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ve McCurry; The Unguarded Moment : Thirty Years of Photographs by Steve McCurry (Hardcover)
McCurry, Steve 지음 / Phaidon Inc Ltd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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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뜰한 사랑을 담는 밥그릇 같은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6]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the unguarded moment》(PHAIDON,2009)


 수천만 대까지 팔린 사진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수백만 대 넘게 팔린 사진기는 꽤 됩니다. 일본 니콘이나 캐논에서 만든 사진기 가운데에는 지구별 곳곳에 수백만 대가 퍼질 만큼 널리 사랑받은 사진기가 있습니다. 수백만 대 만들어진 사진기는 수백만 사람 손을 거쳐 수백만을 웃도는, 아니 수억만에 이를 사진을 빚습니다. 수억만이라는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도록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을 사진이 지구별 곳곳에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두루 알려진 작품이 있고, 하나도 안 알려진 작품이 있습니다. 두루 알려지기는 했으나 그닥 살갑지 못하다 싶은 사진이 있을 테며, 하나도 안 알려졌으나 더없이 살가우며 애틋한 사진이 있을 테지요.

 사진기는 많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도 많습니다. 사진 또한 끝없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진기로 일구는 이토록 많은 사진 가운데 사진쟁이 가슴부터 촉촉히 적시는 살뜰한 사랑 깃든 사진은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기로 찍으면 사진이 만들어집니다. 어떠한 사진이든 모두 사진입니다. 그런데, 찍기는 찍었으되 사랑하는 넋을 담지 못했을 때에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지 궁금합니다. 책을 읽기는 읽었으되 책에 서린 사랑스러운 넋을 가슴으로 삭여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에도 책읽기라는 이름이 걸맞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가공식품으로 이루어진 밥이든 손수 일군 곡식과 푸성귀로 지은 밥이든, 어떤 밥이든 먹으면 배가 부릅니다. 어찌 되든 배가 부르면 기운을 차립니다. 좋은 밥을 먹든 나쁜 밥을 먹든 배가 부르면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살림이 팍팍한 나머지 좋은 밥이나 나쁜 밥을 가릴 겨를이 없이 배만 채우면서 일하는지 모릅니다. 배채우기로도 벅차기에 아름다운 삶이나 따사로운 사랑이나 너그러운 믿음을 건사할 겨를이 없다 할는지 모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다가는 나와 내 살붙이 모두 굶어죽을까 걱정스러우니까 ‘돈벌이 되는 사진을 찍’든지 ‘돈벌이 되는 다른 일거리를 찾’든지 해야 한다고 여기곤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길을 사진쟁이로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사진밭에 사진꿈을 키우려는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스티브 맥커리(Steve McCurry) 님은 《the unguarded moment》(PHAIDON,2009) 같은 사진책을 내놓습니다만, 스티브 맥커리 님이 빚는 사진으로 보이는 ‘빛깔 느낌’을 흉내내거나 따르는 사람만 많을 뿐, 정작 스티브 맥커리 님이 왜 ‘스티브 맥커리 사진 빛깔 느낌’을 선보이면서 이야기 한 자락 나누려는지까지 톺아보지 않아요.

 사진책 《the unguarded moment》는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는 밥그릇 하나와 같을 수 있을 때에 아름답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를 읽을 때에 밥그릇 하나를 비우며 배부를 수 있도록, 마음을 부르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 하나를 찍을 때에 밥그릇 하나에 따순 사랑을 담아 살뜰한 밥차림이 될 수 있게끔 애쓰듯, 마음을 살찌우는 따순 사랑을 담아 살뜰한 사진넋이 꽃피어야 한다고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내 몸과 마음부터 아끼는 사랑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내 몸과 마음부터 아끼는 사랑을 밑바탕으로 깨달아, 내 이웃사람들 몸과 마음을 어떻게 보살피거나 보듬으면서 아끼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하고 헤아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밥 한 그릇 내밀지 못합니다.

 사랑을 느끼기를 꿈꾸면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사랑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밥 한 그릇 소복히 담아서 내밉니다.

