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책읽기


 음성 할머니가 아이한테 옥수수를 쪄서 내준다. 옥수수는 퍽 뜨겁다. 그렇지만 아이는 이 뜨거운 옥수수자루를 거침없이 집어든다. 아뜨 아뜨 하면서도 옥수수자루를 입에 문다.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다 보니 뜨거운 옥수수라 하더라도 뜨거움을 견디면서 먹는다.

 뜨거운 옥수수를 맛나게 먹는 아이를 바라보는 옆지기는 이듬해에 옥수수를 많이 심어야겠다고 얘기한다. 그렇지. 아이도 옆지기도 옥수수를 잘 먹는데, 우리 텃밭에 옥수수를 잔뜩 심어야지. 새 보금자리에서 우리가 지을 텃밭을 얼마나 얻을 만한지 모르지만, 요 빈터 저 빈터에 신나게 심어야지. 겨우내 똥오줌 거름 잘 모아서 거름도 예쁘게 주어야지. 새해를 맞이해서 새롭게 옥수수를 심을 때에는 첫째 아이는 다섯 살이 될 테니까, 올해보다는 흙일을 한결 잘 거들겠지.

 아이는 아직 글을 모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더라도 아이한테 글을 가르칠 생각이 없다. 네 살이건 다섯 살이건 글을 배우기에 퍽 이르다고 느낀다. 일곱 살까지는 글을 몰라도 되고, 여덟 살이 되어도 글을 몰라도 돼. 아이 스스로 글을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이야기할 때에 비로소 글을 가르치면 돼.

 글을 모르는 아이라 하지만, 호미 쥐기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배운다. 씨앗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하나씩 둘씩 집어 밭고랑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쏙쏙 넣고 손바닥으로 판판하게 덮는 일 또한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양을 바라보면서 배운다. 아이는 흙을 일구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읽지 않는다. 아이는 이런 책을 읽을 수조차 없다. 아이는 몸으로 배우고 삶으로 익힌다. 아이는 스스로 흙하고 하나로 얼크러지면서 흙을 돌보거나 아끼거나 사랑하는 길을 배운다.

 돌이켜보면, 자연사랑이나 환경사랑 같은 이야기는 책을 아무리 많이 읽는대서 깨닫거나 느끼거나 배울 수 없다. 도시에서 살아가며 자연사랑이나 환경사랑을 할 수 없다. 도시 일자리를 내려놓고 시골로 가야 한다. 도시에서 돈을 좀 덜 벌면서 빈터가 있는 보금자리를 찾아 텃밭을 일구어야 한다. 스스로 흙을 만지면서 하늘바라기를 할 줄 모른다면, 환경책을 천만 권 읽는들 더할 나위 없이 부질없다. (4344.9.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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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책읽기


 엊저녁부터 22℃로 떨어진다. 드디어 올해에도 가을이 한복판에 이르는 한편, 머잖아 겨울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저녁나절 방 온도가 22℃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보일러를 한 차례 돌린다.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던 때 22℃는 이제부터 보일러를 적게 때거나 안 때도 된다는 뜻이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22℃는 이제부터 신나게 보일러를 때야 하는 철이 닥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22℃는 온도계를 보기 앞서 내 살갗과 몸으로 먼저 느꼈다. ‘어, 오늘은 저녁부터 퍽 쌀쌀한데. 오늘은 창문을 더 일찍 닫아야 하는구나.’ 하고 느꼈다. 아직 한가위가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꽤 쌀쌀하다고, 좀 서늘하다고 느끼는 저녁바람이 되었다고 느끼면서 온도계를 보았다. 그제까지는 저녁에 24℃나 25℃였고, 한밤에 23℃나 22℃까지 떨어졌다. 이제는 해가 떨어진 저녁부터 22℃가 되었으니, 곧 한밤에 20℃나 19℃까지 떨어지겠지.

