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내 친구는 그림책
타카도노 호오코 글 그림, 예상렬 옮김 / 한림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마음그릇으로 읽는 그림책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7] 타카도노 호오코,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한림출판사,2003)



 좋은 마음그릇이 되어 읽는 그림책은 내 아이한테 좋은 마음그릇이 되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 어버이인 나부터 내가 이제껏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했던 고운 마음그릇이 되어 스며든다고 느낍니다. 좋은 마음그릇인 좋은 책 하나 가만히 펼치면서 아이하고 함께 읽든 혼자서 읽든, 이 마음그릇이 담긴 마음밥을 차근차근 받아먹거나 즐길 수 있구나 싶어요.

 책값을 천천히 마련하면서 즐겁고, 땀흘려 마련한 돈을 책값으로 쓰면서 즐거우며, 책 하나 장만하려고 책방마실을 다니는 일이 즐겁습니다. 장만한 책을 읽을 때에 즐겁고, 읽은 책을 책시렁에 꽂을 때에 즐거우며, 읽은 책을 틈틈이 다시 꺼내어 들출 때에 즐겁습니다.

 먹고 또 먹어도 줄지 않는 마음밥인 책입니다. 즐기고 또 즐기면서 낡거나 닳지 않는 마음벗인 책입니다. 나누고 또 나눌수록 새로운 빛이 서리며 어여쁜 마음밭인 책이에요.


.. “뭐야? 너희들 겨우 그것밖에 안 길러? 나라면 더 길게 기를 텐데!” 수진이가 말했습니다. “뭐, 얼마나?” “훨씬,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 길게! 길이는 …….” ..  (4쪽)


 타카도노 호오코 님이 빚은 그림책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한림출판사,2003)을 읽습니다. 머리가 짧은 아이는 저보다 머리가 긴 동무 둘이랑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어떠한 모습일까 하고 꿈을 꿉니다. 길디긴 머리카락으로 무엇을 하고, 길디긴 머리카락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기며, 길디긴 머리카락은 아이 삶을 얼마나 아름다이 일구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예쁜 꿈이에요. 멋진 꿈이에요. 예쁘게 살아가는 아이인 만큼 예쁘게 꿈꿀 수 있겠지요. 멋지게 살아숨쉬는 아이인 터라 멋지게 꿈꿀 수 있을 테지요.

 짧은머리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합니다. 예쁘게 꿈을 꾸는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 또한 예쁘게 꿈을 꾸는 어른일까요. 아이만 혼자 예쁘게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옆지기랑 두 아이가 저마다 어떤 예쁜 꿈을 꾸면서 살아가도록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살붙이로 지내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를 얼마나 어여삐 건사하는 어여쁜 어른인가 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우리 집 딸아이와 아들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희 동무들하고 어여삐 이야기꽃을 피우도록 이끌 만큼 나 스스로 어여삐 살아가는지 곰곰이 헤아립니다.


.. 오른쪽으로 땋은 머리와 왼쪽으로 땋은 머리를 팽팽하게 나무에 묶으면 우리 집 모든 빨래를 한꺼번에 널 수 있어. 빨래가 마를 동안 나는 책 10권을 읽고 “도와줘서 고맙다.”라는 엄마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거야 ..  (12∼13쪽)


 좋은 삶으로 이루는 좋은 꿈입니다. 좋은 사랑으로 일구는 좋은 믿음입니다. 좋은 손길로 나누는 좋은 밥입니다.

 아이한테서 예쁜 웃음이나 맑은 웃음을 바란다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나부터 예쁜 웃음과 맑은 웃음을 아끼며 사랑하면 돼요. 아이한테서 예쁜 말이나 예쁜 몸짓을 꿈꾼다면, 아이랑 오순도순 복닥이는 나부터 예쁜 말이나 예쁜 몸짓으로 이웃을 사귀면 돼요.

 좋은 마음그릇으로 읽는 좋은 그림책입니다. 좋은 마음그릇을 갈고닦지 않는다면 좋은 그림책을 코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해요.

