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그 후 - 사진작가 지영빈의
지영빈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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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찾아 읽는 사진책 60] 지영빈,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



 하루 동안 찍지 못하는 사진이라면, 한 달이나 한 해뿐 아니라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려도 못 찍는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무엇을 찍건 누구를 찍건, 나한테 주어진 겨를만큼 사진을 찍어야, 나 스스로 더 넉넉히 말미를 마련해서 사진을 찍을 때에 제 목소리가 살아숨쉬는 제 이야기가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두 아이를 사진을 담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내가 집에 머무는 겨를이 고작 1분이나 10분이라 하더라도 이동안 사진 열 장이나 서른 장을 찍을 수 있습니다. 찍기 나름입니다. 그냥 마구 눌러대는 사진이 아니라, 내 아이를 내가 사랑하는 마음그릇만큼 사진으로 찍어요.

 내가 참말 내 아이를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라 할 때에는, 고작 하루 몇 분 사이에 열여섯 장 사진을 찍어, 이 열여섯 장으로 사진책 하나 묶을 수 있습니다. 꼭 백육십 장에 이르는 사진을 열 달이나 열 해에 걸쳐 찍어야 사진책으로 묶을 만하지 않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이야기를 가만히 사진으로 담아 사진책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내 아이가 갓 태어나 학교에 들어가고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할 때까지 사진으로 담아야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우리들은 ‘사진으로 이야기를 일구는 일’을 하지 ‘더 많이 찍은 사진’이나 ‘더 오래 찍은 사진’으로 겨루기나 숫자놀이나 등수매기기를 하지 않습니다.

 지영빈 님이 일군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책이있는마을,2010)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지영빈 님은 영화 〈워낭소리〉가 나온 뒤, 이 영화에 나온 할아버지네 막내아들한테서 ‘아버지 사진 찍어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과 봉화를 수 차례 오가며 카메라에 이르신의 모습을 담았다(머리말).”고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를 읽다 보면, 참말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꼭 이만큼 찍은 사진입니다.

 이를테면,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함께 살면서’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봉화에서 ‘어르신하고 한 달이고 석 달이고 함께 먹고자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어르신하고 몇 달이건 몇 해이건 함께 어울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가장 빛나거나 가장 훌륭하거나 가장 돋보이거나 가장 사랑스러울 만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워낭소리, 그후…》 같은 사진책이 《굴피집》(안승일 사진책)만 한 깊이가 담긴 사진책이 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다만, “수 차례 오가며” 찍은 사진이라면, 이렇게 “수 차례 오가며” 만날 수 있는 깊이와 너비가 어떠한가를 사진쟁이 삶으로 녹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돼요. 어르신하고 마흔 해를 살아온 이웃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됩니다. 어르신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감독처럼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안 돼요. 오직 몇 차례 만날 수 있는 틈에서 살릴 수 있고 살아낼 만한 사진을 헤아리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어르신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기다림과의 싸움이었다. 며칠을 찍었는데도 거의 같은 사진뿐이었다(머리말).”는 말을 되새깁니다. 짧지 않은 나날을 사진을 찍은 지영빈 님이요,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지영빈 님입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조용필·이광조·장동건·이승연처럼 이름난 연예인은 당신들 스스로 ‘아주 바쁜 틈을 내어 사진으로 찍혀야’ 합니다. 봉화마을 어르신이라 해서 안 바쁜 나날이 아니에요. 그러나, 봉화마을 어르신은 ‘당신한테 바쁜 나날에 지영빈 님한테 굳이 틈을 쪼개어 사진으로 찍혀 줄 까닭이 없’습니다. 어르신네 막내아들이 당신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건 말건, 어르신으로서는 누가 당신을 찍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일이 없기도 하며, 퍽 귀찮거나 싫을밖에 없습니다. 나하고 사랑스레 만나면서 따스히 어우러질 이웃이나 벗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기 좋은 썩 괜찮다 싶은 사진 몇 장 후다닥 얻어’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다가온다면, 봉화마을 어르신뿐 아니라 대통령이나 서울시장도 사진 찍히기를 달가이 여길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써 사진 몇 장 찍더라도 ‘사진을 찍은 사람부터 스스로’ 마음에 차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사귀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사랑해야 합니다. 남녀 사이에 살을 섞는 사랑놀이가 아니라,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과 사진기를 바라보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영빈 님은 “똑같은 일상, 똑같은 동선에서 어르신의 변화를 담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머리말).”고 말하지만, 정작 《워낭소리, 그후…》에는 어르신 하루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드는 ‘하루 삶’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어요. 아니, 처음부터 이러한 ‘하루 삶’을 담을 마음이 없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이 ‘하루 삶’을 바라보거나 살피지 않았으니까, 이 ‘하루 삶’을 ‘똑같은 동선’이라고 여길 뿐, 이 움직임과 모습과 삶에서 어떠한 이야기가 샘솟는가를 가슴으로 깨닫지 못해요. 사진으로 꽃피우지 못합니다.