 시골에서 살아가더라도 읍내나 시내로 일하러 다니는 사람은 이러한 온도를 잘 못 느끼리라 본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하늘과 구름과 달과 해와 바람과 나무와 풀을 살필 때에 비로소 이러한 온도를 잘 느끼리라 본다. 두릅나무 작고 하얀 꽃이 한창 흐드러지다가 이제 하나둘 저문다. (4344.9.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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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 씻기


 아침에 아이를 씻기는데 무언가 미끈거려 내려다보니, 허벅지에 똥이 묻었다. 바지에도 묻었다. 이 녀석이 똥을 언제 누었지? 소리 없이 누었나? 아니, 소리 내며 누었을 텐데 아이를 씻기려고 물을 받는 사이에 누었나 보다. 그래, 잘 했다. 씻기다가 똥을 누었으면 물을 다시 받아야 하잖아. 내가 입던 바지도 곧 빨아야 했으니 잘 되었지. 똥 눈 아이 엉덩이부터 씻기고 몸을 씻긴 다음 똥빨래를 신나게 한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모두 내 맨손으로. (4344.9.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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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하니 1 - 바다어린이만화
이진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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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살아갈 힘을 북돋우는 오직 한 가지
 [만화책 즐겨읽기 39] 이진주, 《달려라 하니 (1)》


 두 아이를 데리고 음성 할아버지한테 찾아갑니다. 며칠 앞서 음성 할아버지 태어난 날이었는데, 이날 마침 춘천으로 새 보금자리를 보러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며칠 늦은 생일축하를 하러 어제 온 식구가 찾아갑니다.

 생일축하를 하러 간 우리 네 식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옆지기가 아침에 집에서 구운 케익을 칼로 알맞게 썰어 그릇에 담아 가져갑니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로 하나 써서 깨끗한 종이에 옮겨적어 가져갑니다. 첫째는 마냥 신나게 뛰어놉니다. 둘째는 얌전하게 누워서 새근새근 잡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한테든 생일축하로 가장 좋은 일이란 더 큰 선물이나 더 돋보이는 선물이나 더 값진 선물이 아니라 할 만합니다. 함께 어울리고 나란히 밥을 먹으며 느긋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때가 가장 좋은 일일 수 있어요. 무슨 선물보따리를 잔뜩 짊어지고 찾아가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만, 생일을 맞이한 사람한테 찾아가는 ‘내’가 바로 살아숨쉬는 선물일 수 있으리라 느껴요.

 곧, 내가 바로 선물이고 옆지기가 바로 선물이며 두 아이가 바로 선물이에요. 나부터 내 생일 때에 누군가 이런저런 선물을 잔뜩 안길 때보다, 서로 얼굴 한번 보자며 찾아와서 몇 마디 말을 섞을 때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우며 즐거워요.


- “이 악바리야! 졌지? 별거 아닌 것이 사나이 앞에서 까불고 있어! 앞으로는 내 앞에서 까불지 마! 알았지? 이 키 작은 못난이 계집애야!” (24쪽)
- “너 달리기 좋아하니? 그, 뭐냐, 육상이란 거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뛰는 거요? 저도 가끔 한 번씩 힘차게 달려 봤음 하고 생각해요. 숨이 차도록! 특히 엄마 생각이 날 때면 엄마 품까지 내처 달려 보고 싶어요. 하늘 끝까지라도.” (80쪽)


 1985년에 〈보물섬〉에 실리고, 1989년에 만화영화로 나온 《달려라 하니》(드림필드) 1권을 새삼스레 다시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어느덧 스물예닐곱 해를 먹은 만화가 된 《달려라 하니》인데, 만화책으로나 만화영화로나 참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오래된’ 이야기에 깃든 따스함이나 너그러움을 요즈음에는 쉬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하니를 예쁘게 볼 수도 있을 테지만, 하니나 하니를 둘러싼 사람들은 예쁜 모습이나 예쁜 얼굴이라기보다 귀여운 모습이나 얼굴이라 할 만하고, 조금 더 찬찬히 살피면, 하나같이 동글동글한 모습이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모습입니다. 만화 줄거리를 이루면서 하니하고 맞수가 되는 어린이나 어른 한두 사람은 좀 뾰족하거나 모가 났다고 느끼지만, 이들도 나중에는 동글동글하면서 투박한 매무새로 거듭납니다. 도드라질 대목이 없고, 눈부신 모습이 없으며, 남다른 빛깔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드라질 대목이 없으면서 재미나고, 눈부신 모습이 없으면서 아름다우며, 남다른 빛깔이 없이 착합니다.

