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먼시스터즈 2
쿠마쿠라 다카토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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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바라보는 모습
 [만화책 즐겨읽기 63] 쿠마쿠라 다카토시, 《샤먼 시스터즈 (2)》



 한 해에 한 번 맞이하는 한가위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밝고 크게 보이는 달이 뜹니다. 한가위처럼 한 번 맞이하는 설날에도 더없이 밝으며 크게 보이는 달이 뜨고, 큰보름날에도 참으로 밝으며 크게 보이는 달이 뜹니다.

 다른 여느 날에는 그다지 안 밝고 썩 안 크다 할 달이 뜬다 할 테지요. 그렇지만, 시골자락에서 올려다보는 달은 여느 날에도 참 밝으면서 크구나 싶은 별입니다. 달을 비롯해 수많은 별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새까만 밤하늘을 느끼고, 이 새까만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는 우거진 푸나무를 느끼며, 우거진 푸나무에서 살아가는 뭇 풀벌레들을 느낍니다.

 사람은 작습니다. 사람은 작기 때문에 지구별에서 육십 억이든 칠십 억이든, 또 더 늘어나서 백 억이 되든 이렁저렁 살아갈 만합니다. 사람이 너무 크다면 육십 억은커녕 십 억이나 일 억조차 살아갈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크면 너무 많이 먹어야 하고, 너무 많이 먹어야 할 때에는 지구별 크기로는 도무지 먹이를 댈 수 없어요. 사람은 작은 목숨이기 때문에 작은 먹이로 흐뭇합니다. 작은 밥그릇 하나로 넉넉하면서 고맙습니다. 굳이 넘치게 먹어야 할 까닭이 없고, 겉치레를 하자며 먹이를 헤프게 쓸 까닭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스스로 작은 사람인 줄을 자꾸 잊습니다. 스스로 작은 사람인 줄 자꾸 잊으면서, 스스로 큰 사람인 듯 거들먹거린다든지 샛길로 빠집니다. 작은 사람 작은 밥그릇에 걸맞게 작은 살림을 일구면서 작은 사랑을 나누면 즐거울 텐데, 작지 않은 사람들은 작지 않은 밥그릇을 바랍니다. 작지 않은 밥그릇을 바라니까 작지 않은 살림을 키우려 하고, 작지 않은 사랑을 꾀하며, 작지 않은 돈을 벌려 합니다.

 누구나 옷과 밥과 집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사람은 누구나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스스로 옷과 밥과 집을 마련하기 빠듯할 때에는 내가 더 거두어들이는 옷이나 밥이나 집을 다른 사람하고 바꾸거나 주고받으면서 살림을 이었습니다. 쌀을 주고 물고기를 받든, 나무를 주고 옷감을 받든, 서로서로 옷과 밥과 집이 될 밑감을 스스로 마련해서 알맞게 나누었어요.


- ‘그래도 그날 아침은 왠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벗겨 줬는지도 몰라. 아, 그랬구나. (봄이 왔구나. 꽃이 피었구나.)’ (40쪽)


 조용히 착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지만, 나라가 서고 정치가 태어나며 경제가 이룩되는 동안 조용한 넋과 착한 얼을 잊거나 잃습니다. 조용하지 않고 착하지 않다 보니, 작은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며 작은 살림을 사랑하던 매무새 또한 사그라듭니다. 바야흐로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나라일만 돌본다는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궁궐에서만 지내는 정치 전문쟁이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전문쟁이가 태어나고, 정치일을 쥐락펴락 할 힘을 거머쥐려고 다투는 또다른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운동경기만 할 줄 아는 전문쟁이가 새로 태어납니다. 운동경기 전문쟁이 가운데에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어들이는 몇몇이 있습니다. 한창 젊은 스물 몇 살에 ‘이제까지 온삶을 바쳐서 하던 운동경기’를 그만두어야 하기 일쑤입니다. 더 젊고 더 힘세며 더 잘난 뒷사람한테 내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이제나 흙을 일구는 사람한테는 은퇴, 곧 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은 어리건 젊건 늙건 내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먹고 입고 자야 하기에, 흙을 일구는 사람은 노상 내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해서 스스로 쓰고 스스로 돌봅니다. 이와 달리, 정치 전문쟁이나 경제 전문쟁이나 운동경기 전문쟁이나 대입수험 전문쟁이나 대기업 전문쟁이나 공장 전문쟁이나 버스운전 전문쟁이는 ‘돈은 벌’되 ‘삶을 이루는 옷·밥·집’은 스스로 다스리거나 건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아니, 살아가지만 살아간다는 뜻을 모릅니다. 살아간다는 뜻을 모를 뿐더러, 살아가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이나 꿈을 잊어요.


