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정희진의 공부>에 나온 최초의 게스트, 조현철 배우이자 감독.

세상에, 이런 배우가, 아니 이런 남자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요즘 한국 드라마 거의 보지 않아서. <D.P.>는 제목만 들어보았고 탈영병 잡으러 다니는 이야기라는 것과 정해인 배우가 나온다는 정도만 아는.

멋진 남자사람이다. 나무위키 찾아보니 대단한 집안이구나. 이런 집안 환경, 부모님이라 이런 사람으로 자라는 것인가.

백상 수상소감도 이제서야 보았다. 조현철 님을 지켜봐야겠다!

마침 지난주 시사인에 영화 <너와 나> 기사가 있어서 읽었지만 그때 감독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팟빵 듣자마자 영화 검색해봤지만 역시 개봉관이 별로 없다…

* 같은 호 시사인에 반가운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님 기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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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09 0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던 배우였는데 정희진의 공부에서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남자사람이 이 나라에 있다고? 하면서요. 듣자마자 저도 상영관 찾아봤는데 제가 평일에 갈 수 없는 시간대들이었고, 주말은 상영이 안잡혀있더라고요. 너무해..
일단 정희진의 오디오매거진에 출연한다는 것부터가 남다르긴 하죠. 남자사람이, 정희진에? 후훗.
저도 놀라고 감탄한 배우입니다.

어제 책 사면서 시사인 샀는데 제가 이걸 산 건지 확인해봐야겠네요.

잠자냥 2023-11-09 09:05   좋아요 2 | URL
전 이 사람이 영화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 현장의 착취를 보다 보면 자의식과잉만 남은 산업 같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진심 리스펙트,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말끝마다 ~같아요 화법을 쓰는 것도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자신의 말을 확신하지 않는 한국 남자 사람이라니….! 계속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려고요.

햇살과함께 2023-11-09 09:12   좋아요 2 | URL
저만 모르는 배우가 아니었군요!
진짜 생각이며, 말투가,, 정말 이런 한국남자가 있다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남자 친구들에게 우리는 항상 쳐올려졌기 때문에 조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도 빵 터졌어요 ㅎ

다락방 2023-11-09 10:47   좋아요 2 | URL
아 햇살과함께 님 댓글 읽으며 빵터졌습니다. ‘올려쳐졌기 때문에‘ 인데 ‘쳐올려졌기 때문에‘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느낌 되게 쎄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09 13:29   좋아요 2 | URL
다락방 님/ 주말 상영 광화문은 좀 하던데…. 멀죠?!

다락방 2023-11-09 13:35   좋아요 3 | URL
고민.. 중입니다. 광화문.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잠자냥 님 주말에 광화문 가서 이 영화 볼겁니까?

햇살과함께 2023-11-09 13:41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 ㅋㅋㅋㅋ 쓰면서도 좀 어감이? 그랬는데, 자꾸 희진샘이 어퍼컷 얘기하셔서 쳐올리기가 되었네요?

잠자냥 2023-11-09 14:08   좋아요 1 | URL
네 예매완료! 1관에서 하던데 1관은 자리 널널한 거 알죠?!

다락방 2023-11-09 14:27   좋아요 1 | URL
주말 언제 갈건데요. 토요일이에요 일요일이에요. 그걸 말해줘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09 14:33   좋아요 1 | URL
토욜인데 조조 끊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무리 아니니?! 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1-09 14:47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만나려면 토요일 아침에 광화문으로 조조영화 보러 가면 되는 건가요?
은오님 달려올 듯..
안타깝네요 저는 토요일에 서울에 없어서....

다락방 2023-11-09 14:57   좋아요 3 | URL
아까 시간표 보고 토요일 조조 잠깐 망설이다 진정하자 하고 포기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09 15:02   좋아요 2 | URL
잘했다능 ㅋㅋㅋㅋㅋ 끝나고 술 마실 것도 아닌데 ㅋㅋㅋ 다음을 기약해~~ ㅋㅋㅋㅋ 그리고 나 금요일날 술 마니 먹으면 숙취로 예매 취소할지도 모름요 ㅋㅋㅋㅋ

건수하 2023-11-10 00:06   좋아요 1 | URL
오 가까운 곳은 다 밤이라 고민했는데 시네큐브는 밝은 시간에 하네요? 고민된다……

서곡 2023-11-09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조현철이 나왔군요 ㅎㅎ 매력있죠 ㅋㅋ 드라마 구경이 추천합니다 ~~

햇살과함께 2023-11-09 09:14   좋아요 1 | URL
서곡님은 이미 아시는 배우군요!
제가 넷플을 끊어서 ㅎㅎ 유튜브를 좀 찾아봐야겠네요.