 좋은 그림책을 찾기 앞서, 내 삶을 좋은 꿈·사랑·이야기 감도는 기쁨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해요. 좋은 그림책을 바란다면, 어른인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이 기꺼이 물려받으면서 좋아할 만한 일이 되어야 해요. 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좋은 짝꿍을 만나서 저희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어른인 내가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알콩달콩 한솥밥을 먹을 수 있다면, 따로 좋은 그림책이 곁에 없어도 내 삶은 늘 좋은 이야기꽃이 가득합니다.


.. “그래도 보통 때는 귀찮지 않을까?” “그래, 머리가 길어서 다니기 불편하지 않을까?” 연희와 민지가 함께 물었습니다. “문제없어. 그럴 때는 파마를 하는 거야. 그러면 ……. 내 머리는 숲이 되는 거야! 작은 새도, 다람쥐도, 벌레들도 모두 다 모여서 아주 멋있는 숲이 되는 거야!” (22∼26쪽)


 나는 숲을 꿈꿉니다. 나와 옆지기가 따사로이 한삶을 일구는 좋은 ‘집숲’을 꿈꿉니다. 두 어버이와 살아가는 두 아이가 푸른 숨결을 누리면서 푸른 꿈결을 스스로 보살필 수 있을 좋은 집숲을 생각하면서 우리 살림집을 가꿉니다.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더 얻거나 힘을 더 펼치는 삶은 내키지 않아요. 포근하게 어깨동무하고 싶고, 넉넉하게 껴안고 싶으며, 신나게 손잡고 싶어요.

 그림책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을 읽고 덮고 다시 읽고 다시 덮으면서 즐겁습니다. 이야기꽃 하나 피고 지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즐겁습니다. 새 이야기꽃이 천천히 피어나고, 또다른 새 이야기꽃이 새삼스레 피고 지는 그림책을 아이하고 나눌 수 있어 즐겁습니다. (4344.10.13.나무.ㅎㄲㅅㄱ)


―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타카도노 호오코 글·그림,예상렬 옮김,한림출판사 펴냄,2003.1.30./9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yungwoo Chun : Versus - 천경우 작품집
천경우 지음 / 이안북스(IANNBOOKS)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사진이 되기, 예술이 되기, 이야기가 되기
 [찾아 읽는 사진책 48] 천경우, 《Photographs》(IANN,2011)


 마을 이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우리 네 식구는 충청북도 멧골자락 작은 집을 떠나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마을 작은 집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마땅한 빈집과 빈터를 찾는 동안 마을 이장님이 도와줍니다. 가을걷이를 하는 바쁜 때이지만 저녁나절 짬을 내어 도와주시고, 저녁밥과 잠자리까지 내어줍니다.

 새벽 네 시 십오 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짙게 드리운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시골고양이 여러 마리가 고샅길을 조용히 거닙니다. 따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으나 고양이가 이렇게 마을 한식구로 지낸다고 합니다. 마을에 쥐가 없답니다.

 한창 가을걷이를 하고, 온 길바닥에 나락을 넙니다. 드나드는 자동차란 군내버스 말고는 거의 없기에 찻길은 차 한 대 지나다닐 자리를 빼고는 온통 나락누리입니다. 막 거둔 노란 나락으로 예쁜 노란누리를 펼칩니다. 노란 빛깔 흙내음이 물씬 퍼집니다. 내가 선 동백마을이나 이웃 신기마을이나 봉서마을이나 봉동마을이나 한결같이 나락내음과 흙내음입니다. 부디 나락베기와 나락말리기가 다 끝날 때까지 빗방울이 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나락을 벤 자리는 벼포기만 몽땅하게 남습니다. 벤 벼포기는 네모낳게 말아 주는 기계가 척척 네모반듯한 덩이를 내놓기도 하고, 흙일꾼 할매와 할배가 집집마다 다른 모양새로 짚뭇을 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 가운데에는 이 짚뭇 모습이 재미있다 여겨 온나라 다 다른 짚뭇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다니기도 합니다. 한 마을 짚뭇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다 다르고,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햇살에 따라 느낌과 모양과 빛깔이 다릅니다. 온나라 짚뭇을 들여다보려 한다면 수만 수십만 짚뭇에다가 때와 철과 날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테지요.

