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빨래


 한가위를 맞이해서 네 식구가 찾아온 할머니·할아버지 댁에서 할머니 일을 아주 조금만 거들면서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빨거나 품에 안아 어르느라 바쁘다. 첫째는 어머니나 아버지가 하는 말은커녕 할머니가 하는 말조차 거의 듣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뛰놀기만 한다. 한가위에도 빗줄기는 그치지 않아 빨래가 아주 안 마른다. 온 집안에 둘째 천기저귀가 가득 널린다. 스무 장 가까이 널렸을 때에 도무지 안 되겠구나 싶어 다리미를 든다. 다리미를 들어 석 장쯤 말릴 때에 새 오줌기저귀가 나온다. 이럭저럭 다섯 장을 다리미로 말리는 동안 오줌기저귀가 두 장 나온다. 아득한 옛날까지는 아닐 내 어머니 젊은 날, 한가위날이나 설날이나 제삿날에 어린 아이들 돌보기와 갓난쟁이 기저귀 빨래에다가 집일이랑 숱한 먹을거리 장만하기를 어떻게 한꺼번에 치를 수 있었을까. 아버지들 가운데 이 숱한 일 가운데 한 가지라도 도운 사람이 있었을까. 어머니들만 이 숱한 일을 홀로 치러야 했을까. 어머니들끼리 치를 이 숱한 일을 어머니들이 서로서로 조금씩 돕고 거들면서 살아냈을까. 아버지들은 이 숱한 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조차 제대로 건사하거나 맡거나 나누지 않으면서 무슨 거룩한 역사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이나 사회나 경제나 교육이나 철학을 세웠을까. (4344.9.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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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위 빗줄기


 한가위를 맞이해서 비가 내립니다. 아마 한가위 보름달을 올려다볼 수 없겠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 살붙이하고 시골집에서 한가위 초승달하고 한가위 반달을 보았습니다. 한가위 보름달은 올려다볼 수 없지만, 한가위 초승달조차 여느 때 보름달보다 훨씬 밝은 줄 다시금 느꼈고, 한가위 반달은 여느 날 보름달보다 한껏 빛나는 줄 새삼스레 보았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한가위 보름달은 올려다볼 수 없으나, 길디긴 칠팔월 궂은 비가 구월에 접어들어 한동안 멎었기에 고맙습니다. 두 달에 걸쳐 비가 그치는 날이 거의 없는 채 살아오면서 둘째 기저귀 빨래를 끝없이 해댔으니, 한가위에 이쯤 비가 오더라도 기저귀가 안 마를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고마운 한가위요, 즐거운 하루하루입니다. (4344.9.1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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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시스터즈 2
쿠마쿠라 다카토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 이곳에서 살면서 바라보는 모습
 [만화책 즐겨읽기 63] 쿠마쿠라 다카토시, 《샤먼 시스터즈 (2)》



 한 해에 한 번 맞이하는 한가위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 밝고 크게 보이는 달이 뜹니다. 한가위처럼 한 번 맞이하는 설날에도 더없이 밝으며 크게 보이는 달이 뜨고, 큰보름날에도 참으로 밝으며 크게 보이는 달이 뜹니다.

 다른 여느 날에는 그다지 안 밝고 썩 안 크다 할 달이 뜬다 할 테지요. 그렇지만, 시골자락에서 올려다보는 달은 여느 날에도 참 밝으면서 크구나 싶은 별입니다. 달을 비롯해 수많은 별을 올려다볼 수 있습니다. 새까만 밤하늘을 느끼고, 이 새까만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는 우거진 푸나무를 느끼며, 우거진 푸나무에서 살아가는 뭇 풀벌레들을 느낍니다.

