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살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글을 쓴다. 살아가는 사람하고 글을 쓴다.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내가 하는 일과 내가 꾸리는 살림을 글로 쓴다. 살아가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나날을 글로 쓴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나는 시골집 시골다움을 글로 담는다. 시골집에서 네 식구 짐을 꾸려 먼 마실을 나와 새 보금자리를 찾는 동안, 시골집 아닌 여관에서 묵는다. 여관에서 묵는 내내 내 귀로 들리는 소리는 자동차랑 텔레비전 울리는 소리와 에어컨이나 냉장고나 정수기가 전기를 먹으며 끄르릉 끓는 소리. 우리 식구 지난 한 해 살아온 시골집은 텅 비었을 테지만, 시골집 둘레로 갖은 풀벌레가 새벽부터 밤까지 고즈넉히 울겠지.

 귀를 기울이자. 내 마음을 열며 귀를 기울이자. 읍내 여관에서 묵을지라도 냉장고 꼬르륵 소리에 묻히는 저 먼 멧골자락 풀벌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을 열면 이 소리를 고즈넉히 들을 수 있으리라. 마음을 열지 못하면 길가 풀섶 작은 풀벌레 소리조차 못 들으리라.

 나는 내가 먹는 밥과 내가 입는 옷과 내가 자는 보금자리 기운을 하나하나 받아들이면서 글을 쓴다. 나는 내가 딛는 땅과 내가 마주하는 살붙이와 내가 사랑하는 하늘땅을 고스란히 맞아들이면서 글을 쓴다. 내 글은 내 사랑이어야 한다. 내 글은 내 삶이어야 한다. 내 글은 내 눈물과 웃음이어야 한다. (4344.9.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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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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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길을 열 때에 천천히 드러나는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62] 고영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


 서울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과 대전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둘레 터전이 다릅니다. 찍은 사진을 받아들이는 둘레 사람들 느낌이나 마음이 다르고, 찍은 사진을 곱게 가다듬어 어느 한 자리에 그러모아 조그맣게 잔치를 마련할 자리가 다릅니다. 서울과 인천은 또 다르고, 서울과 목포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전주는 또 다르며, 서울과 구례는 또 다릅니다. 서울과 거창은 얼마나 크게 다를까요. 서울과 해남은, 서울과 고성은, 서울과 양양은, 서울과 문경은, 서울과 제천은 또 얼마나 다를까요.

 문화밭이나 예술밭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서울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랑 ‘전라남도 고흥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거나 헤아릴까 궁금합니다. ‘울산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든지 ‘음성에서 사진을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무엇을 살피거나 돌아볼까 궁금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시골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서로 얼마나 어떻게 다르다고 느낄는지요.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과 멧골자락에서 지내며 사진을 한다는 사람은 저마다 어떻게 다르다고 어림할는지요.

 ‘사진을 한다’고 할 때에는 이이한테서 무엇을 느껴야 아름다울까 궁금합니다. 어느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는가를 먼저 살펴야 할까요. 사진학과 아닌 다른 학과를 다녔다면, 왜 사진으로 발을 옮겼는가를 알아야 할까요. 나라밖 어느 곳에서 사진을 배웠는지 알아야 하나요.

 ‘사진을 한다’는 사람이 고등학교만 마쳤다면, 중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만 마쳤다면,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않았다면, 이녁이 하는 사진을 여느 사람이나 예술쟁이나 문화쟁이는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바라볼는지요.

 고영일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한울,2011)을 들여다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기자로 일하며 제주 삶터와 사람을 사진으로 담았다고 하는 고영일 님입니다. 한국땅에서 바라볼 때에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를 사진으로 담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바라본다면 ‘한국 사진’이지 ‘제주 사진’이 아닙니다. 프랑스나 독일이나 네덜란드나 스위스나 룩셈부르크나 오스트리아에서 바라본다면, 고영일 님 사진은 ‘한국 사진’이면서 ‘동양 사진’입니다. 미국이나 멕시코나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바라본다면, ‘아시아 사진’입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네팔이나 티벳이나 버마나 필리핀이나 라오스나 베트남에서 바라볼 때에는 ‘지구별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 따라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저마다 달리 느끼거나 받아들입니다. 필리핀 뭇 섬 가운데 어느 한 곳에서 나고 자라며 사진을 찍은 누군가 빚은 사진책을 읽는다 하면, 이 사진책 하나는 ‘필리핀 뭇 섬 가운데 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보금자리를 곱게 보여준다 하면서, ‘작은 섬 하나를 바탕으로 필리핀이라는 터전’을 드러내는 사진이라고 여기겠지요. 마다가스카르 한켠을 찍은 사진을 읽을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라다크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살필 때에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을 생각할 때에도 이와 똑같아요.

