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1 힘들거나 가볍거나



  어릴적부터 늘 짐꾼으로 살았다. 요새는 안 그럴 텐데, 예전에는 아무리 어리더라도 누구나 짐꾼이었다. 아마 고장마다 다를 수 있을 테니, 나는 내가 나고자란 고장을 바탕으로 얘기를 해야 옳다고 본다. 나는 인천에서 1975년에 태어나서 남구·중구·동구에서 지내는 동안 으레 두 손 가득히 등에도 수북히 짐을 쥐고 얹고 짊었다. 인천에서는 순이돌이를 안 가렸다. 가시내도 머스마도 똑같이 고스란히 짐순이에 짐돌이로 살았다. 재미있다면 재미있을 텐데,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 여섯 해를 돌아보면, 길잡이(교사)가 아이들을 몽둥이나 손찌검으로 호되게 다스릴 적에 순이돌이를 똑같이 두들겨팼다. 1986∼87년 무렵에는 ‘순이가 돌이보다 덜 맞는’ 얼거리로 바뀌었는데, 어릴적에는 잘 몰랐지만, 끝자락 이태는 우리나라에 들물결(민주화운동)이 넘실거렸고, 이 바람에 지난날 어린순이는 어린돌이보다 조금 덜 얻어맞으면서 하루를 보냈다.


  곧잘 예전 일이 또렷하게 떠오르는데, 1986∼87년에 ‘매맞는 어린돌이’는 으레 길잡이한테 “선생님, 왜 여자애들만 살살 때려요? 왜 여자애들은 남자애들 반밖에 안 때려요?” 하고 따진다. 그러면 길잡이라는 놈팡이는 “부럽냐? 그럼 너희도 여자로 태어나야지. 너희는 남자로 태어난 잘못으로 여자애들 몫까지 맞으면 돼!” 하면서 이기죽거렸다.


  지난날 ‘매맞는 어린이’ 이야기를 발자취(역사)로 적어 놓는 글바치(학자)가 있을까? 아마 다들 1986∼87년이라고 하면 들불을 이야기할 뿐, 또 전두환을 끌어내리던 너울을 다룰 뿐, 그때에 아이들이 얼마나 매맞고 시달리고 들볶이고 짓눌리면서 눈물바람으로 하루를 살았는지는 못 다루거나 안 짚는다고 느낀다.


  아침이면 아침이라서 때린다. 먼저 집에서 맞는다. 엄마나 아빠한테 맞고서 하루를 여는데, 언니오빠가 있으면 언니오빠가 성풀이로 동생을 때린다. 나는 집에서 막내였으니 언제나 ‘매벌이’ 구실이었다. 이웃집 막내도 나랑 마찬가지이다. 한또래이지만 언니오빠 자리에 있는 동무는 아침에 엄마아빠한테서 맞은 앙갚음을 동생한테 하고서 나온다. 그런데 동생이 없다면? 같은 배움터에서 힘없는 또래나 동생을 때리거나 괴롭힌다. 이리하여 나는 아침부터 집과 마을과 배움터에서 잇달아 맞는다. 이윽고 길잡이가 우리 앞에 서면 이 핑계에 저 탓을 뒤집어씌워서 1교시부터 6∼8교시까지 신나게 매바심을 한다. 겨우겨우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언니오빠나 한또래한테 걸려서 저녁매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면 또 집에서 엄마아빠에 언니오빠한테 다시금 매를 맞는 나날이다.


  나는 하도 얻어맞고 산 터라 그들이 어떻게 때리고 괴롭혔는지 낱낱이 되새기거나 적을 수 있다. 맞는 그 자리에서는 넋을 비운 채, 이른바 ‘유체이탈’을 하고서 얻어맞는다. 그래야 아픈 줄 못 느낀다. 그냥그냥 이렇게 살았는데, 용케 목숨을 잃지 않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느끼면서, 이 목숨을 건사할 수 있어서 고맙다고 돌아본다. 이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어릴적에 그토록 얻어맞은 나날을 안 잊을까?’


  가만히 보면 어떤 일이건 잊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리 마음과 머리와 살갗과 뼈와 이와 머리카락과 눈코귀입에 고스란히 남는다. 우리 스스로 ‘잊었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우리 몸은 하나도 안 잊는다. 그래서 다시금 곱씹는다. ‘나는 참말로 왜 그 끔찍한 짓을 못 잊지?’


  우리는 모든 일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가벼운 일이나 힘든 일이란 없다. 그저 다 다르게 배우면서 스스로 북돋우고 살리는 길이다. 가벼운 일이어도 구태여 가볍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며 하면 된다. 힘들다는 일이어도 굳이 힘들다고 여기지 않고서 맡으면 어느새 끝을 낸다. 가벼운 일을 가볍다고 여기기에 으레 말썽을 일으키거나 잘못하거나 틀어진다. 힘들다는 일을 지레 힘들다고 여기는 탓에 그만 짓눌리고 무게에 사로잡혀서 허우적거리거나 허둥허둥 헤맨다.


  가벼운 일이기에 아이들이나 이웃한테 넘길 수 있다. 가볍게 해보라는 뜻으로 일감을 나눌 만하다. 힘든 일이기에 슬며시 달아날 수 있다. 애써 내가 안 하더라도 기꺼이 맡거나 억지로라도 맡는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가볍든 힘들든 그냥 하면 다 이루는 일이고, 정 못 하겠구나 싶으면 내려놓거나 달아날 노릇이다.


