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많은 빨래를


 아침부터 밤까지 쏟아진 네 식구 빨래를 밤에 한꺼번에 하자니, 이 많은 빨래를 하지 않고서는 이듬날을 맞이할 수 없겠구나 하고 느낀다. 거창읍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징징거리는 첫째 아이부터 씻긴다. 첫째 아이는 낮잠을 얼렁뚱땅 건너뛰면서 놀기 바쁜 터라, 새 보금자리 알아보러 다니는 길에도 몹시 고단하지만 좀처럼 눈을 붙이려 하지 않는다. 밤 열한 시가 가깝지만 자지도 놀지도 않는 몸짓으로 울먹울먹한다. 얼른 옷을 벗기고 씻긴다. 바닥에 빨래할 옷가지를 가득 깐다. 그러고 나서 둘째 아이를 씻긴다. 아주 얌전한 둘째 또한 몹시 고될 텐데, 넉 달 갓난쟁이는 칭얼거리는 울음 하나 없이 참 잘 견디어 준다. 둘째를 볼 때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러나, 둘째가 더없이 얌전하대서 그지없이 말괄량이 같은 첫째가 미울 수 없다. 첫째는 제 느낌과 생각을 스스럼없이 털어내며 예쁘게 살고, 둘째는 어버이 힘겨운 나날에 손이 덜 가도록 하면서 예쁘게 산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 몸을 씻으면서 빨래를 한다. 어제보다는 기저귀 빨래가 적게 나왔으나, 오늘은 겉싸개에 똥이 흘러서 두꺼운 겉싸개를 하나 빨아야 하는 만큼 기저귀 다섯 장을 빨 때만큼 힘이 든다. 그렇지만, 빨래를 하며 생각한다.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예쁜가. 이렇게 똥물이 흘러 빨아야 하는 겉싸개는, 똥물이 흐르지 않았어도 빨아야 한다. 아이는 똥을 푸지게 누어 똥물이 겉싸개로 흐르도록 하면서 이 옷가지를 빨래하는 일을 잊지 않도록 깨우친다.

 다만, 빨래를 한 이튿날 다시금 똥물을 흘리는 때가 적잖다. 둘째뿐 아니라 첫째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빨래할 때가 닥쳤기에 이렇게 똥물을 줄줄 흘려 주시지만, 힘껏 정갈히 빨래를 했는데 곧바로 다시 똥물을 줄줄 흘리기도 한다.

 아이고 힘들구나,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이윽고, 나도 너희만 했을 때에 내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솔솔 피어오른다.

 어쨌든, 열흘째 바깥잠을 자며 돌아다니는 깊은 밤, 자정이 넘고 새벽 한 시가 다 될 무렵 드디어 이 많은 빨래를 해낸다. 빨래를 다 해내고 방으로 돌아올 때에 둘째가 오줌기저귀 한 장을 내놓는다. 새로 나온 오줌기저귀는 옆지기가 빨래해 준다. 아주아주 고맙다. (4344.10.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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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내버스


 고흥군 고흥읍에서 군내버스를 타고 도화면 신호리로 갑니다. 고흥군에서 이 면과 저 리를 잇는 버스이기 때문에 군대버스입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고흥으로 오기 앞서 지내던 충청북도에서는 음성군 음성읍과 우리 살림집 깃든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를 잇는 버스를 탔습니다. 리에서 읍으로 가는 버스는 읍내버스였습니다.

 충청북도 멧골자락으로 들어오기 앞서 지내던 인천에서는 시내버스를 탑니다. 인천에서 서울로 헌책방마실을 다닐 때에는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시내버스를 탑니다. 옆지기 어버이가 계신 경기도 고양시로 나들이를 갈 적에는 경기도 시내버스를 탑니다.