서곡 2023-11-09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넷플에서 봐서 넷플 오리지널이라 생각했는데 방금 찾아보니 제이티비씨에서 방송했고요 ㅎ 티빙에도 있다고 합니다 ㅋㅋ 구경이란 드라마 자체가 독특해요 여성 서사고요 여기서 보고 조현철이란 배우에게 관심 생겨서 그 담부터 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이면 반갑더라고요 ㅋㅋㅋ 유명래퍼가 형이라 아 했었고요
 

촬영이 시작되기전 사진액자에 비친 내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가 내 얼굴을 감싸고, 이마가 반들거리는 모습. 저건 누구지? 밀려오는 욕지기. 액션, 사라진다. - P239

나에게 토론토에 있는 인터랙트라는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알려준 것은 마크였고 나 역시 1년 뒤 그곳에 다니게 된다. 그곳에서도 나는 비슷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마크가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면서, 그럼으로써 나 자신에게도 가능한 한 그만한 공간을 내어 주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성향덕분에 마크는 나보다 훨씬 과잉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편이었다.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마크는 늘 부모님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소외되어 지내면서도 결코 혼자 있을 수는 없는 그런 아이들은 아역배우 세계에 흔히 존재한다. - P242

내가 느끼던 소외감과 외로움이 2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버지니아까지 따라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캐나다에는 쇼핑몰도 없어?" 사촌이 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고카트를 생각했다. 따뜻하던 호수도 생각했다. 성이 난 오리들. 해변에서 마신 차가운 펩시콜라. 정말 맛있던 꽁꽁 언 초콜릿 바.
‘어째서 여기선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 여기라고 해서 열네살 ‘톰보이‘가 남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P251

제시카 옆에 있으면서 나는 변했다. 동네에 퀴어라고는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내 앞에 그녀라는 사람이 나타난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두려움과 수치심을 극복하고 당당히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걷다가 마주칠 때, 파티에서 그 애를 볼 때, 그 애가 쇼핑센터에서 만드는 샌드위치를 먹을 때, 나는 그 애한테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가능성과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싶었던 거다. 그녀라는 존재가 내 눈에 보인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였다.
지금도 나는 세상을 걸어 다니며 그 일을 생각한다. - P272

이제 와 돌아보면, 나는 그 촬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갈 걸 미리 눈치 챘어야 했다. 촬영 첫 주, 누군가가 세트장에서 키어시에게찾아와 테이크 사이사이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잘 알겠지만 네가 이 역할을 맡게 된 건 네가 흑인이라는 이유밖에 없어.
내 경우에는 첫 번째 의상 피팅 날에 감이 왔다. 순식간에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더 여성스럽게. 내 눈앞에는 하이힐이며 치마가 펼쳐져 있었는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가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레지던트 의대생들의 이야기인 이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며칠이 흘러가는 동안내가 맡은 배역은 옷을 거의 갈아입지 않는다. 나는 내게 주어진과제를 이해했고 그에 순응할 작정이었지만 그 인물이 하이힐이나치마를 입기에 합당한 이유는 절대 없었다. 나는 고급스러운 블라우스, 달라붙는 청바지, 굽이 달린 부츠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사안은 해결됐다. 문제는 해결됐다. 그리고 그 문제란,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거였다. - P278

‘내게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아니, 단지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절벽 끝까지, ‘거의‘ 떨어지기 직전까지스스로를 한껏 밀어붙이는 습관이 생겼다. 하지만 가장 최악이던순간에조차, 내 안의 작고 작은 어떤 부분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미약하고, 손에 잡히지조차 않는 가느다란 틈 그리고 그 틈을 통해 모든 것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식간에 붙잡아야 한다. 그 안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다.
눈을 감고 걸어 나와.
커밍아웃을 한 뒤, 충격적이게도, 세상은 끝나지 않았고 내 삶은 나아졌다. 나는 가슴 주머니에 그 경험을 추천서처럼 넣고 다닌다. ‘이 일을 해냈으니 세상에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 P296