  일도 놀이도 말도 삶도 가볍거나 힘들지 않다. 언제나 다 다른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일 뿐이다. 더 신나는 놀이를 해야 더 신나지 않다. 심심한 놀이를 하기에 심심하지 않다. 마음에 스스로 뿌린 씨앗 그대로 하는 일과 놀이와 말과 삶이다. 어떤 마음으로 다가서고 마주하고 품느냐에 따라서 늘 다르게 맞닥뜨리고 부딪히고 겪는다.


  얼추 마흔 살 언저리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신나게 얻어맞고 얻어터지며 살았다”는 말을 거의 벙긋조차 하지 못 했고, 어쩌다 말을 해야 하면 눈물부터 핑 돌았다. 그런데 이제는 가끔 “늘 맞고 산 매벌이였어요” 하고 스스럼없이 말할 뿐 아니라,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나를 그저 지켜본다. 왜 잊지 않는지, 그리고 잊지 않으면서 무엇을 배우는지, 이리하여 온삶을 가로지르는 길이란 우리한테 어떤 빛줄기인지 새삼스레 돌아본다.


  나는 내가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쓰는 길을 걸을 줄 미처 몰랐지만, 아무래도 진작부터 알았다고 느낀다. 다만, 아주 오랜 예전 마음을 들춰 본다면, “밥벌이를 하는 우리말꽃은 하지 않겠어. 밥벌이로 하면 지치거든.” 같은 혼잣말이 나왔다. 밥벌이를 하며 고된 엄마아빠에 이웃사람을 늘 지켜본 터라, 아무리 뜻있거나 빛나는 일거리라 하더라도 밥벌이로 하면 아니될 노릇이라고 느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손수 써야 할까?


  이 수수께끼를 품으면서 세 살이 지나고 다섯 살이 흐르고 일곱 살을 건너고 여덟아홉 살에 열 살에 이르면서 천천히 보인다. “그저 언제나 즐겁게 하면 될 뿐이구나!” 그래서 언제나 즐겁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언제나 몸벗기(유체이탈)를 바로바로 하면서 신나게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토록 얻어맞고 살갗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고 살점을 파내야 했어도, 내 몸에는 흉터가 하나조차 없다. 다만, 두바퀴를 달리다가 치여죽을 뻔한 숱한 일 탓에 흉터가 남았는데, 이제는 이 흉터조차 차츰차츰 사그라라든다. 아마 예순 살 무렵이면 ‘뺑소니에 치인 흉터’까지 감쪽같이 사라질 만하다.


  말이란 모두 마음이다. 마음에는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 없다. 그저 다 다른 모든 삶을 담는 마음이라는 그릇이자 그루이다. 사람은 저마다 ‘나’이다. 그래서 ‘나’인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숨(바람)을 내주는 ‘나무’ 곁에서 함께 ‘그루’로 선다. 꽃길이건 가시밭길이건 언제나 ‘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말에는 좋은말과 나쁜말이 없이 오직 말만 있으니, 이 말이란 ‘삶말’이면서 ‘마음소리’이다.


  이오덕 어른이 걸은 길을 톺아보자면, 처음 태어나서 맞이한 시골집에, 얼음나라(일제강점기)에 다니던 배움터에, 얼음나라에서 길잡이(초등교사)가 되어 일본책(일본교과서)으로 일본말을 우리 아이들한테 가르쳐야 하던 일에, 1945년 8월이 지나가고 나서야 뒤늦게 창피한 줄 깨달은 일에, 그동안 창피하게 저지른 ‘길잡이(초등교사)’라는 얼룩을 지우고 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홀로 속앓이를 하는 일에, 마침내 실마리를 찾아서 멧골마을 아이들하고 글쓰기랑 그림그리기랑 놀이랑 노래랑 멧밭짓기랑 여러 하루를 나누는 길을 걸어가는 일에, 이러면서 글쓰기모임을 여는 일에, 권정생을 만나서 마음동무로 사귀는 일에, 박정희·전두환한테서 아이들이 안 시달리도록 품에 안은 일에, 이러다가 배움터에서 쫓겨나야 하던 일에, 처음으로 대학교에서 젊은이한테 글쓰기를 가르치다가 우리나라 민낯을 들여다본 일에, 여태 해오던 ‘교육비평·어린이문학비평’을 한동안 접고서 《우리글 바로쓰기》부터 처음으로 열어야겠다고 깨달은 일에, 조금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아차렸다고 느낄 무렵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아픈 몸으로 치달아 그만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일에, 어느 일을 보더라도 온통 가시밭길이었다고 여길 만하다.


