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의 곤충생활 2
아메갓파 쇼죠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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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5.14.

네가 살고 나랑 살며


《마이의 곤충생활 2》

 아메갓파 쇼죠군

 정은서 옮김

 대원씨아이

 2019.7.31.



  벌레가 없으면 논밭이 모두 망가집니다. 벌레 없는 시골이라면 논밭이 모두 무너져서 사람은 굶어죽을 수 있습니다. 왜 벌레가 없으면 논밭이 모두 망가져서 사람도 다 굶어죽을 판이 될까요?


  잎을 갉는 벌레는 새밥이자 개구리밥입니다. 새와 개구리는 벌레를 먹으면서 살아갑니다. 뱀은 개구리와 쥐를 먹고, 새는 또 뱀을 먹습니다. 벌레와 뱀이 없으면 새는 낟알과 씨앗을 어마어마하게 쪼아댈 뿐 아니라, 쥐가 엄청나게 득시글대면서 사람살이는 하루아침에 망가집니다.


  박정희가 내세운 새마을바람은 시골벌레를 비롯해서 벌나비를 몽땅 없애는 죽임더미(농약·화학비료·비닐)를 퍼뜨렸고, 새까지 모조리 내쫓는 죽임길로 치달았습니다. 이리하여 고작 쉰 해도 걸리지 않은 2025년 무렵 시골은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가 거의 자취를 감추려고 하는 ‘죽음터’로 치닫습니다. 이미 중국과 하늬(유럽·미국)에서는 새와 벌레를 안 건드려야 하는 줄 깊이 깨닫고는 섣불리 죽임더미를 쓰지 않는 길로 가지만, 우리나라만큼은 ‘드론 농약’까지 나오면서 거꾸로 죽음시골로 몰아세우는 판입니다.


  오늘날 시골에서 살거나 일하는 사람은 대단히 드뭅니다. 시골에서 일자리를 얻은 벼슬아치(공무원)는 수두룩하되, 이들 가운데 시골마을에 집을 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시골 벼슬아치조차 읍내에서 살거나 가까운 다른 큰고장에서 부릉부릉 몰면서 오갑니다. 시골에는 도무지 안 살려고 하는 ‘진보당·정의당·녹색당’이기도 합니다. 하나같이 서울에서 맴돌고, 이따금 부산·대구·인천이나 전주쯤에는 머물지만, ‘읍’이 아닌 ‘면·리’로 터전을 옮겨서 흙을 만지려는 ‘진보좌파’는 영 안 보입니다.


  《마이의 곤충생활》은 두걸음으로 단출히 맺습니다. 그저 ‘시골 + 벌레 + 흙 + 논밭 + 푸른길’로 엮어도 될 텐데, 자꾸 ‘짝맺기(순이끼리 짝맺기)’로 줄거리를 맞추려고 하면서 샛길로 빠지기 일쑤였어요. 짝맺기가 나쁠 일이란 없으나, 애써 푸른살림을 차분히 풀어내는구나 싶을 때마다 짝맺기를 끼워넣는 얼거리는 아쉬울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나 푸른별 뭇나라를 보면 ‘순이가 마음놓고 살 만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이가 마음놓고 살 만하지 않은 터전’은 ‘돌이도 나란히 마음놓고 살기 팍팍한 터전’입니다. 어느 쪽만 살 만하지 않을 수 없어요. 둘 모두 나란히 고단합니다. 그러면 누가 살기에 좋을까요? 바로 ‘힘꾼(권력자)’하고 ‘힘꾼한테 빌붙는 심부름꾼’만 살기에 좋습니다.


  순이가 마음놓고 살아갈 터전이란, 돌이도 마음놓고 살아갈 터전입니다. 둘은 따로 갈라야 할 사이가 아닌, 어깨동무를 이루면서 함께 배우고 가르쳐서 나란히 노래하고 놀며 일하는 길을 열어야 할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이러구러 ‘벌레살이’를 읽고 익혀서 벌레랑 함께살기를 이룰 적에 비로소 논밭살림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벌레살이 곁에 새살이가 있고, 개구리살이와 뱀살이가 있는 줄 눈여겨볼 때라야, 사람이 어떻게 사람살이를 푸르게 일구면서 온숲을 이루는 온별로 피어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재(아파트)’하고 ‘쇠(자가용)’가 아예 없더라도 굶어죽거나 다치거나 힘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논밭이 망가지고 들숲메바다가 망가지면 모든 사람이 떼죽음입니다. 2025년 6월에 우두머리를 새로 뽑을 텐데, 이놈과 저놈과 그놈과 딴놈 가운데 어느 놈도 ‘푸른시골’을 헤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푸른시골에서 즐겁게 땀흘릴 어린이와 푸름이를 돌보는 배움길’을 살피지 않아요. 푸른시골이 사라지면 서울도 하루아침에 끝장나는 줄 모른다면, 그대는 왼날개도 오른날개도 아닌, ‘우리에 스스로 갇힌 몸뚱이’일 뿐입니다.