 오늘날 숱한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는 한결같이 ‘도드라져 보이려는 줄거리’에 ‘눈부시게 보이려는 모습’에 ‘남달리 보이려는 그림’이 가득합니다만, 썩 재미나거나 아름답거나 착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대단할는지 모르나, 만화책으로든 만화영화로든 두고두고 되읽거나 다시 보면서 즐길 만한 맛과 멋을 헤아리지 못하는 오늘날 만화책이요 만화영화라고 느끼요.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에 《달려라 하니》를 읽으면서 하루에도 서너 차례 되읽었습니다. 이듬날에도 서너 차례 또 되읽었습니다. 다음날에도 새삼스레 서너 차례 되읽었습니다. 동네에 한 주에 두 번 찾아오는 ‘책 빌려주는 차’에서 〈보물섬〉을 빌려서 사흘에 걸쳐 아홉 번이나 열 번은 가볍게 다시 보면서 가슴으로 빨아들였습니다.

 한 번 보고 다시 안 볼 만한 만화라면 처음부터 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공부나 숙제를 안 해도 되고 만화책만 보아도 된다면, 아마 하루 동안 열 차례이든 스무 차례이든 되읽을 테지요.


- “잔소리 말고 가서 두부나 두 모 사 와!” “칫! 매일 나만 시키고. 명화 누나는 왜 안 시켜요?” “누나는 대학생인데다 매일 아침마다 열심히 피아노 연습하지 않니?” “아빠는요?” “쿨! 드르렁!” (50쪽)
- “하니!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소꿉장난 하냐?” “김치요.” “에라! 이 녀석아! 이리 내놔! 김치란 이렇게 담근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 음식 맛이란 손끝에서 우러나는 정성과 양념 양에 따르는 거란 말야. 마늘과 파, 중요한 거야. 난 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며 자취하기 때문에 죄다 알아. 그래서 나는 어려서 혼자도 살아 보고 고생하며 크는 걸 찬성하는 사람이란다. 물론 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안 되지. 그런 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하니! 너를 보고는 안심했다. 넌 얼마든지 혼자 힘으로 꿋꿋하게 지낼 놈이야. 자! 간이 어떤지 맛 좀 봐라!” (76∼78쪽)



 하니는 중학교 1학년 나이에 홀로 옥탑방을 얻어 밥을 하고 김치를 담급니다. 그렇다고 살림을 잘 해내지는 못해 홍두깨 선생님이 하나하나 도와줍니다만, 열네 살 나이에 꿋꿋하고 씩씩하게 제 길을 걸어요. 열네 살이나 되었으면서 ‘엄마 품’만 그리워 할 수 있겠느냐 따질 수 있을 텐데, 가슴에 사무치는 고운 사랑이기 때문에 열네 살이 아닌 스물네 살이나 서른네 살에도 이처럼, 하니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 이렇겠지 하고 여길 수 있을 텐데, 철이 덜 들면 철이 덜 든대로 아름다이 살아가면 되고, 철이 더 들었으면 철이 더 든대로 참다이 살아가면 됩니다.

 어떤 틀에 박혀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틀에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규율이 있고 규칙이 있다지만, 어떤 규율이나 규칙이든 사람들이 사람다이 살아가기 좋도록, 곧 사람이 사람다운 아름다움을 빛내도록 이끌거나 돕는 규율이나 규칙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틀에 짜맞추려는 규율이나 규칙이라 한다면 독재 정치예요.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규율이나 규칙을 맞출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은 달리는 빠르기가 다르고, 밥 먹는 부피가 다르며, 몸으로 쓰는 기운이 달라요. 어린 하니는 빛처럼 빨리 달린다지만 창수는 어영부영 느립니다. 어린 하니는 응어리진 생채기로 괴롭지만, 창수는 집식구들 따스한 사랑을 받으면서 외로운 하니한테 따스한 사랑을 나눌 줄 압니다. 홍두깨 선생은 어릴 적부터 가난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시달렸지만, 이 모든 아픔을 남을 해코지하는 데에 쏟지 않아요. 이 모든 아픔을 내 이웃과 동무를 더 따사로이 보듬는 착한 넋으로 북돋웁니다. 나애리는 달리는 솜씨 하나를 타고났으나, 이 타고난 솜씨로 고운 빛줄기를 갈고닦는 데에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타고난 솜씨를 끌어올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않고 찾지 못하며 찾을 뜻이 없습니다.

 만화책 《달려라 하니》는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얼크러지면서 툭탁툭탁 쌓아올리는 사랑을 들려줍니다. 어설퍼도 기쁜 사랑을 쌓아올리고, 모자라도 너그러운 사랑을 쌓아올리며, 슬프기에 눈물로 어루만지는 사랑을 쌓아올립니다.