  그러나 온통 가시밭길이었기에 어른 한 사람이 설 터전이 생긴다. 가시밭길을 걷기에 “나 혼자 이 가시밭길을 걷지 않는구나. 다들 이 가시밭길에 서는구나.” 하고 알아본다. 하루아침에 가시밭길을 꽃길로 바꿀 수는 없지만, 씨앗을 심기로 한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그림책이 있지만, 우리는 ‘나무부터 심을 수 없’다. 언제나 씨앗부터 심는다. ‘나무’ 또한 씨앗부터 돌보면서 키운 숨결이다. ‘나무심기’란 “남이 해놓은 것을 슬쩍 가져다가 한다”는 뜻이다. 나무심기를 해도 안 나쁘지만, 우리가 할 일이란, 남이 해놓은 나무를 가져다가 옮겨심는 일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모두 새롭게 씨앗부터 심을 일이어야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요 어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아이답고 어른답다. 우리는 누구나 아이답게 아름답기에 하늘누리로 갈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어른답게 어질어 사랑스럽기에 이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다. 떠난 어른은 저 높거나 먼 데에 없다. 떠난 어른은 늘 우리 마음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누구나 다 다르게 어른이거든.


  이렁저렁 힘들거나 가벼운 일을 되새겨 본다. 숱하게 얻어맞고 걷어차이며 뒹굴던 어린 나날 그대로, 어른이라는 몸을 입은 오늘도 똑같이 얻어맞거나 걷어차이거나 뒹군다고 여길 만하다. 나는 “이런 종이는 없는 어른 이웃”을 기다린다. ‘이런 종이’란 ‘졸업장·자격증·면허증’이다. 아이들한테는 아예 신분증부터 없다. 아이들한테 여권을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아이는 모름지기 “이런 종이”는 하나도 안 거느리는 맨손이다. 아이는 오직 가볍게 맨손으로 모든 놀이를 하고 모든 소꿉을 누리다가, 어른 곁으로 다가와서 “내가 뭘 좀 도울까?” 하고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묻는다.


  “이런 종이”가 없는 사람은 늘 상냥하게 스스럼없이 다가와서 즐겁게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으로 서더라. 그러나 “이런 종이”가 있는 사람은 하나같이 길미를 따지고 돈과 이름과 힘을 살피더라.


  내가 바라는 이웃이란, “저런 종이”가 있는 사람이다. “저런 종이”란 손수 붓(필기구)을 쥐고서 천천히 적는 빈종이를 가리킨다. 언제 어디에서나 주머니나 가방에 빈종이에 붓을 챙기는 “저런 종이”가 있다면, 이이는 바로 나한테 이웃이요 동무라고 느낀다.


  오늘날 우리나라 글밭(문학계·언론계·작가집단)을 보면, 하나같이 “이런 종이”를 앞세우더라. “저런 종이”를 챙기는 사람을 아주 드물게 겨우 만난다. “이런 종이”를 앞세우는 글바치는 으레 모든 글밭에서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면서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함께한다. 그래서 나는 “저런 종이”를 손에 쥔 이웃하고 마주앉아서 천천히 손으로 노래 한 자락을 새로 쓴다. 나는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할 뜻도 안 할 뜻도 없다. 나는 그저 ‘삶을 담은 마음을 그리는 소리인 말을 새롭게 그리는 글에 사랑이라는 씨앗 한 톨을 푸른들빛과 파란하늘빛·파란바다빛으로 고르게 담아서 아이 곁에서 나누는 오늘을 노래하려는 일’만 바라본다.


  우리말꽃이라는 꾸러미를 쓰기에 모든 책을 읽고 모든 말을 듣고 모든 글을 쓴다. 여러모로 보면 미친짓이다. 참으로 미친놀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삶이란 워낙 누구나 다 다르게 미친삶이지 않은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미친길일 수 있고, 서로서로 미치는(닿는·다가서는·스미는) 길이기도 하다. ‘종이’에 두 가지가 있듯, ‘미치다’에 두 가지가 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적어도 두 가지로 다 다르게 결과 길이 다르다. 이를테면 ‘눈’과 ‘배’와 ‘말’과 ‘피’와 ‘키’는 그냥 한글로 적어 놓으면 어떤 낱말인지 가릴 수 없다. 그러나 곰곰이 짚으면 이런 길과 저런 길로 다르되 언제나 하나로 맞물린다.


  가벼운 일이란 늘 힘든 일하고 맞닿는다. 힘든 일이란 노상 가벼운 일하고 맞물린다. 가벼운 일을 맡으니 더 힘들곤 하고, 힘든 일을 맡으니 더 가볍곤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하면 된다. 좋은일도 나쁜일도 아닌, 가볌일도 힘듦일도 아닌, 오롯이 일을 하면 된다. 깨끗한 말이나 멋진 말이나 훌륭한 말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말이 아닌, 그냥 말을 하면 된다. 그냥 말을 할 적에는 ‘장애인·비장애인’을 가르는 굴레가 말끔히 사라진다. 그냥 말을 하기에 ‘왼·오른’이나 ‘순이·돌이’를 나누는 담벼락이 깨끗이 녹는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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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65 걸으면서 쓴다



  나는 이웃을 만날 적에 미리 옮겨적은 노래(시)를 건네곤 한다. 내가 건네는 노래종이(시를 적은 종이)를 받는 분은 곧잘 “글씨가 참 정갈하네요” 하고 말씀해 주시는데, 나는 자리맡에 앉아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 나는 자리맡에 앉을 적에는 ‘낱말책 새로쓰기’로 거의 온하루를 보낸다. 손글씨는 시골버스를 타고 움직이면서 저잣마실이나 나래터(우체국)를 다녀오는 길이라든지, 먼고을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시외버스를 타고서 다녀오는 길에 쓴다.