 무르익는 가을날, 귀뚜라미는 하루 내내 쉬지 않고 웁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집 둘레 풀밭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하고 뒤섞이면서 내 몸과 마음으로 촉촉하게 젖어듭니다. 사랑스러운 울음소리요, 어여쁜 목숨결입니다. 시골자락 작은 집에서 네 식구 옹기종기 복닥이는 살림을 꾸리는 애 아빠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와 같은 밥을 차리자고 생각하고, 풀벌레 울음소리와 같은 사진을 찍자고 다짐합니다. (4344.9.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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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학교 나의 학급문고 6
이가을 지음, 임소연 그림 / 재미마주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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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는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6] 임소연·이가을, 《나머지 학교》(재미마주,2002)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인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지내며 배울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고 여기니, 학교에 아이들을 보낸다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미리 찬찬히 헤아리는 어버이는 퍽 드물지 않느냐 하고 느낍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맡는 교사 또한, 아이들이 집에서 배울 수 없고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참말 무엇인지’를 옳게 살피거나 느끼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학교는 교과서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는 교과서에다가 갖가지 특기적성과 외국어를 앎조각으로 집어넣는 곳이 되고 말았지만, 학교는 지식이나 정보나 특기나 직업훈련으로 뒤엉킨 곳일 수 없습니다. 학교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할 이웃을 배우고 삶을 느끼며 사랑을 깨닫는 가슴을 북돋우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집에서 함께 지내는 어버이와 같아야 합니다. 어버이 노릇을 하라는 교사가 아닙니다. 어버이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몸으로 보여주고 마음으로 나누는 넋’이 무엇인가를 옳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곧, 교사는 어버이다움을 알아야 하고, 어버이는 교사다움을 알아야 합니다.

 먼 옛날부터, 그러니까 학교라는 틀이 없던 먼 옛날부터, 이 땅이건 이웃 땅이건 교사라는 사람은 따로 없었습니다. 양반집 아이들이 다니던 서당이 있었다 하고, 더 옛날에는 권력자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땅 95%가 넘는 아이들은 배움터라는 데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작은 집에서 작은 어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때로는 4촌과 6촌과 8촌으로 퍼지는 살붙이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몸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쳤습니다. 따로 가르친다고 말할 구석 없이 몸으로 보여주며 살아냈습니다.

 집안에서 집안일을 합니다. 집밖에서 집밖일을 합니다. 지게를 만들어 멧자락으로 들어선 다음 나무를 하고 나서 즐거이 짊어지고 돌아옵니다. 장작에 불을 지펴 아궁이를 땝니다. 우물이나 냇가에서 물을 길어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며 여물을 쑵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합니다. 누에를 치고 실을 자으며 물레를 돌리고 베틀을 밟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장과 반찬을 담그며 메주를 띄웁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밥·옷·집이 있어야 합니다. 예부터 여느 사람들은 배움터라는 데를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마련했습니다. 예부터 여느 사람들 여느 집안에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누구나 ‘어버이가 아이들하고 함께 일하고 놀면서’ 삶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었습니다.


.. ‘골말로 오지 말고 논두렁길로 바로 올 걸 그랬나?’ 채옥이는 뛰며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 년을 하루같이 지름길로 오지 않고 도는 골말로 다닌 건, 골말 사는 동무들과 같이 오기 위해서입니다. 채옥이가 사는 마지라오에는 초등학생이 채옥이 한 명뿐입니다 ..  (11쪽)


 오늘날 어버이 가운데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할 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서 ‘직업 적성’이나 ‘특기 적성’을 알아야 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한결같습니다. 어른은 오늘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는 앞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른이나 아이나 내 삶을 내 손으로 일구지 못합니다. 내 삶에서 마련해야 하는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돈만 벌어 돈만 쓰는 삶이기 때문에, 밥·옷·집을 옳게 깨닫거나 들여다보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밥·옷·집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 채옥이는 창문을 모두 활짝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나서 비로 쓸었습니다. 그리고 걸레를 빨아 책상과 교탁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청소를 하고 나니 땀이 났습니다. 교실을 둘러보니 아주 깨끗했습니다. 선생님이 보셨으면 칭찬을 해 주시고 번쩍 들어안아 줬을 것입니다 ..  (26쪽)


