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얽히게 하는 것들
‘제1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적 관계를 의미하고 ‘제2의 자연‘은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환경을 뜻한다고 상상해보라. 대중적으로는 생소한, 자연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윌리엄 크로넌William Cronon의 책 『자연의 메트로폴리스Nature‘s Metropolis』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내 책은 ‘제3의 자연‘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곧 자본주의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제3의 자연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미래가 단일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는 가정을 버려야 한다. - P9
마르크스주의의 범주들이 인류학의 민족지적 해석 기법인 두꺼운 기술thick description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내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유지하는 이유는 리사 로펠 Lisa Rofel이나 실비아 야나기사코sylvia Yanagisako 같은 페미니스트 동료 학자의 통찰력 덕분이다. - P15
프롤로그. 가을 향기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버섯을 통해 내 감각은 되살아난다. - P21
나는 우리모두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그리로 가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음을 깨닫는다. 불안정성precarity은 한때 불우한 이들만의 운명으로여겨졌다. 이제는 우리 모두의 삶이 불안정한 것 같은데, 돈을 벌고 있는 순간에도 그렇다. - P22
나는 경제와 생태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된다고 보는 방식을 거부하지만, 경제와 환경을 잇는 한 가지 중요한 연결 고리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바로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투자 자원으로 삼아 부를 축적한 인간의 역사다. 이 역사를 통해 고무된 투자가들은 사람과 사물 모두를 소외시켰는데, 여기서 소외란마치 생명의 얽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독립할 수 있는능 력을 말한다. 사람과 사물은 소외되는 과정을 거치며 이동하는자산이 되었다. 운송을 통해 거리라는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사람과 사물은 자신의 삶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삶의 세계에서교환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이는 가령 먹거나 먹힐 때처럼 다른존재를 단지 어떤 삶의 세계 일부로 사용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데, 그 경우에는 다종의 생물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생활하기 때문이다. 소외는 생활공간의 얽힘을 배제한다. 소외시키려는 [자본주의의] 꿈은 단 하나의 독립형 자산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풍경을 변화시킨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잡초나 쓰레기가 된다. 이런 곳에서 생활공간의 얽힘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비효율적이고, 어쩌면 구시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단일 자산을 더 생산하지 못하면 그 장소는 버려진다. 나무는 베인다. 석유는 고갈된다. - P29
1부 남은 것은 무엇인가 1 알아차림의 기술
지질학자들은 인간이 끼친 영향이 다른 지질학적 작용력을 뛰어넘는 시대라는 의미에서 현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로 부르기 시작했다. - P49
인류세란 인류가 출현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풍경과 생태의 광범위한 파괴를 주도한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가장 설득력 있다. - P50
그러나 어디서든 우리는 진보와 근대화를 향상과 연결 지어 범주화하고 가정한다. 우리는 날마다 진보와 근대화의 목적 민주화, 성장, 과학, 희망을 상상한다. 왜 우리는 경제성장과 과학의 발달을 기대하는가? 발전이라고 명시하진 않더라도 역사에 관한 우리 이론들은 이런 범주들에 물들어 있다. 우리들 개개인의 꿈도 마찬가지다. 다같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꺼내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구태여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 P52
문제는 진보가 더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날 고개를 들고 보니 왕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알아차림noticing을 위한 새로운 도구가 중요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딜레마 자체에 내재한다. 실로 지구에서의 삶은 위기를 맞은 듯하다. 다음에 나올 2장에서는 협력적 생존의 딜레마를 다루고자 한다. - P61
2 협력으로서의 오염
어떻게 모임은 그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되는가? 한 가지 답은 오염이다.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오염을 통해 세계만들기 프로젝트가변화하면 상호적인 세계와 새로운 방향이 창발할 수도 있다. - P63
어떤 생물종이든 살아 있기 위해서는 살기에 적합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다. 협력이란차이를 수용하며 일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오염으로 이어진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 P64