  ‘버스에서 책읽기’는 열일곱 살 때부터 했다. 열일곱 살 여름에 우리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옮기는 바람에, 늘 걸어서 오가는 배움터를 이때부터 버스를 타야만 오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도 40분 남짓 걸렸는데, 처음 하루이틀은 길을 익히느라 오직 바깥만 바라보았다면, 길눈을 익힌 뒤에는 책을 읽었다. 1991년 인천 연수동은 이제 막 삽질을 하던 무렵이라 길이 어마어마하게 나빴고, “이런 길을 다니다가는 버스가 망가지겠구나” 싶도록 흔들리고 덜컹이는 흙길(비포장도로)을 오르내렸다. 동무들은 “야, 넌 어떻게 이런 버스에서 책을 읽어? 이런 버스에서 영단어를 어떻게 외워? 이런 버스에서 ‘수학 정석’을 푼다고?” 하면서 놀라지만, 나는 동무들한테 이렇게 대꾸했다. “이런 덜컹버스에서는 책을 안 읽거나 수학문제를 풀지 않거나 영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오히려 멀미가 나. 책을 읽고 수학문제를 풀고 원서(영어책)를 읽어야 마음을 다스리면서 멀미가 안 나.”


  2008년에 큰아이를 낳으면서 ‘버스에서 책읽기’를 멈췄다. 아기가 있으니 아기를 보면서 아기랑 놀고, 아기한테 끝없이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춤을 추었다. 큰아이가 2009년부터 한글을 익히겠다며 아버지한테 달라붙느라 2009년부터 큰아이한테 읽힐 노래(시)를 썼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버스와 길에서 노래를 쓰고, 버스와 길에서 읽히고, 버스와 길에서 가락을 입혀서 읊었다.


  큰아이는 혼자 마음껏 걸을 수 있던 2010년 무렵부터 ‘걸으며 책읽기’를 했다. 나는 큰아이 곁에서 ‘걸으며 사진찍기’하고 ‘걸으며 책읽기’를 나란히 했다. 다만, 나는 1991년뿐 아니라 1982년부터 늘 큼지막하고 묵직한 등짐을 짊어진 채 걸었고, 버스를 탔고, 버스에서 책읽기를 했고, 걸으면서 책읽기를 했다.


  어린배움터(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1987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꼭 하루 스쳤다. 1988∼2005년 사이에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을 새로 한 사람 스쳤다. 2006∼2025년 사이를 사는 동안, 나보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면 우리집 작은아이가 있다. 다만, 나보다 걸음이 빠른 세 사람은 등짐을 짊어지지 않은 맨몸일 뿐이다. 나는 맨몸으로 걸어다닌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하다. 늘 앞뒤로 잔뜩 짊어지며 걷는다.


  2006년 무렵이었지 싶은데, 어느 이웃님이 “최종규 씨가 얼마나 빨리 걷는지 궁금해서요, 등짐을 벗고서 같이 걷기를 겨루면 어떨까요?” 하고 여쭈었다. “네? 왜 겨뤄야 해요? 저는 그저 길에서 하루를 흘리기 싫어서 그저 신나게 걸을 뿐인데요.” “그래도, 등짐을 푼 맨몸으로 같이 걸어 봐요.” 열 해에 하루조차 거의 없을, 아니 쉰 해를 살며 등짐 없이 걸어 본 일이란 다섯손가락에 꼽을 만큼 없을 일을, 어느 날 겪어 보았다. 그런데 등짐이 없이 맨몸으로 걷자니, 너무 힘들더라. 이미 나는 무게를 잔뜩 이고 진 몸에 맞게 팔다리를 놀리는 매무새에 익숙한 터라, 아무 짐이 없이 빨리 걸어가기란 오히려 너무 어렵더라. 몇 걸음 떼다가 그만두었다.


  충북 음성 생극면 버스나루에서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까지 8킬로미터 즈음이다. 생극 버스나루에서 무너미마을까지는 오르막이다. 이 오르막을 2003∼2007년에 50분∼70분 사이로 걸었다. 늘 등짐차림이었다. 무너미마을에서 생극 버스나루는 내리막이다. 이 내리막을 두바퀴로 달릴 적에 4분∼7분 사이로 갈랐고, 거꾸로 오르막일 적에는 15분∼24분 걸렸다.


  인천 배다리(창영동)에서 서울 합정나루까지 32킬로미터 즈음 나오는 듯싶은데, 서울과 인천에서 살던 무렵에 이 길을 두바퀴로 50∼70분 사이로 달렸다. 걸으면 두 시간 반이 넘었다. 어떤 분은 말이 되느냐고도 묻지만, 왜 말이 안 될까? 예전에 이 길을 달리거나 걸을 적에는 언제나 때(시간)를 쟀다. 달리거나 걷고서 킬로미터도 쟀다. 이제는 구태여 이런 짓을 안 하지만, 한때 두바퀴에 때바늘(속도계)를 달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두바퀴에 붙인 때바늘은 길에서 쇳덩이(자동차)가 나를 치고서 달아난 탓에 조각나서 사라졌다.