 “옷 좀 바꿔 입고 찍자고 해도 한사코 당신이 좋아하는 옷만 고집하시던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머리말).”라는 말은 아주 덧없습니다. 시골마을 할아버지를 찍는 사진은 연예인을 찍는 사진하고 다른데, 할아버지한테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하다니요. 이것 참 버르장머리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으로서 밑바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전투화 코가 벗겨졌잖아. 다른 전투화 신고 와.” 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 다쳐서 어깨를 붕대로 감싼 군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봐, 붕대가 제대로 안 감겼잖아. 다시 감아.” 하면서 사진을 찍어도 될까요. 능금밭에서 능금을 따는 일꾼한테 “여보시오. 좀 고운 옷을 입고 능금을 따시오.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오지.” 하고 말해도 될는지요. 새마을운동 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관청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내세우는 홍보사진을 찍는 일이 아니라면,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헤아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을 텐데, 지영빈 님은 ‘워낭소리 할아버지 삶’을 사진으로 어떻게 보여주도록 그려야 아름다운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가벼운 손재주를 부려 포토샵 사진을 몇 끼워넣기까지 합니다. 사진책 《워낭소리, 그후…》는, 영화 〈워낭소리〉가 극장에 걸린 뒤부터 봉화마을 어르신이 얼마나 시달리거나 고달프거나 힘겹거나 짜증스럽게 살아야 하는가를 낱낱이 보여주는 슬픈 얼굴입니다. (4344.9.21.물.ㅎㄲㅅㄱ)


― 워낭소리, 그후… (지영빈 사진,책이있는마을 펴냄,2010.2.23./23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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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가 빼꼼
마에다 마리 글.그림, 박은덕 옮김 / 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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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으로 그림읽기·글읽기·사랑읽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8] 마에다 마리, 《모자가 빼꼼》(보림,2011)



 모자와 고양이가 나오는 그림책은 몇 살 아이한테 읽히는 그림책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 그림책을 장만해 놓고는 네 살 아이와 갓난쟁이 한 살 아이 가운데 누구한테 읽히려 했는지 헤아려 봅니다.

 아마, 갓난쟁이는 책을 읽을 수 없을 테고, 네 살 첫째한테 읽히려 했다고 여길 만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아이들에 앞서 아버지인 나부터 보고 싶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아이들은 책방마실을 할 수 없고, 아이들은 누리책방에서 책을 장만할 수 없으니까요. 오직, 어버이가 책을 하나하나 살피거나 따지거나 읽은 다음 아이들이 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고르는 책을 아이들이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책을 살피는 눈썰미가 아름답다면, 아이들은 아름답게 받아들일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책을 돌아보는 눈길이 따스하다면, 아이들은 따스하게 맞아들일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책을 고르는 눈매가 사랑스럽다면, 아이들은 사랑스레 껴안을 만한 책을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어버이에 앞서 ‘아름다운 책 하나’ 일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다고 느낄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아름답다고 느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아름답다고 느낄 글과 그림’을 한데 그러모아 ‘아름답다고 느낄 책’을 엮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맛나고 좋은 밥을 차리는 어버이에 앞서, ‘맛나고 좋은 밥이 될 곡식이나 푸성귀나 고기 같은 먹을거리’를 일구거나 짓거나 보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흙일꾼이 있어야 하고, 고기잡이가 있어야 합니다. 집짐승을 치고 집짐승을 잡아 고기로 다지는 일꾼이 있어야 해요. 이들 일꾼 손을 거쳐 가게에 놓인 먹을거리를 사고파는 가게 일꾼 또한 있어야 합니다. 흙일꾼과 고기잡이랑 가게를 잇는 징검돌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해요.

 시골자락에서 손수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호미나 낫이나 삽 같은 연장을 만드는 또다른 사람 손길을 얻어야 합니다. 내 둘레 내가 잘 모르는 고마운 사람들 따사로운 빛줄기를 하나둘 받아들입니다. 이 빛줄기를 아이들한테 살며시 물려주고 이어줍니다. 아이들이 읽는 책이란 어버이가 돈이 있어 넉넉하게 장만해서 읽히는 책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고마운 이웃이 아름다운 넋으로 아름다운 땀을 흘려 아름다운 사랑으로 빚은 따사로운 책이에요.

