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까칠한 숲노래 씨 책읽기
숲노래 오늘책
오늘 읽기 2025.3.26.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숲노래 기획·최종규 글, 철수와영희, 2025.3.28.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이듬달인 넷쨋달(4월)에는 끝자락(28·29·30)에 서울·부천·인천으로 사흘 잇달아 책숲마실을 하면서 이야기꽃을 펴기로 한다. 오류동역 옆에 있는 길손집에서 아침을 맞이하면서 생각한다. 이따가 14:40 고흥버스를 타기 앞서 틈이 나는데 어느 책집을 들를까? 엇, 오류동역이라면 〈그림책방 콕콕콕〉이 코앞이지 않나? 길그림을 살피니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그림책집 〈콕콕콕〉이 있다. 11시부터 연다고 하니 11:30 즈음에 닿도록 가자고 여기면서 새벽부터 신나게 글일을 추스른다.
어느 이웃님이 요즈막에 ‘막짓(악플·폭력)’을 놓고서 몇 가지를 물어보셨다. 그래서 누가 우리한테 무슨 막말을 하건 막짓을 하건, 그런 막놈한테 마음을 안 쓰면 될 일이라고 여쭌다. ‘막짓놈(가해자)’을 굳이 쳐다볼 까닭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들(가해자)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모르쇠’로 있자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르는 짓’은 그만 쳐다보면서, ‘우리가 오늘 스스로 지을 하루그림과 삶’을 바라보자고 얘기했다. 나는 1975년이라는 해에 태어나서 인천에서 어린날을 보내며 1988년까지 ‘하루도 안 맞은 날’이 없이 신나게 두들겨맞는 삶이었다. 집에서는 어머니·아버지·언니한테 맞았고, 마을과 어린배움터에서는 또래와 언니들하고 길잡이(교사)한테 끝없이 맞았다. 어린배움터 여섯 해 내내 “제발 그만 맞고 이제 죽고 싶다”는 마음을 하루라도 안 느낀 날은 없다. 집과 배움터 사이가 안 가깝지만 버스를 안 타고서 늘 걸었다. 1984년부터 ‘버스 차장’이 사라졌다고 느끼는데, 그무렵에 어린이가 버스에 타면 ‘버스 차장’ 누나들이 어린이를 되게 싫어했다. “애들은 반값밖에 안 되는데 왜 자꾸 타?” 같은 말을 ‘아이들이 들으라’고 큰소리로 하기 일쑤였다. 요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사뭇 달랐을 테지만, 지난날에는 아이들은 그저 ‘매바가지(매맞는 사람)’였다.
오늘날에는 어린이와 푸름이를 함부로 때리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부쩍 줄었다. 지난날 나처럼 얻어맞고 자라야 했던 숱한 사람들이 애쓰고 힘쓰고 마음쓰면서 하나씩 바꾸어냈다. 그런데 주먹질(폭력)을 치워낸 자리에 거꾸로 ‘아동학대’라는 허울로 시달리는 어른이 불거진다. 또한 막말(악플)이 곳곳에서 넘친다. 요사이는 글빗(비평)을 해도 ‘조금이라도 따갑다’ 싶은 글빗은 글빗이 아닌 막말(악플)로 여기기까지 한다.
아무튼, 날마다 얻어맞으면서 시달리던 어릴적에는 늘 내 몸을 돌아보아야 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내 몸을 돌아보니 ‘그렇게 실컷 맞으면서도 맞은 멍이나 흉터’가 하나도 안 남는 줄 느꼈다. 아무리 맞더라도 우리 몸은 곧 낫고 멀쩡하더라. 나는 고삭부리였기에 툭하면 앓아눕고 끙끙댔는데, ‘막짓이 싫다’는 마음일 적에는 모든 하루가 두렵고 무서우며, 집에서도 밖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누가 때리건 말건 난 그저 내 삶(어린이로서 놀기 + 집안일과 심부름)’으로 그냥 나아가겠다고 여기기로 했다.