  요즈음 두바퀴를 달리면서 어림해 보니 24∼28킬로미터로 느릿느릿 밟는구나 싶다. 더구나 요새는 예전처럼 안 걷는다. 요새는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그렇지만 내가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더라도 둘레에 나란히 걷는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빠르더라. 서울·부산·인천으로 마실을 가면, 쇳길(전철)을 갈아탈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하는데, 나는 으레 디딤돌(계단)로만 오르내린다. 디딤돌을 오르내릴 적에도 걷는읽기하고 걷는쓰기를 한다. 이미 이런 매무새는 1991년부터 붙인 터라, 등에 묵직하게 책짐을 짊어지고서도 꽤 빠르게 디딤돌을 오르내리면서 읽고 쓴다.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느리’지 않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지었을 뿐 아니라, 우리말글 밑동을 처음으로 닦은 주시경 님이 있는데, 주시경 님이 새길(신학문)을 배울 적에, 서울에서 인천 싸리재(중구 답동·경동)까지 날마다 걸어서 오갔다고 했다. 이오덕 님이 남긴 글을 보면, 경상북도 멧골마을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멧길을 네 시간 남짓 걸어서 오가기 일쑤였다. 우리는 구태여 빨리걷기를 해야 할 까닭이 없다만, 고작 쉰 해 앞서만 해도 “누구나 꽤 빨리 걸어서 길을 오갔다”고 할 수 있다. 늘 걷는 사람은 ‘걷기’가 그다지 느리지 않은 일인 줄 안다. 오히려 늘 걷고 오래 걷는 동안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가다듬고 몸을 북돋우는 줄 알게 마련이다.


  아기수레를 굳이 써야 할 까닭이 없다. 아기를 안고 업고 걸리면 된다. 이따금 짐을 쇠(자동차)한테 맡길 수 있되, 언제나 스스로 짊어지고서 걸어다니면, 우리 몸은 오래오래 한결같이 튼튼하면서 빛난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등짐으로 걸어다니면 이동안 책읽기와 글쓰기를 실컷 누린다. 등짐걷기를 하면서 책읽기와 글쓰기를 한다면, ‘껍데기 아닌 속읽기’에다가 ‘글치레 아닌 삶쓰기’를 스스럼없이 하게 마련이다. 반듯한 책마루(서재)가 있어야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않는다. 부엌에서 쓰고, 마당에서 쓰고, 길에서 쓰면 된다. 한 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달래되, 다른 손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 있다. 걸으면서 읽고 쓰는 이웃이 한 사람씩 늘어난다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별이 아름답게 거듭나리라 본다.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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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꽃, 내멋대로 60 중년남성 출입금지 (도서관 방문기)



  나는 ‘도서관’이라는 데를 안 간다. 안 간 까닭을 밝혀 본다. 먼저 1984년, 이른바 ‘국민학교 3학년’이던 무렵에 동무들하고 ‘책을 읽으려’고 〈인천 율목도서관〉에 찾아갔다. 그런데 이곳 〈인천 율목도서관〉을 지키는 사납게 생긴 어른들(도서관 경비 및 사서)은 “너희가 도서관에 왜 와? 여기서 놀려고 하지? 도서관은 애들이 노는 데가 아냐! 너희들 볼 책은 없어!” 하면서 내쫓았다. 1984년에 인천에 있던 국민학교에는 학교도서관도 학급문고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책이 고파’서, 우리가 사는 마을에 있는 가장 큰 책터인 〈인천 율목도서관〉을 넷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면서 갔다. “도서관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 틀림없이 책이 많겠지? 우리가 볼 책도 있겠지?” 하면서 웃는 마음이었지만, 아예 들머리에서 갖은 막말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쫓겨나면서 넷은 나란히 풀죽을 뿐 아니라 “우리가 왜 도서관에 놀러간다고 여겨? 너무하지 않아? 어른들은 우리 말을 아예 듣지도 않고 욕부터 해! 너무 미워!” 하고 서로 얘기하면서 울었다.


  어릴 적에 인천에서 ‘도서관 쫓겨나기(문전박대)’ 탓에 멍울이 든 마음은 채 씻기지 않았으나, 푸른배움터에 들어간 열네 살인 ‘중학교 1학년’일 적에 〈인천 화도진도서관〉에 갔다. 이때에 ‘도서관 사서’는 “여기는 언니들이 공부하는 데야. 너희는 아직 오기 일러.” 하면서 부드럽게 내쫓았다. 암말도 못 하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서 뒷걸음을 쳤다.


  열여섯 살에 이르러 드디어 ‘중3 수험생’이라는 이름으로 〈인천 시립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도서관 입장권’을 받았고, 이 ‘도서관 입장권’은 두 시간마다 도장을 새로 받아야 했다.


  1992년 8월 28일에 인천 배다리책거리에서 여러 배움책(참고서)을 살피다가 〈아벨서점〉에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태까지 어느 어른(교사·어버이)도 헌책집에 이렇게 온갖 책이 멧더미처럼 넘실거린다고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여태까지 둘레 어른은 “대학입시 공부만 해!”라는 말만 했을 뿐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배우렴” 같은 말을 들려준 적이 없다. 이날 뒤로 나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얼씬하지 말자고 여겼다. 인천에 있는 〈대한서림〉이나 〈동인서관〉이나 〈한겨레문고〉는 댈 수 없을 만큼 책이 많은 데가 헌책집인 줄 처음으로 느꼈고, 이 책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어서, 이레마다 이틀씩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빼먹고서 책마실을 다녔다.


