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 사람: 무위당_이현주
그나저나 너의 삿된 견해만 치우면 홀연 불보살의 극락정토가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승찬 대사의 깊은 뜻이 이 몸에 들어와서 웬만큼 소화되기 시작한 게 나이 여든을 바라보는 근자의 일이니 그동안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야 했던 셈이다. - P166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던 무렵 빈민운동 활동가였던 젊은이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되었다. 그가, 아마도 황금배지를 가슴에 달고(?), 운동권 대부로 알려진 선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가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청하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이 말 그대로 한 말씀 툭 던지셨다. "까불지 마시게." 그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다. - P167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과연 지당한 말씀이셨다. 다만,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 그 결과를 두고 판단하는 못되고 터무니없는 인습(因)에서 해방된 사람에게만 그것이 지당한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다. 부끄럽고 민망스러운 일에 성공하는, 이를테면 나라와 민족을 동강 내는 한이 있더라도 본인이 집권해야겠다는 무슨 그런 일에 성공하는 것보다() 참으로 위대한 일에 실패하는, 이를테면 지상에 하느님나라를 세우겠다는(예수) 또는 이 한 몸 바쳐서라도 민족의 분열은막아야겠다는(白凡) 그런 일에 당당하게 실패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람다운 사람, 철학자 니체의 ‘사후(死後)에 태어나는 어떤 사람‘ 아니겠는가? - P171
나의 눈에서 전체의 눈으로_유소림
장 선생님이 이념을 중심으로 한 투쟁과 대립의 사회운동사에서 일찍부터 협동과 공생에 관심을 두신 것은 세상을 갈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보고 계시는 그분의 관점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일이었다. 이 존재계의 이치 자체가,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저 벌레부터 사람에이르기까지 협동과 공생이 아니면 도무지 생존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러하니 나락 한 알 속에도 우주가 작동하고 계심은 참으로자연스러운 일이다. 수행자 싯다르타가 보리수하에서 발견해낸 연기(起)라는 존재이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싯다르타 수행자는 그 이치를발견하고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 각자(覺者)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의존재근거가 되는 것이 존재의 이치라면 이런 존재계에서 어떻게 다른존재를 해칠 수 있단 말인가. 존재를 해치는 것은, 너를 해치고, 벌레를해치고, 땅을 해치고, 물을 해치는 것은 곧바로 자해행위다. 벌레 한 마리도 온 우주가 동원되어 생겨나고 이 나도 온 우주가 동원되어 비로소생겨난다면 벌레와 이 존재 중에서 누가 더 귀하고 잘난 존재인가. 인간 어머니도 그러하듯 우주 어머니에게도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 법이다. 이 간단 명료한 이치를 우리 인류는 석가모니의 연기 발견 이래 2,500년 동안,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 이래 2,000년이 지나도록 모르쇠하고 있다. - P179
풀 한포기에 대한 존경심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개정증보판 (2016) 맨 끝에 김종철 선생님께서 한살림 활동가들을 위한 ‘무위당 학교‘에서 하신 강의 녹취록이 실려있다. 김종철 선생님이 전해주는 몇몇 일화를 보면 장 선생님은 종교사상가 혹은 사회운동가이기 전에 누구에게나 깊고 따스한 만남이 되어눈물겹게 하는 감동적인 한 인격이었음이 깊이 전해온다. 김종철 선생님은 장선생님을 생각하면 공자가 떠오른다고 하신다. 노자가 아니라공자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논어>의 첫 문장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說乎)"가 바로 장 선생님의 모습이기 때문이란다. 學而時之,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힌다. 바로 그것이었다. 장 선생님은존재계의 상호관계망을 잘 이해하시고 그것을 반복 학습하면서 그 이치를 당신 삶의 기준으로 내면화시키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오늘 여러분들은 중요한 성경말씀을 들으셨으니 그것을 항상 되뇌고 반복해보시라 이 말입니다"(130쪽). "성경에 좋은 얘기가 있어요. 일흔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라. 내가 매일 넘어져요. 그동안 사회에서 배운 게 있어서 안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저질러요.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는 벌써 넘어진 거지. 그럴 때는 내가 잘못했구나 하면서 털고 일어나야지. 그러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요"(207쪽)! "속담에 연자방아 돌리던 망아지는 밭에 가도 돌기만 한다는 말이있어요. 여태까지의 습관, 관행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지. 결국은 자신 스스로의 끊임없는 결단을 통해서 자애와 절약, 겸손을 바탕으로 전체를 보고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77쪽). - P181
