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74] 김씨가게

 고흥읍에서 과역면 쪽으로 가는 길에 퍽 커다란 가게 옆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얼핏 고개를 돌릴 때에 보는데, 가게이름은 ‘킴스마트’입니다. 문득, 서울인가 어디에서 ‘킴스클럽’이라는 퍽 커다란 할인매장 이름을 본 듯합니다. 전라남도 고흥읍에 있는 ‘킴스마트’는 이곳 이름에서 가지를 쳤을까요. 꽤 큼지막하게 짓는 할인매장은 이마트나 롯데마트처럼 ‘마트’라는 영어를 붙입니다. 우리 말 ‘가게’를 붙이지 않습니다. 지난날처럼 한자말 ‘상회(商會)’를 붙이지도 않습니다. 곰곰이 헤아립니다. ‘킴스클럽’이건 ‘킴스마트’이건 ‘김씨가게’입니다. “김씨네 가게”예요. 우리가 한겨레붙이가 아닌 서양사람이라면 서양말로 ‘킴스마트’라는 가게이름을 붙이는 일은 얄궂거나 슬프지 않아요. 한겨레붙이이면서 한겨레붙이답지 못하게 이름을 붙이기에 얄궂거나 슬픕니다. 김씨라서 ‘김씨가게’이고, 장씨라서 ‘장씨가게’라 하면 될 텐데요. 나들이하듯 즐거이 찾아가기에 ‘나들가게’요, 조그맣기에 ‘구멍가게’나 ‘작은가게’입니다. 골목에 깃들어 ‘골목가게’이고, 마을에 있어 ‘마을가게’이며, 섬에 있을 때에 ‘섬가게’입니다. 작은 시골마을 도화면 닭집에 들러 튀김닭 한 마리를 사서 식구들이 맛나게 먹습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Edward S. Curtis (Hardcover) - The Women
Christopher Cardozo / Bulfinch Pr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5]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the Women》(Buffinch,2005)



 마흔 살 일소와 여든 살 흙일꾼 할아버지가 나오는 영화 〈워낭소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퍽 많은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셨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는 극장이 없고, 극장을 찾아 도시로 마실을 가기도 힘드니까요. 아마 시골마을 여느 흙일꾼도 이 영화를 볼 일은 없겠지요. 〈워낭소리〉를 찍은 영화감독은 이 영화를 시골마을 흙일꾼한테 차근차근 보여줄 마음이었을까요, 도시사람한테 널리 내보일 마음이었을까요.

 새 보금자리를 찾아 온 식구를 이끌고 전라남도 고흥으로 찾아와서 여관에 묵는 동안 여관 텔레비전으로 〈워낭소리〉를 봅니다. 조용한 이야기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며 담은 영화 〈워낭소리〉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늙은 소와 사람이 있고, 이 나라 시골 어디에서나 이처럼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가 애틋합니다. 다만, 이제껏 시골자락 늙은 소와 사람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영화로든 연극으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담으려 애쓴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과 권정생 님은 시골자락 일소 이야기를 어린이시로 썼으나, 이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곰삭이며 연속극이나 소설이나 뮤지컬로 일구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자락에서 소는 한식구입니다. 보배로운 한식구입니다. 시골집 소마다 기나긴 나날에 걸친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듭니다. 〈워낭소리〉는 많디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한겨레 문화·예술인은 한겨레 일소를 들여다볼 줄 모르면서 갈비를 뜯거나 등심을 먹거나 꼬리곰탕을 즐기는데, 이제 겨우 일소 이야기 하나가 영화로 태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염소 이야기라든지 돼지 이야기라든지 닭 이야기라든지 고양이 이야기라든지 개 이야기라든지 살뜰히 다룬 적은 아직 없습니다. 더욱이, 〈워낭소리〉가 되든 〈트랜스포머〉나 〈아바타〉가 되든, 이들 영화는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만 봅니다.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도시로 보냅니다. 사람도 도시로 보내고 물건도 도시로 보냅니다. 유기농 곡식이든 화학농 곡식이든 온통 도시로 보냅니다. 물고기도 도시로 보내고 뭍고기도 도시로 보냅니다. 온통 도시에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립니다. 책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읽히다가 도시에서 버려집니다. 사진도 도시에서 찍고 도시에서 즐기며 도시에서 이야기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사진찍기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이 더러 있을 뿐입니다.