- “미즈키, 이 말은 할아버지께서도 자주 하셨겠지만, 너나 시즈루의 능력은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를 잇는 고마운 능력이란다. 힘든 일도 있겠지만, 결코 그 능력을 갈고닦는 걸 게을리 해선 안 된단다.” (69쪽)
- “확실히 미코시는 흉악한 성격이 아니니까 계속 올려다보고만 있다간 죽을 수도 있어. 하긴 올려다보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아, 우린 참 성가신 체질이구나. 앞으로 괜찮을까? 이대로 계속 할아버지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데.” (78쪽)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거나 중학교라든지 고등학교 같은 데에 다니게 된다면, 이 일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까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보통교육이나 기본교육이라 하는 초등학교조차, 이 초등학교를 다닐 여덟∼열셋 나이 어린이가 제 나이에 걸맞게 삶을 느끼거나 배우거나 받아들이거나 나누는 아름다움과 사랑과 꿈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옳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교과서에는 삶을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다루지 않으며 말하지 않습니다. 교과서로 수업진도를 나가는 교사는 삶을 이야기하거나 가꾸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특기교육이나 적성교육이란 얼마나 부질없나요. 현장수업이나 현장체험은 얼마나 덧없나요. 아이들한테는 모든 날 모든 수업 모든 이야기가 현장, 곧 내 삶터여야 합니다. 교사부터 삶을 가르치고 나누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학생은 삶을 배우며 어깨동무하는 보람을 누려야 합니다. 더 낫다는 성적을 거두어 더 낫다는 학교에 가는 일이 교사와 학생 모두한테 얼마나 뜻있거나 값있을까 궁금합니다. 전국 몇 %가 되어 이름나다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오늘날 아이들한테 훈장처럼 달린다면, 이런 훈장은 아이들 삶을 얼마나 따사로이 비추는 햇살이 될는지요.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손전화를 만지작거리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느 어른조차 스마트폰을 갖고 놀며, 나도 일 때문이라고 하면서 손전화를 씁니다. 나는 참말 일할 때에만 손전화를 쓰지만, 이 손전화 기계에는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만 있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자꾸 만지작거리고 싶어 합니다. 따지고 보면, 어른인 나부터 이 손전화를 안 써야 옳은 셈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쓰거나 누리거나 가진 모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물려받으니까요.

 어른들 스스로 사랑스러이 삶을 일구면서 사랑스러이 말을 나눈다면, 아이들은 이 사랑스러운 삶을 받아먹고 사랑스러운 말을 꽃피웁니다. 아이들을 입시학원 같은 데에 보내거나 특기학원 같은 곳에 넣는다 해서 아이들이 아이들 삶을 사랑스레 북돋울 수 없습니다. 피아노학원에 가야 피아노를 칠 수 있지 않아요. 태권도학원에 다녀야 태권도를 익힐 수 있지 않아요. 글쓰기학원에 가야 글을 쓸 수 있지 않아요. 요리학원에 다녀야 밥을 할 수 있지 않아요.

 삶을 모르는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는 학원을 마련해서 보내야 하나요. 사랑을 잊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느끼도록 하는 학원을 세워서 넣어야 하나요. 꿈을 놓치는 아이들한테 꿈을 붙잡는 학원을 만들어서 몰아세워야 하나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 모두, 나 스스로 옳고 바르며 해맑게 살아가는 터전을 사랑하면서 이 터전에서 어린 아이들이 즐겁고 신나며 아름다이 지낼 빛줄기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그저 보이기만 해선 더욱 불안해질 뿐이다.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넌 저쪽의 지식을 배우고 거기에 네 생각을 더해야 돼.” (81쪽)
- “네가 느꼈던 불안은 그런 거란다. 쿠단이 나타나서 무엇을 예언할 것인가보다는, 쿠단이 나타나 예언을 한다는 상황이 실제로 생기는 것. 쿠단은 언젠가 꼭 나타난단다. 두려워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돼.” (146쪽)