 고영일 님은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한 마음은 이른바 ‘개발’ 때문에 사라져 가 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사진인치고 촬영지로서의 제주도를 한 번이나마 생각 안 해 본 적이 없으리라. 거기서 자연 풍경으로서의 제주도는 언제까지나 이어 줄 것이지만 ‘사라져 가는 제주도’는 바로 지금부터가 가장 이른 출발일 수밖에 없다(6쪽).”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은 고영일 님이 스스로 낸 책이 아니라, ‘예전에 적바림한 글’과 사진이 실립니다. 돌아가신 넋을 기리면서 여민 책이기에 고영일 님이 더 보여주고 싶었을 모습이나, 고영일 님이 더 들려주고 싶었을 이야기까지는 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두툼한 사진책 하나로 ‘제주섬 속살’을 어느 만큼 돌아볼 만합니다.

 그러면, 이 사진책을 손에 쥔 사람들은 어떤 ‘제주섬 속살’을 읽을 만할는지요. 참말 이 사진책을 읽을 때에 ‘제주섬 속살’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나는 내 사진을 나 스스로 들여다보거나 내 이웃이 들여다볼 때에 가만히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을 사진으로 찍었다 할 때에 ‘오직 인천이라는 터전만 이 사진에 담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을 발판으로 삼아 ‘한겨레가 저마다 제 삶터에서 어우러지거나 복닥이는 이야기’가 시나브로 깃든다고 느낍니다. 한겨레가 지내는 모습이 살며시 드러나는 ‘내 인천 사진’이면서, 한 해 두 해 무르익는 동안 ‘인천이나 한겨레 울타리를 넘어’ 지구별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취가 고즈넉히 감돈다고 느낍니다.

 잘 찍었다는 사진이건 잘 못 찍었다는 사진이건 늘 같습니다. 즐겁거나 예쁘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슬프다거나 어설프다 여길 만한 사진이건 언제나 같습니다. 사람들은 어여삐 어깨동무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이 해코지하거나 바보스레 다투기도 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따스한 사랑이 깃들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어줍잖게 겉멋내는 껍데기가 넘칩니다. 어느 사람 사진에는 포근한 꿈이 서리지만, 어느 사람 사진에는 그럴듯한 흉내내기나 그림그리기가 춤춥니다.

 어쩔 수 없어요. 착하며 예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나, 비싸고 까만 차를 몰며 으스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흙을 일구며 햇살을 받아들이는 일꾼이 있으나, 서울 종로 높은 건물에서 양복을 빼입고는 자판을 두들기는 일꾼이 있어요.

 골목길이나 고샅길 사진만 ‘옛이야기(추억)’가 되지 않습니다. ‘관제 홍보’ 사진 또한 옛이야기가 됩니다. 투박한 사람들 수수한 삶만 옛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똑같은 교복 차림에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빼곡하게 줄지어 서서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도록 찍는 경주 불국사 수학여행 모둠사진도 옛이야기가 됩니다.

 “동네에 들어서면 촬영자가 오히려 구경거리다. 몰려다니며 찍어 달랜다. 다 모아 놓고 막상 찍으려면 오히려 숨는 녀석이 있다. 장년이 되었을 이들 중에 몇이나 이 사진을 반길 형편이 되었을까(7쪽)?” 하는 고영일 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빨래터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제주섬에서 이렇게 수많은 아주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여 빨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두 번째로 봅니다. 맨 먼저 일본사람이 찍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첫무렵에 내놓은 ‘세계 문화 여행’ 이야기를 다룬 스물 몇 권짜리 ‘전집 사진책’ 가운데 한국 이야기를 다룬 권에서 ‘제주섬 사람들 여느 삶’을 보여주면서 빨래터 사진을 실었어요.