 도시는 돈이 샘솟는다는 곳이고, 돈이 샘솟기 때문에 돈을 마음껏 쓰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시골 논밭을 사진으로 담아 시골 논밭에서 사진잔치를 여는 일이란 없습니다. 파란 빛깔 바다를 사진으로 담아도 바닷마을 사람들하고 즐기도록 사진잔치를 마련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삶이란, 사람이란, 사진이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에드워드 커티스(Edward S.Curtis)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the Women》(Buffinch,2005)을 펼칩니다. 2011년 8월 한국땅에서 드디어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책이 《북아메리카 인디언》(눈빛,201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낱장으로 몇 장씩 나누어 책이나 신문에 쓰기는 하지만, 이렇게 책 하나로 묶은 적은 처음입니다. 어떤 분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고 함부로 100장 가까이 넣으며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너무 모르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고, 아는 사람은 제대로 헤아리지 않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입니다.

 《the Women》은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 빚은 사진 가운데 ‘여성’ 이야기를 간추립니다. 어쩌면, ‘남성’이라든지 ‘어린이’라든지 ‘할머니’라든지 ‘자연’이라는 테두리로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을 살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 삶자락을 찾아 북아메리카땅을 골골샅샅 누비던 에드워드 커티스 님이니, 토박이 겨레에 따라 사진책을 나누어 살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무슨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 사진은 어느 갈래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에드워드 커티스 님은 틀림없이 ‘북아메리카 옛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겼습니다. 다른 여느 미국사람은 옛 토박이를 눈여겨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옛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이거나 모질게 땅을 빼앗습니다.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삶이고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눈길이며 여느 미국사람과 다른 넋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문화인류학’이라는 테두리로 다가설 만합니다.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테두리로 들여다볼 만합니다.

 이야기를 바꾸어, 어느 한국 사진쟁이가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면서 ‘한겨레 토박이’를 사진으로 적바림하고 글로 아로새긴다면, 이러한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이 또한 문화인류학이나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진과 글을 바라보아야 할는지요.

 사진은,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과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 서로 만나며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내 삶을 알뜰히 일구어야 무엇을 사진으로 담아 누구하고 사진을 나누려 하는지를 또렷이 깨닫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또한 이들 스스로 당신 삶을 알차게 돌보아야 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아름다운 빛줄기가 살가이 깃듭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억지로 어떤 모습을 지을 때에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지만, 그럴듯한 그림에 머물 뿐,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매기지 못합니다. 서로서로 삶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가슴 촉촉 이야기’입니다. 서로서로 삶을 보살피면서 일구는 나날을 누릴 때에 바야흐로 고운 꿈이 열매를 맺습니다. 잘 일구는 삶에서 잘 찍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사랑스레 돌보는 삶에서 사랑스레 담는 사진이 비롯합니다. 바보스레 팽개치는 삶에서 바보스레 팽개치는 사진이 불거집니다. 겉치레로 꾸미는 삶에서 겉치레로 꾸미는 사진이 맴돕니다.

 《the Women》은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스러운 삶으로 이어가도록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내(사진쟁이) 삶 또한 사랑스레 돌볼 때에 다 함께 아름다이 살아갈 온누리 무지개빛을 어깨동무할 수 있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기록사진은 사진이 아닌 ‘기록’이고, 문화인류학은 삶하고 동떨어진 ‘학문’이며, 생활문화나 생활역사는 삶과 문화와 역사하고 등지는 ‘지식’입니다. 사진은 기록이나 학문이나 지식이 아닌, 그예 사진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찍는 사진이요, 살아숨쉬면서 나누는 사진이며, 살아내면서 사랑하는 사진입니다. (4344.9.30.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새 5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
 [만화책 즐겨읽기 71] 데즈카 오사무, 《불새 5》



 한 사람으로서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한 사람으로 태어난 이야기라든지,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이야기라든지, 살아가는 뜻이라든지, 따로 학교나 교과서나 책에서 들은 적은 없습니다. 학교는 한 사람 삶이나 넋이나 말을 가르치는 곳이 못 됩니다. 교과서는 한 사람 꿈이나 얼이나 마음을 가르치는 스승이 못 됩니다. 책은 살아숨쉬는 슬기를 그러모아 뒷사람한테 물려주는 사랑이 못 되곤 합니다.