 쿠마쿠라 다카토시 님이 빚은 만화책 《샤먼 시스터즈》(대원씨아이,2004) 2권을 읽습니다. 1권은 한참 앞서 읽었지만, 아니 1권은 2004년에 일찌감치 읽었으나, 이때에 2권까지 읽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곱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2권을 손에 쥡니다. 《샤먼 시스터즈》는 몇 해 앞서 9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기까지 1권만 달랑 읽고 뒷권은 하나도 읽지 않았습니다. 왜 안 읽었을까 하고 더듬으면, 아무래도 내 마음에 와닿지 못했으니 안 읽었다 할 텐데, 내 마음에 와닿지 못했다기보다는 내 마음이 이 만화책을 읽어 받아들이거나 헤아릴 만큼 무르익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누구한테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책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 마음으로 못 읽고 마음으로 못 받아들이며 마음으로 못 헤아리는 책이나 노래나 그림이 있어요. 아름다운 책이지만 무엇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못 느끼곤 합니다. 사랑스러운 노래이지만 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못 느끼곤 해요. 놀라운 그림이지만 어느 대목에서 놀라운지 못 느끼곤 하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틀에 사로잡히거나 갇힌 채, 무엇을 즐겁게 바라보고 무엇을 기쁘게 맞이하며 무엇을 아낌없이 부둥켜안아야 하는가를 잊습니다. 날마다 바라보지만 나 스스로 바라보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옳게 못 깨닫곤 합니다. 무엇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지를 못 살피곤 합니다. 내 삶이 어디로 흐르고, 내 삶이 어떠한 결이나 무늬인가를 못 느끼곤 해요.


- “히시미도 참, 좀더 부드럽게 말해도 될 텐데.” ‘그건 그래. 우리도 나중에 그렇게 얘기해 주는데 말야. 으음, 많이 다르구나.’ (162쪽)


 사랑을 하고 싶을 때에는 사랑을 하면 됩니다. 믿음을 이루고 싶을 때에는 믿음을 이루면 됩니다. 꿈을 지키고 싶을 때에는 꿈을 지키면 돼요. 다만, 사랑을 하고 싶을 때에는 참답고 착하며 고운 넋으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참답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곱지 않은 넋으로는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참답지 않을 때에는 믿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꿈을 지키지 못합니다. 곱지 않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느낄 수 있으려나요.

 만화책 《샤먼 시스터즈》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을 한 자리에 겹쳐 놓고 이야기를 풀고 맺습니다. 보이는 삶이 모두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삶이 모두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이 알맞게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 둘레에 또다른 삶이 있기도 합니다.

 어떻든 한 번 누리는 내 삶입니다. 고맙게 선물받아 일구는 꼭 한 번 누리는 내 삶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언제나 한 번 선물받고 한 번 선물하는 내 삶이에요.

 나는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에서 꽤 좋지 못하다 싶은 선물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낳아 돌볼 아이들한테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을 고스란히 물려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가 썩 좋다 싶은 터전을 선물받고도, 내 아이한테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을 물려줄 수 있어요. 앞길은 모르고 앞날은 아리송합니다. 앞길은 흐리고 앞날은 어지럽습니다. 바로 이곳, 바로 오늘, 내 삶을 나 스스로 모르면 내 앞길은 모릅니다. 바로 이곳, 바로 오늘, 내 삶을 나 스스로 알면 내 앞날은 아리송하지 않아요. 아주 또렷합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돈을 조금 더 벌며 이름도 이럭저럭 얻고 싶은 사람은 돈을 조금 더 벌며 이름도 이럭저럭 얻을 만한 길을 찾습니다. 다만, 이런 길을 찾든 저런 길을 찾든, 드디어 길을 찾았구나 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도무지 길을 못 찾는 사람이 있어요. 《샤먼 시스터즈》 2권을 덮고 3권째 읽습니다. 나는 내 보람차며 고마운 오늘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오늘 한가위에도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끝없이 손빨래합니다. 한가위를 맞이해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찾아오니 첫째 아이는 마냥 끝없이 뛰놀기만 하려 드는데, 하루 빨리 우리 네 식구 살가운 숲속 조용한 보금자리를 찾아 옹글며 오롯이 뛰놀 터전에서 네 식구가 그야말로 옹글며 오롯이 뛰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4344.9.12.달.ㅎㄲㅅㄱ)


― 샤먼 시스터즈 2 (쿠마쿠라 다카토시 글·그림,문준식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04.1.15./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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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책읽기


 아이와 서로 손을 잡고 읍내마실을 합니다. 아이는 논둑길을 거닐며 아주 즐거워 노래노래 부릅니다. 아이 손에는 망가진 필름사진기가 들립니다. 아이는 아버지처럼 사진기를 챙겨서 마실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 논둑길을 걷다가 “어?” 하면서 멈추고는 아버지처럼 사진을 찍습니다. 필름이 없으니 새겨지지 않는 사진인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사진기로 들여다보면서 마음에 새긴다면 모두 사진이 됩니다.