젠장, 여태까지 너무나 많은 유턴을 한 나머지 현기증이 나기억을 잃었던 게 분명했다. 비의 말을 듣는 순간 지난 일들이 플래시백처럼 펼쳐졌다. 나는 친구들에게 질문했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진실을 억누르고 또 억누르길 거듭했다. 새로운배역으로, 새로운 화보 촬영으로, 새로운 연애로, 새로운 공항으로, 새로운 타이트한 스포츠브라로 옮겨가면서. 나는 이 사실을 똑바로 마주봐야 해.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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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내 삶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끊임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두 가지는 서로 별개라는 것이다. 퀴어로 커밍아웃한 것은 트랜스, 즉 타인의 기대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뒤진화한 나 자신으로 커밍아웃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런 기억들은 비선형적인 서사를 이루는데, 퀴어함이란 본질적으로 비선형적인 것, 굽어지고 틀어지는 여정들이기 때문이다. 두 발짝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 나는 내 삶의많은 부분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아주 조금씩 깎아나가는 한편으로 무너질까 두려워하며 보냈다. 그 과정 역시도 의도적으로 내글에 담았다. 여러 의미에서 이 책은 내가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는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 P11

「주노」가 성공을 거두자 영화계 사람들은 내게 내가 퀴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한테 해가 될거라고, 내게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최선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래서 나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했다. 사진촬영을 했다. 폴라를 비밀로 간직했다. 그러면서 우울증과 쓰러질 정도로 심각한 공황발작에 시달렸다. 나는 거의 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몸속에 못이 가득 든 것처럼 무감각했고 조용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고통이 얼마만큼 큰지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특히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적어도 남들이 그렇게들 말하던 시기였으니 말이다. 나는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한 거라고, 내가 감사할 줄 모른다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아프다고, 꼼짝도 할 수 없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 P28

내가 나를 알게 된 건 네 살 때였다. 핼리팩스 시내, 퍼블릭가든 건너편 사우스파크 스트리트에 있는 YMCA 유치원에 다니던시절이었다. 짙은 색 벽돌로 되어 있던 건물 외벽은 이후에 철거한뒤 재건되었다.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애초부터 알았다. 의식적으로 안 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였다. 그 감각은 내가 가진 가장 오래된, 그리고 선명한 기억 중 하나다. - P35

아버지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와 온 가족이 있을 때 참 다른사람이었다.
"린다와 네가 물에 빠지면 나는 널 구할 거다." 아버지는 남몰래 내게 말하곤 했다. "린다는 내 평생의 사랑이 아니야. 너야말로내 평생의 사랑이지." 그건 비밀이었다. 아버지가 대놓고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린다 곁에 있을 때는 에너지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에게는 둘만의 노래인 루스 브라운의 참견하지 마Ain‘t Nobody‘s Business」가 있었다. 나를 학교에 태워다 줄 때면 아버지는 이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따라부르곤 했다.
린다 곁에 있을 때 그런 ‘사랑‘은 증발해버렸다. 말투도, 몸짓도, 표정도 변했다. 마치 두 사람이 하나로 뭉쳐 작당이라도 한 것같은 차갑고 냉랭한 태도에 내 눈길은 절로 바닥을 향했다. 린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게 못되게 굴었고 둘만 있을 땐 더더욱 못되게굴었다. 나는 아버지와 나만의 비밀을 잘 숨겼다. - P67

전문 배우가 되는 동시에 쇼핑몰에서 "녀석, 고맙다."라는 말을 듣는 시절도 끝이 났다. 배역을 위해 머리를 기르고, 신체의 변화를 목전에 두었던 나는 세트장에 있는 시스 남자아이들을 빤히바라보곤 했다. 칼라 달린 셔츠, 멜빵, 반바지에 타이츠는 입지 않은 아이들. 머리에는 리본이 아닌 뉴스보이 모자를 쓴 아이들.
왜 나는 저 모습이 아니지? 나는 저들처럼 움직이고, 저들처럼 연기하는데.
어린아이 시절부터 시작되어 대상포진처럼 골수에 깃들어 있던 괴로운 느낌이 예고도 없이 닥쳐와 온몸에 퍼지며 내 신경을 노출했다.
어머핏 포니를 촬영하는 동안 나는 젠더 디스포리아에 시달렸다. 풀로 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던 타이츠도, 하늘하늘 날리던 드레스도 빌어먹을 리본은 어머니가 내 머리카락에 꽂아 주던 머리핀처럼 해소되지 않는, 내면화된 울화를 자극했다. - P75