ㅍㄹㄴ


“멸종 우려가 있는 종 중 하나야. 서식 조건이 조금 특수하거든. 가끔 습원에 온 멧돼지가 먹이를 찾으라 파둔 구멍에 물이 고인 상태가, 꼬마잠자리 유충의 성장에 가장 적합하대.” “조건이 엄격하구나.” “여기선 우리가 비슷한 구멍을 파서 환경을 조성해 주지만.” (17쪽)


“가늘고 긴 건 소금쟁이아과. 동글동글한 건 바다소금쟁이아과에 속해. 즉 광대소금쟁이는 바다소금쟁이아과지.” (25쪽)


“이놈들은 더위에 약해. 고추좀잠자리의 체온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주위보다 10도 높아진다. 그래서 여름엔 산 위로 피난했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기슭으로 내려오지.” (74쪽)


“우리나라는 자연이 풍부하고산림이 3분의 2를 차지하지.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농지야. 북에서 남까지 논밭이 없는 지역은 하나도 없어. 논밭을 경작하면 이 나라의 모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자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오르더구나.” (79쪽)


“이대로 내가 죽으면, 넉점박이송장벌레가 청소해 주면 좋겠어.” (82쪽)


“너한테선 흙냄새가 난다. ” “밭일을 하니까요.” “그게 아니라 더 깊은 부분에서야. 이 땅이 널 지켜주고 있는 거겠지.” (141쪽)


“흰개미는 주택에 해를 끼치지만, 산야의 쓰러진 나무를 분해해 주는 중요한 곤충이에요.” “해충이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겠구나.” (157쪽)


“날 여기로 불러줘서 고마워.” “후후,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회사에 근무할 땐 일하는 게 고역이라 싫었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농사는 그런 생각이 안 들어. (166쪽)


#麻衣の蟲ぐらし #雨がっぱ少女群


+


《마이의 곤충생활 2》(아메갓파 쇼죠군/정은서 옮김, 대원씨아이, 2019)


상속분은 상쇄하고도 남아

→ 물림몫은 비기고도 남아

7


형용하기 힘든 쓸쓸함만 남았다

→ 말하기 힘들 만큼 쓸쓸했다

→ 몹시 쓸쓸했다

8


밭의 쪽도 일단은 혼자서 괜찮으니까 내일부터는 각자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요

→ 아무튼 밭도 혼자서 할 만하니까 이튿날부터는 처음대로 돌아가요

→ 밭일도 뭐 혼자서 할 만하니까 다음날부터는 예전대로 돌아가요

9


멸종 우려가 있는 종 중 하나야. 서식 조건이 조금 특수하거든

→ 사라질 수 있는 하나야. 보금자리가 조금 다르거든

→ 사라질 듯한 한 가지야. 삶터가 조금 유난하거든

17


가끔 습원에 온 멧돼지가 먹이를 찾으러 파둔 구멍에 물이 고인 상태가, 꼬마잠자리 유충의 성장에 가장 적합하대

→ 가끔 늪에 온 멧돼지가 먹이를 찾으러 파둔 구멍에 물이 고여야 꼬마잠자리 애벌레가 잘 자라

17


용수는 강이나 연못의 물과 비교하면 녹아있는 불순물이 아주 적어

→ 샘은 내나 못물과 대면 부스러기가 아주 적어

→ 샘물은 냇물이나 못물보다 찌꺼기가 아주 적어

22


그런 예비 전력을 지녔기 때문에 개미무리는 다양한 트러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런 뒷심이 있기 때문에 개미무리는 갖은 말썽에도 잘 맞설 수 있다