 마에다 마리 님이 빚은 그림책 《모자가 빼꼼》(보림,2011)은 아무래도 세 살 밑 아이들한테 읽히는 ‘두꺼운종이 그림책’입니다. 그러나, 어버이요 어른인 나부터 즐겁게 보는 그림책입니다. 꼭 퍽 어린 아이들한테만 읽혀야 할 책이 아니에요. 투박하면서 따사로운 손길로 그린 그림은 수수하면서 너그러운 마음길이 담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진보도 개혁도 보수도 수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예 삶을 말합니다. 그저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냥 그대로 사랑을 들려줍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때로는 방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면서 천천히 넘기면 좋을 《모자가 빼꼼》입니다. 기찻간에서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읽을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옆에 앉히고 함께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됩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넋으로 읽으면 됩니다. 옆지기나 짝꿍을 사랑하는 몸짓으로 읽으면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함께 읽으면 됩니다. 조용히 즐기고, 오붓하게 나눕니다. 어른들은 으레 미술관 같은 데에 가서 ‘그림만 달랑 있는 모습’을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가슴이 촉촉히 젖어든다고 하는데, 미술관에 가서 커다란 그림을 ‘아무 풀이말 안 달린 날것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음으로 그림읽기를 하듯, 《모자가 빼꼼》을 집안에서 혼자서, 또는 아이하고, 또는 어른끼리 찬찬히 넘기면서 마음으로 어떤 느낌이 샘솟는가를 헤아리며 그림읽기를 하면 즐겁습니다.

 마음으로 그림읽기를 할 수 있을 때에, 마음으로 글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사진읽기를 하면서, 마음으로 내 곁 고운 사람들 사랑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4344.9.21.물.ㅎㄲㅅㄱ)


― 모자가 빼꼼 (마에다 마리 글·그림,박은덕 옮김,보림 펴냄,2011.2.28./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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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09-21 13:38   좋아요 0 | URL
5번째와 6번째의 단락의 글을 보니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이 생각났어요. 복사 붙이기 하면,

"내가 단 하루라도 혼자의 힘으로 사는 게 가능한 일이던가. 누군가가 땀 흘려 일해 지은 집에서 살고, 누군가의 노고로 수확한 쌀로 밥을 먹고, 누군가의 수고로 만든 옷을 입고 사는 나"

정말 그래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우린 하루도 살 수 없어요.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야 해요. 서로 도우면서...

따스함이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파란놀 2011-09-21 14:15   좋아요 0 | URL
이웃이 있어 고맙고,
나는 이웃한테 사랑을 베풀며 고마운 사람이 되고요.
서로 사이좋게 어우러지면서 즐거운 삶이라고 느껴요.
 


 빨래를 개는 책읽기


 어떤 교육이론 책이나 아이키우기 책에서도 아이한테 ‘다 마른 빨래를 개도록 이끌기’를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빨래를 알뜰히 잘 개는 길을 들려주는 살림책 또한 없으리라.

 나는 언제부터 빨래를 갤 줄 알았을까. 내 어머니는 나한테 언제부터 빨래를 개도록 시켰을까.

 곰곰이 돌아본다. 내 어머니는 아마 나한테 빨래개기를 시키지 않았으리라. 어버이가 되어 두 아이를 돌보며 지내는 동안 생각하는데, 아이한테 빨래개기를 시킨대서 아이가 거뜬히 잘 해내지 않는다. 내 손이 더 가고, 품이며 겨를을 더 써야 한다. 해야 할 집일은 멧더미처럼 기다리는데, 빨래 몇 점 개느라 하느작거릴 수 없다.

 우리 집 첫째는 스스로 서고 걸을 무렵부터 옆에서 빨래개기를 거들었다고 느낀다. 맨 처음 빨래개기에 손을 뻗던 날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 첫돌 안팎이었지 싶다. 아이 곁에 늘 있는 아버지가 날마다 수없이 빨래를 하면서(기저귀 빨래는 날마다 수없이 나오니까), 이 빨래를 날마다 쉴새없이 개는 모습을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슬그머니 따라하던 일이 꽃등이었다고 느낀다.

