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가을호 - 통권 1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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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순임에도 낮 기온이 20도에 이르는 이 가을에 기후위기에 대한 글들 만큼이나 트럼프가 당선된 이 시점에 반민주적인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아닌 추첨제, 시민의회 등 대안적 정치제도에 대한 글들이 주는 울림이 크다. 다음 호에선 트럼프로 인해 촉발될 여러 위기들이 언급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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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하지만 페미니즘의 말은 머리로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말이기는 해도각자의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연결되는 면에서는 약합니다. 즉 개개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이어져 함께 사회를 변혁하는 존재이기도 한 나라는 존재의 전체성을 표현하기에는 페미니즘 운동이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것같습니다. - P7

1 여성해방이란 무엇인가

여자로 사는 어려움, 이것은 여자의 일상을 끊임없이 침식하는 가치가없는 나‘라는 협박 같은 관념과 함께 존재한다. "인류 및 여성 여러분"이라고 처음 말한 이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는데, 그 말은 여자는 과학자들예술가든 음악가든 될 수가 없고, ‘암컷‘만 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의 진실을 묻어 버리지 않고 알려 주는 말이다. 물론남자를 제치고 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밝혀 온 여자들이 지금껏 무수히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여류 음악가‘, ‘여자‘, ‘여의사‘ 등 ‘여류‘로그존재를 허락받았던 것에 불과하다. ‘남자인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에서 여자가 개인 주체로 어떻게 나 자신을 찾아야 할지, "여자인 주제에"하고 매도당하며 암컷으로 살아온 역사성이 우리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않는다. 남자는 집 문지방만 넘어서면 사방이 적인지라 엄혹한 세상에서녹초가 되어 살아간다는데, ‘사회‘에서 자신을 찾고 구하려는 여자들에게는 ‘사회‘ 자체가 적이다. - P33

그런데 애초에 사람의 일생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계속 묻는 과정이기에 물음을 던질 게 있든 없든, 우리는 각자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자 스스로 계속 물을 수 있다.
여성해방운동과 만나기까지 나는 내 삶의 방식을 밝히기 위해 천착할 물음을 갖지 못한 채 내 자신에게 계속 물음을 던져 왔다. 그 과정에서 엉망인 상태는 반복되기도 확산되기도 했다. 당연히 그 엉망인 상태는 나만 알 수 있는 정도이기는 했는데, 전에는 지금보다 더 심하게엉망이었다. ‘선택당하지 못한 여자‘는 스스로를 던지고 깊이 파고들물음이 없어서 이리저리 헤매는 여자, 헛도는 모습이 아주 뛰어난 여자다. ‘선택당하지 못한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나는 내면에서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보는 강박관념과 격렬하게 싸우면서 살아왔다.
그런 강박관념이야말로 엉망인 내 상태의 바탕이었다. 엉망인 상태야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마치 바위가 밀어닥치는 파도로 숨 돌릴새 없이 침식되고 마는 것처럼 강박을 멈출 길 없이 존재의 상실감에사로잡혔다. ‘결국 난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살 수가 없어. 아내이자엄마가 된다고 해도 그 삶도 결코 쉽지는 않아 보이니까. 그래서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건가!‘ 하면서 스스로를 더욱 괴롭혔다. - P41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려면 자신을 돌아볼 게 아니라 해방, 특수한 실현과 같은 목적을 자기 외부에서 추구해야 한다고했다. 이 생각은 매우 옳다. 그러나 이 말에서 누락된 측면이 하나 있는것 같다. 동양과 서양 문화의 차이와 같은 것을 느끼는데, 예를 들어 중국식 무통분만과 같은 특수한 실현을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자 할 때, 그 목적은 자신의 외부와 내부 양쪽에 다 있는 것이 아닐까? 생경한 말이라도 여기서 한번 짚어 보자면, 투쟁을 위해 주체성을 구축할 경우투쟁을 창조하는 목적과 자신을 창조하는 목적은 같은 무게를 갖고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창조하는 나, 내가 창조하는 투쟁에 목적을두고 그것들을 획득하는 과정 가운데 투쟁을 위한 주체성이 결정되는것이 아닐까 싶다.
자신을 돌아볼 일이 없다면, 외부에서 구하는 목적은 달성할 수 없다. 물론 그 목적이라는 것을 사람의 일생으로 본다면 단지 과정이 일단락되는 것일 뿐인데, 어찌 됐건 나를 단련한다는 것, 나를 넘어선다는 것은 과정이며 목적이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나를 넘어서기 위한 매개를 자신으로 둘지, 자신이 아닌 것(남)으로 둘지에서 나온다. 남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증명을 남과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확산하는 성이다. 그런 이유는 경쟁자를 곁에 두지 않고서는 자신을 단단히 할 수 없는 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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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거짓의 여러 얼굴들을 지니는 법이다.
그 앞에서 사람은 되도록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런 진실을 말하면 자칫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으니. - P162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얼마나 숨이 가빴던지,
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야말로 네가 나태함을 벗어 버릴 때로구나.
베개를 베고 이불 속에 누워 편안함을 즐기다가는
명성을 얻을 수 없느니라!