→ 그런 뒷힘이 있기 때문에 개미무리는 온갖 고비도 잘 넘길 수 있다

44


일본에서 제일 큰 수생 곤충이야

→ 일본에서 가장 큰 물벌레야

47


할아버지의 잔영을 찾고 있었다

→ 할아버지 그림자를 찾는다

→ 할아버지 뒤안길을 찾는다

70


혹은 썩어서 낙과(落果)가 되는걸요

→ 또는 썩어서 떨어지는걸요

→ 아니면 썩어서 뒹구는걸요

113


일본흰개미는 유성생식 말고도 단성생식도 가능하거든요

→ 일본흰개미는 암수맺이 말고도 혼맺이도 하거든요

→ 일본흰개미는 암수사랑 말고도 그냥맺이도 하거든요

159


출하할 채소의 종류를 늘리고 싶어요

→ 내놓을 남새를 늘리고 싶어요

→ 선보일 남새를 늘리고 싶어요

162


무늬가 특이하네. 흰색 땡땡이야

→ 무늬가 다르네. 흰얼룩이야

→ 무늬가 새롭네. 흰동글이야

163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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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
마츠무시 아라레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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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25.

엄마도 아빠도 아닌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

 마츠무시 아라레

 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3.31.



  나를 낳은 엄마도 나를 낳기 앞서는 ‘젊은이’였고, 젊은이에 앞서 ‘아이’였습니다. 나를 낳은 아빠도 나를 낳기 앞서는 ‘젊은이’에 ‘아이’였어요. 더 헤아리면, 우리 엄마아빠를 낳은 할매할배도 예전에는 젊은이에 아이였습니다.


  사랑을 그리면서 사랑으로 짝을 맺은 엄마아빠가 있을 테지만, 사랑이 아니었으나 이래저래 짝을 맺고서 아이까지 낳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짝을 맺었으나 갖은 담과 울에 가로막히면서 그만 일찍 떠난 어버이가 있고, 사랑이 없이 짝을 맺고는 아이를 팽개친 어버이가 있습니다.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을 읽자니, 이 그림꽃에 나오는 두 사람한테는 ‘낳은 사람’만 있되 ‘돌본 어버이’는 없는 어린날을 보낸 듯싶습니다. 그런데 ‘낳은 사람’인 두 사람은 ‘낳기’조차 매우 싫어한 듯싶군요. 억지로 누구를 낳기는 했으나, 스스로 낳았으면서도 돌아볼 마음이 터럭만큼도 없었고, 두 사람은 ‘낳은 사랑도 돌본 사랑’도 도무지 느끼기 어려운 어린날을 지나오면서 어느새 스물이나 서른이라는 나이에 이릅니다.


  어린날 사랑을 느끼거나 누려 본 적이 없는 채 몸뚱이만 자랐다면, 이때에는 어떤 하루를 보낼까요? 어린날 집에서 사랑을 보거나 듣거나 배운 적이 없는 채 스물이나 서른이라는 나이까지 흘렀다면, 우리는 사람이라는 몸으로 뭘 할 만할까요?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 아이들이 엄마아빠 곁에 머물 틈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맡겨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골목도 마을도 없을 뿐 아니라, 노키즈존으로 넘치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적잖은 어버이가 아이를 팽개친다(방치)고 여기지만,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아 자란 어린날이 없는 채 몸뚱이만 어른이 된 사람이 짝을 맺어서 아이를 낳을” 적에 아이를 쉽게 팽개치게 마련입니다. 다만, 어릴적에 아무 사랑을 못 받은 아이라 하더라도 “난 우리 엄마아빠처럼 사랑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지 않겠어” 하고 꿈을 그리는 아이들은 “사랑받지 못 한 나날을 보내었어도 새롭게 사랑을 지으며 아이곁에서 웃고 노래하는 오늘”을 짓더군요.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단한 사람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나누고 누리는 수수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펴기를 바랍니다. 개미를 구경할 틈을 느긋이 누리고 싶고, 개구리가 혀를 낼름 내밀어 잠자리나 파리를 잡아채는 모습을 지켜볼 짬을 느슨히 누리고 싶습니다. 고치를 튼 애벌레가 날개돋이를 할 때까지 보름쯤 멀거니 지켜보고 싶고, 나팔꽃이 어떻게 이른새벽에 꽃봉오리를 펴는지 새벽바람으로 아침까지 곁에 앉아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함께 자라기에 즐겁게 누리는 오늘입니다. 아이하고 어버이는 키도 몸도 다르지만, 어깨동무를 하면서 천천히 거닐기에 사랑입니다. 낳은 아이가 없더라도 누구나 어른스럽게 마을 아이를 마주할 만합니다. 아이를 꼭 안 낳더라도 온누리 모든 아이가 “우리 아이”입니다. 우리는 서로 엄마나 아빠이기도 하지만, 엄마아빠란 이름이 없더라도 ‘너·나·우리’라는 이름으로 즐겁게 수다꽃을 피우는 사람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잘생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기는 사랑을 품는 엄마를 바랍니다. 아이는 아빠가 돈을 잘 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랑으로 보금자리를 가꾸는 아빠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른이나 어버이라는 자리에서 아이한테 무엇을 바라는지 이제부터 몽땅 다시 생각할 노릇입니다.


