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설의 핵심 내용은 개체 하나의 발생 과정이 해당 종이 겪어 온 진화의 전 과정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 과정에서도 반복설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 사고의 과정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 P331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가 태동했다. 그것은 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생각들 중의 하나이다. 고대 이오니아 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으므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 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 P343
중국, 인도, 메소포타미아에도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들도 과학과 만났을 것이다. 문화는 일정한 박자와 일정한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문화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나며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 과학적 세계관은 우리 뇌의 가장 고등한 부분과 잘 들어맞고 그부분을 아주 잘 설명하며 또 그 부분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기에 지구상의 그 어떤 문화권이라도 내버려 둔다면 언젠가 과학을 발견하게되고 말 것이다. 다만 한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과학과의 만남에서 앞서거나 뒤설 뿐이다. 그래도 최초는 있다. 그것이 바로 이오니아였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 - P346
탈레스가 내린 결론의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문제 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방식에 있다.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야말로,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탈레스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이오니아로 가져온 천문학과 기하학 등의 새로운 씨앗이 그곳의 비옥한 토양 덕분에 튼실한 싹을 틔우고 과학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 P349
현대의 모든 과학 연구에서 필수적인 수학적 논증의 전통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코스모스‘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바로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조화가 있는 전체", 즉 코스모스로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 P364
그렇지만 피타고라스학파와 달리 케플러는 현실 세계에 대한 실험과 관측의 중요성을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행성의 겉보기운동에 관한 상세한 관측 자료에 따라 원 궤도 운동이라는 전제를 포기했다. 행성들의 궤도는 타원이었다. 케플러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에 매료되어 행성 운동의 조화를 연구하게 됐지만, 결국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 때문에 그의 연구는 10년 이상이나 지체됐던 것이다. - P369
과학사를 연구하는 벤저민 패링턴은 고대 과학의 쇠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오니아의 중상주의적 전통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노예 경제의 발전도 동반했다. 노예 소유가 부와 권력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폴리크라테스의 요새도 노예들이 쌓아올렸으며 페리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활약하던 시기에 아테네 시에는 엄청난 규모의 노예 인구가 상주하고 있었다. 아테네인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온갖 대범한 생각들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해당됐지, 구성원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정체성은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육체 노동에 있었다. 육체 노동은 바로 노예임을 뜻했다. 한편 과학 실험도 육체 노동이었다. 노예 소유자들은 당연히 육체 노동과 거리를 뒀다. 그러나 과학을 할 만큼의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도 일부 사회에서 체면치레로 ‘gentle-men‘이라 불러 주는 바로 노예주들뿐이었다. 그러니 과연 누가 과학을 했겠는가? 거의 아무도 과학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 P370
따라서 중상주의의 전통은 기원전 600년경 이오니아의 위대한 깨달음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노예 제도를 통하여 200여 년 후에는 과학적 사고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류사의 모순 중 모순을 바로 여기에서 볼 수 있다. - P372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 Aristarcos에서 시작한다. 그는 이오니아의 마지막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와서 지적 깨달음의 중심지가 위대한 알렉산드리아도서관으로 이미 이동했기 때문이다. - P375
아리스타르코스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 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대쪽으로 흐르는 물결을 끊임없이 거슬러 가며 저항해야 했다. 지구와 지구인을 우주에서 올바르게 자리 매김하는 일이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의 발전에 원동력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의 결과가 완강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러한 통찰이 천문학 이외의 분야에 초래하게 되는 사회적 영향의 심각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P380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행성은 따분할 정도로 그저 그런 별에 속해 있다. 그리고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별은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이에 잊혀진 듯이 버려져 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라는 것도 뭐그리 대단한 존재도 못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주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겨우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제그렇고 그런 ‘식구‘일 뿐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되기까지 우리는 하늘을 보고 머릿속에서 모형을 구축해 보고 그 모형에서 귀결되는 관측 현상들을 예측하고 예측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예측이 실제와 맞지 않을 경우 그 모형을 과감하게 버리면서 모형을 다듬어 왔다. - P384
우리의 행성 지구가 우주에서 중요한 존재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지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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