 인천이나 서울이나 고양 또는 일산 같은 곳에서는 시내버스요, 이들 시를 벗어나는 데로 오가는 버스는 시외버스입니다. 음성에서 버스를 타고 서울이나 인천이나 청주로 갈 적에도 시외버스라 했습니다. 그러면 고흥군에서 순천이나 여수나 광주나 서울로 갈 때에는? 이때에도 시외버스라 일컬어야 할는지요, 군외버스라 일컬어야 할는지요.

 돌이키면, 음성에서 서울로 갈 적에는 읍외버스라 해야 옳구나 싶습니다. 군외버스라 할 수도 있겠지요. 음성읍에서 금왕읍이나 삼성면으로 갈 때에는 군내버스라 하거나 읍외버스라 하고요.

 읍내버스나 군내버스를 한여름에 탈 적에 버스 일꾼은 에어컨을 곧잘 틀기도 하지만, 버스에 탄 사람이 적으면 그냥 창문을 열곤 합니다. 봄가을에는 읍내버스나 군내버스는 에어컨을 틀지 않습니다. 마주 달리는 자동차도, 뒤에서 앞지르려는 자동차도, 버스가 앞지를 만한 자동차도, 시골길을 달리는 동안 거의 마주하지 않는 읍내버스나 군내버스는 시골버스입니다. 시골버스는 이 마을과 저 마을을 가득 보듬는 푸른 숲이나 들판을 가로지릅니다. 달리는 버스에서 풀벌레소리나 바람소리를 듣기란 수월하지 않으나,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쏴아 하고 쐴 때에는 이 바깥바람에 함께 묻어 들어오는 숱한 내음과 소리와 무늬와 빛깔을 골고루 즐깁니다. (4344.9.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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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4] 김씨가게

 고흥읍에서 과역면 쪽으로 가는 길에 퍽 커다란 가게 옆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얼핏 고개를 돌릴 때에 보는데, 가게이름은 ‘킴스마트’입니다. 문득, 서울인가 어디에서 ‘킴스클럽’이라는 퍽 커다란 할인매장 이름을 본 듯합니다. 전라남도 고흥읍에 있는 ‘킴스마트’는 이곳 이름에서 가지를 쳤을까요. 꽤 큼지막하게 짓는 할인매장은 이마트나 롯데마트처럼 ‘마트’라는 영어를 붙입니다. 우리 말 ‘가게’를 붙이지 않습니다. 지난날처럼 한자말 ‘상회(商會)’를 붙이지도 않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킴스클럽’이건 ‘킴스마트’이건 ‘김씨가게’입니다. “김씨네 가게”예요. 우리가 한겨레붙이가 아닌 서양사람이라면 서양말로 ‘킴스마트’라는 가게이름을 붙이는 일은 얄궂거나 슬프지 않아요. 한겨레붙이이면서 한겨레붙이답지 못하게 이름을 붙이기에 얄궂거나 슬픕니다. 김씨라서 ‘김씨가게’이고, 장씨라서 ‘장씨가게’라 하면 될 텐데요. 나들이하듯 즐거이 찾아가기에 ‘나들가게’요, 조그맣기에 ‘구멍가게’나 ‘작은가게’입니다. 골목에 깃들어 ‘골목가게’이고, 마을에 있어 ‘마을가게’이며, 섬에 있을 때에 ‘섬가게’입니다. 작은 시골마을 도화면 닭집에 들러 튀김닭 한 마리를 사서 식구들이 맛나게 먹습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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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S. Curtis (Hardcover) - The Women
Christopher Cardozo / Bulfinch Pr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5]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the Women》(Buffinch,2005)



 마흔 살 일소와 여든 살 흙일꾼 할아버지가 나오는 영화 〈워낭소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퍽 많은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극장을 찾아 도시로 마실을 가기도 힘드니까요. 아마 시골마을 여느 흙일꾼도 이 영화를 볼 일은 없겠지요. 〈워낭소리〉를 찍은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시골마을 흙일꾼한테 차근차근 보여줄 마음이었을까요, 도시사람한테 널리 내보일 마음이었을까요.