ㅍㄹㄴ


“누군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22쪽)


“그렇게 지각이 몹쓸 짓인가요?” “뭐?” “으음, 사실 카와무라 씨는 차로 1시간이나 걸리잖아요?” (88쪽)


“그치만 우리 개가 위독해서 도쿄까지 바래다줘도 료헤이 군은 아무 이득도 없…….” “되게 시끄럽노, 토모짱. 손해인지 이득인지 몰라도, 토모짱이 곤란하면 도쿄에 가는 의미는 있지.” (110쪽)


“엄마 곁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젠 찾았으니까 괜찮아.” (128쪽)


“네가 그 가게를 물려받았다니, 웃긴다. 그 정도 인물이면 기둥서방이라도 할 것이지.” “날 할배 집에 두고 갔으면서, 데리러 오겠다 캐놓고 전화도 안 하고, 속 편하게 잘도 카레 처묵고 있나?” “아무 데나 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141쪽)


#自轉車屋さんの高橋くん #松蟲あられ


+


《자전거집 타카하시 군 2》(마츠무시 아라레/오경화 옮김, 대원씨아이, 2025)


완전 꿈의 밥상이네

→ 아주 꿈같은 밥이네

→ 아주 꿈밥이네

8쪽


그런 사람한테 이용당할까 봐

→ 그런 사람한테 휘둘릴까 봐

19쪽


누군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아요

→ 누구한테도, 누가 좋아할 적에도, 얕보거나 그러진 않아요

→ 누구를 놓고도, 누가 좋아할 때도, 깔보거나 그러진 않아요

22쪽


눈이 반짝반짝거리네

→ 눈이 반짝거리네

→ 눈이 반짝반짝하네

4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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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외 프린세스 2
아이다 나츠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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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5.

안팎을 잇는 너


《권외 프린세스 2》

 아이다 나츠미

 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2016.8.15.



  나는 너를 달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네가 스스로 달래는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다독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는 내가 스스로 다독이는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누가 누구한테 무엇을 해주는 듯 보일는지 모르나, 정작 어느 누구도 남을 달래거나 다독이지 않습니다. 늘 저마다 스스로 달래거나 다독입니다.


  네가 나를 좋아하기에 기쁠 까닭이 없어요. 네가 나를 미워하기에 꺼리거나 싫을 까닭이 없어요. 어느 누구도 남을 사랑하지 못 합니다. 좋거나 미운 마음이란 누구나 품을 수 있되, 모름지기 사랑이란 스스로 어떤 숨빛인지 알아보는 길을 가리킵니다. 남을 아끼거나 보살핀다면 ‘아끼다’나 ‘보살피다’라고 합니다. 아끼거나 보살피기에 사랑이지 않아요. 스스로 사랑으로 빛나기에 저절로 이웃을 아끼거나 보살피는 매무새가 피어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기에 즐겁거나 기쁠 수 없어요. 좋아하면 그뿐입니다. 어느 하나를 좋아하기에, 이 하나를 뺀 나머지를 모조리 싫어하거나 안 쳐다보거나 미워하거나 꺼리거나 등돌리곤 합니다.


  온누리를 보면 환하게 드러납니다. 어느 갈래를 좋아한다고 밝히는 사람일수록 “어느 갈래를 뺀 모든 갈래”를 모르거나 등돌리거나 까막눈입니다. 어느 사람을 좋아한다고 외치는 사람일수록 “어느 사람을 뺀 모든 사람”을 아예 안 쳐다보고 얘기를 안 듣고 말조차 안 섞더군요. 좋아하니까 좁아요. 좁으니까 좇아다녀요. 이러다가 이웃을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권외 프린세스》는 어느 아이가 누구보다 스스로 안 좋아하고 스스로 미워하고 스스로 못생기고 못났다고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스스로 갉아먹는가 하는 줄거리를 들려줍니다. 잘생기거나 몸매가 미끈해야 남들이 좋아할 만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나 얼굴이나 몸매는 “어느 사람 숨빛”이 아닌, 그저 살덩이일 뿐입니다. 살덩이를 쳐다보는 마음으로는 아무런 사랑이 안 싹터요.