 아이하고 읍내를 돈 다음 피자집에 들릅니다. 읍내에 다녀올 때에 옆지기가 피자를 사올 수 있으면 사오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시골집까지 날라다 주는 밥집은 없습니다. 옆지기는 피자보다 돼지뼈감자곰국을 먹고 싶어 했지만, 이 먹을거리를 싸서 갈 수 없고, 읍내에 돼지뼈감자곰국을 하는 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읍내 가게에서 뼈다귀와 감자를 장만해서 내가 끓일까 생각해 보기도 하다가, 고개를 젓습니다. 나중에 함께 읍내에 나갈 때에 찾아서 먹어야지, 집에서 하지는 말자.

 피자집에서 두 판을 시키고 아이랑 나란히 기다립니다. 피자집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큰소리로 온갖 광고와 방송이 흐릅니다. 아이는 넋을 잃고 들여다봅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따분해졌는지 가게 안팎을 이리저리 휘젓듯 돌아다닙니다. 나는 아이가 노는 양을 바라봅니다. 아이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 노랫소리보다 텔레비전 소리가 훨씬 크고, 가게 앞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더 큽니다. 깔깔거리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목소리가 퍽 크고, 피자 굽는 기계가 내는 소리가 꽤 큽니다.

 이것저것 장만하려고 읍내로 나오지만, 이 읍내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읍내보다 훨씬 클 시내에서는, 여느 시내보다 더더욱 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들으며 생각할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골마을 이야기이든, 두릅나무 꽃이 보름 넘게 흐드러진다는 이야기이든, 논마다 누런 벼알이 날마다 얼마만큼 익는다는 이야기이든, 달과 별과 구름과 햇살을 올려다보는 아이들 눈빛이 얼마나 맑은가 하는 이야기이든, 예나 이제나 텔레비전에 흐른 적이 없습니다. 뭐, 책이라 해서 이런 이야기를 즐겨 적바림하지는 않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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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여행 - 케이트가 만난 인상주의 화가들
제임스 메이휴 지음 / 크레용하우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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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샘솟는 사랑으로 그림읽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3] 제임스 메이휴,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



 책을 많이 읽는대서 무언가를 더 잘 알거나 더 제대로 알거나 더 널리 알지는 않습니다. 그저 책을 많이 읽었을 뿐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더 많이 읽느냐 더 적게 읽느냐를 따져서는 안 되고, 따질 까닭이 없으며, 따진들 부질없습니다.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는 동안 내 삶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살펴서 어떻게 살찌우려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책읽기는 지식쌓기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지식쌓기를 이루려고 책읽기를 할 테지만, 마음읽기와 사랑읽기로 이루는 삶읽기로 나아가는 길이 참답다 할 책읽기라고 느낍니다. 곧,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스스로 깨닫거나 찾으려고 손에 쥐는 책이 돼요.

 나는 내 마음그릇에 따라 내 마음을 건드리는 책을 살핍니다. 내 마음그릇을 아직 넓게 열거나 갈고닦거나 추스르지 못했을 때에는 이런 마음그릇 깜냥에 맞게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 마음그릇을 찬찬히 다스리면서 사랑스레 돌본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결에 맞추어 조금씩 테두리를 넓힐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 삶대로 읽는 책입니다. 언제나 내 몸에 맞추어 먹는 밥입니다. 적게 먹는 사람이면서 커다란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은 밥을 먹을 수 없어요. 뷔페집 같은 데에서 신나게 먹을 수 있다지만, 조그마한 내 밥통에 잔뜩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레 잔뜩 먹으면 배앓이를 해요. 배에 탈이 납니다.

 숱한 지식조각을 머리에 집어넣을 때에는 머리앓이를 합니다. 갖은 조각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제자리를 못 찾는 지식조각으로는 가슴을 움직이는 슬기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먹을 만큼 먹는 밥이어야 하고, 담을 만큼 담는 지식이어야 하며, 다스릴 만큼 다스리는 넋이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삶을 헤아리고, 내가 즐길 만한 일거리를 찾으며, 내가 느긋하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이 살아갈 터전을 느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마음껏 펼칠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뜰살뜰 꾸려야 아름답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가득 쏟아 따사로이 읽을 책을 찾아서 받아들여야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무엇이든, 내 마음밭을 일구는 결을 톺아보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어떤 비평가들 잔소리에 휘둘리며 읽는 그림이 아닙니다. 어떤 전문가들 말밥에 어질어질 휘말리며 읽을 그림이 아니에요. 내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꿈이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림 하나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이야기꽃이 피어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 오늘은 할머니의 생일이에요. 할머니는 케이트하고 미술관에 가기로 했어요. 케이트는 미술관을 무척 좋아하지요. 그곳엔 케이트만의 비밀이 있거든요 ..  (3쪽)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내가 좋아하는 결을 살리면서 씁니다. 내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쥐어짤 수 없습니다. 돈을 억수로 안기더라도 내 마음으로 우러나지 않을 때에는 아무 글을 못 씁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내가 사랑하는 결을 보듬으면서 그립니다. 내가 그리고 싶지 않은데 그림을 함부로 그릴 수 없어요. 그림대회가 되든 자화상이 되든 내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여야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북받치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내 가슴속 깊이 아로새깁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치솟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내 가슴속 넓게 펼쳐놓습니다.