 한 사람으로서 태어난 까닭은 회사원이 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은 까닭은 ‘나라 안팎에 이름난’ 대학교에 들어가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한삶을 사랑하며 하루하루 맞아들이는 까닭은 부동산이 될 만하면서 퍽 넓은 아파트를 장만하거나 꽤 값나가며 멋들어진 자가용을 마련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연봉이나 명함이나 학벌이나 몸매나 재산이 한 사람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명예나 훈장이나 권력이나 지위가 한 사람을 밝힐 수 없습니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법관 같은 이름은 고이고이 남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물려주거나 물려받으면서 남는 이름이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나눈 사랑’으로 살아낸 사람들 이름과 넋과 꿈과 말과 삶입니다.


- “난 벌써 사람을 몇이나 죽였어. 더는 겁날 게 없다구. 나도 갓 태어났을 때는 사지육신이 멀쩡했어. 그런데 처음 세상에 태어난 날 이런 몸뚱이가 되고 만 거야 … 난 멀쩡한 두 팔을 가진 녀석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25, 27쪽)
- “이제 내 인생은 끝났어! 난 이제 죽을 때까지 내 손으로 훌륭한 작품을 조각할 수 없게 됐어!” “하지만 왼손이 아직 남아 있지 않나.” “왼손? 그게 어쨌다는 거죠? 혼이 담긴 조각을 만들려면 왼손만으로는 어림없어요!” (31쪽)


 사람들은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는 사람들치고 내가 먹는 밥을 일군 흙일꾼 이름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꽤 자주 고기를 먹습니다. 물고기이든 뭍고기이든 참 쉽고 값싸게 장만해서 먹습니다. 고기를 꽤 자주 먹는 사람들이나, 이 고기를 누가 거두고 누가 마련하며 누가 이루는가를 아는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옷을 걸칩니다. 언제나 옷을 입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실을 잣고 물레를 돌리거나 베틀을 밟아 천을 얻는 사람은 없다 할 만하고, 돈을 주고 옷을 사입더라도 이 옷을 누가 마름하여 만드는가를 아는 이는 없다 할 만합니다.

 사람들은 집이 있어 잠을 자거나 쉽니다. 집 없이 떠돌거나 맴돌며 한뎃잠을 자면 몸이 무너지거나 망가집니다. 푸른 들과 멧자락이 아닌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에서 한뎃잠을 잘 때에는 누구나 몸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멘트로 집을 짓고 아스팔트로 길을 냅니다. 흙으로 집을 짓지 않고 흙으로 길을 닦지 않습니다. 모든 목숨이 흙에서 비롯하지만, 사람들은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괴롭히면서 도시 물질문명을 이룹니다.


- “그럼 넌 대체 누구야?” “난, 언젠가 당신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에요.” “목숨을?” “헛소리! 내가 널 어디에서 만났지? 난 전혀 생각이 안 나.” “당신은 살며시 날 들어올려 목숨을 구해 줬어요. 당신은 살인자에 난폭하긴 하지만 날 죽이지 않았죠. 사실은 당신이 마음씨 착한 사람이란 걸 알고. 난 기뻤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시집갔던 거예요.” (70쪽)