아버지를 용서하기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 당장 토론토로 가서네 엉덩이를 걷어차 주마. 자기 자식이 보호를 필요로 했을 때, 자기자식이 사랑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폭력을 가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성년자인 내가 겁도 없이 성인 남자와 인터넷으로 교류했다는이유로 노여워했다. 그 순간에 내게 돌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순간에 내게 안전과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영영 그런 것을 얻을 날은 없지 않을까? 아버지의 그 한마디 말은 그 남자의 위협보다, 그의 집착보다, 내 팔을 훑던 그의 손가락보다 내 몸속에 더욱오래 머물렀다. - P89

2014년의 커밍아웃은 선택했다기보다는 하지 않을 수 없어서한 것이었지만, 맞다,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한 일들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노출되고 취약해지는일이 잇따랐다 한들, 커밍아웃은 그 모든 걸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걸음이었다.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이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낮은 목소리. 그 속삭임은 여전히 선명하게 내 귓가에 맴돌았다. - P111

수줍어하던 나는 점점 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갔다. 벌써 그녀가 나를 아끼고, 지켜 주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고, 그럼에도 어른 행세는 전혀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그렇지만우리의 친밀함은 그 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열아홉 살의 내 자아에미친 영향을 아주 약간 완화해 준 데 그쳤다.
「아메리칸 크라임은 1965년 인디애나주 역사상 한 명의 희생자가 겪은 최고 수위의 학대를 경험한 열여섯 살 소녀 실비아 리킨스의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잔인한 영화지만 실화의 끔찍함에비하면 자제한 편이다. 나는 실비아 역을 맡게 되었다. - P123

내가 맡은 배역들은 나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연기란 다른 인간의 경험을 탐구하는일이다. 공감하고,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자 바라는 마음으로, 감정이 솟구쳐 오르기를 기다리는, 결코 끝나지 않는 연습이다. 눈을 감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이 내게 닥쳐왔다. 실비아는 어떻게 그토록 오래 버틴 걸까? 어떻게 포기해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고문이란 사람을 끝까지 끌고 갔다가 다시 끌어당기는 일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는 것이리라. - P127

촬영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특히 더 힘든 날이면 키너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돌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테킬라를 마시고 키너의 집 벽난로 앞에 앉았다. 음악을 크게 틀어 두고, 알 수 없는 커다란 모험을 앞둔 채 춤을 추고 또 췄다. 우리가 만나게 된 계기인 이 영화에서는 키너가 나를 살해한다. 실제 세계에서 키너는 내 하나뿐인 구원자였다. - P129

비록 그 배역을 맡게 되리라는 걸 스크린 테스트 전부터 넌지시 알고 있었음에도, 배역이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꿈꾸던 배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스크린 테스트가 끝나고 두 달 뒤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결국 촬영이 밀렸고, 회복할 시간이 생겼으니 내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자기억제는 여전했지만 음식을 먹는게 훨씬 더 편해졌고 일은 내게 도움을 주었다. 주노 세트장에 있으면 치유받는 기분이었고, 고문의 장면들이 나를 집까지 따라오지도 않았고, 나는 내 몸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나게 나아졌다.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기분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우울감이 나를 껍데기만 남기고 빨아들여 버렸는데말이다. - P135

내 옷은 내 허벅지에, 가슴에, 거머리처럼, 1990년대에 유행하던슬랩 팔찌처럼 철썩 달라붙었다.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 마치내가 기적 같은 승리라도 거두었다는 듯 환해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내 얼굴은 일그러졌다. 내가 칸 영화제에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프리미어 시사회를 위해 몸에 딱 붙는 금빛드레스를 차려입었을 때 기뻐하던 얼굴들을 앞으로도 영영 잊지못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예쁘잖아."
울 "그냥 게임을 한다고 생각해."
나 개인의 삶에서 하고 있는 연기가 이미 나를 숨 막히게 하고 있는데 스크린에서도 연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압박이었다. - P156

할리우드의 바탕은 퀴어함을 지렛대처럼 활용하는 데 있다. 필요한 순간에는 치워버리고, 이익이 될 때는 끄집어내면서 자기들끼리 뿌듯해하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때늦게, 한참 뒤처져 반응하고 따라간다. 할리우드라는 깊숙한 벽장은수많은 비밀을 묻어 버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내가 퀴어라는 것 때문에 벌을 받는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사람들을 대놓고 학대하면서도 보호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해 보인다." 꼭읽어 볼 만한 책인 세라 슐먼Sarah Schulman의 『끈끈한 유대감: 가족 내의 호모포비아와 그 결과 Ties That Bind: Familial Homophobia and ItsConsequence』에 나오는 구절이다. - P163