  서로 눈을 감고 마주볼 적에 비로소 스스로 어떤 숨빛인지 느끼고, 이때에 ‘사랑’이란 늘 ‘나부터’ 날개를 펴는 길인 줄 천천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나부터 일어서야 너를 알아보고, 너를 알아보면서 나를 다시 바라보며, 나를 다시 바라보다가 너를 그윽히 지켜보기에, ‘우리’를 이루는 하늘빛으로 반짝반짝 웃고 노래하는 길에 서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울(설득) 수 없습니다. 남한테 “자, 이제 스스로 깨어나 보셔요.” 하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북돋울 수 없습니다. 남한테 “자, 이제 스스로 사랑해 보셔요.” 하고 얘기할 수는 있습니다.


  속꽃(무화과)을 먹고 싶으면 속꽃나무 한 그루를 심을 노릇입니다. 배를 먹고 싶으면 배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 됩니다. 남이 속꽃이나 배를 사다가 주기를 기다리거나 바랄 까닭이 없어요.


  말을 알고 싶으면 마음을 틔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낱말책을 살펴서 차분히 읽으면서 스스로 낱말풀이를 하면 됩니다. 글을 쓰고 싶으면 그림부터 그릴 노릇입니다. 하루를 그리고, 꿈을 그리고, 사랑을 그리면서, 천천히 살림을 그리노라면, 어느새 누구나 글지기로 일어섭니다.


  너를 바라보는 나는 서로 안팎을 잇습니다. 눈을 감고 바라보다가, 눈을 뜨고 지켜보다가, 다시 서로서로 마음과 눈망울을 마주하면서, 차분히 안팎을 잇는 빛줄기를 느낍니다.


ㅍㄹㄴ


“너도 같은 마음이지? 전시회가 걱정돼서 온 거잖아. 나처럼!” (9쪽)


‘포기하는 건, 역시 불가능해!’ (72쪽)


‘오히려 내 쪽이 아니었을까?’ (110쪽)


“메구치. 잡지도 사람이 만드는 거라,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 안 돼. 이 중에서 내가 ‘괜찮다’ 싶은 것만 골라서 참고로 하면 되지 않을까? 사랑도, 화장도, 멋도, 수학 교과서랑 달라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아.” (147쪽)


‘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떡하는 게 가장 좋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조금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금방 침울해 하는 게 아니라, 나랑 둘이 이 비오는 날, 어떡하면 즐길 수 있는지부터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쿠니마츠, 난 널 그저 좋아하기만 하는 게 아냐. 난 너처럼 다정하고 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198쪽)


#圈外プリンセス #


+


《권외 프린세스 2》(아이다 나츠미/서수진 옮김, 대원씨아이, 2016)


지면이 까마득히 멀어

→ 바닥이 까마득히 멀어

→ 땅이 까마득히 멀어

7쪽


어느 반보다도 월등히 뛰어나니까

→ 어느 곳보다도 뛰어나니까

→ 어느 칸보다도 잘했으니까

22쪽


짧은 치마에 호전적인 자세는 뭐야?

→ 짧은치마에 달려드는 몸짓은 뭐야?

→ 짧은치마에 사나운 매무새는 뭐야?

129쪽


앞머리를 얘처럼 사선으로 해보는 건 어때?

→ 앞머리를 얘처럼 빗살로 해보면 어때?

→ 앞머리를 얘처럼 비스듬히 하면 어때?

147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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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리고 죽어 5
토요다 미노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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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3.

온하루를 바쳐서


《이거 그리고 죽어 5》

 토요다 미노루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12.31.



  《이거 그리고 죽어 5》을 아이들하고 즐겁게 읽습니다. 반갑게 맞이해서 기쁘게 읽는다고 할 만합니다. 언제쯤 다음걸음이 한글판으로 나오려나 손꼽아 기다리면서, 되읽고 새로읽고 다시읽곤 합니다. 《이거 그리고 죽어 5》에서는 그야말로 온힘을 쏟아부어서 그리는 마음이란 무엇인지 짚습니다. 언뜻 보면 “활활 불태운 붓끝”이기에 이제 한 줌 재가 된 듯싶습니다. 그러나 온힘과 온마음과 온넋을 그러모아서 빚은 그림 한 칸이란, ‘불태우기·불사르기’가 아닌 ‘붓기(쏟아붓기)’입니다. 불이란 불길(분노)이게 마련이라 그만 잿더미로 갑니다만, ‘붓다’일 적에는 여름날 소나기나 봄날 눈녹임비처럼 온누리를 푸르게 적셔요.