 사람은 작습니다. 사람은 작기 때문에 지구별에서 육십 억이든 칠십 억이든, 또 더 늘어나서 백 억이 되든 이렁저렁 살아갈 만합니다. 사람이 너무 크다면 육십 억은커녕 십 억이나 일 억조차 살아갈 만하지 않습니다. 너무 크면 너무 많이 먹어야 하고, 너무 많이 먹어야 할 때에는 지구별 크기로는 도무지 먹이를 댈 수 없어요. 사람은 작은 목숨이기 때문에 작은 먹이로 흐뭇합니다. 작은 밥그릇 하나로 넉넉하면서 고맙습니다. 굳이 넘치게 먹어야 할 까닭이 없고, 겉치레를 하자며 먹이를 헤프게 쓸 까닭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스스로 작은 사람인 줄을 자꾸 잊습니다. 스스로 작은 사람인 줄 자꾸 잊으면서, 스스로 큰 사람인 듯 거들먹거린다든지 샛길로 빠집니다. 작은 사람 작은 밥그릇에 걸맞게 작은 살림을 일구면서 작은 사랑을 나누면 즐거울 텐데, 작지 않은 사람들은 작지 않은 밥그릇을 바랍니다. 작지 않은 밥그릇을 바라니까 작지 않은 살림을 키우려 하고, 작지 않은 사랑을 꾀하며, 작지 않은 돈을 벌려 합니다.

 누구나 옷과 밥과 집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사람은 누구나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했습니다. 스스로 옷과 밥과 집을 마련하기 빠듯할 때에는 내가 더 거두어들이는 옷이나 밥이나 집을 다른 사람하고 바꾸거나 주고받으면서 살림을 이었습니다. 쌀을 주고 물고기를 받든, 나무를 주고 옷감을 받든, 서로서로 옷과 밥과 집이 될 밑감을 스스로 마련해서 알맞게 나누었어요.


- ‘그래도 그날 아침은 왠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벗겨 줬는지도 몰라. 아, 그랬구나. (봄이 왔구나. 꽃이 피었구나.)’ (40쪽)


 조용히 착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지만, 나라가 서고 정치가 태어나며 경제가 이룩되는 동안 조용한 넋과 착한 얼을 잊거나 잃습니다. 조용하지 않고 착하지 않다 보니, 작은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며 작은 살림을 사랑하던 매무새 또한 사그라듭니다. 바야흐로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나라일만 돌본다는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궁궐에서만 지내는 정치 전문쟁이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전문쟁이가 태어나고, 정치일을 쥐락펴락 할 힘을 거머쥐려고 다투는 또다른 전문쟁이가 태어납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운동경기만 할 줄 아는 전문쟁이가 새로 태어납니다. 운동경기 전문쟁이 가운데에는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어들이는 몇몇이 있습니다. 한창 젊은 스물 몇 살에 ‘이제까지 온삶을 바쳐서 하던 운동경기’를 그만두어야 하기 일쑤입니다. 더 젊고 더 힘세며 더 잘난 뒷사람한테 내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나 이제나 흙을 일구는 사람한테는 은퇴, 곧 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은 어리건 젊건 늙건 내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먹고 입고 자야 하기에, 흙을 일구는 사람은 노상 내 옷과 밥과 집을 스스로 마련해서 스스로 쓰고 스스로 돌봅니다. 이와 달리, 정치 전문쟁이나 경제 전문쟁이나 운동경기 전문쟁이나 대입수험 전문쟁이나 대기업 전문쟁이나 공장 전문쟁이나 버스운전 전문쟁이는 ‘돈은 벌’되 ‘삶을 이루는 옷·밥·집’은 스스로 다스리거나 건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아니, 살아가지만 살아간다는 뜻을 모릅니다. 살아간다는 뜻을 모를 뿐더러, 살아가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이나 꿈을 잊어요.


- “미즈키, 이 말은 할아버지께서도 자주 하셨겠지만, 너나 시즈루의 능력은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를 잇는 고마운 능력이란다. 힘든 일도 있겠지만, 결코 그 능력을 갈고닦는 걸 게을리 해선 안 된단다.” (69쪽)
- “확실히 미코시는 흉악한 성격이 아니니까 계속 올려다보고만 있다간 죽을 수도 있어. 하긴 올려다보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아, 우린 참 성가신 체질이구나. 앞으로 괜찮을까? 이대로 계속 할아버지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데.” (78쪽)