 좋아하는 나무 앞에 서 보셔요. 좋아하는 꽃 키높이에 맞추어 앉아 보셔요. 좋아하는 내 아이하고 눈을 마주보면서 코를 살짝 대 보셔요. 그림 하나에 담을 이야기란, 글 한 줄에 실을 이야기란, 사진 한 장에 깃들일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가 될 때에 착하면서 해맑을까 곱씹어 보셔요.


.. “케이트야, 여기 이 아름다운 꽃들을 좀 보렴.” “할머니, 난 물감 얼룩만 보이는걸요.” “그래, 그 물감 얼룩들이 모여서 그림이 되는 거란다. 뒤로 몇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꽃이 잘 보일 거야.” ..  (4쪽)


 수많은 사람들한테 돋보이는 이야기일 때에 내 가슴을 찌릿 울리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았다는 이야기일 때에 내 마음이 번쩍 깨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알아야 하고,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삶을 믿어야 하고, 내 삶을 느껴야 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을 떠올립니다. 제임스 메이휴 님은 《미술관 여행》이라는 그림책에서 ‘케이트’라는 아이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살포시 보여줍니다. 어린이 케이트가 ‘그림읽기’를 하는 길을 넌지시 밝혀요.

 어린 케이트는 비평가나 전문가 눈·코·귀·입을 빌지 않아요. 오직 어린 케이트 가슴을 믿고 어린 케이트 사랑을 꿈꾸면서 그림을 읽어요.


.. 그때 르느와르 아저씨의 그림이 눈에 띄었어요. 한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극장에 앉아 있는 〈첫나들이〉라는 그림이었어요. “할머니께 저 꽃다발을 선물하면 무척 좋아하실 텐데…….” 케이트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꼬옥 감았어요 ..  (21쪽)


 케이트한테는 ‘인상주의 화가’나 ‘르느와르’라는 이름이 덧없습니다. 이런 이름을 알자고 그림을 읽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외우려고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뒤를 잇자며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또다른 루벤스’가 될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고흐를 뛰어넘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가엾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거나 ‘예술쟁이’가 되겠다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지없이 안쓰럽습니다.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에요. 사랑을 불태우려고 그리는 그림이에요. 삶을 밝히면서 꿈을 활짝 드러내는 그림이에요.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좋아서 그림을 읽습니다. 사랑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랑해서 그림을 간직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은 미술관 마실을 하면서 ‘그림읽기 실타래’를 푼다고 할 만합니다. 이렇게 느끼면서 책을 덮어도 나쁘지 않아요. 조금 더 생각하거나 한껏 부푼 사랑을 하고 싶다면, 어린 케이트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넋으로 읽는 그림으로 이루는 예쁜 꽃다발을 나 또한 내 가슴으로 곱다시 껴안는 길을 살펴보셔요. 어린 케이트한테는 물감 얼룩이 모인 그림도 좋은 그림일 텐데, 주름진 살결로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하는 따스한 할머니 손길이야말로 좋은 그림입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미술관 여행 (제임스 메이휴 글·그림,사과나무 옮김,크레용하우스 펴냄,2001.5.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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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1984-1987 1 -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실뱅 사부아 그림, 마르제나 소바 글, 김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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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도 ‘공산주의 나라’도 아닌 만화를
 [만화책 즐겨읽기 62] 실뱅 사부아·마르제나 소바, 《마르지 1984∼1987 (1)》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 마지막 무렵에 어린 나날을 보냈다고 하는 마르제나 소바 님이 쓴 글에 만화라는 옷을 입힌 《마르지 1984∼1987》(세미콜론,2011) 1권을 읽습니다. 책날개에는 “《쥐》,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마르지》! 우리에게 가려진 역사인 동유럽, 한 소녀의 눈을 통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고 적힙니다.