불안감은 사라질 줄 몰랐다. 무언가가 나를 자꾸만 짓눌렀고,
공황발작 때문에 도저히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운전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날들도 많았다. 걱정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의욕이 없었으며, 바라는 것도 없었다. 처음으로 제대로된 심리치료사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삶을 구하는 조언을 얻게 해준 건 매니저였다.
"진짜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로 가야 해요." 스물세 살에만난 새로운 심리치료사가 말했다.
"안 돼요, 그건 불가능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내 퀴어다운 걸음걸이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내 입 밖으로 나온 말이었다.
젠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너무 뜨거워서 건드릴 수도 없는 주제였으니까. 내가 젠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내가 나 자신에게 충분히 귀를 기울이게 될 수 있기까지 이로부터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극한에 몰린 나머지 더는 선택지가 없어질 때까지. 길 위의 마지막 갈림길에 놓일 때까지.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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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숲속쉼터에서 비 그치길 기다리며 읽은 책.
커피만 있으면 딱 좋은 비오는 날 분위기.
이 책은 정말 표지에 있는 권법 자세를 취하는 여러 길고양이들이 나오는 귀여운 책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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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서
전시 환경파괴는 전쟁범죄이다
1943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어느 생물학 실험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아서 갤스턴은 ‘2, 3,5-트라이아이오도벤조산‘이라고 불리는 화학물질이 식물의 생장을 무분별하게 촉진시켜서 오히려 말라죽게 한다는논문을 발표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연구결과는 갤스턴이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적극 활용되었다. 1950년대 영국과 미국 국방부 소속 과학자들은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을 말려서 죽이는 제초제, 즉 고엽제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고엽제는 미군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에서 약 8,000만L를 살포했던 ‘에이전트오렌지‘라는 이름으로 잘알려져 있다. 영국 공군도 1950년대에 일명 ‘말라야 비상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말레이시아 반도에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에이전트오렌지를 비롯한 제초제의 파괴력은 잔혹했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비인간적이었다. 오늘날 에이전트오렌지로 인해 파괴되었던 인도차이나반도의 숲은 외관상으로는 옛 모습을 되찾은 듯하다. 하지만 화학염으로피해를 입은 베트남 주민들은 최소 400만 명에 이르며,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미국과 한국 군인들도 고엽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오염물질이 빗물에 씻겨서 지하수로 흘러들어간 뒤 인간의 건강뿐만 아니라 동식물에도 소리 없는 피해를 계속 입히고 있다. - P109

백무산
현실은 이제 인간에 대한 문제에 다른 관점을 요구한다. 인간문제를넘어서 인류의 문제로, 문명의 역사를 넘어 인류사 전반의 문제로 인식의 확장을 요구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나머지 다른 영역을 해석하는 오만하고 잘못된 전통 그대로 문명사회를 기준으로 과거 인류의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을 제대로이해하기 위해서 ‘머나먼 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P121

도시문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문자였다. 도시는 이질적인 사람과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며 교환을 위한 사업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문자가 이질적인 것을 연결하고 권력에 의한 통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문자는 단순히 말을 받아 적은 기호가 아니었다. 문자는 우리의 생활세계에 생성하고 소멸하는 구술적 상호작용 대신에 정신을 사물화하고 불변하는 허구적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스스로를 지상에서 더없이 우월한 존재로 만들었다. - P123

자본주의 노동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변형하고 왜곡시킨다. 자본주의 노동습관은 자연에 대해 무관심과 적대와 공격적인충동을 유발한다. 노동의 윤리는 그 시대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태도를결정한다. 노동 자체에 대한 성찰은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며 자연과의왜곡된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기계노동은 신성하지도 인간적이지도않다. 그 누구도 인간성의 요구대로 노동자가 된 사람은 없다. 채찍과감옥이 있었고 감시와 처벌로 훈육되고 개조되었다. 이러한 성격을 인간성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윤리성을 인간의 고유성으로 둔갑시켰다. - P125