 나는 우리 집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거나 중학교라든지 고등학교 같은 데에 다니게 된다면, 이 일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할까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보통교육이나 기본교육이라 하는 초등학교조차, 이 초등학교를 다닐 여덟∼열셋 나이 어린이가 제 나이에 걸맞게 삶을 느끼거나 배우거나 받아들이거나 나누는 아름다움과 사랑과 꿈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옳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교과서에는 삶을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삶을 다루지 않으며 말하지 않습니다. 교과서로 수업진도를 나가는 교사는 삶을 이야기하거나 가꾸거나 북돋우지 않습니다. 특기교육이나 적성교육이란 얼마나 부질없나요. 현장수업이나 현장체험은 얼마나 덧없나요. 아이들한테는 모든 날 모든 수업 모든 이야기가 현장, 곧 내 삶터여야 합니다. 교사부터 삶을 가르치고 나누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학생은 삶을 배우며 어깨동무하는 보람을 누려야 합니다. 더 낫다는 성적을 거두어 더 낫다는 학교에 가는 일이 교사와 학생 모두한테 얼마나 뜻있거나 값있을까 궁금합니다. 전국 몇 %가 되어 이름나다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오늘날 아이들한테 훈장처럼 달린다면, 이런 훈장은 아이들 삶을 얼마나 따사로이 비추는 햇살이 될는지요.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손전화를 만지작거리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느 어른조차 스마트폰을 갖고 놀며, 나도 일 때문이라고 하면서 손전화를 씁니다. 나는 참말 일할 때에만 손전화를 쓰지만, 이 손전화 기계에는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만 있지 않으니까, 아이들이 자꾸 만지작거리고 싶어 합니다. 따지고 보면, 어른인 나부터 이 손전화를 안 써야 옳은 셈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쓰거나 누리거나 가진 모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물려받으니까요.

 어른들 스스로 사랑스러이 삶을 일구면서 사랑스러이 말을 나눈다면, 아이들은 이 사랑스러운 삶을 받아먹고 사랑스러운 말을 꽃피웁니다. 아이들을 입시학원 같은 데에 보내거나 특기학원 같은 곳에 넣는다 해서 아이들이 아이들 삶을 사랑스레 북돋울 수 없습니다. 피아노학원에 가야 피아노를 칠 수 있지 않아요. 태권도학원에 다녀야 태권도를 익힐 수 있지 않아요. 글쓰기학원에 가야 글을 쓸 수 있지 않아요. 요리학원에 다녀야 밥을 할 수 있지 않아요.

 삶을 모르는 아이들한테 삶을 가르치는 학원을 마련해서 보내야 하나요. 사랑을 잊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느끼도록 하는 학원을 세워서 넣어야 하나요. 꿈을 놓치는 아이들한테 꿈을 붙잡는 학원을 만들어서 몰아세워야 하나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 모두, 나 스스로 옳고 바르며 해맑게 살아가는 터전을 사랑하면서 이 터전에서 어린 아이들이 즐겁고 신나며 아름다이 지낼 빛줄기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그저 보이기만 해선 더욱 불안해질 뿐이다.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넌 저쪽의 지식을 배우고 거기에 네 생각을 더해야 돼.” (81쪽)
- “네가 느꼈던 불안은 그런 거란다. 쿠단이 나타나서 무엇을 예언할 것인가보다는, 쿠단이 나타나 예언을 한다는 상황이 실제로 생기는 것. 쿠단은 언젠가 꼭 나타난단다. 두려워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돼.” (146쪽)



 쿠마쿠라 다카토시 님이 빚은 만화책 《샤먼 시스터즈》(대원씨아이,2004) 2권을 읽습니다. 1권은 한참 앞서 읽었지만, 아니 1권은 2004년에 일찌감치 읽었으나, 이때에 2권까지 읽자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일곱 해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2권을 손에 쥡니다. 《샤먼 시스터즈》는 몇 해 앞서 9권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기까지 1권만 달랑 읽고 뒷권은 하나도 읽지 않았습니다. 왜 안 읽었을까 하고 더듬으면, 아무래도 내 마음에 와닿지 못했으니 안 읽었다 할 텐데, 내 마음에 와닿지 못했다기보다는 내 마음이 이 만화책을 읽어 받아들이거나 헤아릴 만큼 무르익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누구한테나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 마음에 와닿지 못하는 책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스스로 마음으로 못 읽고 마음으로 못 받아들이며 마음으로 못 헤아리는 책이나 노래나 그림이 있어요. 아름다운 책이지만 무엇이 어떻게 아름다운지 못 느끼곤 합니다. 사랑스러운 노래이지만 왜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못 느끼곤 해요. 놀라운 그림이지만 어느 대목에서 놀라운지 못 느끼곤 하지요.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틀에 사로잡히거나 갇힌 채, 무엇을 즐겁게 바라보고 무엇을 기쁘게 맞이하며 무엇을 아낌없이 부둥켜안아야 하는가를 잊습니다. 날마다 바라보지만 나 스스로 바라보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옳게 못 깨닫곤 합니다. 무엇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지를 못 살피곤 합니다. 내 삶이 어디로 흐르고, 내 삶이 어떠한 결이나 무늬인가를 못 느끼곤 해요.