  마지막 기운까지 쏟아붓고서 드러눕기에 어느새 기운을 차려서 일어나고, 다시 붓을 쥐면 뜻밖에도 예전에는 느끼지 못 하던 찌릿찌릿 벼락이 온몸으로 퍼지는 줄 알아차리지요. 다 쏟아부었다고 여겼기에, 예전 몸짓을 모두 녹여낸 셈이요, 바야흐로 새몸으로 거듭나서 새그림을 빚을 수 있습니다. 불태움질이 아닌 쏟아붓기일 적에는 풀벌레가 허물벗기를 하듯 ‘낡은 우리 몸을 스스로 벗는’ 길입니다.


  우리말 ‘기쁨(기쁘다)’이란 ‘깊다’하고 밑동이 같습니다. ‘길다’와 ‘길’에다가 ‘기르다’와 맞닿기도 합니다. ‘기쁨’이라고 할 적에는, 깊이 스미면서 차오르는 빛일 뿐 아니라, 길디길게 잇는 길처럼 스스로 나아가는 빛살로 뻗고, 스스로 살리고 살찌우고 북돋우듯 기르면서 ‘기운’을 일으키는 몸짓이자 마음이라고 할 만합니다.


  기쁠 적에는 굳이 안 웃으면서 차분히 있기도 합니다. 속으로 기운과 빛이 넘쳐오르니 굳이 겉으로 티를 내지 않더라도 둘레를 밝혀요. 이와 달리 ‘즐거움(즐겁다)’일 적에는 즐거운 티가 풀풀 나면서 활짝 웃고 떠듭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즐겁다’는 ‘즈믄(1000·천)’이라는 셈값을 나타내는 낱말하고 밑동이 같고, ‘졸졸·줄줄’이며 ‘줄기·줄기차다·줄거리’에 ‘지며리’처럼 맑고 밝게 흐르는 물빛으로 노래하는 결이거든요. 이리하여 ‘즐겁다’는 ‘짓다·집’으로 잇는 낱말이라서, 맑고 밝게 피어나는 웃음과 이야기로 살림을 짓는 보금자리(집)로 나아가는 마음과 몸짓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은 꼭 ‘좋은일’에서만 느끼지 않아요. 좋든 안 좋든, 언제나 우리 스스로 이 삶을 배우고 누리고 나누고 베풀고 받아들이고 다시금 주고받는 사이에 피어나는 마음입니다. 가시밭길도 기쁘고 즐겁습니다. 꽃길도 즐겁고 기쁩니다. 온하루가 늘 사랑인 줄 알아보는 눈빛이기에 기쁘고 즐겁게 마음을 다스려서 이 삶을 짓고 가꾸면서 길이길이 나아간다고 느낍니다.


  《이거 그리고 죽어》는 기쁜 길이 무엇인지 짚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러면서 즐거운 노래가 무엇일까 하고 곱씹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왼손과 오른손에 놓으면서, 둘 사이를 가만히 오가고 지켜보고 하나로 어우르는 삶을 찾아보려는 매무새라고도 여길 만합니다.


  더 빼어난 붓끝은 없습니다. 더 높거나 낮은 붓질도 없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스스로 차분히 짓는 붓끝입니다. 오늘은 오늘까지 쏟은 땀방울로 눈망울이 빛납니다. 오늘을 실컷 누리기에 오늘부터 맞이할 새날에는 이슬 한 방울과 빗물 한 톨을 두 손에 놓고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ㅍㄹㄴ


“천재란 게 칭찬인가? 내가 아이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엄마가 인기 만화가여서도, 타고난 센스가 있어서도 아니야. 아이의 몇 백 배나 그렸으니까 그런 거지. 자기가 노력 안 하는 것에 대한 변명 아냐?” (14쪽)


‘그리고 싶다. 빛을. 그림자를. 봄 햇살의 따뜻함을. 여름날의 생명력 넘치는 하늘을. 가을날의 차분한 평온함을. 겨울날의 차갑게 맑은 공기를.’ (36∼37쪽)


“난폭해! 무모한 설정을 무모한 설정으로 받아쳤어! 고민하고 있어! 마음 착한 후지모리가 고민하고 있어!” (67쪽)


“그건 테시마 선생님한테 너무 심하게 굴어서.” “날 위해서 그린 겁니까? 그런 부탁 한 적 없습니다만.” “아뇨, 제가 화가 나서.” “그럼 개인적인 분노를 위해 사람을 한 번만 보고 폄하하고 모욕한 겁니까? 만화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것일 텐데요.” (107쪽)


“다음번엔 제대로 재미있는 만화로 싸우겠습니다!” (116쪽)