 새 보금자리를 찾아 온 식구를 이끌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찾아와서 여관에 묵는 동안 여관 텔레비전으로 〈워낭소리〉를 봅니다. 조용한 이야기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며 담은 영화 〈워낭소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늙은 소와 사람이 있고, 이 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이처럼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가 애틋합니다. 다만, 이제껏 시골자락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담으려 애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은 시골자락 일소 이야기를 어린이시로 썼으나, 이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곰삭이며 연속극이나 소설이나 뮤지컬로 일구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자락에서 소는 한식구입니다. 보배로운 한식구입니다. 시골집 소마다 기나긴 나날에 걸친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듭니다. 〈워낭소리〉는 많디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한겨레 문화·예술인은 한겨레 일소를 들여다볼 줄 모르면서 갈비를 뜯거나 등심을 먹거나 꼬리곰탕을 즐기는데, 이제 겨우 일소 이야기 하나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염소 이야기라든지 돼지 이야기라든지 닭 이야기라든지 고양이 이야기라든지 개 이야기라든지 살뜰히 다룬 적은 아직 없습니다. 더욱이, 〈워낭소리〉가 되든 〈트랜스포머〉나 〈아바타〉가 되든, 이들 영화는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도시로 보냅니다. 사람도 도시로 보내고 물건도 도시로 보냅니다. 유기농 곡식이든 화학농 곡식이든 온통 도시로 보냅니다. 물고기도 도시로 보내고 뭍고기도 도시로 보냅니다. 온통 도시에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립니다. 책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읽히다가 도시에서 버려집니다. 사진도 도시에서 찍고 도시에서 즐기며 도시에서 이야기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사진찍기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을 뿐입니다.

 도시는 돈이 샘솟는다는 곳이고, 돈이 샘솟기 때문에 돈을 마음껏 쓰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시골 논밭을 사진으로 담아 시골 논밭에서 사진잔치를 여는 일이란 없습니다. 파란 빛깔 바다를 사진으로 담아도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즐기도록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삶이란, 사람이란, 사진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the Women》(Buffinch,2005)을 펼칩니다. 2011년 8월 한국땅에서 드디어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낱장으로 몇 장씩 나누어 책이나 신문에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책 하나로 묶은 적은 처음입니다. 어떤 분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함부로 100장 가까이 넣으며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너무 모르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고, 아는 사람은 제대로 헤아리지 않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입니다.

 《the Women》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빚은 사진 가운데 ‘여성’ 이야기를 간추립니다. 어쩌면, ‘남성’이라든지 ‘어린이’라든지 ‘할머니’라든지 ‘자연’이라는 테두리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 삶자락을 찾아 북아메리카땅을 골골샅샅 누비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니, 토박이 겨레에 따라 사진책을 나누어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무슨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은 어느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틀림없이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겼습니다. 다른 여느 미국사람은 옛 토박이를 눈여겨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옛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이거나 모질게 땅을 빼앗습니다.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삶이고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눈길이며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넋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문화인류학’이라는 테두리로 다가설 만합니다.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테두리로 들여다볼 만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 어느 한국 사진쟁이가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면서 ‘한겨레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긴다면, 이러한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 또한 문화인류학이나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과 글을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사진은,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며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내 삶을 알뜰히 일구어야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 누구하고 사진을 나누려 하는지를 또렷이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이들 스스로 당신 삶을 알차게 돌보아야 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다운 빛줄기가 살가이 깃듭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때에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지만,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매기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삶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가슴 촉촉 이야기’입니다. 서로서로 삶을 보살피면서 일구는 나날을 누릴 때에 바야흐로 고운 꿈이 열매를 맺습니다. 잘 일구는 삶에서 잘 찍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사랑스레 돌보는 삶에서 사랑스레 담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바보스레 팽개치는 삶에서 바보스레 팽개치는 사진이 불거집니다. 겉치레로 꾸미는 삶에서 겉치레로 꾸미는 사진이 맴돕니다.