 우리 집 두 아이는 집에서 제 어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네 살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었으니 첫째는 마냥 집에서 놀고, 갓난쟁이 둘째 또한 집에서 두 어버이가 돌보는 손길을 맞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씩씩하게 큽니다. 이제 넉 달째 살아낸 둘째는 어제 비로소 뒤집기를 합니다. 아버지는 둘째를 집에서 보살피며 살아가기에 둘째가 뒤집기를 할 때에 말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거듭거듭 뒤집기를 하면서 입을 쩍쩍 벌리며 좋아라 하는 모습을 아낌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흙을 일구며 살아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글을 쓰며 살아가기에 집살림을 건사하면서 아이들하고 부대낍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든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하루 내내 아이들하고 살을 부비고, 하루 내내 아이들을 안고 어르며 놉니다. 아이들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씻기며,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우리 살림이 가난하니까 아이들 보살피는 몫을 집에서 모두 치른다 할 테지만, 두 어버이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는 일을 다른 누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학교나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맡길 수 없습니다. 한글교재나 영어교재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자가용이나 텔레비전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어버이 두 손에 맡깁니다. 어버이 가슴에 맡깁니다. 어버이 마음밭에 맡깁니다.

 옆지기는 옆지기 어머님이 마련한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느낍니다. 나 또한 내 어머니가 마련한 밥을 먹고 자라면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 나라 서울시는 무상급식을 놓고 주민투표까지 벌이는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낮밥은 ‘무상급식으로 하느냐 마느냐’로 따져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사랑을 느끼며 밥을 맞아들이도록 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합니다. 아이들은 영양소 아닌 사랑을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이 감도는 좋은 밥을 먹어야지, 이런저런 숫자로 어림한 영양소를 먹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사랑과 어른 사랑을 고루 받아먹으면서 마음씨를 착하게 북돋아야지, 시험성적 숫자에 목을 매달면서 어린 넋이나 푸른 얼을 망가뜨리면 안 돼요.


- “죽은 자를 위해 경문이라도 읽어 주시지 그래요?” “어차피 돈도 안 될 텐데, 뭐.” “그, 그런 말이 어딨어요! 말도 안 돼! 그럼 스님이며 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 나라에서 세운 절이 전국에 산재해 있고 훌륭한 대불들이 세워지지만, 그건 다 정치를 위해서야. 나랏님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도 잠자코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불교를 널리 전파해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거지. 왜 그러지? 실망했느냐?” (117쪽)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 《불새》(학산문화사,2002)를 5권째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똑같은 이야기라고 들려주는 《불새》 5권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은 똑같은데, 이 똑같은 삶과 죽음을 옳게 바라보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요. 삶과 죽음은 하나인데, 이 하나인 삶과 죽음을 참다이 느끼는 어른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나요.

 삶은 아름답고, 죽음 또한 아름답습니다. 삶은 사랑스럽고, 죽음 또한 사랑스럽습니다. 삶은 기쁘며, 죽음 또한 기쁩니다. 삶은 목숨이요, 죽음 또한 목숨입니다.


- “고, 고맙습니다. 스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나보고 고맙대, 나보고. 나 같은 인간을 보고! 우하하하 우하하하 우히히히 으하하하.” (123쪽)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산다 이야기하지만, 사람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살 수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먹이를 거두도록 흙을 일구거나 푸나무를 아껴야 먹고살 수 있습니다. 회사나 관공서나 가게에서 일을 하며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숨을 잇기’는 하지만, 목숨을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돌보지 못합니다. ‘나이를 먹을’ 수 있으나 삶을 일구거나 보살피지 못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를 돌아보면, 사람들은 돈만 따집니다. 밥그릇 나이만 셉니다. 눈으로 바라보는 몸매에 얽매입니다.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사랑과 꿈과 빛과 흙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푸나무와 푸른바다와 파란하늘을 깨닫지 못합니다. 맑은 햇살이나 눈부신 달빛을 보듬지 못합니다.

 삶을 삶다이 마주하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죽음다이 껴안으면서 아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은 삶으로 이어집니다. 한결같이 얼크러지는 삶과 죽음은 내 왼손과 내 오른손이듯, 아니 내 한몸으로 녹아드는 내 한마음이듯, 하루 열두 시간은 낮이요 하루 열두 시간은 밤입니다. 동이 트면서 모든 목숨이 눈을 뜨고, 어스름이 깔리면서 모든 목숨이 새근새근 잠듭니다. (4344.9.29.나무.ㅎㄲㅅㄱ)


― 불새 5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3.25./45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부터 책방에 들어갔어요. 새 보금자리를 알아보려고 전라남도 고흥에 와서 여관을 돌며 해롱해롱거리는데, 용케 여관에서 무선인터넷이 잡혀 이렇게 소식을 띄웁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463182  