 네 살 아이는 빨래개기를 제법 잘 한다. 아직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꽤 잘 갠다. 아버지가 기저귀 넉 장을 갤 때에 아이는 작은 손닦개 하나를 겨우 개지만, 조금 삐끗 튀어나오는 데가 보이지만, 참 잘 갠다.

 내 어릴 적 일을 돌이킨다. 내가 빨래 한 점을 개는 사이 어머니는 서너 점을 후딱후딱 갠다. 나보다 훨씬 빠르면서 나보다 훨씬 정갈하다. 어머니는 말한다. “빨리 개려고 하지 마. 빨리 개도 엉망이면 내(어머니)가 다시 개야 하니까.” 일고여덟 살, 아홉열 살 무렵, 집에서 빨래를 개는 식구는 어머니하고 나였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빨래를 갠 일이 없지 않으랴 싶다. 빨래를 어떻게 개야 정갈하고, 빨래를 정갈하게 갤 까닭이 무엇이며, 빨래를 정갈하게 개어 옷장에 건사하는 일이 무얼 뜻하는지를 아직까지 모르시리라 본다.

 아버지가 문간에서 신을 가지런히 맞추고 드나들면 아이는 똑같이 신을 가지런히 맞추며 드나든다. 바쁘다면서 신을 아무렇게나 휙휙 벗으면 아이는 똑같이 신을 휙휙 벗는다. 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빨래개기는 내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빨래개기이다. 내 몸에 아로새겨진 어머니책이 내 아이한테는 아버지책이 되어 흐른다. (4344.9.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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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바라보는 두 아이


 깊은 저녁, 좀처럼 잠들지 않으려는 두 아이 눈망울이 말똥말똥하다. 이제 그만 자면 안 되겠니? 홀가분하게 잠들고 싶으며, 기쁘게 잠들고 싶지만, 아이들 마음은 더 놀 수 있으면 몸에 기운이 다 빠지도록 더 놀아야 후련할까.

 이제 제법 머리를 가눌 줄 아는 둘째까지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녀석들, 제 아버지 기운을 송두리째 빼먹을 녀석들. 그래,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당신 기운을 아낌없이 빼먹었겠지.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 기운을 신나게 빼먹어야 할 테지.

 날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 재우느라 고단하다. 그러나, 고단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인 줄 깨달아야지 싶다. 어제는 어제대로 어제까지 고단했다면, 오늘은 새삼스레 생각하고 가다듬으면서 ‘내가 아이들에 앞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함께 놀자. 함께 놀다가 아버지가 곯아떨어지면 제아무리 말괄돼지 첫째 아이라 하더라도 제풀에 지쳐 곯아떨어지지 않을까. 아니, 이런 다음에는 어머니를 들볶으려나. (4344.9.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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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73] 발빨래

 두 아이와 살아내며 날마다 하는 기저귀 빨래는 손으로 합니다. 두 손으로 신나게 비빔질을 하고 헹굼질을 합니다. 네 식구 옷가지와 베갯잇 또한 손으로 빨래합니다. 가방이나 걸레나 행주도 손으로 빨래합니다. 이불만큼은 손으로 빨래하기에 벅차 큰 통에 물을 받고 가루비누를 넣어 발로 밟으며 빨래합니다. 한창 이불빨래를 하며 생각합니다. 손으로 빨든 발로 빨든 빨래입니다. 옛날부터 빨래는 빨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빨래를 맡아 해 주는 집이 생겨 ‘가게빨래’와 ‘집빨래’로 나눌 만할 테고, 집에서 빨래를 하더라도 기계가 빨래를 해 주니까 ‘기계빨래’와 ‘손빨래’로 나눌 만합니다. 그러면, 집에서 손으로 빨래를 하다가도 이불처럼 덩이가 큰 녀석은 도무지 손으로 빨래할 수 없으니, ‘발빨래’라고 해야겠다고 느낍니다. 이불을 발로 밟으면서 “네, 이불도 손빨래로 해요.”처럼 말하자니 어딘가 어울리지 않거든요. 씻는방 문턱에 놓은 닦개는 ‘손닦개’가 아닌 ‘발닦개’입니다. 발을 닦도록 놓은 마른천이니까요. 굳이 새 낱말을 만들지 않아도 될 만한 집일이거나 집살림일 수 있습니다만, 집에서 일하거나 살림하는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따숩게 사랑하자면, 크고작은 일거리를 알맞고 즐거이 일컬으면 한결 나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나는 빨래하며 내 마음 또한 맑게 갈무리한다고 느낍니다. (4344.9.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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