- 놀림을 받아도 또 한 번 쳐다보게 되는 아이. 그렇게 좋은 감정. 사춘기가 오는 소리. (61쪽)
- ‘엄마는 그저 하니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돼! 난 엄마에게 아무것도 안 바랄 거야.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 가슴의 기억만 있으면 돼.’ (130쪽)
- ‘그 집은 처음부터 내가 살던 집이야. 자기들 멋대로 팔아버렸지만 내 집이야. 그 집, 거기엔 엄마의 기억이, 그 집 거기엔,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이. 우리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을 빼앗은 계집애! 다음에도 까불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조심해! 가만 안 놔둘 테니까!’ (157쪽)


 한창 가을로 접어든 날이기에 이제부터 낮이 짧아지고 어스름이 일찍 찾아듭니다. 슬슬 어스름이 찾아들 무렵 네 식구는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할아버지가 자가용을 몰아 데려다주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첫째 아이가 곯아떨어집니다. 첫째 아이는 할아버지 차를 타기 앞서까지 지칠 줄 모르는 듯 ‘어쨌든 졸린 눈’으로 신나게 놀다가, 할머니 품에 안겨 한 오십 미터쯤 달릴 무렵 아주 깊이 잠듭니다. 온 기운을 쏟아 마음껏 놀았겠지요. 모든 힘을 터뜨려 신나게 뛰었겠지요.

 살아가는 힘은 사랑입니다. 살아내는 기운은 믿음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더 살아냅니다.

 돈이 있기에 살아가지 않습니다. 든든한 일자리가 있대서 살아내지 않습니다. 자가용이 없으면 걷거나 버스나 택시를 타면 됩니다. 자전거도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면 돼요. 집이 없으니 다른 사람 집에서 얻어 지내거나 방 하나 얻어 함께 살아갑니다. 나한테 돈이 없으면 누군가 나보다 돈이 더 있는 사람한테서 얻습니다. 나한테 땅이 없으면 누군가 땅이 있는 사람한테서 빌려서 흙을 일굽니다.

 나는 내가 더 가지거나 더 누린다고 여기는 무언가를 나눕니다. 글을 쓰는 나는 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나는 사진을 나눌 수 있습니다. 케익을 굽고 뜨개양말을 뜰 수 있는 옆지기는 집에서 구운 케익을 나누고 손수 여러 날 걸쳐 뜬 뜨개양말을 나눕니다.


- 악바리라 불리워 버린 소녀. 부릅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 키 작은 몸으로 무서운 스피드를 내는 소녀. 그러나 그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한, 그 애 이름은 하니! (26∼27쪽)
- 아직은 엄마 품에서 응석을 부릴 나이, 부릅뜬 두 눈이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릴 것 같은 아이. 악바리라 불리는 아이, 하니! (33쪽)



 어느새 저녁이 찾아들고 반달이 뜹니다. 어느덧 반달은 기울고 머잖아 새벽이 희뿌윰하게 밝겠지요. 온갖 풀벌레는 거침없이 웁니다. 풀벌레들은 저희 목숨을 오롯이 누리면서 새벽이고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밤이고 울음소리를 곱게 나누어 줍니다. 나는 이 풀벌레 울음소리를 받아먹으면서 가을날을 실컷 누립니다. 고운 결 노랫소리는 귀로도 스미고 살갗으로도 스미며 가슴으로도 스밉니다. 새근새근 자는 두 아이 몸으로도 스미고, 곁에서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는 옆지기한테도 스밉니다. 작은 살림집에 건사하는 책들한테도 스밀 풀벌레 노랫소리이고, 날마다 우리 식구들 고맙게 먹는 밥그릇에도 스밀 풀벌레 울음소리입니다.

 나는 이 가을날 풀벌레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우면서 고맙고 즐겁습니다. 나는 이 가을날 책상맡에 《달려라 하니》를 얌전히 꽂고는 백 번이고 즈믄 번이고 신나게 꺼내어 다시 들출 수 있어 반가우면서 고맙고 즐겁습니다. 네 살 아이도 《달려라 하니》를 혼자 스스럼없이 꺼내서 주루룩 넘겨서 보곤 합니다. 아이는 이선희 님이 부른 만화영화 주제노래를 아주 잘 부릅니다. (4344.9.7.물.ㅎㄲㅅㄱ)


― 달려라 하니 1 (이진주 글·그림,드림필드 펴냄,1996.10.27./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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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9-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달려라 하니 다시 보고 싶어요.
저 어릴 때 동네 만화가게는 요즘의 만화방 같지 않고 (요즘 만화방이 어떤지는 사실 잘은 모르지만) 정말 초등학생 꼬마들만 가는 만화가게였어요. 다닥다닥 모여 앉아 만화 읽는 재미에 빠져 밖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저를 찾아나선 할머니에게 잡혀 나왔지요 ㅋㅋ
꺼벙이도 하니도 모두 그리워져요.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지요.