 그림책 《나머지 학교》(재미마주,2002)를 읽습니다.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작은 학교 무대가 된 영월책박물관은 이제 영월에 없습니다만, 《나머지 학교》는 영월 작은 학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 때이든 들어서지 않던 때이든 늘 자그마한 배움터였습니다. 이 자그마한 배움터로 다니던 아이들은 이 자그마한 배움터를 굳이 다니지 않아도 ‘살아가며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작은 멧자락 작은 집에서 작은 어버이들하고 부대끼면서 밥·옷·집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니까요.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채옥이’는 텅 빈 학교를 홀로 치웁니다. 혼자서 깔끔하게 쓸고닦습니다. 작은 몸뚱이 작은 힘으로 학교를 건사합니다. 아이가 도시락을 싸서 먹는지까지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마 아이는 쌀이랑 된장만 집에서 가져오면, 나머지 반찬거리는 멧자락이나 들판에서 뜯어서 얻을 테니까, 혼자 즐거이 낮밥을 먹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은 집에서 누에를 치고 실을 자아 물레를 돌리며 베틀을 밟는 일이 없으니 ‘옷짓기’를 따로 하지는 못한다지만, 채옥이만 한 아이라면 바느질을 잘 하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아이는 뜨개질도 잘 할는지 모릅니다.

 읍내 학교에 굳이 갈 까닭이 없습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야 한다면, 이 그림책에 나오듯 아이 혼자서 ‘교과서 진도’를 나가면 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날마다 알맞게 익히면 됩니다.

 모든 배움은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채옥이가 하는 배움과 같습니다. 스스로 날마다 제때에 알맞게 익히지 못한다면, 가정교사가 붙든 손꼽히는 학교에 다니든 하나도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익히려 할 때에 찬찬히 받아들이는 앎입니다.


.. 채옥이는 또 제자리로 돌아가 앉습니다. “그럼, 우리 학교는 이제 나머지 학교도 못 돼요?” 모기만 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선생님, 읍내 학교에 가고 나서는 한 번도 샛강에 못 갔어요. 혼자 공부해도 전보다 더 잘하잖아요.” ..  (39쪽)


 멧골마을이나 바다마을에 자그마한 학교가 참 많이 섰다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시골 ‘면내’ 학교는 송두리째 사라질 판입니다. 큰도시하고 가까운 시골 읍내나 면내라면 이곳 학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큰도시는커녕 작은도시하고도 먼 시골 읍내와 면내에서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마저 문을 닫을 판입니다.

 그러면, 생각해야 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에서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은 슬플까요. 시골 읍내와 면내에 학교가 남아야 할까요. 학교가 남아야 한다면 어떤 학교가 남아야 할까요. 멧골자락 멧골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멧골자락 멧골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멧골자락을 떠나 도시로 가야 하나요, 멧골자락에 예쁘게 남아서 예쁘게 살아야 하나요. 바다마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다에서 고기를 잡거나 밭을 일구는 아이로 살아야 하나요, 읍내나 시내로 나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나요. 오늘날 시골학교에서조차 흙일이나 바다일을 다문 한 가지라도 가르치기는 하는지요. 도시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밥하기·옷짓기·빨래하기·쓸고닦기·집돌보기·아이보기 같은 집일 가운데 무엇을 얼마나 가르치는지요.

 그림책 《나머지 학교》를 덮습니다. 나머지 학교인 시골마을 작은 학교들은 “나머지 학교도 못 되”는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이 슬픈 길인지 슬프지 않은 길인지는 모릅니다. 우리 집 두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우리 시골마을 작은 학교는 아예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퍽 먼 읍내까지 학교를 다녀야 할 텐데, 구태여 시골마을에서 읍내까지 먼길을 나서도록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읍내에 있는 조금 큰, 그러니까 시골에서는 조금 크고 도시로 치면 아주 작은 학교를 우리 집 두 시골아이가 다녀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시골아이가 읍내나 시내 학교를 다니며 무엇을 배우거나 보거나 느낄까 궁금합니다. 밭을 돌보고 나무를 아끼며 바다와 멧자락과 흙을 사랑하는 길을 읍내나 시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웃을 아끼거나 동무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결을 읍내나 시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4344.9.19.달.ㅎㄲㅅㄱ)


― 나머지 학교 (임소연 그림,이가을 글,재미마주 펴냄,2002.5.6./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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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9 15:28   좋아요 0 | URL
네, 교사가 부모님 같아야 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 제도나 학사 행정을 보면
교사가 부모님같을 수 없는 압박감(또는 스트레스)이 절로 들게 되어 있어 안타까와요.