“정마아아알? 《기생수》보다 재미있었냐아아아아∼?” “뭐랑 비교하는 거니. 뻔뻔도 해라!” (177쪽)


“열심히 노력했지만 내가 졌어. 이거 그렸으니까 죽을까?” (195쪽)


#これ描いて死ね #とよ田みのる


+


《이거 그리고 죽어 5》(토요다 미노루/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24)


내가 원하던 건 바로 이거였어

→ 나는 바로 이 길을 바랐어

→ 난 이렇게 하고 싶었어

141쪽


그렇게 대단한 애가 신입부원이라니

→ 그렇게 대단한 애가 새내기라니

→ 그렇게 대단한데 새사람이라니

142쪽


차분하게 부감해서 생각하자

→ 차분히 내려다보며 생각하자

→ 차분하게 새보기로 생각하자

172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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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샌드백 : 하 - 완결
카오리 오자키 지음, 박소현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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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그림꽃 / 숲노래 만화책 . 만화비평 2025.4.13.

나이는 나무처럼


《개와 샌드백 下》

 카오리 오자키

 박소현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3.12.30.



  새봄을 맞으면 어느새 나비가 팔랑팔랑 들숲을 날아다닙니다. 언제 고치를 틀었고, 언제 날개돋이를 했고, 언제 어디에서 겨울잠을 마치고 일어난 나비일까 하고 한참 바라봅니다. 겨울에는 찬바람과 누렇지만 부드럽게 시드는 풀포기를 가볍게 쓰다듬고, 봄에는 푸릇푸릇 돋는 풀포기에 내려앉는 산들바람과 나비를 문득 지켜보다가 나무한테 다가가서 “겨우내 애썼구나” 하고 쓰다듬습니다.


  해마다 넷쨋달을 맞이하면, 마녘 시골에서는 마늘밭에 풀죽임물을 오지게 뿌립니다. 마늘밭이 온통 하얗게 풀죽임물잔치를 이루는 모습을 처음 본 해에는 “마늘을 굳이 먹어야 할까?” 하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 해를 지나고 다섯 해를 지나고 열 해를 지나고 열다섯 해에 이른 오늘 다시 헤아립니다. 마늘밭이며 논밭 풀죽임물 못지않게 시골과 서울 어디나 부릉부릉 쇳덩이가 매캐한 김을 끝없이 뽑아내요. 풀죽임물만 걱정할 노릇이 아닌, 그저 모든 쇳덩이를 근심할 노릇이더군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읊습니다. “바람아, 하늘아, 우리가 잘못했구나. 그렇지만 늘 새롭게 파랗게 불어 주니 고마워.” 바람은 우리 목소리를 듣고는 어느새 돌개바람을 일으켜 풀죽임물을 훅 날립니다. 하늘은 우리 마음을 듣고는 어느새 굵게 빗방울을 떨굽니다.


  꽃과 나비와 새 곁에, 나무와 풀벌레와 사람이 나란히 서는 봄입니다. 《개와 샌드백》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제법 나이든 순이와 스물 언저리인 돌이가 몸뚱이에 앞서 마음으로 먼저 만나서, 서로 그동안 스스로 어떤 응어리와 멍울을 온몸으로 새기면서 “남이 아닌 내가 스스로 삶을 갉아먹었”는지 말로 주고받으면서 풀어내는 얼거리입니다.


  모든 응어리는 남이 아닌 내가 받아들입니다. 모든 고름은 남이 아닌 내가 내놓습니다. 모든 멍울도 생채기도 우리가 스스로 남깁니다. 햇살이 내리쬐기에 우리 살갗이 다치지 않습니다. 빗방울에 맞기에 우리 몸에 구멍이 나지 않습니다. 누가 옆에서 무어라 쫑알거리든 우리 마음이 다칠 까닭이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한테 “어머니 어릴적 얘기 좀 들려주셔요.” 하고 여쭈면 한 마디도 안 하기 일쑤였습니다. 떠올리기 싫은 일이 가득하기에 차마 말을 하기도 싫을 뿐 아니라, 떠올리기만 해도 욱씬거리기만 한 줄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요즈음 우리 집 아이들이 저한테 “아버지 어릴적에는 어땠어요?” 하고 물으면 빙그레 웃으면서 지나온 일을 하나하나 그림으로 줄줄이 머릿속에 떠올린다. 낱낱이 짚으면서 그때 겪은 일과 오늘 어떻게 바라보는지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우리 삶은 늘 하나입니다. 오늘과 모레와 어제는 언제나 하나로 흐릅니다. 오늘을 제대로 알려면 어제를 짚을 노릇이고, 어제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면, 머잖아 다가올 모레를 꿈과 사랑으로 그릴 노릇입니다. 어떤 모레를 맞이할는지 알고 싶다면 바로 오늘 즐겁게 살림씨앗을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삶이라는 길을 사랑이라는 숨결과 눈빛으로 가꾸는 살림을 숲빛으로 품는 목숨붙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말로 우리 삶을 그리고, 글로 우리 삶을 그립니다. 우리가 쓰는 모든 말글이란, “우리 이야기”이면서 “아이곁 이야기(육아일기)”이기도 합니다. 순이돌이가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떤 어린날을 누렸고 젊은날을 보내면서 어른살이를 짓고 싶은지 이야기할 적에, 비로소 이 나라는 천천히 아름답게 바뀌리라 봅니다.