명성 없이 삶을 소모하는 사람은
허공의 연기나 물속 거품과 같은
흔적만을 세상에 남길 따름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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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_기후위기 시대의 중심 가치, 돌봄

기후위기 시대에 돌봄에 대한 또다른 인식의 전환은 돌봄의 대상을인간에 한정하지 않는 것이다. 조미성에 의하면 기후돌봄은 ‘생태적 돌봄‘으로서, 돌봄을 비인간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난잡한 돌봄‘이라고 명명하는데 그 뜻은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간에 이루어지는 모든 형태의 돌봄"이다. ‘난잡함‘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식의 행동을 뜻하는데, 그만큼 인간, 비인간을 가리지 않고무차별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용어다.
이때 돌봄의 대상은 심지어 생물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즉 사물도 돌봄의 대상이 된다. 우석영이 소개한 철학자들은 사물도 생물처럼 잠재역량과 생기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제인 베넷에 의하면, 물질의 구멍, 즉 "결정 사이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유원자들의 진동이바로 사물의 생기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행위주체라는 점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그것이 어떤 성격의 물질이든 존재론적 위계구조상에서 우열의 위치를 점하는 자들일 수는 없다. 우석영에 의하면 이러한 신유물론적 사유는 "거의 모든 종류의 차별을 그 밑바닥부터 붕괴시킨다." - P235

손우정_민주주의의 근원에 다가서기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근원적 의미, 본질은 무엇일까? 고대에는 이것이 명확했다. 민주주의의 어원 그대로 ‘민중의 지배‘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이 동일하다는 원리, 내일 내가 앉아 있을 수도 있는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발상은 오늘날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고 있는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선거는 귀족정을, 추첨제는민주정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급진적‘이라는 말과 ‘근원적‘이라는 말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현실의 민주주의를 계속 급진화하면, 그 궁극적 지향과 가치는 근원적 민주주의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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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음_공유지에서 살아가기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집의 주인이 되기를 사양했다. 손님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그렇지만 그들보다 좀 오래 머무르는 장기투숙객으로 살기로 했다. 우리끼리는 구구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고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던 설정이었다. 그리고 재미가 없어지면 바꾸면 될 것이었다. ‘빈집‘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 우리는 몰랐다, 우리가 시작하는 일은 구현하기도 어렵지만 쉽게 포기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빈집‘의 원칙은 나중에야 언어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은 공유, 자치, 환대였다. - P189

키키는 건물 이름이자 공동체의 이름인데, 웃음소리에 친구와 친족(kith and kin)이 되어 함께 살자는 뜻을 담아 만든 이름이다. 혈연도 아니고 같은 공간에 살지 않아도 같은 종족으로 살자는 의미에서 키키족으로 부르기도 한다. - P195

강수돌_인간노동, 인공지능, 가치원천

K. 맑스의 《자본》은 자본주의 상품가치의 원천이 인간노동임을 명확히 했다. 왜 그런가? A. 칭의 <세계 끝의 버섯>처럼, 황폐한 숲속에서 돋아나는 송이버섯은 그 자체로 (자본주의) 가치가 없다. 사람이 힘겹게 숲속을 헤매다 땅바닥 솔잎을 조심스레 들추어야 송이버섯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잘 따서 깨끗이 정리한 다음 시장까지 잘 날라야 비로소 가치를 지닌 ‘상품‘이 된다. 산속의 송이 그 자체는 상품이 아니며 가치 개념도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에 인간노동이 가해지고 시장 거래 대상이 되어야 비로소 상품이 되고 가치를 갖는다. 만일 자연산 송이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면, 손쉽게 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할 것이다. 그게 양송이버섯, 새송이버섯이다. 자연산 송이에 비하면 양송이나 새송이는 훨씬 싸다. 즉, 상품가치는 인간노동량에 따른다(가치공식 1). 그리고, 노동량이 많이 든 상품은 가치가 높아 더 많은 화폐와 교환되고, 노동량이 적은 건가치가 낮아 더 적은 화폐와 교환된다(가치공식 2). - P200

요컨대, 가치의 원천은 인간노동이다. 인간노동이 없다면 가치는 생산되지도 재현되지도 실현되지도 못한다. 그런데 각종 자본주의적 혁신은 결국 노동효율을 증가시키지만 두 가지 면에서 자기모순에 이른다. 첫째는 가치공식8처럼, 무한대를 향한 가치 증식 욕망이 각종 기술혁신을 추진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상품 단가를 무한소로 축소하기에 갈수록 마진(잉여가치)이 얇아진다는 모순이다. 가치 증식 욕망의 무한대 경향과 가치 축소 현실의 무한소 경향이라는 자가당착! 둘째는, 각종 혁신의 결과 노동효율이 높아지는 경우, 이것이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엔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즉 잉여인간만대량 방출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기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바로 그 열심히 일한 결과 스스로 해고 대상자로 내몰리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이런 일이 설사 한 기업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보면 더욱 뚜렷하다. 자본주의에서는 (재산, 소득 불평등뿐 아니라) 한쪽에서는 실업이, 다른 쪽에서는 과로가 상존하는, 지극히 불합리한 노동 불평등이 전 사회적으로 관철되기 때문! - P203

바로 이런 면에서 독일 사회학자 마리아 미즈의 ‘빙산 모델‘이나 영국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스의 ‘도넛 경제‘가 눈길을 끈다. 이들은 우리가 아는 노동-자본 관계는 (눈에 잘 보여 GDP로 산입되지만)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 빙산 아래엔 더 어마어마한 덩치가있는데,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무시당한다. 그것은 비공식 부분, 자급농부, 가사노동, 식민지와 제3세계, 그리고 자연 등이다. - P205

정형철

《지그문트 바우만,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소비지상주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그야말로진정한 ‘문화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P223

부희령

이러한 맥락에서 책에 인용된 호주의 철학자이자 환경활동가 발 플럼우드의통찰이 예리하다. "남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등을 비롯한 모든 중심주의는 ‘지배자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자기중심적충동이 기반이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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