자급을 생각한다_최문철
언제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늘어려웠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쌍한 장애인 조직으로 대상화되지 않게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 도움을 받는 일은 일방적이고 시혜적인모습으로 흐르기 쉬웠다. 도움을 구하기 전에 동등한 관계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 배웠다. 꿈뜰에서만큼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장애인을 위해 비장애인을 희생시키거나, 후원을 늘리기 위해 장애를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섬세한 이해와상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서로의 자기다움을 지켜줄 수 있다. 선의를 가진 도움이라 할지라도 이용을 당하거나 자기다움이 위태로워질 상황이라면 일단 멈추는 게 맞다. - P189
-2년 전에 시작한 책 모임에서, 발달장애인을 둘러싼 다양한 옹호인들・특수교사, 부모와 가족, 관련 종사자, 마을주민들을 꾸준히 만나고있다.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서 매번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65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아이를 위한 정신의학》을 천천히 소리 내서 다 읽었고, 혼자 읽을 땐 이해하기 어려웠던 책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이어서 함께 읽고 있다. 책 모임을 통해 발달장애인뿐만 아니라 옹호인들도외롭다는 것을, 환기와 환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과 필요를 안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 P191
‘좋은 삶‘을 지속하기 위한 자급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성장하고, 자기다운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늙고, 병들고, 장애가 있어도, 전형적이지 않아도, 소수자여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돈과 능력과 정상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스스로를 살피는 기술을 익히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은 삶이 가능하다고말하고 싶다. 장애를 안고 농사를 지으며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작은 마을 안에서 건강한 의식주, 돌봄과 협동의 기술, 좋은 추억, 믿을 수 있는 친구, 자기답게 지낼 수 있는일터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떻게든 계속 해보려고 한다.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모쪼록 좋은 삶을 자급해낼 수 있기를!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창간사(1991) - P192
자본주의 다시 보기_강수돌
이것이 (물리적 폭력과 구별되는) 제도적 폭력이다. 물리적 폭력은 가시적이어서 저항을 곧잘 부르나, 제도적 폭력은 비가시적, 구조적이라잘 정당화된다. 이렇게 자본의 가치지향은 무한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배타성과 폭력성을 띠는 구조(위계)를 통해 관철된다. 이는 비단 정치경제만이 아니라 교육, 언론, 의료, 문화, 예술, 종교 등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일리치 선생이 ‘우정‘에 대해 말한 것처럼 "좋은 것(the good)에 대한 감각은 가치(value)에 대한 감각과 전혀 다르다." 교육이나 의료 등 ‘가치의 제도화‘가 결국 인간적 무력감을 초래하는 것도 이 제도적 폭력때문! - P198
수직에서 수평으로, 폐쇄에서 개방으로, 소유에서 관계로의 ‘혁명‘이다! 이것이 리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말한 ‘재난 공동체‘다. 이는 또한, 애나 칭이 <세계 끝의 버섯>에서 말한 송이버섯 같은 존재다. 이는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파괴 뒤, 그 폐허를 뚫고 처음 솟아난 생명체다. 앞의 ‘자경단‘은 겉으로는 강력한 재난공동체로 보이나, 실은 그 자체가 재난의 일부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갖고 사느냐(상품 물신)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삶의 방식)다. - P199