 장바구니에 담아 기쁘게 장만하시는 분들 모두한테 예쁜 빛줄기 드리우리라 믿습니다~~ ^__^

   

 

 

 

 

 

 

 

 

 [출판사에서 쓴 소개글] 

 이 책은 말과 글이 하나 되어야 하며 누구나 손쉽게 쓰는 말로 글을 적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논문이나 학문책이 죄다 어려운 한자말에다가 영어로 뒤범벅인 것은 지식 권력 울타리를 높여 밥그릇을 지키려는 어른들이 말과 글을 달리 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글쓴이는 어른들은 청소년들에게 ‘외계어’나 ‘통신체’를 쓴다고 나무라지만 정작 스스로는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 서양 번역투나 영어 따위를 사용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옳고 바른 삶터를 꿈꾼다면, 우리가 쓰는 말부터 옳고 바른말이 되도록 땀 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간추린 글 몇 가지] 

말사랑벗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면 참 기쁘겠습니다

말사랑벗들이 둘레 어른한테서나 다른 동무한테서나 좋은 말과 넋과 삶을 받아들이거나 눈여겨보면서 말사랑벗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면 참 기쁘겠습니다. 따순 손길을 내미는 말을 아끼고, 너른 마음을 펼치는 글을 사랑해 주면 더욱 기쁘겠어요.

가. 우리말 생각
말이란 말재주가 아니라, 내 삶을 일구는 하루하루를 곱게 들려주는 이야기예요. 글이란 글솜씨가 아니라, 내 꿈을 이루는 어제오늘을 예쁘게 나누는 이야기예요. 입으로 읊어 말이고, 손으로 적어 글입니다. 말을 하듯이 글을 쓰고, 글을 쓰듯이 말을 합니다. 말과 글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에요. 입으로 하는 말과 손으로 쓰는 글은 다르지 않습니다. 입으로 말할 때처럼 손으로 글을 써야 아름답고, 손으로 글을 쓰듯 입으로 말할 때에 어여뻐요.

나. 글쓰기 삶쓰기
글을 쓰는데 맞춤법을 잘 몰라서 받침이나 홀소리를 잘못 적었다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찌개’로 써야 맞는지 ‘찌게’로 써야 맞는지, 또는 ‘빨래집게’하고 ‘빨래집개’하고 어느 쪽이 바른지를 몰라도 글쓰기를 하면서 걱정스러울 일이란 없어요. 맞춤법은 틀릴 수 있고, 띄어쓰기를 모를 수 있어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는 나중에 혼자서 새로 배우면 되고, 틀렸으면 바로잡으면 돼요.
그런데 말사랑벗들이 쓰는 글에 알맹이가 없다면 나중에 어찌저찌 손을 쓰지 못합니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없는 글이라면 값이나 보람이나 뜻이 없어요.

다. 우리말 착하게 가꾸기
우리 둘레 말삶을 더 돌아보면, ‘식수(食水)’나 ‘생수(生水)’란 낱말은 버젓이 쓰이면서 낱말책에 냉큼 실리지만, ‘마실물’이나 ‘먹는샘물’ 같은 낱말은 여태껏 낱말책에 안 실립니다. ‘생수’는 일본말이기에 ‘먹는샘물’로 고쳐써야 한다고 정부에서 틀을 세운 지 한참 지났으나, 이러한 틀을 낱말책에 알뜰히 담지 못해요. 그나마, ‘먹을거리’는 낱말책에 실어 놓으나, ‘마실거리’는 낱말책에 없습니다. 고작 ‘음료수(飮料水)’ 한마디만 실립니다.

라.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는 말꼬리잡기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얄궂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해서 “당신은 뭔데 말을 요로코롬 하우?” 하고 따지자는 말꼬리잡기가 아니에요.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면서 내 삶을 바르게 추스르자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입니다. 우리말을 바르게 손보면서 내 마음밭을 알차게 일구겠다는 “우리말 바르게 손보기”예요.