파란놀 2011-09-07 19:48   좋아요 0 | URL
저 2001년에 다시 나온 판도 얼마 안 되어 품절이 되었어요. 새로 나와도 요즘 아이들은 재미있게 사 읽지 않으니까 추가 쇄를 안 찍는 듯해요. 어쩌면 만화책 운명은 이와 같은지 모르지요.

그래도, 인터넷에서 판도라티비에서 찾아보면 1989년에 했던 만화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답니다~
 
고향 -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황학주 글, 배병우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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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51] 배병우·황학주, 《故鄕》(생각의나무,2007)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지만, 멀거니 떨어진 자리에서 부산스레 오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합니다.

 사람이 붓과 종이를 만들었고, 사람이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살붙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들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종이에 글을 쓰든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든, 사람이 글을 씁니다. 사람이 쓰는 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기고, 사람을 둘러싼 너른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만큼, 이 사람살이를 글로 옮깁니다.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렇게 여섯 가지를 사진으로 담아 큼지막하게 빚은 사진책 《故鄕》(생각의나무,2007)을 읽습니다. 꽃과 바다와 바위와 소나무와 숲과 오름은 배병우 님이 사진으로 담고, 황학주 님이 글을 씁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으로서 바라보거나 마주한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을 보여줍니다. 황학주 님은 황학주 님으로서 느끼거나 맞아들인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사진을 보고 글을 봅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이야기를 담았을 테고, 글은 글대로 이야기를 실었을 테지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꽃은 얼마나 꽃다울까요. 이 바다는 얼마나 바다다운가요. 이 바위는 얼마나 바위답다 할 만한지요. 이 소나무는 얼마나 소나무다운 목숨인지요. 이 숲은 어디에서 숲다운 모습일까요. 이 오름은 어떻게 오름다운 모습일는지요.

 더 톺아보면, 내가 내 살림자리 곁에서 늘 바라보는 꽃은 ‘내가 바라보는 꽃’입니다. 이 꽃들은 내가 바라보지 않더라도, 또 사람들이 ‘꽃’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언제나 이곳에서 이 모습대로 살아냈습니다.

 사람들이 꽃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꽃다움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어느 한 사람다움’을 알뜰살뜰 빛내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사진이란 ‘사진으로 담기는 넋 밑삶이나 밑모습을 드러내는 일’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만 가까운지 모릅니다.

