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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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서 다시 만난 i(머리말이라는 시에서). 반가웠다. 김소연 시인의 시집 중 유일하게 읽은 ‘i에게’가 생각나서. 해설에서도 역시 언급되고. 시의 전체적인 의미나 제목의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특정 단락들이 와닿는다. 이를 테면, 이런 시.

2층 관객 라운지

중략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이 생각을 5만 번쯤 했더니
내가 만약이 되어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가
내가 생각이 되어버린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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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날개도 가까이에서 보면
우악스러운 뼈가 강인하게 골격을 만들고

아침엔 늦게까지 잠을 잔다. 어제가 충분하게 멀리 떠나갔다. 우선 보드라운 양말에 발을 넣을 것. 그리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다. 옥상에 올라간다. 머그잔을 들고서.

다세대주택들이 반듯하게 도열한 것을 내려다본다. 호호 불며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사람들을 보고.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더멀어지는 걸 보고. 머그잔에서는 아직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우유 냄새가 올라오고.

양말을 신길
잘했다.
잘하는 게 이렇게도 많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말하는 친구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응한다.

-중략- - P77

2층 관객 라운지 같은 일인칭시점

기다린다는 것은 거짓말
그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야
견디고 있는데 무엇을 위해 견디고 있는지를 더 이상모르므로

되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는 것과
되어본 적 없는 것
상상조차 안 해본 것

울타리를 뜯는 사람의 고독 옆에 서기
전문가들의 거대하고 장엄한 편견 앞에 서서

소진시키기
믿고 싶은 것을 믿는 마음을 무효화시키기
물 흐리기 어깃장 놓기
이면의 이면의
이면을
계속해서 들쑤시기

20년 전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

-중략- - P90

공연

-중략-

본 것들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
정교하게 잔인해지던 사람

이유를 만들어내며 잔인해지던
이유조차 필요 없이 잔인해지던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말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던 사람

-중략- - P93

머리말

-중략-

i는 치아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에게 수반을 건네받았다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시를 쓰지 마
i는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나는 무엇에 대해 시를 쓰지?
옥상에 대해? 파피루스에 대해?
생일에 대해?
팔짱에 대해?

네가 사라지고 나면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생겨나고
분양문의 플래카드가 창문마다 나부끼고 있어도
아무도 입주하지 않고
텅 빈 건물 복도에서
텅빈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고
시멘트 냄새가 나고
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가 듣고

-중략- - P99

저작

무언가를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식물을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
하나
하나

죽어나가는
이파리들

엉망이 되고 있다는 당혹감보다는
무언가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불길함이 우선한다

기쁜 일에 대해서도
더러운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는걸
하물며

-중략- - P104

해설_김언

i는 사회적인 자아(I)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그럴싸한사람 구실을 하는 자아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타인을기는 역할을 척척 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일신조차도 겨우 감당할 수 있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로서의 자아다. 이런 자아가 떠맡을 수 있는 역할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역할이 될 수 없다. 그것의 역할은 자신을 지키거나 기껏해야 i를 품고 있는 ‘i+I‘ 혹은 ‘i+I+a’로서의 나를 (위의 시처럼 이상하게 생일을 챙기는 방식으로) 감당하는 정도에 머문다. 그런데 이런 못난 자아(i)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작고 보잘것없는자아에 기대어 시라는 것이 나오고 시인이라는 존재가탄생할 수 있다면, i가 찾아오는 날은 달리 말해 시적인자아가 탄생하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적인 자아가탄생할 때마다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시인 혹은 화자의생일이라고 해도 좋겠다. 누구의 생일이든 그것을 정하 - P154

는 것은, 즉 i의 방문 날짜를 정하는 것은 시인도 아니고 화자도 아니고 I도 아니고 심지어 i도 아닐 것이다. i는 그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못 된다. 그럼에도 i의 방문으로 인해 시가 탄생하고 시적인 자아가 탄생하고 시인 역시 그로 인해 탄생이 가능한 존재라면, 위 시의 말미에 나오는 "나는 i 몰래 없는 시를 쓰러 갔다"라는 발언은 여러모로 재고를 요한다. 어찌 보면 i 자체가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갑자기 없는 시 쓰기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P155

