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보행을 위한 모임들, 통행을 위한 투쟁들

마이클 코언이 뮤어에 관해서 쓴 책 『나지 않은 길: 존 뮤어와 미국의 황무지 (The Pathless Way:John Muir and the American Wilderness)』에도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지 취향은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특권, 곧 미국인 중에서 안락한 계급의부모를 가진 사람들이라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직접 깨닫게된 일이 우리에게는 충격이었다. 이런저런 야외 활동들을 통해 유토피아적 공동체 감각을 기를 수 있으려면, 이미 어떤 기본 가치들에 동의하는긴밀한 집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시에라 클럽과 기타 단체들은 그런유의 경험을 매개하는 데 더 유리한 ‘도심 원정‘을 후원해왔다.) 우리 셋은 산등성이를 내려오는 길에 등산로에서 벗어나 크로스컨트리를 시작했다. 검은절벽 아래 숨어 있는 탓에 더 깊어 보이는 작은 호수 근처를 거닐기도 하고, 녹색 달래가 촘촘히 자라고 진홍색 인디언 붓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질척질척한 습지를 조심스럽게 지나서 블러디 캐니언을 굽어보는 바람 부는 비탈까지 가보기도 했다. - P253

귀족들의 정원에서 시작된 취향의 일종이 사유재산이라는 절대적권리 내지 특권에 대한 공격으로 끝난다는 것은 시골 땅을 걸은 역사의위대한 아이러니(혹은 권선징악)이다. 보행 문화가 시작된 장소였던 정원과사유지 공원은 폐쇄된 공간(많은 경우 담장이 세워져 있거나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 극소수의 특권층에게만 개방되어 있는 공간, 경우에 따라 인클로저로 점유된토지에 조성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국 정원이 만들어진 과정에는민주주의의 원리가 내재해 있다. 첫째, 나무들과 물과 땅이 기하학적 형태를 강요받는 대신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의 모양을 펼칠 수 있고, 둘째, 담장이 없어지는 등 공간의 격식이 점점 사라졌고, 셋째, 공간의 격식이사라짐에 따라 점점 자유로운 보행 경험이 가능해졌다. 자연 속을 걷고싶어 하는 취향이 확산되면서, 정원을 거닐던 귀족의 후손들은 이런 정원에 내재된 원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 영국 땅 전체가보행자들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 P272

보행을 위해 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이상하다. 실제로 보행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자주 언급하는 독립, 고독, 자유는 조직과통솔이 없는 데서 온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즐거움을 얻으려면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자유로운 시간, 자유롭게 걸을 장소, 질병이나 사회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육체가 그것이다. 이 기본적 자유는 무수한 투쟁의 목적이 되어왔다. 힘든 투쟁을 통해서 자유로운 시간(8시간, 또는 10시간 노동, 그리고 이어서 주 5일 노동)을 쟁취해낸 노동자 단체들이, 그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유롭게 걸을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이 장에서는 오직 자연과 시골 공간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주로 다루었지만,
도심의 공원 조성과 관련해서도 풍요로운 역사가 있다. 예컨대 센트럴 파크는 뉴욕을 떠날 만한 여유가 없는 도심 주민에게 전원의 미덕을 선사한다는 민주적·낭만적 기획이었다. 한편 자유로운 육체는 자유로운 시간이나 자유롭게 걸을 장소에 비해서 미묘한 주제다. 초창기 시에라 클럽에서 샤프롱을 동반하지 않은 여자들이 반바지를 입고 등산을 하거나 솔가지를 모아 침대로 삼았듯, 캘리포니아에서는 육체의 자유를 위해 걸었다기보다 걸음으로써 육체가 자유로워졌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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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역사가 산으로 간다: 등산 문학

산 정상에 오르는 등반의 매력도 언어적 비유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영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들은 높은 것 또는 높이 올라가는 것을 권세 또는 미덕과연결시킨다. 행복의 절정(on top of the world), 능력의 최고조(at the height ofone‘s ability), 상승가도(on the way up), 영혼 고양 체험(peak experience), 경력의 절정기(peak of a career), 출세(rising and moving up in the world), 출세주의자(social climber), 신분 상승(upward mobility), 고결한 성자와 저열한 악당(high-minded saints and lowly rascals), 상류층과 하류층 (the upper and the lowerclasses)이 그런 예다. 기독교적 우주관에서 천국은 위에 있고 지옥은 밑에있으며, 단테가 그리는 연옥은 원뿔 모양의 산이다 - P224

소로도 그 점에 주목했다.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산은 그 모습을 바꾼다. 산의 형태는 오직 하나뿐이지만, 산의 모습은 무한히 많다." 산의 형태를 포착하려면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일본의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北)의 유명한 판화 연작 「후가쿠 36경(三十六景)」을 보면, 서른여섯 장 중 서른다섯 장에는 후지 산이 가까이에 크게 나오든 멀리 작게나오든 완벽한 원뿔형으로 나온다. 후지 산의 익숙한 형태가 도시와 길과 땅과 바다에 방향성과 연속성을 부여하면서 장면에 통일성을 주는 그림들이다. 나머지 한 장은 참배자들이 후지 산을 올라가는 그림인데, 여기서는 그 통일성을 부여하던 형상이 사라진다. 좋아보이면 가까이 가게되지만 가까이 가면 좋아보였던 모습이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려고 얼굴을 가까이 대면 그 사람의 얼굴이 한눈에 보이지 않게된다. 호쿠사이의 후지 산 참배자들 판화에서도 매끄러운 원뿔형이던 후지산은 발에 밟히는 험한 바위가 되어 하늘을 가려버린다. 산의 객관적형태가 주관적 경험 속으로 흩어지면서 산에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도 함께 흩어지는 것 같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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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두 발이 감상에 빠지면: 보행 문학

특별히 보행을 다룬 최초의 수필은 해즐릿이 1821년에 쓴 「길을 떠나며(On Going a Journey)」이다. ‘자연 속‘을 걷는 것의 기준, 그리고 이후에 따라올 보행 문학의 기준을 마련한 글이다. 이 글의 서두에 따르면 "세상에서 제일 기분 좋은 일 가운데 하나는 길을 떠나는 것인데, 나로 말하자면 혼자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걸을 때 혼자인 편이 좋은 이유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내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책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고, "나는 내 막연한 상념이 민들레 솜털처럼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지 그 상념이 논쟁의 가시덤불에 엉켜 붙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행과 사유의 관계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글이다. 그렇지만 해즐릿이 자연이라는 책 속에서 정말혼자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짧은 글은 베르길리우스, 셰익스피어, 밀턴(John Milton), 드라이든(John Dryden), 그레이, 쿠퍼, 스턴, 콜리지, 워즈워스가 쓴 책들,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인용하고 있다. 웨일스를 여행했던 날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풍경 묘사 속에 여행 전날 밤에 읽은 루소의 『신엘로이즈』가 섞이고, 여행을 하면서 콜리지의 풍경시를 읊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 글에 인용되는 책들은 자연 속을 걷는 것의 이상, 곧 생각과 인용과 풍경이 어우러지는 기분 좋은 경험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해즐릿 역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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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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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울 것 같아서 책을 들지 못하고 몇 달 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막상 다시 읽으니 울음이 나지 않았다. 요즘 눈물이 없어져서인가. 각오를 해서 인가. 읽는 내내 무척 담담하게 읽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끈질기게 묻는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기억에 대해. 인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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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 P134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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