사람보다 로봇을 믿는 당신에게_장일호 김현아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의 부제는 ‘정보 과잉과 불신의 시대, 병원을 현명하게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환자는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의료산업의 공모자가 된다. 의료산업이 숙주삼는 것은 두려움이며 ‘감정‘은 꽤 자주 ‘팩트‘를 이긴다. 질병 자체보다질병을 문제시하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이야말로 의료산업을 든든히 조력한다. 2020년 국립암센터가 암과 무관한 30세 이상 1,234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설문 대상자 중 27.1%는 "암 생존자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31.5%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고, 45.7%는 "암 환자 집안 자녀와 결혼을 피하고 싶다" 라고 응답했다. 출퇴근길 지하철처럼 사람이 운집한 장소에 갈 때면 나는 사람들 머리 위로 그 숫자들을 떠올리다 움츠러들곤 했다. - P206
치료과정이 곧 완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타인에게 이해시키는것은 여전히 숙제처럼 남아 있다. 그것은 의료진들이 환자와 만나는 매일의 시간에서 느끼는 답답함이기도 할 것이다. 김현아는 "많은 환자가완치와 치료의 개념을 혼동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에 대한 과장된 통념이 확산되었기 때문"(133쪽)이라고 본다. "병원에서 일을 하 - P209
다 보면 너무 많은 사람이 ‘완벽한 건강‘, ‘완벽한 정상 상태‘가 있다고 믿고 이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이 유난히 정상성에 집착하는경향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지적하는 바인데, 그러다 보면 삶의 한모습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하는 많은 문제를 마땅히 치유해야 하는비정상성으로 낙인찍게 된다"(255쪽). 자본이 약속하는 것은 ‘완치‘지만그것은 의학보다는 기적 혹은 신앙의 영역에 가깝다. 손상된 몸은 아프기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고, 치료는 질병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는조치다. ‘완치가 없다‘라는 진실은 의료진과 환자가 나누는 비밀에 가깝다. 환자는 ‘살아남는 것‘과 ‘회복하는 것‘ 사이에서 혼란을 반복한다. 김지승 작가의 <짐승 일기》(난다, 2022)에서 ‘관병‘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나는 큰 숙제 하나를 해결한 기분이었다. 병과 싸우기 싫고(‘투병) 병을 다스리고 싶지도 않으며(‘치병‘) ‘반려 병‘은 내 경험을 설명하기에는 가볍다고 느끼던 차였다. 김 작가 역시 그런 소외감 속에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적확한 단어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러던 어느날 과거 머물렀던 절의 주지 스님이 쓴 편지를 발견한다. 스님은 이렇게 적는다. "불교에서 ‘관‘은 지혜로 경계를 비추어 본다는 의미이다. 관심은 마음을 그리 보며 바르게 살핀다는 의미가 되겠지. 앞으로세상을 잘 관하여 길 잃지 말고 인연이 닿거든 또 보자." 김 작가는 그편지에서 ‘관병‘이라는 단어를 발굴해 병을 헤아리고, 살피며, 관계하는대상이라고 정의한다. 관병이야말로 병원과 환자 사이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의료 비즈니스 시대‘를 만든 공모자들을 ‘모두까기‘ 한 김현아가 고민하는 지점도 그와 아주 멀지 않다. - P210
기후위기 시대의 ‘좌파적’ 사유_한승동 박노자 <전쟁 이후의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서방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것도 잉여 수탈과 본원적 축적을 위한 전쟁과 군사력 추구의 부산물과도 같은 것이다. 1780년 영국이 인도 무굴제국을 무너뜨리고 식민화했을 때 영국에서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상위 3%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이 모든 남자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전시 징병을 해야 했던 1차 세계대전 때였다. 19세기 말에 프랑스나 독일 등이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준 것도 징병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징병 대상에서 제외된여성들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1946년이 돼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비스마르크가 ‘복지‘제도를 마련한 것도 전시 총동원체제를 위한 상이병연금, 전몰 군인 유족연금, 부상병 무상치료 등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복지도 전쟁의 산물인 셈이다. 한국의 군인연금이나 공무원 연금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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