- “히시미도 참, 좀더 부드럽게 말해도 될 텐데.” ‘그건 그래. 우리도 나중에 그렇게 얘기해 주는데 말야. 으음, 많이 다르구나.’ (162쪽)


 사랑을 하고 싶을 때에는 사랑을 하면 됩니다. 믿음을 이루고 싶을 때에는 믿음을 이루면 됩니다. 꿈을 지키고 싶을 때에는 꿈을 지키면 돼요. 다만, 사랑을 하고 싶을 때에는 참답고 착하며 고운 넋으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참답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곱지 않은 넋으로는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참답지 않을 때에는 믿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꿈을 지키지 못합니다. 곱지 않으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느낄 수 있으려나요.

 만화책 《샤먼 시스터즈》는 사람들 눈에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을 한 자리에 겹쳐 놓고 이야기를 풀고 맺습니다. 보이는 삶이 모두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삶이 모두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이 알맞게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 둘레에 또다른 삶이 있기도 합니다.

 어떻든 한 번 누리는 내 삶입니다. 고맙게 선물받아 일구는 꼭 한 번 누리는 내 삶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닙니다. 언제나 한 번 선물받고 한 번 선물하는 내 삶이에요.

 나는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에서 꽤 좋지 못하다 싶은 선물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낳아 돌볼 아이들한테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을 고스란히 물려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가 썩 좋다 싶은 터전을 선물받고도, 내 아이한테 썩 좋지 못하다 싶은 터전을 물려줄 수 있어요. 앞길은 모르고 앞날은 아리송합니다. 앞길은 흐리고 앞날은 어지럽습니다. 바로 이곳, 바로 오늘, 내 삶을 나 스스로 모르면 내 앞길은 모릅니다. 바로 이곳, 바로 오늘, 내 삶을 나 스스로 알면 내 앞날은 아리송하지 않아요. 아주 또렷합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찾습니다. 돈을 조금 더 벌며 이름도 이럭저럭 얻고 싶은 사람은 돈을 조금 더 벌며 이름도 이럭저럭 얻을 만한 길을 찾습니다. 다만, 이런 길을 찾든 저런 길을 찾든, 드디어 길을 찾았구나 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도무지 길을 못 찾는 사람이 있어요. 《샤먼 시스터즈》 2권을 덮고 3권째 읽습니다. 나는 내 보람차며 고마운 오늘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오늘 한가위에도 둘째 갓난쟁이 기저귀를 끝없이 손빨래합니다. 한가위를 맞이해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찾아오니 첫째 아이는 마냥 끝없이 뛰놀기만 하려 드는데, 하루 빨리 우리 네 식구 살가운 숲속 조용한 보금자리를 찾아 옹글며 오롯이 뛰놀 터전에서 네 식구가 그야말로 옹글며 오롯이 뛰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4344.9.12.달.ㅎㄲㅅㄱ)


― 샤먼 시스터즈 2 (쿠마쿠라 다카토시 글·그림,문준식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04.1.15./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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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전 책읽기


 아이와 서로 손을 잡고 읍내마실을 합니다. 아이는 논둑길을 거닐며 아주 즐거워 노래노래 부릅니다. 아이 손에는 망가진 필름사진기가 들립니다. 아이는 아버지처럼 사진기를 챙겨서 마실을 가야 한다고 합니다. 논둑길을 걷다가 “어?” 하면서 멈추고는 아버지처럼 사진을 찍습니다. 필름이 없으니 새겨지지 않는 사진인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사진기로 들여다보면서 마음에 새긴다면 모두 사진이 됩니다.

