, 물질의 구멍, 즉 "결정 사이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원자들의 진동이바로 사물의 생기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행위주체라는 점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그것이 어떤 성격의 물질이든 존재론적 위계구조상에서 우열의 위치를 점하는 자들일 수는 없다. 우석영에 의하면 이러한 신유물론적 사유는 "거의 모든 종류의 차별을 그 밑바닥부터 붕괴시킨다." - P235

손우정_민주주의의 근원에 다가서기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근원적 의미, 본질은 무엇일까? 고대에는 이것이 명확했다. 민주주의의 어원 그대로 ‘민중의 지배‘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이 동일하다는 원리, 내일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있는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발상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고 있는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선거는 귀족정을, 추첨제는민주정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급진적‘이라는 말과 ‘근원적‘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현실의 민주주의를 계속 급진화하면, 그 궁극적 지향과 가치는 근원적 민주주의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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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음_공유지에서 살아가기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집의 주인이 되기를 사양했다. 손님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렇지만 그들보다 좀 오래 머무르는 장기투숙객으로 살기로 했다. 우리끼리는 구구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고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던 설정이었다. 그리고 재미가 없어지면 바꾸면 될 것이었다. ‘빈집‘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몰랐다, 우리가 시작하는 일은 구현하기도 어렵지만 쉽게 포기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빈집‘의 원칙은 나중에야 언어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공유, 자치, 환대였다. - P189

키키는 건물 이름이자 공동체의 이름인데, 웃음소리에 친구와 친족(kith and kin)이 되어 함께 살자는 뜻을 담아 만든 이름이다. 혈연도 아니고 같은 공간에 살지 않아도 같은 종족으로 살자는 의미에서 키키족으로 부르기도 한다. - P195

강수돌_인간노동, 인공지능, 가치원천

K. 맑스의 《자본》은 자본주의 상품가치의 원천이 인간노동임을 명확히 했다. 왜 그런가? A. 칭의 <세계 끝의 버섯>처럼, 황폐한 숲속에서 돋아나는 송이버섯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가치가 없다. 사람이 힘겹게 숲속을 헤매다 땅바닥 솔잎을 조심스레 들추어야 송이버섯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잘 따서 깨끗이 정리한 다음 시장까지 잘 날라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된다. 산속의 송이 그 자체는 상품이 아니며 가치 개념도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에 인간노동이 가해지고 시장 거래 대상이 되어야 비로소 상품이 되고 가치를 갖는다. 만일 자연산 송이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면, 손쉽게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할 것이다. 그게 양송이버섯, 새송이버섯이다. 자연산 송이에 비하면 양송이나 새송이는 훨씬 싸다. 즉, 상품가치는 인간노동량에 따른다(가치공식 1). 그리고, 노동량이 많이 든 상품은 가치가 높아 더 많은 화폐와 교환되고, 노동량이 적은 건가치가 낮아 더 적은 화폐와 교환된다(가치공식 2). - P200

요컨대, 가치의 원천은 인간노동이다. 인간노동이 없다면 가치는 생산되지도 재현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한다. 그런데 각종 자본주의적 혁신은 결국 노동효율을 증가시키지만 두 가지 면에서 자기모순에 이른다. 첫째는 가치공식8처럼, 무한대를 향한 가치 증식 욕망이 각종 기술혁신을 추진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상품 단가를 무한소로 축소하기에 갈수록 마진(잉여가치)이 얇아진다는 모순이다. 가치 증식 욕망의 무한대 경향과 가치 축소 현실의 무한소 경향이라는 자가당착! 둘째는, 각종 혁신의 결과 노동효율이 높아지는 경우, 이것이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엔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즉 잉여인간만대량 방출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기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바로 그 열심히 일한 결과 스스로 해고 대상자로 내몰리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런 일이 설사 한 기업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보면 더욱 뚜렷하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 소득 불평등뿐 아니라) 한쪽에서는 실업이, 다른 쪽에서는 과로가 상존하는, 지극히 불합리한 노동 불평등이 전 사회적으로 관철되기 때문! - P203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 사회학자 마리아 미즈의 ‘빙산 모델‘이나 영국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스의 ‘도넛 경제‘가 눈길을 끈다. 이들은 우리가 아는 노동-자본 관계는 (눈에 잘 보여 GDP로 산입되지만)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빙산 아래엔 더 어마어마한 덩치가있는데,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무시당한다. 그것은 비공식 부분, 자급농부, 가사노동, 식민지와 제3세계, 그리고 자연 등이다. - P205

정형철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소비지상주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그야말로진정한 ‘문화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P223

부희령

이러한 맥락에서 책에 인용된 호주의 철학자이자 환경활동가 발 플럼우드의통찰이 예리하다.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등을 비롯한 모든 중심주의는 ‘지배자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자기중심적충동이 기반이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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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 무지의 베일

김상준_시민의회 돌아보기

시민의회라고 해도 국회와 다름없이 지지 또는 소속 당파에 따라 의견이 뚜렷이 갈려 평행선만 달리고 비생산적인 말싸움만 하다 결국 합의 없이 끝나지 않을까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고된시민의회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다. 필자가 접한 많은 사례보고 중에서그런 방식으로 ‘싸움만 하다 끝난‘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보고들에서공통적인 반응 중 하나가 "나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 같은데 같은문제에 대해 나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였다. - P161