숲속을 거닐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기보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이 발견되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시선에서 발견되는 나는 내가 생각해온 내가 아니다. 그 시선은 나의 내면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깬다. 나는 보는 자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자이기도 하다. 보여지는 것도 나의인식의 일부다. 나의 내면은 내 안에만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 P127

강수돌
저는 언론과 대중문화에도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개개인이 분리배출 잘하고 전기차를 타면 기후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녹색과 성장이 양립할수 있는 개념인 것처럼 이야기해서 정치의 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게합니다. 그렇지만 수치로 따져도 세계 최상위 부자 10%가 대기 중 온실가스의 약 45%의 책임이 있다고 하잖아요. 이 사람들의 생활이 평균으로만 내려와도 온실가스가 3분의 1 줄어든다고 합니다. - P146

선생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생활정치라고 할까요, ‘나부터 혁명‘이라는저서도 여러 권 내셨지만 사고장애, 경쟁, 동일시, 중독 등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 보통사람들의 왜곡된 욕망을 분석하고, 노동(자본)의 족쇄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때 맛볼 수 있는 보람과 즐거움, 그리고 가능성을 몸소 실천적으로 주창해오셨지요. 저희 편집실은 깊은 무기력증과 빈곤한 상상력의 수렁에 갇혀 있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것은 정밀한 진단과 함께 대안적 삶의 모습 그 자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생님께 말씀을 청해 듣고 싶었습니다. - P147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력’으로서의 삶을 무시할 순 없지만, 노동력 차원이 10~20% 정도라면 ‘인격체‘로서의 삶이 80~90%가 돼야 온전히 삶의 주인으로서 살 수 있어요. - P148

강 대다수 사람들이 ‘강자동일시‘를 하면서 그들을 선망하고 모방하려 하는 것은 결국 ‘거품을 향한 질주‘죠. 물론 자본주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로 묘사할 순 없어요. 오히려 크게 두 가지 측면-신분의 자유화, 소비의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뤘어요. 그러나 이 성취들이갈수록 족쇄로 기능하죠. 신분 자유화로 노동력을 자유로이 거래하는대신 잉여가치 생산시스템에 종속되었고, 소비 민주화는 결국 자원낭비, 자연오염, 생태위기를 초래했어요. ‘이카루스 역설‘처럼 성공의 요인이 패망의 요인으로 작동한 역설이죠. 비근한 예로, 성공 신화로 회자되는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잖아요. 그가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성공은 할 만큼 했지만 놓친 게 있다. 바로 내 삶을 놓쳤다. 내 삶의 시간과 내용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결코 살 수 없다." 가치관 내지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과 이런 메시지를 공유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고 봐요. - P151

그러니까 내가 잡초를 ‘이겨야지‘, 이런 마음으로 달려들면 안돼요. 요즘 저는 잡초한테 배워야지, 잡초처럼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우리도 그런식으로 활동하고 운동해야죠. 칡넝쿨처럼 우리가 가는 모든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뿌리는 운동을 꾸준히 해나가야 해요. 그게 얼마나 성공할 것인가 물어보는 이들이 있는데, 결과와는 관계없이 ‘옳은 일‘이면 해야죠. - P155

복지국가란 원래 자본주의를 존속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결코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변화시키는 건 아니죠. 이 부분에 저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 P162

강 굉장히 중요한 점인데, 아픔이나 고통 같은 어두운 면이나 기쁘고 행복하고 밝은 면 모두, 큰 차원에서는 삶의 흐름 안에서 부단히 교 - P168

차하고 공존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시민들은 대개 좋은 것만 취하려 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전가하거나 안 보이는 데로 돌려버리려는 회피성향이 커요. 어두운 면(더러움, 촌스러움, 귀찮음, 아픔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둠을 직시하지 못하죠. 그리고 바로 그 과정에 자본이 개입해요. 기술이나 약품, 오락의 형태로! 그렇게 해서 중독의 늪에 빠져드는거예요. 자신의 인간적 필요, 고통 같은 것들을 책임감 있게 직접 대면하면서, 때로는 좀 아픔도 겪으면서 긴 터널을 통과하듯 빠져나가야 비로소 어둠과 함께 하나의 큰 세상을 구성하는 빛도 맛볼 수 있어요. 두렵다고 자꾸 우회로를 만들고 달콤한 대체물에 의존하게 되면 중독의수렁에서 헤매게 되죠. 그렇게 ‘악의 일상성‘이 구현되는 거죠.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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