 1960년대 일본 사진책에서 ‘제주섬 빨래터 사진’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지며 벙 떴습니다. 일본사람은 1960년대에도 한국에 와서 이런 사진을 찍는데, 한국사람은 1960년대나 1970년대나 1980년대나 1990년대나 2000년대나 2010년대나 무슨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오늘 이곳’에서 사진으로 담은 적이 있는지 그야말로 알쏭달쏭합니다. 스스로 투박하거나 수수하게 살아가면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삶’을 비롯한 ‘투박하거나 수수한 내 이웃 삶’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는 길을 찾는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문화를 하건 예술을 하건, 사진길을 열려면 내 삶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먼저 깨닫는 길에 서야 바야흐로 내 사진길이 어느 문화나 예술 갈래에서 빛이 날 만한지를 알아차립니다. 무턱대고 문화길이나 예술길부터 걸을 수 없습니다. 사진뿐 아니라 그림이나 만화나 글이나 춤이나 노래나 연극이나 영화나 서로 매한가지입니다. 내 삶길부터 똑똑히 아로새기고 나서야 문화이든 예술이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못 깨닫고 내 삶을 말할 줄 모를 때에는 아무런 문화도 예술도 말하지 못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문화이든 예술이든 사랑할 수 업습니다. 내 삶을 꿈꾸면서 일굴 때에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꿈꾸면서 일굴 수 있어요.

 고영일 님은 제주에서 나고 자라 제주섬 사람과 터전과 자연을 찬찬히 사진으로 담으면서 시나브로 사진길을 엽니다. 천천히 사진길을 열며 삶길을 북돋우기에 뒷날에는 사진비평을 하는 눈길을 트면서 글 몇 자락 남길 수 있습니다. 삶이 먼저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삶이 첫걸음이요 사랑이 두걸음입니다. 삶에서 샘솟는 따스한 손길이요 사랑에서 비롯하는 넉넉한 사진길입니다. (4344.9.27.불.ㅎㄲㅅㄱ)


―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고영일 사진,한울 펴냄,2011.3.3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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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아파트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가는 네 시간 길에 거치는 광양시와 순천시에 아파트가 참 많다. 이곳에 이 아파트들은 언제부터 섰을까. 이곳은 지난날 어떠한 삶자리 삶자락 보금자리 사랑터였을까. 아파트가 서기 앞서, 제철소나 공장이 올라서기 앞서, 온갖 관공서나 회사나 가게가 들어서기 앞서, 이 멧자락과 들판과 냇가와 바닷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숲은 없고 아파트가 있다. 나무로 이루어진 숲은 사라지고 아파트로 이루어진 숲이 생긴다. 숲이 아닌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책을 손에 쥐고 어떤 이야기를 가슴으로 아로새길까. (4344.9.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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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방울 책읽기


 몸이 도무지 버티지 못하며 여관 방바닥에 등허리가 들러붙는다. 새 보금자리를 알아보려고 멧골집을 나선 지 나흘째, 짐을 풀어놓고 둘째 기저귀와 첫째 옷가지 들을 모두 빨래한 다음 저녁 늦게 겨우 잠든 무렵, 글조각 하나 적바림하려고 하지만, 눈이 뜨이지 않아 자리에 드러눕는다. 곯아떨어진다. 내 나이가 몇 살 더 젊다면 곯아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나한테 살림돈이 넉넉하다면 이렇게 몸이 퍼지도록 돌아다니지 않고도 좋은 보금자리를 쉬 얻을 수 있을까. (4344.9.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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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못이 된 솔로몬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126
윌리엄 스타이그 / 시공주니어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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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따사로운 보금자리를 찾습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81] 윌리엄 스타이그, 《녹슨 못이 된 솔로몬》(시공주니어,2000)



 네 식구가 짐을 꾸려 시골집을 떠납니다. 네 식구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길을 나섭니다. 아직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지만, 새 터에 깃들면서 새 보금자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먼저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꾸민 다음 식구들이 옮겨야 한결 낫다고 하지만, 아버지 혼자 돌아다니면서 새 보금자리를 찾기까지 어머니와 아이들만 옛집에 남아 기다리도록 하기보다는 퍽 고되더라도 네 식구가 함께 움직이고 살피며 얼크러지는 삶이 좋다고 느낍니다.

 옆지기를 만나고 첫째를 낳으며 둘째를 낳기까지, 네 식구가 떨어져 지낸 적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으레 온 식구가 함께 움직입니다. 한 집에서 살고 한 방에서 함께 자며 한 밥상에서 밥을 먹습니다. 다른 집안 다른 식구는 어떠한지 모릅니다. 아마 다른 집안 다른 식구는 으레 아버지 쪽이 바깥으로 나가 돈을 번다고 하겠지요. 다른 집안 다른 식구는 아이들이 아버지 얼굴 보기 힘들 뿐더러, 아버지가 집에서 온갖 일과 살림을 도맡아 하지 않겠지요.