 책날개에 적는 글은 출판사에서 붙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얼마든지 이처럼 적을 만합니다. 그러나, 만화책 《쥐》와 《페르세폴리스》를 읽은 사람으로서 만화책 《마르지》를 펼쳤을 때에, 이 세 가지를 함께 놓을 만한지는 아리송합니다. 아니, 이 세 가지 만화책을 함께 묶을 만한 이음고리가 있는지부터 알쏭달쏭합니다. 세 가지 만화는 어느 대목에서도 겹치지 않습니다. 다만, ‘프랑스에서 퍽 사랑받으면서 알려진 작품’이라는 이음고리를 찾는다면, 요 하나는 얽힙니다.


- 나는 아빠와 빵을 사러 간다. 사는 데는 별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이 동네에 하나뿐인 빵집인지라 거기도 줄이 길긴 마찬가지다. (35쪽)


 프랑스에서 사는 사람이 프랑스에서 다니는 학교에서 듣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는 역사를 《쥐》와 《페르세폴리스》와 《마르지》가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할 때에는 틀리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땅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세 가지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한국땅 세계사 교과서에서 ‘폴란드 이야기’를 한 줄이나마 제대로 적는다고 여길 수 없지만, 한국땅 한국사 교과서에서 ‘한국 이야기’를 얼마나 제대로 적는다고 여길 만할까요. 내 어머니와 내 할아버지가 살아온 나날 가운데 어느 대목이 한국땅 한국사 교과서에 실릴까요.

 이른바 ‘한국 문화’란, ‘한국 전통문화’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요. 우리가 안다는 ‘한국 역사’는 얼마나 ‘한국다운’ ‘역사 이야기’라 할는지요.


- 아침이 되면 따스한 햇살이 날 깨운다. 할머니는 늘 먼저 일어나 있다. 난 이 방이 참 좋다. (51쪽)


 나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폴란드 삶·사람·삶터’를 사진으로 담은 두툼한 책을 몇 권 장만했습니다. 폴란드 사진책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사진책과 덴마크 사진책과 쿠바 사진책과 아르헨티나 사진책과 뉴질랜드 사진책도 장만했습니다. 스웨덴 사진책과 일본 사진책과 버마 사진책과 네팔 사진책 또한 장만했어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오는 동안, 열두 해에 걸쳐 제도권학교를 다닐 때에, 폴란드도 체코슬로바키아도 덴마크도 쿠바도 아르헨티나도 뉴질랜드도 스웨덴도 일본도 버마도 네팔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제대로 가르칠 교과서부터 없지만, 제대로 가르칠 교사조차 없어요. 오직 나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오로지 나 스스로 찾아다니며 알아야 합니다.

 두툼한 사진책 몇 가지를 장만해서 읽는들 ‘옳게 잘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훑을 뿐입니다. 터키 사진책을 장만해서 넘기는 동안 ‘이야, 터키사람은 이렇게 눈부신 빛깔로 무늬를 아로새긴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며 즐겨입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폴란드 사진책을 넘길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와, 폴란드는 이렇게 갖은 빛깔이 무지개처럼 어우러지면서 붉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대단한 나라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네덜란드땅 사람들이 귤빛으로 드러나는 눈부신 빛깔을 사랑하듯, 폴란드땅 사람들은 ‘공산주의’고 아니고를 떠나 붉은 빛깔 옷을 사랑합니다(2002년 한·일월드컵 때 폴란드 관중이 입은 옷을 떠올리면 조금은 짚힐 테지요). 무엇보다 어느 한두 가지 빛깔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맑고 밝은 빛깔을 좋아해요.


- 그래서 아빠는 원래 있는 사진을 빼고, 결말을 바꾸어 말해 준다. 물론 우린 그게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끝나는 게 좋다.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86쪽)


 만화책 《마르지 1984∼1987》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날개 아닌 책겉에 적힌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라는 글줄이 못마땅합니다. 마르지라는 어린이한테는 ‘공산 폴란드’가 아닌 ‘그냥 폴란드’입니다. 전쟁도 혁명도 공산주의도 경제도 모르는 ‘놀기 좋아하는 어린이’ 마르지는 당신 어린 나날을 보낸 이야기를 수수하게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에 ‘어른들’이, 이를테면 ‘프랑스 어른들’이 ‘공산 폴란드 옛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붙일는지 모르지만, 마르지한테는 ‘내 고향나라 고향마을 살아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는 삶과 사회와 사랑에 눈을 뜬 푸름이가 바라본 고향나라 이란 이야기입니다. 만화책 《쥐》는 길디긴 나날이 흘러도 가슴에 아로새겨져서 잊을 수 없는 크디큰 생채기인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페르세폴리스》를 그린 사람이든 《쥐》를 그린 사람이든,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퍽 넉넉하게 살림을 일굽니다. 《마르지》도 이런 틀과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고 모든 만화나 문학이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많은 숫자인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사람들 입과 눈과 코와 귀와 가슴’을 거쳐 만화나 문학으로 태어난 적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 과수원은 정말 넓고, 채소와 과일로 가득하다. 난 과일 따는 걸 좋아한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좋아한다. 내가 여기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기도 하다. (130쪽)