마. 우리말 살가이 살피기
누구한테 어느 말을 쓰든 내가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겉으로 들리는 말씨로는 높임말인 듯 들리지만, 정작 속으로는 맞선이를 낮추거나 깔보는 마음이라면 이때에는 높임말 아닌 낮춤말인 셈입니다. 말씨로는 낮춤말이지만 맞선이를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짙다면, 겉으로 보이기에는 낮춤말일 테지만 정작 속으로는 높임말이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즈키 선생님 1 세미콜론 코믹스
다케토미 겐지 지음, 홍성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선생님은 학교에서 뭘 할 수 있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65] 다케오미 겐지, 《스즈키 선생님 (1)》


 ‘선생님’ 아닌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스스로 ‘선생님’이라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은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열면 안 됩니다. ‘선생’도 아닌 ‘선생님’은 남이 나를 높이면서 부르는 말이지, 내가 나를 높이면서 가리킬 수 없는 말입니다. 아이들 앞에 선 사람은 “나는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열어야 올바릅니다.

 곧 ‘선생님’은 학교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학교 밖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학교 안팎에서 어느 하나 할 수 없는 이가 선생님입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라 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태어나서 밥그릇을 좀 많이 비웠으니까, 나어린 이들이 높임말로 우러르거나 섬겨야 하겠습니까. 나이가 많으면 그저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은 서로를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사람은 서로를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으로 바라볼 까닭이 없어요.

 사람은 서로를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사람은 서로를 학벌이나 학연이나 지연 따위로 바라보지 않으며, 학벌이나 학연이나 지연 따위로 바라볼 까닭이 없어요.

 서로서로 좋은 넋을 헤아리면서 서로서로 따스한 얼을 북돋웁니다. 내 고운 사랑을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네 기쁜 사랑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내 빛나는 넋을 예쁘게 뿌립니다. 네 빛나는 눈길을 고마이 받아들입니다.

 이리하여, 선생님 자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요, 교사 자리는 그저 ‘가르치기’만 하는 자리입니다. 이른바 학교라는 데에서는 교사 몫을 하는 이가 ‘가르치기’만 하면서 ‘달삯’을 챙길 뿐입니다.


- “나도 모르게 내가 알고 있는 게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어요.” “그랬군요. 그럼 예전에 전화로 얘기한 반 회의는?” “네, 안 하려고요. 종례시간에 모두에게 담담하게 이즈미의 얘기를 전하고 돌려보냈어요. 나머지는 혼자서 차분하게 깊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말이죠. 솔직히 걱정했지만, 나카무라도 신중하게 들어 줬어요. 그렇게 보였어요. 너무 낙관적인 걸까요?” “이것저것 모두 교사가 손 안에 쥐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47쪽)


 교사는 학생 자리에 선 사람한테 ‘교과서 지식을 가르치는’ 몫을 맡겠다면서 교육대학을 네 해 다니고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땁니다. 학원에서도 이와 똑같아요. 운전학원이건 발레학원이건 피아노학원이건 태권도학원이건, ‘지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이는 먼저 여러 해에 걸쳐 자격증을 따려고 애씁니다. 자격증을 딴 다음에는 달삯이라는 돈을 벌 일자리를 알아봅니다. 작은 사람을 맡아 작은 사람이 살아갈 아름다운 나날에 빛나는 마음밥이 될 넋이나 얼을 보살피는 이야기는 ‘자격증을 따는 동안 따로 배우지 않’아요.

 교사는 공무원입니다. 나라에서 달삯과 수당과 연금을 줍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건 나라에서는 공무원 노릇을 하는 교사한테 달삯과 수당과 연금을 줍니다.

 교사는 노동자입니다. 노동자인 교사한테는 노동3권이 있을 테니, 노동3권을 외칩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자 노동자인 교사입니다. 이밖에 달리 아무것도 아닌 교사입니다. 아이들 앞에 설 때에 스스로 무엇인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먼저 태어났으니까 우러름을 받으려는(선생님)’ 사람이면서 ‘넉넉히 돈을 받는(공무원)’ 사람인 한편 ‘권리를 누리는(노동자)’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면서 아이들한테 ‘교과서 지식’이나 ‘시사상식’만 들려줍니다.