 새벽 네 시 반, 마당에 있는 물꼭지로 낯을 씻고 머리를 감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을 휘 둘러봅니다. 달은 구름에 가리고, 마을 고샅 여기저기에 걸린 작은 등불이 내는 빛을 받은 바지랑대와 빨랫줄에 하얀 빛가루가 내려앉습니다. 달빛가루만큼은 아니지만 달빛가루와는 또 다르게 고즈넉하면서 눈부시며 어여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집 즐거이 마련할 수 있으면 우리 집에는 어떻게 빨랫줄을 잇고 바지랑대를 걸칠까 하고 꿈을 꿉니다. 충청북도 멧골자락은 아침저녁으로 퍽 서늘해 풀벌레소리 일찌감치 잠들었으나, 전라남도 시골자락은 아침저녁에도 풀벌레소리 가늘게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 반쯤 되는 숫자는 서울과 서울 둘레 커다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어 회사를 다니는 이가 퍽 많습니다. 해남이, 강진이, 보성이, 순천이, 화순이, 담양이, 나주가, 구례가, 곡성이, 남원이, …… 고향이지만, 이 고향을 등지고 커다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한 자리를 얻어 돈을 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고흥이나 해남이나 강진이나 화순이 고향이요 당신 어버이가 예부터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데 당신은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서 사진찍기를 하면서 꿈이나 뜻을 펼치는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를 빛내고 사진이라는 예술을 살찌우며 사진이라는 열매를 거두자면, 시골마을에서는 할 수 없고 큰도시에 깃들어야 한다고 여길 만할 테니까요.

 사진삶을 일구려는 이들은 으레 서울로 모이고,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모입니다. 으레 뉴욕이나 파리를 꿈꾸며, 때로는 베를린이나 도쿄를 찾습니다. 런던이나 산티아고로 발길을 옮기는 이도 있겠지요. 암스테르담이나 오슬로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사진빛을 보듬고자 고흥이나 통영이나 고성이나 문경이나 부여에서 살림집을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이는 쉬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걷고자 군산이나 김해나 밀양이나 상주나 홍천이나 횡성에서 뿌리를 내리며 마을 이웃을 사귀려는 이는 좀처럼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이고, 사람을 찍는 사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찍는 사진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찍히는 사진입니다. 내 삶과 네 삶이 어우러지는 사진입니다. 내 꿈과 네 꿈이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내 사랑과 네 사랑이 하나되는 사진이에요.

 천경우 님 사진책 《Photographs》(IANN,2011)를 들여다봅니다. 뿌옇게 보이는 사진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천경우 님이나 다른 예술비평가가 적바림한 글을 읽지 않고서는 이 사진을 읽어낼 수 없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천경우 님은 당신 사진책 이름을 ‘Photographs’라고 붙이는데, 사진을 보여주는 사진이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와 같은지, 사진은 사진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러한지, 사진으로는 사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사진책 이름을 이렇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람들과 함께하는가요. 사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는가요. 사진은 사람이 빚어서 사람이 즐기거나 누리는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살아가며 다 달리 사진을 누립니다. 《Photographs》 또한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에 따라 태어난 다 다른 사진책 가운데 하나예요. 더 돋보이지 않으며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눈부시지 않으며 좀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더 빛나지 않으며 썩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저 천경우 님 삶·넋·말만큼 길어올린 이야기가 담긴 사진책 하나입니다.