 《마르지》를 그린 실뱅 사부아 님은 이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 앞서까지 폴란드를 간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만화를 그리고 나서부터 폴란드땅을 처음으로 밟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마주보면서 그림결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를 느끼기도 했을 테지만, 폴란드땅을 밟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폴란드라는 나라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지 않느냐 싶어요. 왜냐하면, 폴란드라는 나라는, 땅도 사람도 터전도 자연도 푸성귀도 무엇도 ‘칙칙한 잿빛’이 아니거든요. 폴란드사람이 참 오랫동안 머물며 비손을 드리는 성당 건물 또한 조금도 ‘칙칙한 잿빛’이 아닙니다. 눈부신 무지개빛입니다.

 만화책 《마르지》에 감도는 빛깔은 처음부터 끝까지 ‘칙칙한 잿빛’ 바탕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그렸을 텐데, 누군가, 그러니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프랑스로 옮겨 살아가는 누군가, 당신 고향나라인 대한민국과 서울을 그리면서 프랑스에서 만화로 그린다고 할 때에, 이처럼 ‘칙칙한 잿빛’ 바탕으로 한국과 서울을 그린다 한다면, 한국에서 살거나 서울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한국땅을 칙칙한 잿빛으로 그려도 될까요. 서울이 자동차 끔찍하게 많고 아파트로 꽉 찬 칙칙한 땅이라고는 하나, 이렇다 하더라도 칙칙한 잿빛으로 서울을 그리는 일을 올바르다 할 만할까요.

 ‘마르지가 좋아하는 햇살’과 능금빛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라보는 푸르디푸른 들판과 밭뙈기와 멧자락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빛깔을 입히려 하지 말고 흑백 만화로 그렸다면, 《마르지》 느낌과 이야기가 퍽 많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합니다. 폴란드 빛깔을 옳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렇게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인다면, 폴란드 삶과 사람과 터전을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마르지》를 손에 쥐어 펼칠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안다고 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쥐》와 《페르세폴리스》는 이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한테 ‘어떤 빛깔과 느낌’을 밀어넣지 않습니다. ‘강요’하거나 ‘주입’하지 않아요. 그러나, 만화책 《마르지》는 칙칙한 빛깔 때문에 그만 ‘수수하면서 사랑스러운 내 고향나라 고향마을 이야기’를 샛길로 빠지게끔 밀어넣고야 맙니다.

 1권을 덮었으니 2권을 읽으며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텐데, 2권까지 살 생각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마르지 1984∼1987 (1) (실뱅 사부아 그림,마르제나 소바 글,세미콜론 펴냄,2011.7.29./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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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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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을 만져야 내 몸이 살아난다
 [책읽기 삶읽기 77] 데이비드 몽고메리,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



 혼자 책을 짊어지며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언제나 ‘책을 둘 곳’을 헤아리면서 내 살림집을 찾았습니다. 책을 둘 만한 넉넉하고 볕 잘 드는 곳인가를 생각했고, 여러 책방을 가까이 찾아가기에 괜찮은 목인가를 돌아보았습니다. 내 몸이 느긋하게 쉴 곳인가는 거의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집인가보다 책이 깃들기에 좋은 데인가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요즈음은 달리 생각합니다. 책은 어떻게든 곰팡이가 피지 않는 데에 둘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네 식구 깃들 사랑스러운 터전을 헤아립니다. 네 식구가 먼저 사랑스레 살아갈 만한 터전이어야 좋은 보금자리로 여겨 옮기지, 네 식구가 살가이 지내기 힘든 데라면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으로는 꿈처럼 바라는 곳으로 가기 힘듭니다. 짐차를 불러 옮기는 값부터 만만하지 않으나, 좋은 시골자락 터란, 땅과 집을 장만해서 옮겨야지, 빌려서 들어가면 애써 잘 꾸며 살 만하게 고치면, 금세 집임자나 땅임자한테 쫓겨납니다. 이러다 보니 선뜻 꿈을 꾸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해요.