 아이하고 읍내를 돈 다음 피자집에 들릅니다. 읍내에 다녀올 때에 옆지기가 피자를 사올 수 있으면 사오라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시골집까지 날라다 주는 밥집은 없습니다. 옆지기는 피자보다 돼지뼈감자곰국을 먹고 싶어 했지만, 이 먹을거리를 싸서 갈 수 없고, 읍내에 돼지뼈감자곰국을 하는 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읍내 가게에서 뼈다귀와 감자를 장만해서 내가 끓일까 생각해 보기도 하다가, 고개를 젓습니다. 나중에 함께 읍내에 나갈 때에 찾아서 먹어야지, 집에서 하지는 말자.

 피자집에서 두 판을 시키고 아이랑 나란히 기다립니다. 피자집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습니다.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큰소리로 온갖 광고와 방송이 흐릅니다. 아이는 넋을 잃고 들여다봅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따분해졌는지 가게 안팎을 이리저리 휘젓듯 돌아다닙니다. 나는 아이가 노는 양을 바라봅니다. 아이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아이 노랫소리보다 텔레비전 소리가 훨씬 크고, 가게 앞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더 큽니다. 깔깔거리며 지나다니는 사람들 목소리가 퍽 크고, 피자 굽는 기계가 내는 소리가 꽤 큽니다.

 이것저것 장만하려고 읍내로 나오지만, 이 읍내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읍내보다 훨씬 클 시내에서는, 여느 시내보다 더더욱 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들으며 생각할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시골마을 이야기이든, 두릅나무 꽃이 보름 넘게 흐드러진다는 이야기이든, 논마다 누런 벼알이 날마다 얼마만큼 익는다는 이야기이든, 달과 별과 구름과 햇살을 올려다보는 아이들 눈빛이 얼마나 맑은가 하는 이야기이든, 예나 이제나 텔레비전에 흐른 적이 없습니다. 뭐, 책이라 해서 이런 이야기를 즐겨 적바림하지는 않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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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여행 - 케이트가 만난 인상주의 화가들
제임스 메이휴 지음 / 크레용하우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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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샘솟는 사랑으로 그림읽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3] 제임스 메이휴,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



 책을 많이 읽는대서 무언가를 더 잘 알거나 더 제대로 알거나 더 널리 알지는 않습니다. 그저 책을 많이 읽었을 뿐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더 많이 읽느냐 더 적게 읽느냐를 따져서는 안 되고, 따질 까닭이 없으며, 따진들 부질없습니다.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는 동안 내 삶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살펴서 어떻게 살찌우려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책읽기는 지식쌓기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지식쌓기를 이루려고 책읽기를 할 테지만, 마음읽기와 사랑읽기로 이루는 삶읽기로 나아가는 길이 참답다 할 책읽기라고 느낍니다. 곧,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스스로 깨닫거나 찾으려고 손에 쥐는 책이 돼요.

 나는 내 마음그릇에 따라 내 마음을 건드리는 책을 살핍니다. 내 마음그릇을 아직 넓게 열거나 갈고닦거나 추스르지 못했을 때에는 이런 마음그릇 깜냥에 맞게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 마음그릇을 찬찬히 다스리면서 사랑스레 돌본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결에 맞추어 조금씩 테두리를 넓힐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 삶대로 읽는 책입니다. 언제나 내 몸에 맞추어 먹는 밥입니다. 적게 먹는 사람이면서 커다란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은 밥을 먹을 수 없어요. 뷔페집 같은 데에서 신나게 먹을 수 있다지만, 조그마한 내 밥통에 잔뜩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레 잔뜩 먹으면 배앓이를 해요. 배에 탈이 납니다.