예닐곱 살이나 열 살이나 열두 살 아이였던 지난날, 내가 무슨 ‘철학자’나 ‘도인’이었겠는가. 그저 아이였는데, 날마다 아침낮저녁으로 실컷 얻어맞는 하루를 끝없이 보내면서 몸벗기(유체이탈)를 스스로 익혔다. 어릴적에는 ‘몸벗기’란 말도 몰랐다. 그저 몸을 벗고서 5m쯤 위쪽에서 멀거니 ‘놈들(가해자)’을 바라보니 ‘놈들은 참 덧없는 짓을 바보처럼 하면서 성풀이’를 하더라. ‘놈들(가해자)’은 그놈들 집이나 마을에서 다른 더 센 놈들한테 똑같이 얻어맞으면서, 가장 힘없는 나한테 찾아와서 주먹질로 눈물씻이를 하는 줄 느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봐주고(용서) 말고 할 까닭이 없이, 나는 그저 내가 살아갈 오늘을 바라볼 노릇이라고 날마다 새삼스레 느끼면서 또 맞고 다시 맞았지만, 열네 살부터는 드디어 ‘안 맞는 하루’를 겨우 살았는데, 스무 살에 싸움터(군대)에 들어가면서 다시 열넉 달 동안 날마다 두들겨맞으며(군대폭력·군대성폭력) 시달리기도 했다.
그토록 두들겨맞은 날이기에, 어디를 어떻게 때리면 얼마나 아프고 죽을맛인지 알지만, ‘내가 맞았기에 남을 똑같이 때리면서 성풀이나 앙갚음을 할 까닭’이 없는 줄 배웠다. 그저 배우고 지나간다. 그저 속모습을 보고 민낯을 읽으면서, 참거짓을 가리자고 느낀다.
낱말책(사전)을 쓰는 길을 1994년부터 걸으며 언제나 다시 생각한다. 어느 낱말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면서 뜻풀이를 하거나 보기글을 붙이면 안 된다. 터무니없다. 이른바 ‘욕’은 ‘욕’이라는 짓이 무엇인지 수수하게 짚고서 다룰 일이다. ‘폭력’이라는 낱말도 그저 ‘폭력’으로 바라보며 풀이하고 보기글을 붙이고 다루고서 끝낼 일이다. 우리가 저마다 ‘낱말지기(사전편찬자)’라면, ‘놈(가해자)’이라는 낱말을 어떻게 풀이를 하면서 보기글을 붙여야 할까? 미움과 불길(분노)을 듬뿍 담아야 할까? 이런 얼뜬짓이 더는 이 별에 깃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부드러이 녹여내어 어린이한테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도록 풀어내야 할까?

어제그제(2025.3.24∼25) 서울과 부천을 오락가락 크게 돌면서 전철과 버스에서 숱한 서울내기와 부천내기를 스쳤다. 전철과 버스에서 숱하게 밟히고 밀리고 장난이 아니었다. ‘출퇴근시간’이 아닌 때여도 사람바다가 대단했다. 나는 책짐을 등에 크게 지고 가슴에 크게 안은 채 뒤뚱뒤뚱 걸으며 전철을 타는데, 그야말로 앞과 옆과 뒤에서 끝없이 밀고 밀치고 밟고 치더라.
이때에 이 모든 사람바다를,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밀고 밀치고 밟고 친다고 이마에 주름살을 내면서 짜증이나 불길이나 성을 내야 하는지 언제나 곱씹곤 한다. “이 많은 서울이웃(도시이웃)은 왜 이렇게 바쁘게 달리고 밀고 밟으면서 얼굴에 아무 빛(감정)이 없을까?” 하고 바라보기만 한다. 이러면서 내 옷가지를 추스르고, 숨을 가만히 고른 뒤에, 책을 꺼내어 읽고, 꾸러미(수첩)를 펴서 노래(시)를 쓴다.