김소연의 이번 시집에서는 핵심 이미지에 해당하는그것이 ‘밤‘이다. 단순히 시집 제목에 ‘밤‘이 들어가서도아니고, ‘밤‘이라는 단어가 시집 전반에 걸쳐 엄청난 빈도수를 보이며 등장해서도 아니다. 앞서 얘기해온 ‘끝‘에대한 사유도, 거기서 더 가지를 뻗어가는 얘깃거리도 모두 ‘밤‘이라는 이미지에 촘촘히 엮여 있기 때문이다. 촘촘히 엮여서 하나씩 끈을 풀듯이 풀어나가야 하는 밤을아래의 시에서 만나보자.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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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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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여성이 처한, 사랑 보다 조건을 따질 수 밖에 없는 현실, 한정 상속이라는 제도적 문제, 계급 차이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무엇보다 주인공들이 스스로의 ‘오만‘과 ‘편견‘을 깨뜨리며 성장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연애소설이라는 플롯으로 섬세하고 감싸고 있다. 역시 오스틴 소설 중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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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불과 4개월 전에 그녀가 거만하게 물리쳐버렸던 청혼이 이제 기쁘고도 고맙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 그가 얼마나 의기양양해할 것인가 하고! 그가 남자 중에서도 가장 관대한 사람임을 그녀는 의심치 않았으나, 그렇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승리감이야 있을 터.
그녀는 이제 그가 성품에서나 재능에서나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남자임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지력과 성품은 자신의 것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온갖 바람을 충족시켰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을 결합이었다. 자신의 편하고 활기 있는 태도로 그의 마음은 부드러워질 것이고 태도는 개선될 것이며, 그의 판단력, 지식, 세상에 대한 식견으로 자신은 매우 소중한 이익을 얻게 될 것이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이런 행복한 결혼을 해서 그들을 찬양하는 무리들에게 결혼의 행복이 진정 무엇인지를 가르쳐줄수 없게 되었다. 이 결합의 가능성을 밀어내면서 이와는 다른 결합이 이들의 가족 사이에서 곧 이루어지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 P427

해설

이런 사실은 영국 특유의 전통적인 상속 제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대륙에서 양반가의 자녀들이 대개 어느 정도 동등한 상속의 권한을 누렸다면, 영국은 장남에게 전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부모 대에서 자식 대로 같은 재산과 지위가 계승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많은 경우 한정 상속이라 하여 재산과 지위의 상속이 집안의 남자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상속을 한정시키는 법적 장치가 있었다. 그 결과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전통적으로 군인이나 목사가 되는것이, 넉넉하지는 않으나마 양반의 지위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아울러 한정되어 있지 않은 재산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정략결혼이 재산과 지위를 얻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또한 장자 상속 및 한정 상속으로 인해 상속 재산이 없는 딸들의 경우에는 결혼만이 재산과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결혼을 못한 노처녀는 형제나 친척에게 얹혀살며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거나, 하녀나 다름없는 가정 교사 노릇이 유일한 자립 수단이었다. 이렇게 지위와 재산에 대한 고려로인해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상속 재산을 가진 여자와, 상속 재산이 없는 딸들은 어느 정도의 재산과 지위를 가진 남자와 결혼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상황에서 전통적으로결혼은 개인의 성격이나 사랑을 고려하기보다는 재산과 지위를 우선시하는 정략결혼이 규범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인 중심의 근대 시민 사회로 넘어오면서 이런 규범 - P546

은 많은 개인들에게 질곡으로 느껴지고 결혼 시장에 나선 개인들은 ‘계산이냐 사랑이냐‘라는 어려운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런 사정은 최소한 재산과 지위를 유지할 수있는 직업의 가능성이 있던 남자들과는 달리, 상속 재산이없고 직업의 가능성이 차단된 여성에게 더욱 가혹했다. 결혼 시장에 나선 여성들은 사랑과 무관하게 조건만 괜찮다면 결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 자신도 바로 이런 ‘사랑이냐 조건이냐‘의 불합리한 선택의 국면에서 사랑은 좌절되고, 사랑 없는 조건은 본인이 거부하는 어려운 상황을 직접 체험했고, 그런 체험을 통해 전근대적인 사회 제도와 규범의 불합리성을 뼈저리게 느낀듯하다. 어쨌든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양반 계층의 젊은 남녀 간의 결혼은 더 큰 사회적인 이슈와 무관한 여자들끼리의 수다거리가 아니라,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관의 변동을 읽고 감지할 수 있는 장이며 척도였던 것이다. - P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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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가 제멋대로 구는 꼴이 사람들 눈에 띄어서 우리모두가 입게 될 피해는 어떡하고요. 아니, 벌써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요.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달리 판단해주시리라 믿어요."
"벌써 피해를 당했다!" 하고 베넷 씨가 되뇌었다. "흠. 네 애인들 가운데 몇 녀석이 걔한테 놀라 달아나버렸니? 우리 리지, 가엾기도 해라! 그렇지만 낙담 마라. 집안에 어리석은 사람이 좀 있다고 친척이 될 수 없네, 하고 나오는 그런 까다로운 청년들이라면 아쉬워할 가치도 없다.
자, 리디아의 어리석음 때문에 물러서버린 시시한 녀석들 명단이나 한번 보자."
"잘못 짚으셨어요. 제가 그런 피해를 받은 적은 없어요. 무슨 특정한 해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미치는 해악을 말하는 거예요. 제멋대로인 데다가 뻔뻔스럽고 내놓고 절제를 우습게 아는 리디아의 성격 때문에 우리 가족의 비중이라든가 평판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요. 죄송하지만, 터놓고 말씀드려야겠어요. 아버지께서 나서서 개의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을 단속하고, 그런 식으로 남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인생을 보낼 거냐고 타이르지 않으시면, 걔는 곧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질 거예요. 성격은 굳어버릴 것이고, 열여섯 나이에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아주 호(號)가 난 바람둥이가될 거예요. 그것도 천박하기 짝이 없는 최악의 바람둥이 말이에요.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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