  1994년에 대학생이 되었다. 인천을 떠나 서울 이문동에 있는 대학교까지 전철로 날마다 네 시간 남짓 납작떡이 되면서 오갔다. 왜 ‘지옥철’이라는 이름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천에서 서울 이문동까지 네 해 동안 지옥철로 오간 윗내기는 웃으면서 “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인천에서 대학교를 다니면 하나도 배울거리가 없어서 숨이 막혀. 지옥철로 오가야 배울 수 있단다.” 하고 들려주더라.


  1995년 봄부터 ‘대학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책갈무리를 맡으며 일했다. 그런데 이해 11월 6일에 싸움터(군대)에 들어가기까지 예닐곱 달을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다른 근로장학생’을 아예 본 적이 없다. 나 혼자서 대학도서관에서 책갈무리를 하더라. 나는 10월 즈음에 대학도서관 책지기(사서)한테 여쭈었다. “여기 장부(출퇴근 장부)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많은데 왜 얼굴도 안 보이지요?” 대학도서관 책지기는 흠칫 놀라면서 “어, 네가 이상한 거야. 다들 장부에 이름만 적고 일은 안 해. 그냥 이름만 적으면 근로장학생한테 장학금을 주거든.” 하고 알려주더라. “네? 근로장학생은 일을 해야 돈을 받고서 학비로 보태는 얼개가 아닌가요?”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그러고 보니 학생(너)은 점심시간에 일을 안 했다고 해놓았네. 그냥 09∼18 이렇게 여기에 있었다고 적으면 되는데.” “네? 제가 여기에서 일을 안 하고도 장부에는 마치 일을 했다고 적으라고요?” “다 그렇게 해. 넌 여태 그렇게 안 했니?” “일을 안 하고서 일을 했다고 적으면서 장학금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 그래도 그렇게 하지? 너도 굳이 책정리 안 해도 돼. 그냥 이름만 적고서 장학금을 받으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여기 도서관에서 아무 일을 안 하고서 근로장학금을 받더라도, 저는 제가 일한 시간만 똑바로 적고서, 제가 일한 만큼만 장학금을 받겠습니다.”


  싸움터에 다녀온 뒤로는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안 가기로 했다. 이러면서 2007년 4월 5일에 인천 배다리에서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라는 이름으로 책마루(서재도서관)를 연다. 우리나라에는 ‘허울 도서관’만 있다고 여겨서, 그냥 내가 ‘책숲다운 책숲’을 꾸리자고 생각했다.


  2017년 즈음, ㅇ이라는 고장에 있는 도서관에 갔더니 “중년남성 출입금지”라는 알림글이 있다. 그 도서관에서 ‘강의’를 하는 몸으로 갔기에 그곳 책지기한테 이 알림글이 뭐냐고 물으니 “하도 사회에서 어린이 성범죄로 말이 많아서, 요새는 이렇게 합니다.” 하고 알려준다. “중년여성은 아무 문제가 없나요?” “아, 그게…….” “범죄자만 막아야 하지 않나요? 아저씨야말로 어린이책과 그림책과 동화책을 읽으면서 배움길을 넓히도록 도와야 할 텐데요? 그래야 우리나라가 바뀌지 않나요?” “…….”


  2024년에 이르도록 우리나라 여러 도서관은 “어린이·청소년 칸은 중년남성 출입금지”를 하더라. 적잖은 도서관은 “여성 전용 구간”도 마련해 놓는다. 가만히 보면 젊은 사내도 나이든 사내도 “거의 도서관 출입금지”로 가로막는 얼거리이다. 그리고 적잖은 독립서점(동네책방)도 ‘중년남성 방문’을 대단히 꺼린다. 어느 곳은 ‘중년남성’은 책손님으로 아예 안 받기도 한다.


  나는 사내라는 몸을 입고서 태어났기에, 우리나라에서 둘레 숱한 사내가 어떤 뻘짓과 막짓을 일삼는지 참 흔하게 숱하게 지켜보았다. 내가 안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사내라는 몸’이기에 창피하게 여길 만하다. 그런데 젊거나 나이든 사내가 어린이책과 그림책과 동화책을 아예 읽지 못 하도록 막아 놓고 닫아 놓는다면, 게다가 ‘페미니즘’ 책까지 사내들은 건드리지 못 하도록 닫아건다면, 사내들은 뭘 배울 수 있을까? 오히려 “중년남성 절대환영!”이라고 내걸면서, 철없는 아저씨를 차근차근 달래고 가르치는 길을 열어야 이 나라가 바뀌지 않을까?