- “선생님이 잘 해결해 주실 거야.” “정말? 왜 그럴까. 탕수육, 왜 다들 먹지 못할 정도로 싫어하는 걸까.” (75쪽)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선생님도 내키지 않고 교사도 못마땅합니다. 그저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그예 어른이면 반갑겠습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이요,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입니다. 어린이 마음이나 푸름이 마음이 되겠다고 섣불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입니다. 사람이자 어른인 줄 거듭 되뇌며 다시금 아로새겨야 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사람이라고 깨닫고 살아낼 때에 비로소 교과서이든 교과서 아닌 책이든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무엇이든, 아이들하고 함께 가르치고 배웁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라고 느끼며 어깨동무할 때에 바야흐로 어른으로서 내 삶을 어떻게 일구면서 아이들 스스로 어떤 삶을 아이들 스스로 일굴 때에 서로 아름다울까 하고 알아차립니다.

 사랑을 해야지 사랑 지식을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짝꿍을 사랑하고 살붙이를 사랑하며 동무를 사랑할 노릇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지 이웃을 불쌍히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동무를 좋아해야지 동무를 부러워하거나 창피하게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짝꿍을 사랑해야지 짝꿍 살결을 주물럭거릴 까닭이 없어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무엇이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누리고, 무엇을 나누며, 무엇을 남기거나 돌보아야 하는가를 먼저 살피고 깨달아 아이들한테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이어주는 몫을 맡을 때에 ‘교사’라는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어른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넋을 가다듬어 어떤 말을 펼치며 어떤 삶을 가꾸는가를 올바르며 착하고 참다이 삭여야 ‘교사’답게 아이들과 배울 만합니다.


- “선생님은 제가 한 일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 지금 들은 것만 보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진 않구나.” “그렇군요. 그건 제가 중2라서요? 아님 상대방이 초등학생이라서? 말씀드렸지만, 이건 예민한 문제니까요. 만약 이것저것 다 캐물은 다음 납득이 안 가는 이유로 대충 마무리하고 처벌하면 저는 반성은커녕 절대로 용서 못할 거예요.” (116쪽)


 다케오미 겐지 님이 빚은 만화책 《스즈키 선생님》(세미콜론,2011) 1권을 읽습니다. 교사 자리에 섰으나 아직 교사라 할 만하지 않은 ‘어른 스즈키’가 어떤 모습으로 아이들하고 마주하는가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책이름부터 선생님이라고 적습니다만, 교사와 선생님이라는 이름이나 허울이 어떠한가를 아직 옳게 짚지 못하는 ‘사람 스즈키’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가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이들과 지내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뾰족한 길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여러 날 골머리를 앓고, 오래도록 마음앓이를 합니다. 어른도 아이도 갈팡질팡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언제나 ‘수업 진도’가 맨 먼저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오락가락입니다. 어른도 아이도 늘 ‘시험 성적’이 가장 큽니다.

 수업 진도와 시험 성적이라는 쇠사슬을 스스로 동여맨다면, 학교는 그야말로 학교입니다. 배우는 터전인 배움터가 되지 못합니다. 배움터는 지식쌓기를 하는 데가 아니니까요. 삶터가 돈벌이만 잘해서 갖가지 전자제품이나 물질문명을 누리는 데가 아니듯, 배움터는 교과서 수업 진도를 잘 나가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철썩 붙도록 등을 떠미는 데가 아닙니다. 포근하며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고운 보금자리가 될 삶터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꿈이 예쁘게 어우러지는 사람들 좋은 이야기마당이 될 배움터입니다.

 만화책 《스즈키 선생님》은 참다운 교육이 걸어갈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교사다운 교사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제도권 교육 울타리에서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잃지 않고 어른들이 어른다움을 내팽개치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대목을 살짝 보여줍니다. 그나마, 아직까지 한국땅에서는 이만 한 이야기조차 만화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글로든 춤으로든 노래로든 보여주지 못합니다. (4344.9.27.불.ㅎㄲㅅㄱ)


― 스즈키 선생님 1 (다코오미 겐지 글·그림,홍성필 옮김,세미콜론 펴냄,2011.2.17.8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