 내가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녔다면, 내가 나라밖에서 사진을 배웠다면, 내가 내 사진을 ‘사진 주류한테든 비주류한테든 알리려고 서울에서 사진잔치를 연 적이 있다’면, 내가 내 사진을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 팔았다면, 내가 내 사진을 나라밖으로 알리려고 힘썼다면, 나도 천경우 님처럼 사진을 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사진강의를 듣지 않았으며, 나라밖 사진잔치를 열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가 살아가는 작은 골목동네와 시골마을에서 사진잔치를 조그맣게 엽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나한테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나누어 줍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챙기거나 간직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진은 예술이 되어야 하나요. 사진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담아야 하는가요.

 나는 내 삶이 좋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내 삶에 따라 내 사진을 누립니다. 이제 곧 동이 트겠군요. (4344.10.13.나무.ㅎㄲㅅㄱ) 



― Photographs (천경우 사진,IANN 펴냄,2011.6.10./2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을걷이철 책읽기


 동백마을 이장님 댁에서 이틀째 묵는다. 새벽 세 시에 “비가 오네. 들깨 덮어야겠소.”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다. 이장님과 아주머님 두 분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바삐 나가신다. 나도 퍼뜩 일어나서 뒤따른다. 오는지 마는지 소리조차 없는 듯한 실비가 조금 내린다. 말리려고 널어 놓은 들깨를 셋이 함께 덮는다. 엊저녁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비가 오기는 온다.

 어제 도화면 지죽리까지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 동호덕마을 할배와 할매 두 분이 햇볕에 말린 나락을 푸대에 다시 담아 경운기에 싣는 모습을 본다. 세 시간 남짓 자전거를 몰았기에 다리가 많이 지쳤지만, 할배와 할매를 스친 자전거머리를 돌린다. 경운기 뒤쪽에 자전거를 세운다. “경운기에 실으시지요? 제가 거들게요.” 할배하고 둘이서 나락푸대를 경운기에 싣는다. 할배는 일흔은 훌쩍 넘으신 듯한데 기운을 퍽 잘 쓰신다. 할배가 이만큼 기운을 쓰지 못한다면 경운기에 나락푸대를 실을 수도 없을 테지만, 경운기에 실어 댁으로 돌아간 다음 갈무리하지도 못할 테지. 아니, 나락논을 돌보려면 기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 모두, 시골마을 어디나 가을걷이철이 되어 몹시 바쁘다. 나도 새 보금자리 찾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할 만하지만, 요 며칠은 집임자하고 계약을 한다며 집임자가 언제 오나 기다리기만 했다. 집임자는 끝내 시골집까지 안 오고 전화로만 이야기한다. 한 번 떠난 고향마을에는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을까.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흙으로 돌아가 없는 고향마을에는 어쩐지 다시 찾아올 만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도시에서 해야 하는 일이 몹시 바쁘며 빠듯하기 때문에 쉽사리 찾아들 수 없을까.

 도시에서 학원 강사 노릇을 하는 옆지기 동생은 강사 노릇뿐 아니라 다른 공부까지 하느라 언제나 밤이 깊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옆지기 동생만 이러하지는 않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배움자리를 찾아다니는 누구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설 테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겠지. 나는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가느라 새벽 아주 일찍 부산을 떨어 지옥철을 탔다가, 저녁에 파김치가 된 몸으로 오징어떡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참 많이 보았다. 이들 도시내기 회사원과 공무원한테 가을이 있으려나. 가을걷이가 있으려나. 가을걷이로 바쁜 흙일꾼 비지땀을 느낄 가슴이 있으려나.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난 다음 도시에서 튼튼히 뿌리를 내린 딸아들은 시골마을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마다 가을이면 부지깽이한테조차 일을 거들라 할 만큼 힘에 부치고 바쁜 줄 느낄 겨를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바쁜 틈에 마을 이장님네 아주머니는 손자한테 보내준다고 잘 익은 단감을 따서 갈무리하고 김치를 함께 싸서 서울로 보낸다. 나는 옆에서 감 갈무리를 조금 거들고는 감알 셋 얻는다. 다쳐서 보내지 않고 이곳에서 먹을 감알 가운데 셋을 골랐더니, 이잠님네 아주머니는 서울로 보내려던 예쁜 감알을 셋 골라 얹어 주신다. 옆지기와 두 아이 몫으로 두 알씩 생긴다.

