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세르비뉴와 라파엘 스테방스는 《붕괴의 사회정치학》에서, 이대로 가면 금융적 붕괴, 경제적 붕괴, 정치적 붕괴 그리고 사회적 붕괴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본다. 정부가 당신을 돌봐줄 것이라는 희망이사라지고 동료가 당신을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마저 사라진 다음에는, ‘인류의 선함‘에 대한 믿음마저 잃게 되는 문화적 붕괴까지 일어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다. - P83

이보 모슬리는 《민중의 이름으로》(녹색평론사, 2022)에서 대의민주주의란 민중이 아니라 중간계급이 권력을 잡고 민중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위선적인 체제라고 대놓고 비판한다. 서구의 근대사회가 이런 대의민주주의를 다른 나라들에 적극적으로 수출했고, 그렇게 수출된 선거대의제는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신흥 엘리트들에게 권력을 몰아줬으며 민중의 경제적 독립성을 빼앗고 시민사회의 황폐화를 불러왔다. 대의민주주의를 외친 정치인들은 민중이 아니라 은행, 기업들과 손을 잡았고, "인간의 삶과 행위의 전 영역에서 기업구조가 공민적 구조를 대체해왔고, 전 세계가 부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개조되고 있다"(188쪽). 그 결과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거대한 골이 생겨나고 있다"(54쪽). 대의민주주의는 대안이 아니라 파국의 원인이다.
이런 설명에는 충분히 공감이 되지만 모슬리의 설명을 한국식으로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영국처럼 중간계급이 젠트리에 의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싸우지 않았고, 식민지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대의민주주의조차 전면에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을 통해 선거대의제가 도입된 것은 맞지만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면서 중간계급이라 불릴 수 있는 계층이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는 선거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했고 진보정당, 진보정치의 등장을 봉쇄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거 이상을 주장하거나 민중이 직접 권력을 쥐자고 주장하기 어려웠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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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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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노숙, 소매치기. 가출팸을 형성한 아이들의 세계와 마음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는 작가의 섬세함. 누군가에겐 그 세계 밖에 없지만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지. 그 희망의 끈이 인수를 살게 하고 이호를 살게 할 것이다. 신발 끈을 묶어주는 무심한 행동만으로도. <페이드 포>도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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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해봤다. 용돈은 거절하면서 몰래 천원씩 훔치는 건 어떤 마음일까. 적은 돈 없어도 티가 나지 않는 돈을 훔칠 때 느끼는 죄책감이 신세를 지면서 느끼는 부채감보다 가벼운 것일까.
신경질적인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음 저편에 밀어놓았다가 끌어당겼다가 하고 있으면 반질반질하게 닦인 어둠속에서 귀신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코웃음을 치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망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 P116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일구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그런 게 체득이 되는 인간들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창가에 어른거리는 고양이 그림자를 눈으로 좋으며 우리는 망했다고 홀로 중얼거렸다. - P198

이호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었다.다.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뭐가."
"누가 내 신발 끈 묶어주는 거요."
나는 멈칫했다.
"어릴 때, 누군가가 묶어줬을 거야. 네가 기억 못할 뿐이지."
나는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어른 흉내를 내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럴 거야, 분명히 그랬을 거야, 하고 무언가를 다짐하듯 말했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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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드 포 - 성매매를 지나온 나의 여정
레이첼 모랜 지음, 안서진 옮김 / 안홍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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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도 성매매가 성폭행, 강간과는 다르다는 허튼소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성매매의 합법화와 비범죄화를 주장하진 못할 것이다. 아니라면,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백 번, 천 번 다시 읽어야 한다. 성매매에 대한 순진한 생각을 완전히 깨트리는 책이다. 모랜의 10년의 노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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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0-25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러분들의 완독 기록이 줄줄이 올라오네요.
읽기 힘든 책 읽느라 수고하셨고 완독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백자평 너무 좋습니다, 햇살과함께 님!!

