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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신 ㅣ 문학동네 시인선 190
김개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3월
평점 :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3.26.
노래책시렁 489
《작은 신》
김개미
문학동네
2023.3.31.
글을 못 쓰겠다고, 더구나 ‘시’라면 아주 못 쓰겠다고 여쭙는 이웃님이 많아요. 이웃님 말씀을 가만히 듣고서 종이를 꺼냅니다. 붓을 쥐고서 “나 / 시를 못 써요. / 무서워. / 시를 쓰라고 하면 / 난 달아날래.”처럼 다섯 줄을 슥슥 적어서 건넵니다. “이 다섯 줄은 이웃님이 ‘입으로 쓴 시’예요. 저는 옆에서 그저 이웃님 말씀을 받아적었어요.” 하고 보탭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를 써야 하지도 않고, 안 써야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글을 써야 하지도 않고, 안 써야 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제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고 옮기고 그리면 즐거우면서 넉넉합니다. 《작은 신》을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현대 시문학’이라면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렇게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시문학’이 널리 퍼지면 노래가 무서워서 달아날 뿐 아니라, 글을 엄두조차 못 낼 이웃님이 외려 부쩍 늘어날 듯싶습니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서 서울을 떠난 분이 ‘시골할매마냥 호미질을 할’ 수 없습니다. ‘시골할배처럼 낫질을 할’ 수도 없습니다. 서툴든 어설프든 다 다른 손길로 천천히 호미질과 낫질을 하며 아주 느긋이 ‘흙일’을 ‘흙살림’으로 받아들이고 녹이면 될 뿐입니다. 삶을 말하고, 이 말을 그리면 노래입니다.
ㅍㄹㄴ
천사는 약하고 아파서 / 내가 천사가 되어주어야 하는 천사였습니다 / 나는 살을 떼어 먹이고 / 관절과 눈물을 바쳤습니다 / 천사는 뛰지 못했지만 뛰고 싶어해서 / 나는 천사를 업고 산을 뛰어올랐습니다 / 천사가 친구를 원해서 / 나는 사람들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 천사를 천사처럼 입히고 꾸미는 일로 / 나는 매일 행복하고 피곤하고 바빴습니다 (나의 천사/16쪽)
들쥐는 어째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 눈알을 닦으며 사람의 길을 가로질러가고 / 머리가 커다란 해바라기는 어째서 / 태양에 몰두하지 않고 바닥을 살피는 걸까 // 시계를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이 /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 누가 음악을 들으며 지나간다 / 듣고 싶지 않은데 너무 잘 들린다 / 아는 노래인데 제목을 모르겠다 (조용한 여름/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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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신》(김개미, 문학동네, 2023)
매일 아침 절벽 아래 떨어진 참혹한 인간을 발견한다
→ 아침마다 벼랑에서 떨어진 끔찍한 사람을 본다
→ 아침이면 낭떠러지서 떨어진 섬찟한 사람을 본다
5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 제로의 인간
→ 아무것도 못 떠올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빈 사람
→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안 계신 사람
5
기다림은 그의 전문이 아니지만 그가 할 일은 그것뿐이다
→ 그는 기다리지 못 하지만 기다릴 뿐이다
→ 그는 못 기다리지만 기다릴 뿐이다
5
나의 집에 천사가 왔습니다
→ 우리 집에 꽃님이 옵니다
→ 울 집에 빛살이 옵니다
16
친구를 원해서 나는 사람들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 동무를 바라서 사람들 발밑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16
병이 낫고 광휘에 둘러싸인 천사에게 가진 것 없고 초라한 천사는 필요 없으니까요
→ 다 낫고 빛에 둘러싸인 꽃님한테 빈털털이 초라한 꽃님은 쓸모없으니까요
16
들쥐는 어째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 들뛰는 어째서 이글거리는 대낮에
50
해바라기는 어째서 태양에 몰두하지 않고 바닥을 살피는 걸까
→ 해바라기는 어째서 해를 바라지 않고 바닥을 살필까
→ 해바라기는 어째서 해를 바라보지 않고 바닥을 살필까
50
시계를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는 것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 나만 때바늘을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지 않나 보다
→ 나만 똑딱이를 잃어버리고 어쩔 줄 모르지 않는가 보다
50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