  철없는 아저씨도, 아직 앳된 젊은이도, 어린이책과 그림책과 동화책부터 읽으면서 마음을 가꾸고 살찌우면서 하나하나 새롭게 익혀야 한다고 여긴다. 아저씨도 젊은이도 푸름이도, 집안일을 즐겁게 맡으면서 집살림을 어질게 돌보는 길을 배워야 한다고 여긴다. 이렇게 하자면 “도서관 어린이·청소년칸 중년남성 출입금지”는 좀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 ‘동화읽는 아빠모임’을 나라에서 앞장서서 북돋우고 꾸려야 하지 않을까? ‘동화읽는 할배모임’을 시골과 서울 모두 앞장서서 이끌고 펼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열아홉 살이던 때부터 동화책과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비로소 읽었다. 열아홉 살에 이르던 때까지는 학교도서관이 아예 없기도 했고, 그무렵 인천에 있는 도서관에서는 어린이책은커녕 그림책은 구경조차 못 했다. 1992년 8월에 인천 배다리책거리에 있는 헌책집에서 비로소 동화책과 그림책과 어린이책을 만났고, 그때부터 꾸준히 어린이책과 그림책과 동화책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살찌우는 배움길을 걷는다. 나는 내 곁에 ‘중년남성’과 ‘젊은사내’가 함께 그림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마음밥을 누리는 하루를 지을 수 있기를 꿈꾼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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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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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59 그만두다



  쉰 살에 이른 나한테 어느 분이 묻는다. “어릴 적에 어떻게 보내셨어요?” 나는 어린날을 늘 떠올리지만 늘 생각조차 않는다. 앞뒤 어긋난 말 같지만, 늘 두 가지를 나란히 한다. 어제하고 오늘하고 모레는 늘 같기에, 오늘을 바라볼 적에 늘 모레가 나타나면서 어제가 피어난다. 어릴 적에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렸는지 바로 되새기면서, 오늘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리는지 곧장 생각하고, 이동안 모레에 무엇을 하며 놀거나 일하거나 꿈을 그리는지 어느새 눈앞에서 하나둘 본다. “저는 어린날에 늘 얻어맞으면서 살았어요. 막말(욕)도 오지게 들었어요. 어린날에 대여섯 해쯤 몹쓸짓(성폭력)에 시달리기도 했어요. 어린날에는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늘 감돌았어요. 날마다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 하고 울지 않았어요. 모든 때, 그러니까 1분 1초 모든 때에 ‘죽고 싶다. 죽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이런 마음일 적마다 둘레에서 ‘그럼 내가 널 죽여 줄까?’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보는 사람도 있고 못 보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 둘레에는 온갖 깨비(귀신)가 늘 도사려요. 우리가 스스로 엉큼하거나 어둡게 스스로 죽일 적에는 바로 이 깨비가 속삭이면서 홀리려고 하지요. 깨비가 나를 죽여 주겠다고 할 적마다 ‘아냐! 난 죽을 수 없어! 난 죽지 않겠어!’ 하고 외쳤고, 이때마다 깨비는 빙그레 웃으면서, 또는 차가운 낯빛으로 사라졌어요. 워낙 날마다 집에서도 마을에서도 배움터에서도 얻어맞고 막말에 시달리는 나날이었는데, 열다섯 살에 이르러 드디어 이런 굴레를 스스로 떨치는데, 열다섯 살까지 굴레살이를 하면서도 ‘굴레’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집 안팎에서 저를 모질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 적마다 ‘내 몸은 내가 아니야. 내 몸은 내가 입은 그릇이야. 그런데 너희가 이 그릇을 아무리 들볶고 괴롭히고 장난을 치더라도 그릇은 다치지 않아. 너희는 껍데기를 만지작거릴 뿐이거든.’ 하고 여기면서 지나갔어요. 견디지 않았습니다. 버티거나 참지 않았어요. 어린날에는 ‘유체이탈’이란 말을 몰랐는데요, 어린날에 시달리고 들볶이는 동안 ‘몸벗기(유체이탈)’를 했어요. 날마다 뻔질나게 했습니다. 얻어맞거나 막말을 듣거나 몹쓸짓에 시달릴 적마다, 제 넋은 몸을 벗어났어요. 저를 괴롭히는 이들 머리 위로 붕 떠올랐어요. 그들은 제 넋이 몸에서 나와 하늘에 붕 뜬 줄 하나도 모르더군요. 저는 하늘에 뜬 채 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곰곰이 지켜보았어요. 제가 아무리 맞아도 그닥 대꾸도 없으니, 또 멀쩡하게 웃고 뛰놀면서 사라지니, 이튿날에도 또 괴롭히기 일쑤이지만, 언제나 몸벗기를 하면서 어린날을 보냈어요. 저는 어린날에 책을 조금 읽기는 했지만, 책을 읽을 틈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곁에서 집안일을 돕고 심부름을 하고, 어린배움터와 푸른배움터에서 쏟아붓는 무시무시한 짐더미(숙제폭탄)를 붙잡고 울었어요. 밤새워도 다 할 수 없을 만큼 짐더미를 쏟아붓고는, 짐더미를 다 못 했다면서 길잡이(교사)란 놈들이 몽둥이에 따귀에 발길질을 일삼았답니다. 제 어린날은 이렇습니다.” 겉몸을 휘젓거나 괴롭히는 이들은 아마 사랑받은 일이 없다고 여기리라 본다. 그들한테는 떡 하나를 더 주어야 옳다고 느낀다. 예부터 미운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하는 말은, 사랑받지 못 한 이웃과 아이가 “넌 늘 사랑받는 삶이요 숨결이란다” 같은 이야기를 온몸으로 맞아들이면서 배울 수 있도록 징검다리를 놓는 조그마한 손길을 나타낸다고 본다. 미운아이를 손가락질하거나 때리거나 굶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싸움(전쟁)이다. 싸움은 나쁘지 않지만, 싸움만 일삼거나 싸움으로만 치닫는다면,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사랑을 잊고 잃는다. 아마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참답게 배우고 슬기롭게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씨앗을 품으려고 ‘어린날’을 보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마음을 그만두자마자 오직 꿈으로 걸어가는 밤길을 보았고, 밤이란 어두운 때가 아닌, 밤이란 별빛으로 밝고 아름다운 사랑길인 줄 알아차렸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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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꽃, 내멋대로 58 낮은 데로 임하소서