정말 세상이 핑핑 돌아가네요. ㅠ

파란놀 2011-09-19 16:13   좋아요 0 | URL
이 그림책에서는 '작은 시골학교' 아이는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잘 배우는 착한 아이'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꼭 학교에 다녀야 하는 틀'에 아이를 끼워맞추는 줄거리로 마무리를 짓고 말아요.

시골 아이 삶을 헤아리면서 마무리라든지 줄거리를 더 잘 짰다면, 더없이 좋았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제 여느 사람들은 '기계 아닌 손으로 빨래하기'를 생각하지 못해요. 이런 만큼, 예방주사가 왜 몸을 병원균한테서 예방해 주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학교가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아요...
 

 엄마가 넘겨 주는 책


 큼지막한 사진책을 바닥에 펼친다. 어머니가 한 장씩 넘기며 이야기를 한다. 무슨무슨 모습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아이는 어머니하고 큼지막한 사진책을 함께 읽는다. 사진책에 담긴 아이와 어른과 짐승과 자연과 건물과 사막과 자전거를 함께 읽는다. 살뜰히 찍은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을 함께 읽을 때에는 살뜰히 빚은 영화를 아주 천천히 보는 느낌하고 같다. 살뜰히 일구는 사랑스러운 삶이기에, 이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살뜰히 담아내겠지. 이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글쟁이는 글로 사랑스러움을 살뜰히 담을 테고, 노래쟁이는 노래로 사랑스러움을 살뜰히 나누어 줄 테지. 예부터 아이 어머니들은 아이가 먹을 밥그릇에 살뜰히 돌보는 사랑을 고이고이 소복하게 담으면서 살아왔다. (4344.9.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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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이 책읽기


 두 아이를 바라본다. 멧자락을 옆에 낀 이 시골집을 떠나 새 시골집을 찾아야 하기에, 짐을 꾸리고 쌓아 두느라 집안이 참 어지럽다. 이 어지러운 집에서도 잘 놀고 잘 크며 잘 떠드는 아이들이 고맙다. 둘째가 하루하루 눈부시게 자라면서 곧 뒤집기를 해내겠지. 첫째는 둘째하고 놀아 준다며 때때로 ‘좀 괴롭히는 짓’이 되고 마는 놀이를 하지만, 둘째는 첫째한테 ‘좀 괴롭힘을 받아’도 까르르 하면서 웃는다. 나는 우리 형한테서 어떤 괴롭힘이자 놀이를 받았을까.

 나도 어린이였고 옆지기도 어린이였다. 어린이로 살아가는 두 아이는 머잖아 어른이 되리라.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으면, 저희 아이를 돌아보면서 저희 어린 나날을 곱씹을까. 아니면, 오늘 이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아이들을 옳게 사랑하고 착하게 껴안는 나날을 일굴 수 있으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뒤에 저희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저희 어린 나날을 돌이키며 아름다운 넋을 건사하도록 할 수 있을까.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사랑스러운 길이 어디인가 하는 이야기는 육아책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다. 바로 우리 두 아이 얼굴에, 발가락에, 혓바닥에, 머리카락에 하나하나 아로새겨진다. 아이들 작은 가슴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으면 콩콩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이들을 내 가슴에 올리고 가만히 있으면 쿵쿵 뛰는 소리를 아이들이 듣겠지. 어버이는 아이책을 읽고 아이들은 어른책을 읽는다. (4344.9.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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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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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말투’는 없고 ‘번역 말투’만 있다
 [책읽기 삶읽기 79] 이희재,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



 나라밖 책을 한국사람이 읽도록 옮기는 일을 하던 이희재 님이 《번역의 탄생》(교양인,2009)이라는 책을 이태 앞서 내놓았습니다. 이태 앞서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늦게 이러한 책이 나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다 한들, 또 2013년이나 2015년에 다른 책이나 비슷한 책이나 더 나은 책이 나온다 한들, 이 나라 번역 문화는 그닥 달라지지 않는구나 싶어요. 누구보다 번역을 하는 분이 읽을 《번역의 탄생》이지만, 이러한 책을 읽으면서 ‘번역말이 더 한국말다울 수 있도록 힘쓰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거든요.