 시골에서 살다가 다른 시골로 옮기는 만큼 귀농이나 귀촌은 아닙니다. 더 깊으면서 조용한 시골자락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분들은 도시에서 더 낫다고 여길 만한 보금자리를 찾아 옮긴다면,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더욱 낫다고 여길 뿐 아니라, 땅과 집을 조그맣게나마 마련해서 오래도록 뿌리내릴 만한 자리를 찾아 옮긴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식구는 한동안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산 적이 있는데, 도시에서 살 때에는 나무를 심기 힘듭니다. 나무를 심어 열 해나 스무 해를 고이 건사하며 사랑하기 벅찹니다. 고운 흙이 애틋한 빈터가 없으니까요. 빌라나 아파트 같은 데에 살면서 나무를 심을 수 없어요. 꽃그릇을 마련해 꽃송이를 본다든지, 헌 상자나 스티로폼 상자에 푸성귀를 기를 수는 있으나, 볕이 잘 드는 툇마루가 딸린 집을 얻기는 퍽 힘들어요.

 충청도 시골에서 살다가 전라도 시골로 옮기려고 보금자리를 찾는 길에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러 나무를 골고루 심고 싶습니다. 씨앗으로 나무를 키우고 싶고, 어린나무를 얻어 예쁘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자그마한 숲과 들판과 텃밭을 아기자기하게 일구고 싶습니다. 햇볕과 바람과 물과 바람을 살뜰히 아끼는 터를 돌보면서 내 마음을 함께 보살피고 싶습니다. 아이와 어버이가 서로 아끼면서 얼싸안을 푸근한 둥지를 가꾸고 싶습니다.


.. 솔로몬은 평범한 토끼였습니다. 다른 토끼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바라기만 하면 언제든지 녹슨 못으로 변신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다는 거예요. 솔로몬은 자기한테 그런 재주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  (5쪽)


 낮에는 구름과 파란 빛깔 하늘을 누리고 싶습니다. 밤에는 별이랑 달이랑 까만 빛깔 하늘을 누리고 싶습니다. 바람이 흐르는 낮하늘을 좋아하고 싶습니다. 미리내가 노래하는 밤하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자동차 오가는 소리는 듣기 싫고, 풀벌레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웃집에서 낫질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와 함께 호미질을 하고 싶습니다.

 들꽃을 예쁘게 바라보고, 들풀을 따사로이 쓰다듬고 싶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내 목숨은 흙에서 태어난 다른 목숨을 받아들여 살아가는구나 하고 언제나 느끼는 작은 집에서 살림을 꾸리며 잠을 자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마당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빨래널기를 하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뜻을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보람을 맛보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사랑을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좋다 하는 대학교를 가야 하기에 중·고등학생 나이에 좁은 교실 좁은 책걸상에 갇혀 형광등 불빛에 눈이 나빠지는 아이가 되도록 내몰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좋다 하는 대학교에 굳이 안 가도 될 뿐 아니라, 입시지옥일 뿐인 중·고등학교조차 가야 하지 않습니다. 예비 수험생이 되도록 갖은 지식조각을 외우도록 이끄는 초등학교마저 아이한테는 부질없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를 사랑하는 아이요 어버이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제 하루를 고맙게 돌아보는 아이요 어버이로 함께 살고 싶습니다. 다가올 앞날을 기쁘게 꿈꾸는 아이요 어버이로 지내고 싶습니다.

 살림돈이 조금 남는다면 책 몇 권 장만합니다. 살림돈이 벅차다면 팍팍한 가계부를 내려놓고 아이랑 자전거마실을 하거나 옆지기랑 멧길마실을 하면 됩니다. 따사롭고 시원스러운 가을 햇살 누리는 마당에 돗자리를 펼치고는 네 식구가 드러누우면 됩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아버지는 책을 읽으며 첫째 아이는 뛰노는 한편 둘째 아이는 뒤집기를 하려고 용을 쓰면 됩니다. 좋은 하루이고 좋은 나날이며 좋은 보금자리로구나 하고 느낄 시골집이면 넉넉합니다.


..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종잡을 수가 없어. 여기 있나 싶으면 저기 있고, 그러다간 없어지고 …….”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솔로몬은 자기가 사람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  (11쪽)


 윌리엄 스타이그 님이 빚은 그림책 《녹슨 못이 된 솔로몬》(시공주니어,2000)을 읽습니다. 《당나귀 실베스타와 요술 조약돌》이랑 조금 비슷한 얼거리로구나 하고 느끼다가는, 얼거리는 비슷하달지라도 서로 다른 이야기요, 사뭇 다른 삶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술 조약돌은 누군가한테서 사랑을 받아야 하지만, 솔로몬은 스스로를 사랑합니다. 요술 조약돌은 외로이 기다려야 하지만, 솔로몬은 씩씩하게 견디면서 스스로를 북돋웁니다.