햇살과함께 2023-10-25 20:08   좋아요 1 | URL
감사^^ 너무 좋았어요~ 저는 생각보다, 다른 책에 비해 읽기 힘들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모랜의 글을 풀어내는 빙식에 답답함이 없어서 인 것 같아요. 다만,, 물리적으로 글씨가 작아서 읽기 힘듬…

건수하 2023-10-25 21:13   좋아요 1 | URL
모랜의 글 참 좋았지요. 번역도 좋았던 것 같고요 ^^

독서괭 2023-10-25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햇살과함께 2023-10-25 20:10   좋아요 1 | URL
너무 좋은 책^^ 큰 글자판으로 널리널리 보급 필요합니다 ㅎ

건수하 2023-10-25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햇살과함께님 완독 축하드려요 ^^ 큰글자판 보급 꼭 필요합니다 222

은오 2023-10-26 0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햇살님~ 완독 축하드려요!! 👏👏👏💕
이 책 진짜 많이 읽혔음 좋겠어요. 누가 성매매에 대해 허튼소리 하면 이 책을 내밀 것입니다!!!!!

잠자냥 2023-10-26 06:53   좋아요 2 | URL
늘 갖고다녀야겠네…..

은오 2023-10-26 08:24   좋아요 2 | URL
말이 안통하면.. 무기로 쓰면 좋을텐데 양장이 아니라 아쉽군요ㅜ

햇살과함께 2023-10-26 09: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늘 갖고 다니다 허튼소리에 들이밀도록 포켓북 사이즈로 만들었나 봐요 ㅎㅎ 출판사의 큰 그림!
 

21. 성매매의 보편화
아무에게도 강요받지 않은 나와 같은 여성들은 우리의목소리를 찾아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 아무것도 우리를 강요하지 않은 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강압적인 상황에서 지구상 가장 강력한 강제성은무형으로 존재하는데, 강제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주먹이나 총, 칼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건 무척이나 인간적인 어리석음이다. 내 성매매 경험은 강요되었다. ‘자유로운‘ 범주에 속하는 우리들을 강압한 건 삶이다. - P339

성매매를 보편화하려고 이용하는 또 다른 거짓은(현대이전 매우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성매매가 존재하기에 남성들이 지니는 성적인 공격성이 비성매매 여성으로 향하지않을 수 있다는 개념이다. 아일랜드 전국 여성 연합 전 대표인 수전 맥케이가 아래와 같이 말하면서 이 신화를 혹평했다.

성매매 여성의 존재가 남성들이 지니는 성적인 공격성을 막는안전밸브라서 다른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성폭력 없이 살아야 하는 모든여성의 권리를 무시한다. 성매매를 정기적으로 하는 남성들은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을 자주 더 폭력적으로 대하는 경향이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성매매 여성들을 이용하는 남성들은 여성들을 존중하는 남성들이 아니다. - P341

성매매 경험을 ‘성노동’으로 눈가림하려는 전략과 같고, 둘 다 같은 목적을 공유하니 같은 맥락이다. 이 묘사 뒤에는 분명히 고의적인 의도가 있다. 성매매를 품위와 결합시키려는 의도이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부끄럽지 않아야 용인할 만하기 때문이다. - P347

24. 관계와 섹슈얼리티에 미치는 악영향
저메인 그리어는 1969년도 책『여성, 거세당하다』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단지 반응하고 응대하는 정도에그쳐 왔으며 부자연스럽게 훼손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왔다는 것은 사실이며, 사회적 길들이기가 그 책임이 있다. 어떤 다른 그룹에 속한 여성도 성매매여성만큼 섹슈얼리티의 두 다리가 묶이지 않는다. 섹슈얼리티가 방해받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다. - P378

25. 여진
이 여성들의 글쓰기가 나의 글쓰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위안을 받았고 안심이 됐다. 예를 들어, 나는 이 책을 집필하기 초반부터 ‘성매매 여성‘이라는 말보다 ‘성매매된 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선호했다. 왜 이 용어가 더 적합하게 느껴졌는지 정확히는몰랐다. 그저 그렇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왜 인지 안다. 여성은 오직 다른 사람에 의해서 성매매될 때만 성매매 여성이 될 수 있고 그 누군가를 염두하지 않은 채 성매매 여성만을 언급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상업 분야에서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정육업자는 아무도 그의 고기를 사지 않아도 여전히 정육업자인가? 아니다 그는정육업자가 되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그 이상은 아니다. 여성에게 그 명칭이 붙기 위해선 성매매가 되어야만 한다. 성매매 여성이 되기 이전에 구매되어야만 한다. - P401

에필로그
이 책을 쓴 이유 대부분은 이미 설명했지만 한 가지가 남아있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불타는 건물을 비유로 들 수 있는데, 불 타는 건물을 빠져 나올 만큼 운이 좋았다면 그 집에 불이 났다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옳다. 그래야 그 안에 여전히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희망이 생긴다. - P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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