 《the Women》은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스러운 삶으로 이어가도록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사진쟁이) 삶 또한 사랑스레 돌볼 때에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온누리 무지개빛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기록사진은 사진이 아닌 ‘기록’이고, 문화인류학은 삶하고 동떨어진 ‘학문’이며,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는 삶과 문화와 역사하고 등지는 ‘지식’입니다. 사진은 기록이나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그예 사진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찍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면서 나누는 사진이며, 살아내면서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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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새 5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
 [만화책 즐겨읽기 71] 데즈카 오사무, 《불새 5》



 한 사람으로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난 이야기라든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이야기라든지, 살아가는 뜻이라든지, 따로 학교나 교과서나 책에서 들은 적은 없습니다. 학교는 한 사람 삶이나 넋이나 말을 가르치는 곳이 못 됩니다. 교과서는 한 사람 꿈이나 얼이나 마음을 가르치는 스승이 못 됩니다. 책은 살아숨쉬는 슬기를 그러모아 뒷사람한테 물려주는 사랑이 못 되곤 합니다.

 한 사람으로서 태어난 까닭은 회사원이 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까닭은 ‘나라 안팎에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한삶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까닭은 부동산이 될 만하면서 퍽 넓은 아파트를 장만하거나 꽤 값나가며 멋들어진 자가용을 마련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연봉이나 명함이나 학벌이나 몸매나 재산이 한 사람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명예나 훈장이나 권력이나 지위가 한 사람을 밝힐 수 없습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법관 같은 이름은 고이고이 남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물려주거나 물려받으면서 남는 이름이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나눈 사랑’으로 살아낸 사람들 이름과 넋과 꿈과 말과 삶입니다.


- “난 벌써 사람을 몇이나 죽였어. 더는 겁날 게 없다구. 나도 갓 태어났을 때는 사지육신이 멀쩡했어. 그런데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날 이런 몸뚱이가 되고 만 거야 … 난 멀쩡한 두 팔을 가진 녀석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25, 27쪽)
-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난 이제 죽을 때까지 내 손으로 훌륭한 작품을 조각할 수 없게 됐어!” “하지만 왼손이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왼손? 그게 어쨌다는 거죠? 혼이 담긴 조각을 만들려면 왼손만으로는 어림없어요!” (31쪽)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는 사람들치고 내가 먹는 밥을 일군 흙일꾼 이름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꽤 자주 고기를 먹습니다. 물고기이든 뭍고기이든 참 쉽고 값싸게 장만해서 먹습니다. 고기를 꽤 자주 먹는 사람들이나, 이 고기를 누가 거두고 누가 마련하며 누가 이루는가를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옷을 걸칩니다. 언제나 옷을 입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거나 베틀을 밟아 천을 얻는 사람은 없다 할 만하고, 돈을 주고 옷을 사입더라도 이 옷을 누가 마름하여 만드는가를 아는 이는 없다 할 만합니다.

 사람들은 집이 있어 잠을 자거나 쉽니다. 집 없이 떠돌거나 맴돌며 한뎃잠을 자면 몸이 무너지거나 망가집니다. 푸른 들과 멧자락이 아닌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에서 한뎃잠을 잘 때에는 누구나 몸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멘트로 집을 짓고 아스팔트로 길을 냅니다. 흙으로 집을 짓지 않고 흙으로 길을 닦지 않습니다. 모든 목숨이 흙에서 비롯하지만, 사람들은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괴롭히면서 도시 물질문명을 이룹니다.