 솔로몬은 낡고 슨 작은 못으로 몸을 바꿀 줄 압니다. 재미나게 놀고 싶거나 아슬아슬한 일이 닥쳤을 때에 낡고 슨 작은 못으로 몸을 바꿉니다. 둘레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앞에서 새로운 모습을 선보입니다. 모두들 솔로몬한테 어떠한 솜씨가 있고 어떠한 빛이 있으며 어떠한 꿈과 사랑이 있는가를 잘 모릅니다. 솔로몬은 제 솜씨와 꿈과 사랑을 말없이 숨기며 혼자 즐깁니다. 둘레 동무나 살붙이가 찬찬히 헤아리거나 살피지 못한다지만, 솔로몬이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걸지는 않습니다.

 솔로몬네 동무나 살붙이가 솔로몬을 조금 더 찬찬히 돌아보거나 살폈다면, 솔로몬이 무엇을 잘 할 줄 알거나 무엇을 좋아하거나 어떤 길을 걷고 싶은가를 옳게 깨달으며 따뜻하게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솔로몬네 동무나 살붙이는 솔로몬이 마음을 열며 다가오지 못한다면 깊고 넓게 얼싸안기 힘듭니다. 마음은 한쪽만 열 수 없으니까요. 서로 열 마음이고, 서로 하나될 마음입니다. 서로 포근하게 사랑할 사람이요, 서로 넉넉하게 아낄 목숨입니다.

 그림책 《녹슨 못이 된 솔로몬》을 찬찬히 넘기면서, 솔로몬이 살아가는 터전을 떠올립니다. 솔로몬이 낡고 슨 못으로 몸을 바꾸었을 때에 솔로몬을 사로잡아 ‘저녁거리로 삶아 먹으려 하는’ 녀석들 터전 또한 곰곰이 되새깁니다. 모두들 ‘도시’ 아닌 ‘숲속’에서 살아갑니다. 여린 목숨인 솔로몬도, 솔로몬 같은 여린 목숨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녀석들도 숲속에서 ‘고운 자연’을 한껏 받아들이면서 살아갑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아침햇살을 맞아들입니다. 나무와 풀과 꽃하고 이웃하면서 살아갑니다.

 범도 사자도 자연에서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토끼도 노루도 자연에서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개구리도 뱀도 자연에서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사마귀도 여치도 자연에서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잠자리도 모기도 자연에서 살아가는 목숨이에요.

 그러나, 우리들 사람만큼은 자연을 등지거나 자연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자연이 사랑스러운 곳에는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남곤 합니다. 자연이 따사로운 곳에서 태어나 자연을 마음껏 들이마시며 자라는 아이가 나날이 부쩍 줄어듭니다.


.. 하루 해가 저물고, 또 하루 해가 산을 넘어갔습니다. 솔로몬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백만, 천만, 억 ……. 가끔은 세상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어요. 비록 나무 벽에 박힌 몸이지만, 작으나마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게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죠 ..  (23쪽)


 숲속 작은 집에서 살더라도 보름달과 반달과 초승달을 못 느낄 만큼 무엇인가에 바쁠 수 있습니다. 복닥거리는 커다란 도시에서 지내더라도 길가 작은 풀과 꽃을 살가이 느낄 만큼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뜨는 해하고 어제 하루 뜬 해는 같지 않습니다. 날마다 다른 해이면서 날마다 다르게 아름답습니다.

 날마다 자라는 아이는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어여쁩니다. 날마다 새 삶을 맞아들이면서 새 나날을 누리는 아이는 날마다 빛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따사로운 보금자리에서 따사로운 사랑이 태어납니다. 즐거운 보금자리에서 즐거운 사랑이 샘솟습니다. 슬픈 보금자리에서 슬픈 생채기가 덧납니다. 고단한 보금자리에서 고단한 눈물이 터져나옵니다. 좋은 꿈을 많은 돈보다 아낄 수 있기를 빌고, 좋은 넋을 높은 이름보다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9.26.달.ㅎㄲㅅㄱ)


― 녹슨 못이 된 솔로몬 (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박향주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0.7.2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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