게리 가드너_추첨제와 정상상태 경제

롤스는 공적인 문제를 숙고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무지의 베일‘ 뒤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는 그가 입안자이든 다른 공적 주체이든,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즉 자신의 재산수준이나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 혹은 성적 지향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이다. 그 결과, 제안된 정책이 그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 P171

게다가 추첨은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통치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을위한 선거는 없다》(2016)의 저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정관을 제비뽑기로 선발하는 것은 민주주의이고, 선거로 뽑는 것은 과두제"라고 썼다. 판 레이브라우크도 여기에 동의한다. - P172

지난 몇백 년간 우리가 선거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채택해온 것은 엘리트들에 의해서 조작된, 의도적인 반민주주의적 움직임이었다고 책에쓰고 있다. 선거제도들은 경제적 힘을 갖고 있는 자들(이를테면 초기 미국의 백인 남성 지주들)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통치구조들을 설계하였고, 그렇게 해서 다수 대중과 정책입안 과정 사이에서 완충장치의 역할을해왔다. - P173

공익을 모색하기
통치구조에 운(運)이라는 요소를 더하는 것이 건설적이라는 생각은허무맹랑하게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로니 - P178

핸콕은 추첨제에 내재된 매력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비뽑기라는 아이디어는 처음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것으로 여겨진다." 추첨제는 자녀들에게 "한 사람이 (파이를 자르고, 다른 사람이 먼저 골라라"라고 하는 어머니의 판결과 동일한 원리를 갖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주요 세계종교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하고있는 황금률, 즉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우하라는 원리를환기하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기초적인 공정성을 알아볼 수 있고 그것을 갈망하는 법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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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
이희경 <이반 일리치 강의>

좌담_초고령사회,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1차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는 이미 정년을 했고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1972년생)가 은퇴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연금 개혁도수십 년째 지지부진하고,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람들을 사회가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베이비부머 세대가 호명되고 있는 것일 테죠. 베이비부머 세대를 ‘마처 세대‘라고도 하던데요.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 자녀로부터 돌봄을 못 받는 처음 세대라는 뜻인데, 역시 생계나 돌봄 차원에서 노후에 대한 사회적 대책이 없다는 우려를 담은 표현이겠지요. - P128

고령화란 전체 인구 비중에서 노년층이 늘어나는 것이고, 결국 저출산이 문제인 것인데, 아이를 안 낳는 건 젠더문제, 여성노동의 문제로연결되잖아요. 한국 여성 자살률이 OECD 1위이지만, 특히 20~30대 여성자살률이 가파르게 증가했다는 거잖아요. 다큐멘터리 <‘조용한 학살‘이 다시 시작됐다> (2020)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에만 3,000명씩 자살시도를 했고 300명 가까이 죽었다고 합니다. 1997년에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변하면서 비정규직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2008년 금융위기 겪으면서 또 한차례 노동환경이 크게 변하는데, 이때 가장 큰 타격을 받은것도 여성 노동자들이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시급제로 몰렸어요. 코로나 발발 직후 한 달에 여성 12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거잖아요. 한달 사이에 무려 12만 명이 해고된 것도 놀랍지만 이게 전혀 사회적 이슈가 안됐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누겠어요. 노인빈곤 문제를 살펴봐도 여성이 더 취약합니다. 요는 초고령사회로의 빠른 이행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는 젠더, 계급 문제와 함께 풀어야 한다는 거예요. 노인에만 초점을 맞춰선 해결이 안됩니다. - P132

김찬호 사회적 돌봄이나 생활동반자법 같은 건 정부가 부담을 줄이는 방식이죠. 사실 ‘윈윈게임‘인데 기득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지요. 일본은 스스로 ‘과제 선진국‘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초고령화에 대한 경험치가 있고 배울 점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치매 노인들의 경우에 일본에서는 자신이 치매 환자임을 밝히고 계속해서 사회활동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치매에 걸렸다고 해도 아주 초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데, 그런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면 당사자나 주변에서 치매인 걸 인식하고 계속해서 이 사람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 다양한 장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원봉사 활동이나 놀이 공동체일 수도 있고, 가벼운 육체노동 등 사례가 많아요. 또 치매 환자의 쇼핑에도우미 역할을 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도 있더군요. 치매 노인이 혼자서물건을 사러 가면 산 것 또 사고, 계산 틀리고 실수를 하는데, 이런 일이반복되면 아예 포기하게 되고 그럼 병세가 나빠지거든요. 그래서 일본어느 도시에서는 마트 주최로 일주일에 하루, 1시간 동안 치매 환자들을 위한 쇼핑 시간을 지정해서, 지역주민 자원봉사자들이 일대일로 붙어 치매 노인들의 쇼핑을 돕는다고 해요. - P139

저는 개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별로 없어요. 제 화두는 생물학적 소멸에 맞춰 어떻게 실존적으로 후퇴할 것인가입니다. 저는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지금과 같이 죽을 때까지읽고 쓰는 일을 하고 싶긴 해요. 어느 날 눈이 어두워 더이상 책을 읽고쓸 수 없다면 어떤 방식으로 우주의 지혜에 접근할 수 있을까, 그런 게고민입니다. 각자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사이드식으로 표현해서 ‘말년의 양식‘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사례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 P143

저는 정치적 주체로서 ‘주변‘이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에 페미니즘 씨앗을 뿌렸다고할 수 있는 이효재 선생은 퇴직하시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도서관에서아이들 책 읽어주는 일을 하셨어요. 이렇게 작은 일, 동네에서 쓸모 있는 일을 하는 할머니가 제가 닮고 싶은 모습이에요.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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