 이희재 님은 “직역은 한국어를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외국어의 참신한 비유는 앞으로도 과감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3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곧이어 “한국의 직역주의는 자기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보다는 그저 원문을 무작정 우러러보는 종살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3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가와 독자는 ‘-게 하다’라는 사역 표현에 무척 익숙합니다. 번역서에서 워낙 그런 문장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지요(10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세 마디를 가만히 놓고 생각합니다. ‘직역’이라는 번역 말투는 오늘날 이 나라에 아주 널리 퍼졌습니다. 이희재 님은 이 직역이 한국말을 크게 살찌웠다고 이야기하는데, 이희재 님 입으로 ‘한국사람은 서양말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무턱대고 우러르며 쓰기만 하는 종살이’를 한다고 나무랍니다.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내 삶을 다스리는 임자 구실을 못하는 한국사람이라면서, 종살이와 같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서, 이러한 ‘직역’으로 한국말을 어떻게 얼마나 살찌울 수 있을는지요. 아니, 살찌우려고 하기나 했을까요. 조금이나마 살찌웠다 할 만한가요. 소 뒷다리로 개구리를 잡는다 하듯, 직역 말투로 한국말을 살찌운 대목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제 나라말을 곱다시 여기지 못하는 매무새로 서양말·중국말·일본말을 섬기는 한겨레는 한국말을 하나도 살찌우지 못했다고 해야 올바릅니다.


.. 일본어는 한국의 사전에서도 끄떡없이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의 사전 편찬자들은 해방 후에 영한사전을 만들 때도 영일사전을 전범으로 삼았습니다 … 일본어는 한자를 쓰기 때문에 같은 뜻이라도 한자로 어렵게 표현하려는 경향이 한국어보다 강합니다. 그런데 영일사전을 베끼다 보니까 영일사전에 나와 있는 한자로 된 딱딱한 풀이어들이 발음만 한국어로 표기되어서 영한사전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 한국어는 주어는 안 쓰더라도 문장은 될수록 능동문으로 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역동적이고 힘찹니다. 일본어는 될수록 수동문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  (28∼29, 93쪽)


 《번역의 탄생》은 “번역이 태어났다”고 밝히는 책이 아닙니다. “번역이라는 새 말투가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제 웬만한 한국사람 누구나 익숙하게 젖어든 ‘번역 말투’가 어떠한가를 찬찬히 살피면서, ‘조금 더 한국말답게 말을 하거나 번역을 헤아리는 길’을 돌아보자고 이끄는 책입니다.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 한국에서 나오는 책은 하나같이 번역 말투입니다. 여느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아요. 어린이책이라 해서 번역 말투에서 홀가분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좀 다를까요? 중·고등학교 푸름이가 읽어야 할 교과서는 좀 낫다 할까요?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싫든 좋든 초등학교부터 번역 말투로 교과서를 배웁니다. 더욱이, 초등학교에 앞서 어린이집에서도 번역 말투로 이야기를 듣거나 주고받습니다. 게다가, 어린이집에 들기 앞서 ‘아이를 낳은 어버이’라면 누구나 ‘아주 마땅하다’ 할 만큼 번역 말투로 생각을 나눠요.


.. 난해한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것은 그 자체가 번역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 제가 한국어 번역에서 대명사를 명사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몇 분의 일이라도 한국어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를 바라는 균형 감각 때문일 것입니다 … 한국어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주어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확고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수동문을 쓰지 않습니다. 주어가 겉으로 드러나야 하는 언어일수록 수동태가 발달합니다. 영어가 그렇습니다 … 전치사가 들어간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동사를 덧붙여 주어야 자연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전치사 자체가 강한 행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  (31, 56∼57, 80, 236쪽)


 여느 인문책이나 문학책이나 학술책이 ‘번역 말투로 가득하다’고 걱정하거나 슬퍼하기 앞서, 이 나라 모든 교과서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은 ‘일찌감치 번역 말투로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전문가나 학자나 여느 어버이나 교사 또한 ‘으레 번역 말투를 여느 삶말로 여겨’ 주고받아요. 연속극에서도 영화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옮기는 나라밖 그림책도 이와 똑같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사람이 빚은 한국 그림책 또한 이와 같아요.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돌보면서 한국말을 나누려는 어른이 없습니다. 한국말다이 한국말을 보듬으면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고 땀흘리거나 애쓰는 어른이 없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는 ‘생각 안 하고 살아가는 어른들 번역 말투’를 고스란히 물려받습니다. 이 나라 푸름이와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에도 저희들이 어린 나날부터 익숙해지거나 길든 번역 말투로 저희 아이들을 낳고 기릅니다.


