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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와 역사의 정치 ㅣ 딕테 시리즈 3
조앤 스콧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6월
평점 :
논문 모음집이라 역시 어렵다.
특히, 최다 인용 횟수를 기록 중이라는 2장
젠더는 너무나 어렵다. 4부 평등과 차이가 가장 좋았다. 그나마
알쏭달송한 와중에도 물음표를 던지면서도 이해가능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장이었다.
평등과 차이를 대립적으로 보는 프레임을 벗어나고 사고의 방향을
바꾸는 것. 우리가 당연시하는 범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살피는 것. 이분법적 구조를 거부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러저러한 독서에 집중하지 못한 핑계들만 가득한 요즘. 그나저나 산불이 빨리 잡혀야 할 텐데 걱정이다.
평등과 차이가 이분법적으로 대립할 경우 선택은 불가능해진다. 평등을 선택하면, 차이가 그것에 대립된다는 관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차이를 선택하면, 평등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정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이 장의 시작 부분에 인용된 루스 밀크맨이 말한 딜레마다. 페미니스트들은 "차이"를
포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차이"는 우리가 고안해 낸 가장 창의적인 분석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도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가 민주적인 정치 체계의 원칙과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한은 말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운동이 페미니스트들에게 기존 범주들 안에서만 주장을 펼치도록 제한한다거나, 페미니즘의 정치적 논쟁을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닌 이분법으로 특징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차의 개념을 인정하고 그것을 활용하면서도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답은 이중적이다. 즉, 평등을 차이의 대립항으로 제시함으로써 구축된 권력관계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한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정치적 선택의 이분법적 구조를 거부하는 것이다.
평등론 대 차이론은 페미니즘 정치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그런 대립은 두 용어 사이의
관계를 잘못 재현하고 있다. 평등이란, 권리의 정치이론- 배제된 집단들이 정의를 요구하는 근거의 맥락에서 보면 특정목적을 위해 혹은 특정 맥락에서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 P299
내가 보기에 평등과 차이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사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대개의 경우 당연시하는 범주들 - 역사, 여성, 남성, 평등, 차이와 같은 정치 이론의 용어들 그 자체 -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이 용어들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발생하고 사용된 특정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하며, 문화적·정치적·시간적 산물로서 이 용어들을 검토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단일한 이야기로서의
역사라는 것이 보편적 주체에 대한 허구이며 그 보편성은 암묵적 차별, 주변화, 배제의 과정을 통해 획득되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성을
역사에 포함할 수 없다. 바꿔 말하자면, 남성man은 한 번도 진정으로 보편적 형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남성의 보편타당성을
확립한 것은 차이화를 통해 이루어진 배제의 과정들이었다. 이전과 다른,
더 비판적인 역사학을 위해서는 우선 남성의 보편타당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 과정의
한 측면은 "남성과 대립되는 특징, 특성, 역할을 부과함으로써 "여성"을 정의해 온 것과 연관돼 있다. 수많은 여성사에서 역사가들이
기록해 온 그 차이는 이런 과정을 통해 생산된 것이지 여성의 성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적 속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성의 경험"
또는 "여성 문화"는 오로지
남성적 보편성과 대비되는 여성의 독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회적 삶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개념들이다. 차이화 과정의 다른 한 측면은 평등과 차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는 것과 연관된다. 평등이 절대적으로 실천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평등은 특정 차이에 대한 배제가 특정 맥락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유예된 것이라고 보는 게 차라리 맞다. 역사적으로 시기에 따라 어떤 차이는 다른 차이보다 더 문제가 되었다. –
P338~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