 새벽이슬을 머금는 봉숭아랑, 아침햇살 스미는 봉숭아랑, 한낮 눈부신 햇살을 받는 봉숭아랑, 어스름이 깔리는 봉숭아랑, 달빛을 맞아들이는 봉숭아랑, 새까만 깊은 밤 봉숭아랑, 어느 모습이 봉숭아 꽃다운 모습이 될까요. 시골자락 밭뙈기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골목집 담벼락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꽃그릇에서 얌전히 자라는 봉숭아랑,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스스로 자라는 봉숭아랑, 그늘진 데에서 조용히 꽃망울 피우는 봉숭아랑, 어느 꽃자락이 꽃답다 할 만한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책 《故鄕》을 펼치면서 거듭 돌이킵니다(거듭 돌이키니, 이 사진책 이름은 ‘故鄕’이지 ‘고향’마저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꽃은 꽃다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고향을 생각하거나 떠올리는 사람 마음에 새겨진’ 모습을 되새기는 징검돌 같은 꽃이 될 뿐입니다. 바다도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바다를 보여주는 바다 사진이 아닙니다. 바위를 보여주는 바위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보여주는 소나무 사진이 아니요 숲 사진이 아니며 오름 사진이 아니에요. 언제나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 틀거리에 따라 잘라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를 헤아립니다. 이름없을 뿐더러 사진쟁이조차 아닌 여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길 때를 돌아봅니다. 어느 쪽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삶’일까요.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분들은 왜 ‘작가’가 될까 궁금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졌기에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 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다 하지만, 이 소나무 사진들은 얼마나 소나무다움을 드러낼는지요. 소나무가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소나무로서 ‘그래 그래, 이 사진들은 바로 나, 소나무 삶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지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배병우 님 스스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말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소나무 꽃잎이나 뿌리나 줄기를 찍는 사람은 ‘소나무를 못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위에 뿌리내려 자라는 소나무를 찍든, 민둥산에 한 그루 달랑 남은 소나무를 찍든, 몇 천만 원어치 값을 뽐내며 학교나 체육관이나 회사나 아파트 들머리에 심긴 소나무를 찍든, 어디에서나 ‘소나무를 찍는 사진’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소나무는, 어디에서 자랄 때에 ‘소나무다운 소나무’일까요. 사람 발길이 뜸한 데에서야 비로소 소나무일는지요. 아파트 앞에 심으면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소나무는 경주에서만 소나무요, 서울 남산에서는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우물을 파고 우물에 갇혔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쪽에 얽매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길어올리는 사진을 바라보거나 다루거나 비평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 스스로 우물을 파거나 울타리를 친다 할 만합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이 바라보는 대로 꽃도 찍고 바다도 찍고 바위도 찍고 소나무도 찍고 숲도 찍고 오름도 찍고 할 뿐입니다. 구태여 ‘배병우 아닌 다른 사람 눈길’로 꽃이나 바다나 바위나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어요. 그런데, 퍽 슬프게도 배병우 님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당신 눈길’이 아닌 ‘당신들이 좋아한다는 배병우 님 눈길’을 좇거나 시늉하거나 따르면서 어설픈 껍데기 사진에 사로잡힙니다. 곧,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 사진을 즐긴다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자,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즐기는 사진을 마음껏 누려 보셔요.’ 하고 이끌지 못하는 노릇입니다. 온통 따라쟁이만 낳습니다. 온통 흉내쟁이만 키웁니다.

 《고향》이라는 사진책은 모두 여섯 갈래로 나누어 고향이라는 삶자리를 돌아봅니다. 고향을 이 여섯 갈래로 나눌 만한지부터 아리송한데, 이 여섯 갈래로 나눈다 할 때에, 어느 한 갈래도 ‘도시하고 가깝지 않’습니다. 여섯 갈래 모두 도시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이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는 꽃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없습니다. 아니, 도시는 꽃조차 들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키우는 꽃은 돈이 되는 꽃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꽃은 모조리 잡풀로 여겨 뽑아냅니다. 그렇다면, 이 사진책에서 밝히는 ‘고향’에서 자랄 꽃은 어떤 꽃인가요. 참말 고향이라는 데에는 꽃이 있을까요.

 이제 사진책 《고향》을 덮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진책 《고향》을 이제 덮습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에서 흘러든 똥물과 쓰레기가 가득한 나머지, 앞바다에서 똥냄새와 쓰레기내음을 피웁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로 올려보낼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가득해서, 언제나 매연을 마시고 언제나 짐 가득 실은 짐차 배기가스까지 신나게 마십니다. 나한테 내 고향은 시커먼 빛깔에 가까운 잿빛입니다. 돌도 흙도 햇빛도 물도 바람도 풀도 홀가분하기 어려운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꽉 막힌 데에서도 내 어버이와 내 이웃들은 텃밭을 일구고 꽃밭을 마련하며 웃음눈물을 나누더군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잘난 이야기를 길어올리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돈을 벌자며 사진기 단추를 눌러대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을 담습니다. 사람이 만든 사진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은 ‘사람 얼굴’을 찍는대서 담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골목길’을 찍는대서 실리지 않습니다. 들꽃이나 골목꽃 한 송이를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빛깔을 담습니다. 길바닥에 구르는 돌이나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내음을 싣습니다. 들판을 찍거나 멧자락을 찍거나 바닷물을 찍거나, 누군가 이곳에 얌전히 섰기 때문에 들판 사진이나 멧자락 사진이나 바닷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이 지구별 기스락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을까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람내음은 얼마나 깃드는가요. 사람이 만들어 나누는 사진기란 사람들 사랑을 얼마나 옮길 만한 따스한 연장이 되는가요. (4344.9.6.불.ㅎㄲㅅㄱ)


― 故鄕,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배병우 사진,황학주 글,생각의나무 펴냄,2007.3.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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