 숱한 지식조각을 머리에 집어넣을 때에는 머리앓이를 합니다. 갖은 조각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제자리를 못 찾는 지식조각으로는 가슴을 움직이는 슬기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먹을 만큼 먹는 밥이어야 하고, 담을 만큼 담는 지식이어야 하며, 다스릴 만큼 다스리는 넋이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삶을 헤아리고, 내가 즐길 만한 일거리를 찾으며, 내가 느긋하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이 살아갈 터전을 느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마음껏 펼칠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뜰살뜰 꾸려야 아름답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가득 쏟아 따사로이 읽을 책을 찾아서 받아들여야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무엇이든, 내 마음밭을 일구는 결을 톺아보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어떤 비평가들 잔소리에 휘둘리며 읽는 그림이 아닙니다. 어떤 전문가들 말밥에 어질어질 휘말리며 읽을 그림이 아니에요. 내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꿈이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림 하나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이야기꽃이 피어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 오늘은 할머니의 생일이에요. 할머니는 케이트하고 미술관에 가기로 했어요. 케이트는 미술관을 무척 좋아하지요. 그곳엔 케이트만의 비밀이 있거든요 ..  (3쪽)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내가 좋아하는 결을 살리면서 씁니다. 내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쥐어짤 수 없습니다. 돈을 억수로 안기더라도 내 마음으로 우러나지 않을 때에는 아무 글을 못 씁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내가 사랑하는 결을 보듬으면서 그립니다. 내가 그리고 싶지 않은데 그림을 함부로 그릴 수 없어요. 그림대회가 되든 자화상이 되든 내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여야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북받치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내 가슴속 깊이 아로새깁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치솟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내 가슴속 넓게 펼쳐놓습니다.

 좋아하는 나무 앞에 서 보셔요. 좋아하는 꽃 키높이에 맞추어 앉아 보셔요. 좋아하는 내 아이하고 눈을 마주보면서 코를 살짝 대 보셔요. 그림 하나에 담을 이야기란, 글 한 줄에 실을 이야기란, 사진 한 장에 깃들일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가 될 때에 착하면서 해맑을까 곱씹어 보셔요.


.. “케이트야, 여기 이 아름다운 꽃들을 좀 보렴.” “할머니, 난 물감 얼룩만 보이는걸요.” “그래, 그 물감 얼룩들이 모여서 그림이 되는 거란다. 뒤로 몇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꽃이 잘 보일 거야.” ..  (4쪽)


 수많은 사람들한테 돋보이는 이야기일 때에 내 가슴을 찌릿 울리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았다는 이야기일 때에 내 마음이 번쩍 깨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알아야 하고,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삶을 믿어야 하고, 내 삶을 느껴야 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을 떠올립니다. 제임스 메이휴 님은 《미술관 여행》이라는 그림책에서 ‘케이트’라는 아이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살포시 보여줍니다. 어린이 케이트가 ‘그림읽기’를 하는 길을 넌지시 밝혀요.

 어린 케이트는 비평가나 전문가 눈·코·귀·입을 빌지 않아요. 오직 어린 케이트 가슴을 믿고 어린 케이트 사랑을 꿈꾸면서 그림을 읽어요.


.. 그때 르느와르 아저씨의 그림이 눈에 띄었어요. 한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극장에 앉아 있는 〈첫나들이〉라는 그림이었어요. “할머니께 저 꽃다발을 선물하면 무척 좋아하실 텐데…….” 케이트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꼬옥 감았어요 ..  (21쪽)


 케이트한테는 ‘인상주의 화가’나 ‘르느와르’라는 이름이 덧없습니다. 이런 이름을 알자고 그림을 읽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외우려고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뒤를 잇자며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또다른 루벤스’가 될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고흐를 뛰어넘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가엾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거나 ‘예술쟁이’가 되겠다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지없이 안쓰럽습니다.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에요. 사랑을 불태우려고 그리는 그림이에요. 삶을 밝히면서 꿈을 활짝 드러내는 그림이에요.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좋아서 그림을 읽습니다. 사랑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랑해서 그림을 간직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은 미술관 마실을 하면서 ‘그림읽기 실타래’를 푼다고 할 만합니다. 이렇게 느끼면서 책을 덮어도 나쁘지 않아요. 조금 더 생각하거나 한껏 부푼 사랑을 하고 싶다면, 어린 케이트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넋으로 읽는 그림으로 이루는 예쁜 꽃다발을 나 또한 내 가슴으로 곱다시 껴안는 길을 살펴보셔요. 어린 케이트한테는 물감 얼룩이 모인 그림도 좋은 그림일 텐데, 주름진 살결로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하는 따스한 할머니 손길이야말로 좋은 그림입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미술관 여행 (제임스 메이휴 글·그림,사과나무 옮김,크레용하우스 펴냄,2001.5.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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