 가을은 책을 읽는 철일 수 있을 테지만, 먼저 가을걷이를 하고 나서 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를 모두 마치고서야 비로소 종이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가 있기에 책이 있고, 가을걷이를 하는 사람들은 온몸에 나락내음과 풀내음과 흙내음이 짙게 배는 책읽기를 한다. (4344.10.14.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골에서 시골버스


 서울 같은 큰도시 버스는, 손님이 삯 치르고 나서 자리에 앉거나 손잡이를 잡기 앞서 부르릉 하고 떠난다. 바쁘니까. 시내버스 일꾼을 탓할 수 없다. 이렇게 바삐 움직여야 바쁜 일 하는 손님들은 늦지 않게 저마다 갈 곳에 닿을 수 있다. 시내버스 일꾼이 손님이 자리에 앉거나 손잡이를 잡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린 다음 부르릉 하고 움직인다면, 시내버스 탄 손님은 저마다 가야 할 곳까지 퍽 늦을밖에 없다. 전철에서도 이와 똑같다. 전철역마다 ‘준법 운행’을 하면, 아마 전철을 탄 사람들 아우성이 넘쳐나겠지. 모두들 너무 바쁜 나머지 1분을 기다릴 줄 모를 뿐 아니라 10초마저 기다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느 사람들 마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서울 같은 큰도시 버스 일꾼이 손님이 버스삯을 카드로 찍거나 맞돈으로 치르지 않았는데에도 곧바로 부르릉 하고 떠나는 일을 탓하면 안 된다. 여느 사람들은 이처럼 버스 일꾼이 서두르기를 바라니까. 여느 사람들은 버스 일꾼이 더 서둘러서 더 빨리 달리기를 바라니까.

 그래서, 나는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다.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버스나 전철 모두 타고 싶지 않다.

 나한테는 자가용이 없다. 자가용 없는 주제에 버스와 전철을 안 타고 무슨 수를 쓰나 궁금해 할는지 모른다만, 나는 자전거를 탄다. 두 다리로 걷는다.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된다. 어찌할 수 없을 때에는 버스나 자전거를 탄다. 여느 때에는 자전거와 두 다리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마을 읍내버스나 군내버스는 손님이 자리에 앉지 않았는데도 서둘러 부르릉 하고 떠나는 일이 없다. 언제나 기다린다. 재촉하지 않는다. 늘 기다린다. 다그치지 않는다. 알맞춤한 빠르기로 달리고, 알맞게 볼일을 보며, 즐거이 살아가면 된다.

 바삐 움직이고 싶으면 빨리 먹고 빨리 죽으면 된다. 나는 빨리 먹거나 빨리 죽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누리고 싶다. 내 나날을 즐기고 싶다. 내 목숨을 사랑하고 싶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 모두 따사로우면서 넉넉하게 어깨동무하고 싶다. (4344.10.13.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숲읽기 책읽기


 숲 사이로 자동차 빨리 달릴 길을 내야 하기에 멧기슭에 구멍을 뚫어요. 논밭 가로지르며 찻길이 놓이고, 사람 건널 일 없어도 냇물 사이로 다리를 놓아요. 이 좋은 숲길이지만, 고속버스나 시외버스로는 바람소리·물소리·새소리·풀벌레소리 들을 수 없어요. 버스를 탄 몸으로는 그저 고단해서 잠을 자요. 푸른 숲길이지만 버스 걸상에 고단하게 기대어 마냥 잠만 자요. 숲을 느끼며 숲그늘에서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리지 못해요. 숲속에 있는 몸이지만 숲을 바라보거나 느끼지 못하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길가에 심은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랐다지만, 버스를 탄 몸은 나무 하나하나를 차근차근 돌아보거나 쓰다듬지 못하며 휙휙 지나치기만 해야 해요. 숲을 바라보지 못하고, 책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4344.10.13.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