협력은 차이를 가로지르는 작업이지만, 이것을 자립적 진화의경로에 존재하는 순수한 다양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들selves‘의 진화는 이미 마주침의 역사를 통해 오염되었다. 그 어떤 새로운 협력을 시작하든 간에 우리는 이미 다른 것과 섞여 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히는 프로젝트와도 얽혀 있다. 우리는 다양성 덕분에 협력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런 다양성은 몰살과 제국주의 등등의 역사를 통해 창발한다. 오염이 다양성을 만든다. - P67
3 규모에 따른 문제
이야기를 쏟아내고 귀 기울여 듣는 것은 하나의연구 방법이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새로운 지식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때 연구 대상은 오염된 다양성이고, 분석 단위는 불확정적인 마주침이다. 무엇을 알려 하건 간에 우리는 알아차림의 기술을 회생시키고 민족지와 자연사를 아울러야만한다. - P79
이야기의 규모도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의 이야기에 끼어들어 방해하는 다른지형과 박자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아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를 쏟아내는 연구 방법이 하나의 과학으로서 갖는 힘이다. 이렇게 끼어들어 방해해야만 대부분의 근대 과학이 갖는 한계, 즉 연구 틀은 바꾸지 않으면서 무한한확장 가능성을 요구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알아차림의 기술은 이런 식으로 규모를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구식으로 여겨진다. 연구 과제를 변경하지 않고도 자신의 연구 틀을 좀 더 큰 규모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은 근대 지식의 특징이 되었다. 버섯에 대해 생각하고픈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와 같은 기대는 접어야 한다. 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버섯 숲을 ‘반플랜테이션 농장‘으로서 연구한다. - P80
인류가 규모의 확장을 통해 전진한다는 인식은 매우 강력하게 자리 잡았다. 따라서 확장될 수 있는 요소는 어마어마한 주목을 받고, 확장될 수 없는 요소는 걸림돌로여겨진다. 이제는 우리가 단지 서술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이론을 성립하게 하는 요인으로서 확장될 수 없는 요소에 관심을 기울일 때다. - P81
플랜테이션 농장의 대표적인 구성 요소-클론 묘목, 강제된 노동력, 정복당한 빈터는 어떻게 소외와 호환성, 팽창이 전례 없는 이윤을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공식은 우리가 진보와 근대성이라 부르게 된 꿈의 형태를 빚어냈다. 시드니 민츠sidney Mintz가 주장하듯, 산업화 시기에 공장들은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을 모델로 삼아 플랜테이션식 소외를 미리 계획해두고 있었다. 확장성을 활용해 팽창하는 데 성공하자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 P84
송이버섯에게 필요한 것은 숲의 역동적인 다종적 다양성,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를 오염시키는 관계성이다. - P85
불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는 것은, 확장성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풍경과 사회를 변형시켜온 방식을 이해함과동시에 한편으로는 확장성이 실패하는 지점, 그리고 확장성 없는생태적, 경제적 관계가 분출하는 지점을 응시해야 한다는 점에서도전적인 일이다. 확장성과 비확장성 양쪽 모두가 이뤄놓은 결과에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확장성은 나쁘고 비확장성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 P89
그러나 먼저 불확정성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불확정성은내가 추적하는 배치에서 핵심적인 특징이다. 지금까지 나는 다음과같은 부정적인 특징을 열거하며 배치를 정의했다. 즉, 배치의 성분들은 오염되었고, 따라서 불안정하며, 배치는 순조롭게 확장되기를거부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배치는 항상 소멸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모으는 무언가의 힘으로도 규정된다. 배치는 역사를 만든다. 형언할 수 없으면서도 현존하고 있는 이러한 조합은 냄새로 확연히 드러난다. 냄새는 버섯의 또 다른 선물이다. - P91
인터루드. 냄새 맡기
인간은 불확정성으로 버섯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았다. 미국인 작곡가 존 케이지가 작곡한 짧은 퍼포먼스 곡들로 이루어진 <불확정성 Indeterminacy>이라는 시리즈에는 버섯과의 마주침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케이지는 야생버섯을 찾기 위해서는 특정한 종류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마주칠 때 발생하는 모든 가능성과 놀라움을 포함해 마주침이 일어나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케이지의 음악은 대부분 이렇게 ‘항상 다른‘ 지금 여기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고전음악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같음sameness‘ 과 대조했다. 그래서 그는 청중이 작곡된 음악만큼이나 주변의 소리도 들을 수 있도록 작곡했다.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4분33초433">에서 청중은 어떤 음악도 연주되지 않는 상황에서 듣기만 하도록 강요된다. 케이지는 일이 일어나는 그대로 듣는 방식에주의를 기울였기에 불확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 P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