  어릴 적부터 “낮은 데로 임하소서”란 말을 들으며 늘 거북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못 하고 속으로 “뭐야? 그냥 우리 곁에 있으면 되지, 뭘 낮은 데로 오라고 그래? 높은 데 있는 어느 누가 우리 곁에 온다고?” 같은 혼잣말을 했다. 열네 살이 되어 1988년에 들어간 푸른배움터(중학교)에서 옛자취(역사)를 배우는데, 그때 길잡이가 “브 나로드(민중 속으로)”를 알려주었다. “민중 속으로”로 풀이한 러시아말을 다시 듣자마자 코웃음이 나왔다. “뭐야? 처음부터 우리(민중)하고 같이 안 살았으면서 우리한테 온다고? 그래서 어떻게 산다는 얘기야? 버틸 수나 있어?”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들(진보·좌파)은 아주 쉽게 말한다. “낮은 데”로 가겠다느니 “민중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외친다. 그런데 왜 외치지? 그냥 ‘우리(가난하고 이름이나 힘이나 돈이 없는 사람)’하고 나란히 이웃집으로 살면 되지 않나? 우리 곁에서 살려고 할 적에 왜 자꾸 먼저 이름을 붙이고 글을 써서 알려야 할까? 건축이나 예술이나 사진이나 문학이나 철학이나, 아무튼 뭔가 한다는 이들치고서 골목집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꼴을 본 적이 아예 없다. 굳이 가난해야 뭔가 할 수 있지 않다. 가난하건 가멸차건 그저 살림살이가 다를 뿐이다. 가멸찬 살림이라면 가멸찬 살림을 누리면서 글을 쓰건 문화예술이건 하면 된다. 가난한 살림이라면 가난한 살림을 돌보면서 이모저모 하면 된다. 내가 살던 마을이나, 내가 다닌 배움터는 가난한 데였지만, 이 가운데 꽤 가멸찬 집도 있었다. 가멸차게 살던 이웃 가운데 돈티를 내는 이가 드물게 있었으나, 그저 스스럼없이 섞였다. 곰곰이 보니, 가난마을에서 살아가는 글바치(작가·기자)는 여태 못 봤다. 그들은 다 하늘나라에서 사는 듯하더라. ‘가난한 이웃’을 사진으로 담겠다고 하는 이들은 으레 ‘안 가난한 사람’이다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길로 사진을 찍더라. 골목집에서 안 살고 잿집(아파트)에서 살며 이따금 골목마을로 ‘출사(사진마실)’를 나오는 이들이 골목을 어떻게 보고 느껴서 담겠는가? 겉치레나 허울일 뿐이다. 스스로 골목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골목빛을 담아내는 사람이 찍는 사진은 아주 다르다. 스스로 마을사람이나 시골사람으로 살아가며 ‘순이돌이(장삼이사)’를 담는 글도 무척 다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고 읊는 이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에 겉치레이다. “민중 속으로” 또는 “국민과 함게”라 읊는 이도 언제나 뻥에 겉핥기이다. 적어도 열 해 남짓 가난한 골목집이나 시골집을 보금자리로 일구어 보고 나서야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조금은 기웃거릴 만하리라. 열 해조차도 골목집이나 시골집에서 살아내지 않는 몸으로 ‘구도심 재개발 건축디자인’이라든지 ‘소멸위기 대책 수립’을 읊으려 한다면, 하나같이 그들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걸어다니거나 시골버스를 타지 않는 사람이 시골이나 마을을 알 턱이 없다. 아이를 업은 채 자장노래를 부르고 똥오줌기저귀를 손수 삶고 말려서 대는 수수한 살림을 누린 적이 없는 이들이 쓰는 글이나 내놓는 예술작품이 ‘서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없다. 부디 낮은 데로 오지 마십시오. 그저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갑시다. 굳이 민중 속으로 오지 마십시오. 모든 돈과 이름과 힘을 내려놓고서 조용조용 흙을 만지고 풀꽃나무랑 동무하면서 바람을 읽고 새노래랑 풀벌레노래를 들으십시오. 열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말을 하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지켜보고 살펴볼 만한 즐겁고 반가운 이슬받이로 하루를 지으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쇳덩이(자동차)를 모는가? 안 몬다. 그러니까 낮은 데로 오지 말고, 쇳덩이를 버리면 된다. 열 살 어린이가 몇 억을 훌쩍 넘는 잿집(아파트)을 사들이는가? 아니겠지. 잿집은 집어치우고서 ‘마당 있는 시골집’으로 터전을 옮기면 된다. 입발린 글은 ‘낮은 사람들’한테도 이바지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낮은 데로 가겠다’는 그들 스스로한테부터 이바지하지 못 한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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