- “그럼 넌 대체 누구야?” “난, 언젠가 당신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에요.” “목숨을?” “헛소리! 내가 널 어디에서 만났지? 난 전혀 생각이 안 나.” “당신은 살며시 날 들어올려 목숨을 구해 줬어요. 당신은 살인자에 난폭하긴 하지만 날 죽이지 않았죠. 사실은 당신이 마음씨 착한 사람이란 걸 알고. 난 기뻤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시집갔던 거예요.” (70쪽)


 우리 집 두 아이는 집에서 제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네 살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었으니 첫째는 마냥 집에서 놀고, 갓난쟁이 둘째 또한 집에서 두 어버이가 돌보는 손길을 맞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큽니다. 이제 넉 달째 살아낸 둘째는 어제 비로소 뒤집기를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집에서 보살피며 살아가기에 둘째가 뒤집기를 할 때에 말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거듭거듭 뒤집기를 하면서 입을 쩍쩍 벌리며 좋아라 하는 모습을 아낌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흙을 일구며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기에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아이들하고 부대낍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하고 살을 부비고, 하루 내내 아이들을 안고 어르며 놉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기며,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우리 살림이 가난하니까 아이들 보살피는 몫을 집에서 모두 치른다 할 테지만, 두 어버이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일을 다른 누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학교나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길 수 없습니다. 한글교재나 영어교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나 텔레비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어버이 두 손에 맡깁니다. 어버이 가슴에 맡깁니다. 어버이 마음밭에 맡깁니다.

 옆지기는 옆지기 어머님이 마련한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 또한 내 어머니가 마련한 밥을 먹고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 서울시는 무상급식을 놓고 주민투표까지 벌이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낮밥은 ‘무상급식으로 하느냐 마느냐’로 따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느끼며 밥을 맞아들이도록 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합니다. 아이들은 영양소 아닌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감도는 좋은 밥을 먹어야지, 이런저런 숫자로 어림한 영양소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과 어른 사랑을 고루 받아먹으면서 마음씨를 착하게 북돋아야지, 시험성적 숫자에 목을 매달면서 어린 넋이나 푸른 얼을 망가뜨리면 안 돼요.


- “죽은 자를 위해 경문이라도 읽어 주시지 그래요?” “어차피 돈도 안 될 텐데, 뭐.” “그,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말도 안 돼! 그럼 스님이며 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라에서 세운 절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훌륭한 대불들이 세워지지만, 그건 다 정치를 위해서야. 나랏님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도 잠자코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불교를 널리 전파해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거지. 왜 그러지? 실망했느냐?” (117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불새》(학산문화사,2002)를 5권째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라고 들려주는 《불새》 5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똑같은데, 이 똑같은 삶과 죽음을 옳게 바라보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요. 삶과 죽음은 하나인데, 이 하나인 삶과 죽음을 참다이 느끼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요.

 삶은 아름답고,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삶은 사랑스럽고, 죽음 또한 사랑스럽습니다. 삶은 기쁘며, 죽음 또한 기쁩니다. 삶은 목숨이요, 죽음 또한 목숨입니다.


- “고, 고맙습니다. 스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나보고 고맙대, 나보고. 나 같은 인간을 보고! 우하하하 우하하하 우히히히 으하하하.” (123쪽)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산다 이야기하지만, 사람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먹이를 거두도록 흙을 일구거나 푸나무를 아껴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회사나 관공서나 가게에서 일을 하며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숨을 잇기’는 하지만, 목숨을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돌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 수 있으나 삶을 일구거나 보살피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돈만 따집니다. 밥그릇 나이만 셉니다. 눈으로 바라보는 몸매에 얽매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사랑과 꿈과 빛과 흙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푸나무와 푸른바다와 파란하늘을 깨닫지 못합니다. 맑은 햇살이나 눈부신 달빛을 보듬지 못합니다.

 삶을 삶다이 마주하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죽음다이 껴안으면서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삶으로 이어집니다. 한결같이 얼크러지는 삶과 죽음은 내 왼손과 내 오른손이듯, 아니 내 한몸으로 녹아드는 내 한마음이듯, 하루 열두 시간은 낮이요 하루 열두 시간은 밤입니다. 동이 트면서 모든 목숨이 눈을 뜨고, 어스름이 깔리면서 모든 목숨이 새근새근 잠듭니다. (4344.9.29.나무.ㅎㄲㅅㄱ)


― 불새 5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3.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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