  우리가 나눌 말이란, 늘 ‘삶·살림·사랑·숲’ 네 가지입니다. 이 네 가지를 이야깃감으로 삼기에 언제나 어깨동무하면서 집과 마을과 나라와 별을 함께 일굴 수 있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든, 둘이 같이 살림을 꾸리든, 아이를 낳든 안 낳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삶·살림·사랑·숲’ 네 가지를 마음으로 담아내어 몸으로 녹아내기에 사람일 뿐입니다.


  말 한 마디란 말씨이고, 글 한 줄이란 글씨입니다. 어떻게 말씨앗과 글씨앗을 남겨서 스스로 돌아보고, 이웃과 아이한테 베풀려 하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각하기에 사람이고, 생각을 안 하기에 사람이 아닌 겉껍데기 살가죽입니다.


ㅍㄹㄴ


“이렇게 멋진 여자를 어설프게 사랑해선 안 돼!” (47쪽)


“영혼은 배신하지 않아. 좋아해요, 니치코 씨.” (49쪽)


“저걸 갖고 있으면 언제까지고 거짓말쟁이라며 그 사람을 탓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 분노가 부족했었나?” (61쪽)


“모모, 유통기한이라는 말을 자기 자신에게 쓰면 안 돼!” (109쪽)


‘이상한 기분이다. 이젠 못 만나는 거지? 아츠무. 당신도 다리였어. 내가 도쿄를 살아내기 위한.’ (192쪽)


#尾崎かおり #犬とサンドバッグ


+


《개와 샌드백 下》(카오리 오자키/박소현 옮김, 서울미디어코믹스, 2023)


생식 능력이 퇴화한 일개미는

→ 낳지 못하는 일개미는

→ 씨알이 사라진 일개미는

5쪽


매일 먹이를 모으거나 유충을 보살피는 등

→ 늘 먹이를 모으거나 애벌레를 보살피며

5쪽


이 노선은 왜 아직도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지 않는 걸까

→ 이 길은 왜 아직도 겹닫이를 안 놓을까

→ 이쪽은 왜 아직도 덧닫이를 안 둘까

13쪽


주로 클레임에 대응해야 하니까 자존심이 깎여나가요

→ 딴죽질을 마주해야 하니까 마음이 깎여나가요

→ 딴지걸기를 받아야 하니까 속이 깎여나가요

15쪽


처음으로 원나잇을 해버렸네

→ 처음으로 하룻밤을 해버렸네

→ 처음으로 그러안아 버렸네

→ 처음으로 믐을 섞어버렸네

20쪽


중고 거래 앱으로 팔았어야 하는 건데

→ 되팔기 무른모로 팔아야 했는데

→ 다시쓰기 꽃으로 팔아야 했는데

→ 헌살림 모로 팔아야 했는데

62쪽


왜 남자만 여자한테 조공을 바치고도 차여야 돼?

→ 왜 사내만 가시내한테 바치고도 차여야 해?

80쪽


나는 위하수체야! 남의 체질을 갖고 사람을 놀리지 마

→ 나는 속처짐이야! 남을 몸빛으로 놀리지 마

→ 나는 배처짐이야! 남을 몸으로 놀리지 마

114쪽


용천수를 찾아 수풀로

→ 옹달샘을 찾아 수풀로

→ 샘물을 찾아 수풀로

180쪽


석양을 보고 있어

→ 저녁놀을 봐

→ 노을을 봐

184쪽


40견입니다. 노안이 시작됐어요

→ 마흔어깨. 잘 안 보여요

→ 어깨앓이. 눈이 이제 어두워요

189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사전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내가 사랑한 사진책》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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