 어찌해야 좋을까를 놓고 여러 달 망설이고 알아봅니다. 이곳으로 우리 깜냥껏 옮길 만한지 가늠하고, 저곳에서 우리를 불러 주는데, 우리가 옮겨도 될 만한가 어림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마땅한 집터와 책터를 찾기까지는 퍽 품을 들여야겠지요. 오래오래 눌러살 생각이라면, 네 식구가 모조리 가볍게 짐을 싼 뒤 ‘우리가 좋아할 만한’ 마을로 찾아가서 방을 하나 얻은 다음, 좋은 살림집을 찾기까지 눌러지내야겠지요.


.. 흉작일 때 아무런 구제책이 없는 소작농들은 기근 동안 음식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시중에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생계 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살 수 없었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정부들은 곡물을 수출했고, 그렇게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소비에트 농부들은 1930년대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중앙정부가 농부들이 수확한 것으로 도시를 먹이고 해외시장에 내다 팔아서 번 돈으로 산업화의 비용을 댔기 때문이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19세기 말 무렵에 유럽 나라들은 대개 수입 식품으로 국민들을 먹였다 ..  (154∼155쪽)


 옆지기와 함께 읽는 ‘아나스타시아’를 떠올립니다. 러시아 타이가 잣나무숲에서 살아가는 아나스타시아는 식구들이 살아갈 보금자리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둘째로 좋거나 셋째로 좋은 데가 아닌 가장 좋다고 여기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요.

 첫째로 좋다고 여길 만한 데라기보다 둘째나 셋째로 괜찮다고 여길 만한 데로 옮기려고 생각하던 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넷째나 다섯째 자리라 하더라도 마음을 느긋하게 내려놓을 데라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첫째가 아니고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한 번 받은 고마운 목숨을 살아가는 나날인데, 돈 걱정이나 집 걱정에 앞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가 아닌가를 따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면서 보고 들으며 부대낄 좋은 보금자리인가 아닌가를 아로새겨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늘 즐거운 터전이어야 합니다. 낮에 신나게 뛰놀고 밤에 새까만 별하늘을 올려다볼 터전이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있고, 너른 멧자락과 파란 바다를 이웃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이 잘 뚫린 데라든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학교가 가까이 있다 한들 부질없습니다. 아이 삶을 보건대, 이런 물질과 문명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지식이 덧없습니다. 아이 삶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날마다 숨쉬고 마시며 먹는 자연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흙의 침식이 고대사회들을 무너뜨렸고 오늘날의 사회도 심각하게 뒤흔들 수 있다는 무시 못 할 증거 앞에서도 지구적인 흙의 위기와 식량 부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미 1980년대 초반에 농업경제학자 레스터 브라운은 현대 문명이 석유보다 먼저 흙을 다 써 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어진 그런 불안한 예측들을 한귀로 흘려 버리면서 전통적인 자원경제학자들은 흙의 침식이 식량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을 지나쳤다. 그러나 침식 탓에 농경지에서 흙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흙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그런 관점은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흙의 유실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는 때가 2010년이냐 2100년이냐 하는 논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  (246쪽)


 이야기책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양사람들은 흙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동양사람들 가운데 퍽 많은 이들이 서양사람들처럼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얻어 지낸다고 할 때부터 흙을 하찮게 여기고 맙니다.

 흙은 문명도 물질도 과학도 아닙니다. 흙은 오로지 자연이고 삶이며 목숨입니다.

 사람은 문명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라는 옷을 입으면, 몸을 덜 쓰거나 땀을 안 흘리면서 돈은 넉넉히 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며 물을 들이켜야 합니다. 밥·숨·물이 없이 어떤 사람이 몇 초나 살아숨쉴 수 있겠습니까. 밥·숨·물이 없는데 돈·힘·이름으로 무얼 할 수 있는가요.


.. 우리는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8쪽)


 이야기책 《흙》은  수많은 보기를 오랜 발자국을 더듬으면서 하나하나 알뜰히 짚습니다. 바보스레 살아온 서양 문명 사회를 낱낱이 꼬집거나 나무랍니다. 384쪽에 이르는 줄거리는 한결같습니다. 머리말에 한 줄로 적은 말마디처럼, 《흙》은 예나 이제나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슬프며 안타까운 사람들 근심스럽고 안쓰러운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흙을 먹고 흙을 입으며 흙에 몸을 누여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흙을 잊는다면 사람은 사람 구실을 못 합니다. 흙하고 멀어지면 몸은 자질구레한 못난 것들이 스며들어 무너지기 때문에 자주 아프고 오래 앓습니다. 흙을 만져야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적어도 텃밭을 돌보거나 조그마한 꽃그릇을 건사해야 사람다움을 살포시 잇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씀,이수영 옮김,삼천리 펴냄,2010.11.26./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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