밖에서 이야기꽃(강의·수업)을 펴든, 집에서 아이들과 곁님하고 삶을 두런두런 얘기하든, 낱말책을 고즈넉이 엮고 가다듬든, 늘 한꽃처럼 헤아린다. 이렇게 숱한 서울이웃이 너무 바쁘고 힘들게 지치면서 밀리고 밀치는 삶을 조금이라도 ‘새롭게’ 바라볼 ‘작은 길꽃’ 한 송이가 있으면 어떨까 하고 여긴다. 내가 엮은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이나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나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이나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이나 《쉬운 말이 평화》나 《우리말꽃》이나 《곁말》 같은 자그마한 책 하나를 그야말로 ‘길꽃’으로 삼아서 ‘말과 마음과 삶과 숲과 사랑과 꿈과 생각을 스스로 어우르며 추스르는 눈빛’을 가만히 다독여 볼 수 있다면, 천천히 이 별을 푸르게 돌볼 만하리라고 본다.
모든 놈(가해자)은 언제나 스스로 값(벌)을 치른다. 얼핏 보면 갖은 막짓을 일삼고도 팔다리 펴고서 멀쩡히 사는 듯 느낄 수 있다만, 모든 놈(가해자)은 ‘잘살지’ 못 한다. 모든 놈(가해자)은 우리 둘레에서 ‘잘사는 시늉’만 한다. 우리를 놀리고 싶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싶어서, 우리를 또 때리고 못살게 굴고 싶어서, 그놈들은 늘 ‘꾸미기(연극)’를 한다. 그놈들 가운데 ‘잘사는 놈’은 아예 없다. 그놈들은 늘 ‘잘사는 시늉·꾸미기’를 하면서 그놈들 스스로 그놈들 삶을 갉아먹고 할퀼 뿐이다.
모든 놈은 우리가 발끈발끈하면서 대들기를 기다린다. 그놈들은 스스로 삶과 하루를 안 그리면서 시늉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아예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놈들은 늘 쳇바퀴에 빠지면서 우리를 살살 건드리면서 괴롭히는 짓만 되풀이한다.


그놈들은 우리가 그놈들한테 똑같이 막말(욕)을 하면서 막주먹을 휘둘러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린다. 그러나 그놈들을 뭣 하러 때리거나 막말을 돌려줘야겠는가. 그저 그들이 이제는 꾸미기(연극)와 시늉을 스스로 끝내고서, 그들이 여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그들 스스로 삶을 제대로 짓기를 바랄 뿐이다.
막짓·막말은 스스로 갉고 할퀴는 얼뜬 굴레이다. 막짓과 막말을 일삼는 놈들은 “난 여태 사랑받은 적이 없어!” 하면서 누구나 다 미워하려고 한다. 그런데 막짓놈인 그들이 이 별에서 목숨을 잇고 사람몸을 입었다면, 그들도 똑같이 “사랑받는 삶”이다. 해는 나한테도 너한테도 그놈한테도 나란히 비춘다. 바람은 나한테도 너한테도 그놈한테도 나란히 분다. 모든 하루는 누구한테나 고르게 찾아온다. 이 별에서 이 몸을 입고서 살아가는 일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낱말이 어떤 말밑(어원)이고, ‘사람’이라는 우리 이름이 어떤 말밑인지 차근차근 짚고 읽을 때에, 나도 너도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마음을 가꾸면서 삶이라는 길을 지을 수 있다.
요즘 같은 팍팍한 나라에서 무슨 책을 읽느냐고, 책이 손에 안 잡힌다는 이웃님을 으레 만난다. 그러나 이렇게 팍팍한 나라이니까 되레 즐겁게 낱말책(사전)을 곁에 두면서 ‘가장 흔하고 수수한 낱말’부터 속뜻과 밑뜻을 처음부터 새롭게 짚고 읽고 살필 일이라고 느낀다. ‘놈들’을 쳐다볼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나’를 고요히 바라보면서 ‘너’를 즐겁게 마주하면 된다. 내가 나부터 나를 사랑할 때에, 바야흐로 참답게 눈을 뜨며 ‘너’가 ‘나’와 매한가지로 이 별에 사랑이라는 빛을 받으며 태어난 줄 알아볼 수 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을 열 해 만에 매듭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1500쪽쯤 줄거리를 채우려고 했지만, 이러다가는 스무 해 동안 붙잡아야 할 일이 되겠구나 싶더라. 단출히 792쪽으로 끊었다. 더 많이 담아서 더 많이 나눌 수 있지만, 알맞게 맺고 끊어서 즐겁게 나누자고 생각했다.