.. 한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고유명사를 적는 데도 불리합니다. 뜻글자는 의미 환기력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것을 차단하려면 될수록 의미가 이어지지 않는 글자들을 모아야 하고, 심지어 새 글자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소리로 나는 수많은 한자어 중에서 어떤 한자어를 고유명사의 발음에 대응시킬지 막연합니다 … 그런데 왜 멀쩡한 ‘공약’이라는 좋은 말을 두고 ‘매니페스토’라는 말을 요즘 뜬금없이 쓰는 것일까요? 기존 영한사전에 manifesto의 풀이어로 ‘공약’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manifesto는 그냥 공약이 아니라 책임 있는 공약이기나 한 것처럼, 흔히 말하는 ‘공약’과는 구별해서 써야 하는 말인 것처럼, 한국어 ‘공약’은 영어 manifesto의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  (322, 344쪽)


 한국땅에서 번역 말투가 이처럼 널리 퍼진 지는 얼마 안 된 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참 짧은 햇수만에 번역 말투가 온누리 구석구석 퍼졌다고 여길 만합니다.

 이처럼 널리 쉬 퍼진 번역 말투가 ‘한국말을 살찌웠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널리 쉬 퍼지는 ‘번역 말투 또한 한국말로 삼아야 한다’고 바보스레 생각하고야 맙니다.

 번역 말투가 아닌 한국말다운 한국 말투를 쓰는 일을 낯설게 여기는 요즈음이니까요. 이제는 번역 말투를 ‘번역 말투’ 아닌 ‘한국 말투’로 삼아야 한다고 여겨도 틀리지 않다고 할 만하니까요. 아니, 이제 한국사람들 한국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지난 2000년대와 오늘 2010년대와 앞으로 맞이할 2020년대 한국땅 한겨레 말투란 ‘번역 말투’라 해야 하겠지요.


.. 한국의 번역 문화는 한국어의 논리보다는 외국어의 논리를 너무 숭상하는 풍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 외국어의 논리라는 것도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서 수미일관한 체례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문화도 그렇습니다. 외국 문화의 방정식을 규명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답만 열심히 받아적어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외국 전문가와 외국 이론을 그대로 들여와서 한국 현실에 들이미는 풍토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두 세대가 넘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402쪽)
 

 《번역의 탄생》을 쓴 이희재 님은 우리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낱낱이 보여줍니다. 우리 모습이 나아지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질 길을 따로 밝힐 수 없습니다. 거듭나려고 애쓴다 한들, 둘레 다른 사람들 얄궂거나 슬픈 모습에 휩쓸리거나 휘둘리거나 다칩니다. 맑게 다시 태어나거나 밝게 새로 태어나려고 힘쓴다 한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말삶을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일구지 않습니다.

 말을 바르게 다스릴 길을 살피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말을 아름다이 북돋울 길을 찾지 않는 이 나라입니다. 아니, 이 나라가 말썽이기 앞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내 매무새부터 내 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부터 내 말을 아끼거나 보살피거나 믿지 않아요.

 한국말은 없고, 한국글은 없습니다. 번역말과 번역글만 있습니다. 돈에 사로잡힌 말이랑 이름값이나 학벌이나 권력에 젖어든 글만 있습니다. (4344.9.18.해.ㅎㄲㅅㄱ)


― 번역의 탄생 (이희재 씀,교양인 펴냄,2009.2.10./1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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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머리 2011-10-2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본지는 오래 되었지만 번역의 예만 주의깊게 보고 배우느라 책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문제의식은 그냥 넘기고 말았다는 생각을 이 글을 보고 해 보게 되네요...

파란놀 2011-10-30 02:36   좋아요 0 | URL
번역 보기 바로잡기는...
글쓴이부터 글쓴이 삶에서
제대로 녹아들면서 조금만 보여줄 수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문제의식'은 나부터 내 삶에서
내 넋과 말을 아름다이 돌볼 줄 아는 길에서
실마리를 얻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