작은 낱말 하나를 보자. ‘작다’라는 낱말은 왜 ‘작다’일까? ‘크다’라는 낱말은 어떤 밑뜻과 말밑일까? ‘삶’이란 참으로 뭘까? ‘참·참말’이란 낱말은 참으로 뭘까?

문해력이나 의사소통이 아닌 ‘말’과 ‘글’과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러니까 ‘말’이란 참말로 뭘까? ‘글’이라는 낱말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집’이라는 낱말은 말밑이 뭔지 짚어 보자. ‘옷’이라는 낱말은 뭘까?
이른바 ‘피해자’이기에 늘 처지거나 울어야 할 까닭이 없다. 아침에 그토록 두들겨맞았더라도, 두들겨맞고 나서 1분도 채 안 지나서 까르르 웃고 떠들며 뛰놀지 말아야 할 까닭이 없다. 어릴적에 우리 어머니도 언니도, 또래와 마을 언니들도, “넌 무슨 미친놈이니? 조금 앞서 그렇게 맞고도 웃음이 나와?” 하며 다시 주먹과 발길질과 몽둥이를 휘두르더라. 그러나 그들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몽둥이로 매찜질을 한대서, 내가 안 뛰어놀아야 할 까닭이 없고, 안 웃고 안 노래해야 할 까닭이 없다.
열 살짜리 어린이는 1984년에 ‘비폭력’이나 ‘무저항’이라는 말이 있는 줄 몰랐다. 그들이 때리면 얌전히 실컷 맞고서, 그들이 자리를 떠나면 물로 손낯을 씻고, 후들후들하는 다리를 다잡으면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파란하늘과 눈부신 해를 바라보다가, 길바닥에 돋은 작은 들꽃을 쓰다듬다가, 가지가 잘려서 우는 나무한테 다가가서 줄기에 뺨을 대고서 ‘퉁퉁 부은 볼’을 식히다가,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맞고서 조용히 걷다가, 다시 웃었다. 이러며 오늘 2025년 3월에 이른다.
나는 서울과 부천 여러 곳을 돌며서 장만한 책을 신바람으로 짊어지면서 고흥으로 돌아간다. 나는 붐비는 전철에서 빙그레 웃으며 책을 읽고 노래(시)를 쓴다. 전철에서 소리내어 노래하면 미쳤다고 여길 테니, 그저 빙긋빙긋 웃으면서 종이에 노래를 쓴다. 오직 한 가지 마음, 내가 나부터 나를 사랑할 수 있을 적에 낱말풀이를 해낸다고 배웠다. 내가 나부터 나를 사랑하는 하루일 적에 말밑풀이(어원탐구)를 해내어 이웃한테 알려줄 수 있다고 깨달았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이라는 792쪽짜리 ‘얇고 작은’ 낱말책은 우리가 스스로 사랑으로 일어서며 어깨동무하자는 마음을 나누려는 꿈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꿈씨앗을 사랑손길로 나누면서 숲눈빛으로 누리기를 바라면서 내놓는다. 늘 쓰는 가장 수수하고 흔한 말씨부터 말밑을 헤아리는 이웃님을 기다린다. ‘깨끗한 순우리말’이 아닌 ‘살림살이 손수짓기’를 오래오래 잇고 물려준 옛사람 넋을 살피면서, 오늘 우리가 어른으로서 참하게 서는 길을 낱말읽기로 즐길 수 있기를 빈다. 어린이도 이 ‘얇고 작은’ 낱말책을 스스로 천천히 읽으면서 ‘말빛·말꽃·말씨·말숲·말노래·말살림’을 느긋이 익혀 가기를 빈다. 사랑으로 품기에 저마다 스스로 풀어내어 누구나 푸르게 빛난다.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