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여행 - 케이트가 만난 인상주의 화가들
제임스 메이휴 지음 / 크레용하우스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가슴에 샘솟는 사랑으로 그림읽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3] 제임스 메이휴,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



 책을 많이 읽는대서 무언가를 더 잘 알거나 더 제대로 알거나 더 널리 알지는 않습니다. 그저 책을 많이 읽었을 뿐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더 많이 읽느냐 더 적게 읽느냐를 따져서는 안 되고, 따질 까닭이 없으며, 따진들 부질없습니다.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는 동안 내 삶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살펴서 어떻게 살찌우려 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책읽기는 지식쌓기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지식쌓기를 이루려고 책읽기를 할 테지만, 마음읽기와 사랑읽기로 이루는 삶읽기로 나아가는 길이 참답다 할 책읽기라고 느낍니다. 곧,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스스로 깨닫거나 찾으려고 손에 쥐는 책이 돼요.

 나는 내 마음그릇에 따라 내 마음을 건드리는 책을 살핍니다. 내 마음그릇을 아직 넓게 열거나 갈고닦거나 추스르지 못했을 때에는 이런 마음그릇 깜냥에 맞게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 마음그릇을 찬찬히 다스리면서 사랑스레 돌본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결에 맞추어 조금씩 테두리를 넓힐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 삶대로 읽는 책입니다. 언제나 내 몸에 맞추어 먹는 밥입니다. 적게 먹는 사람이면서 커다란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은 밥을 먹을 수 없어요. 뷔페집 같은 데에서 신나게 먹을 수 있다지만, 조그마한 내 밥통에 잔뜩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갑작스레 잔뜩 먹으면 배앓이를 해요. 배에 탈이 납니다.

 숱한 지식조각을 머리에 집어넣을 때에는 머리앓이를 합니다. 갖은 조각이 이리저리 뒤섞이면서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제자리를 못 찾는 지식조각으로는 가슴을 움직이는 슬기나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먹을 만큼 먹는 밥이어야 하고, 담을 만큼 담는 지식이어야 하며, 다스릴 만큼 다스리는 넋이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삶을 헤아리고, 내가 즐길 만한 일거리를 찾으며, 내가 느긋하면서 넉넉하고 따사로이 살아갈 터전을 느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마음껏 펼칠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뜰살뜰 꾸려야 아름답습니다. 나 스스로 내 사랑을 가득 쏟아 따사로이 읽을 책을 찾아서 받아들여야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글이든 그림이든 노래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무엇이든, 내 마음밭을 일구는 결을 톺아보면서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어떤 비평가들 잔소리에 휘둘리며 읽는 그림이 아닙니다. 어떤 전문가들 말밥에 어질어질 휘말리며 읽을 그림이 아니에요. 내 마음속에서 좋아하는 꿈이 피어오르는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림 하나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이야기꽃이 피어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 오늘은 할머니의 생일이에요. 할머니는 케이트하고 미술관에 가기로 했어요. 케이트는 미술관을 무척 좋아하지요. 그곳엔 케이트만의 비밀이 있거든요 ..  (3쪽)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내가 좋아하는 결을 살리면서 씁니다. 내가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쥐어짤 수 없습니다. 돈을 억수로 안기더라도 내 마음으로 우러나지 않을 때에는 아무 글을 못 씁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내가 사랑하는 결을 보듬으면서 그립니다. 내가 그리고 싶지 않은데 그림을 함부로 그릴 수 없어요. 그림대회가 되든 자화상이 되든 내 가슴이 뭉클뭉클 움직여야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북받치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내 가슴속 깊이 아로새깁니다. 나 스스로 가슴으로 치솟는 느낌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내 가슴속 넓게 펼쳐놓습니다.

 좋아하는 나무 앞에 서 보셔요. 좋아하는 꽃 키높이에 맞추어 앉아 보셔요. 좋아하는 내 아이하고 눈을 마주보면서 코를 살짝 대 보셔요. 그림 하나에 담을 이야기란, 글 한 줄에 실을 이야기란, 사진 한 장에 깃들일 이야기란, 어떤 이야기가 될 때에 착하면서 해맑을까 곱씹어 보셔요.


.. “케이트야, 여기 이 아름다운 꽃들을 좀 보렴.” “할머니, 난 물감 얼룩만 보이는걸요.” “그래, 그 물감 얼룩들이 모여서 그림이 되는 거란다. 뒤로 몇 걸음만 물러서서 보면 꽃이 잘 보일 거야.” ..  (4쪽)


 수많은 사람들한테 돋보이는 이야기일 때에 내 가슴을 찌릿 울리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사랑받았다는 이야기일 때에 내 마음이 번쩍 깨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알아야 하고,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삶을 믿어야 하고, 내 삶을 느껴야 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크레용하우스,2001)을 떠올립니다. 제임스 메이휴 님은 《미술관 여행》이라는 그림책에서 ‘케이트’라는 아이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살포시 보여줍니다. 어린이 케이트가 ‘그림읽기’를 하는 길을 넌지시 밝혀요.

 어린 케이트는 비평가나 전문가 눈·코·귀·입을 빌지 않아요. 오직 어린 케이트 가슴을 믿고 어린 케이트 사랑을 꿈꾸면서 그림을 읽어요.


.. 그때 르느와르 아저씨의 그림이 눈에 띄었어요. 한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극장에 앉아 있는 〈첫나들이〉라는 그림이었어요. “할머니께 저 꽃다발을 선물하면 무척 좋아하실 텐데…….” 케이트는 그림 가까이 다가가서 눈을 꼬옥 감았어요 ..  (21쪽)


 케이트한테는 ‘인상주의 화가’나 ‘르느와르’라는 이름이 덧없습니다. 이런 이름을 알자고 그림을 읽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을 외우려고 그림을 배우지 않습니다. 이런 이름 뒤를 잇자며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또다른 루벤스’가 될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고흐를 뛰어넘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가엾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거나 ‘예술쟁이’가 되겠다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지없이 안쓰럽습니다.

 좋아서 그리는 그림이에요. 사랑을 불태우려고 그리는 그림이에요. 삶을 밝히면서 꿈을 활짝 드러내는 그림이에요.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좋아서 그림을 읽습니다. 사랑해서 그림을 그리고, 사랑해서 그림을 간직합니다.

 그림책 《미술관 여행》은 미술관 마실을 하면서 ‘그림읽기 실타래’를 푼다고 할 만합니다. 이렇게 느끼면서 책을 덮어도 나쁘지 않아요. 조금 더 생각하거나 한껏 부푼 사랑을 하고 싶다면, 어린 케이트가 할머니를 사랑하는 넋으로 읽는 그림으로 이루는 예쁜 꽃다발을 나 또한 내 가슴으로 곱다시 껴안는 길을 살펴보셔요. 어린 케이트한테는 물감 얼룩이 모인 그림도 좋은 그림일 텐데, 주름진 살결로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하는 따스한 할머니 손길이야말로 좋은 그림입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미술관 여행 (제임스 메이휴 글·그림,사과나무 옮김,크레용하우스 펴냄,2001.5.2./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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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1984-1987 1 -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실뱅 사부아 그림, 마르제나 소바 글, 김지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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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도 ‘공산주의 나라’도 아닌 만화를
 [만화책 즐겨읽기 62] 실뱅 사부아·마르제나 소바, 《마르지 1984∼1987 (1)》



 ‘폴란드 공산주의 체제’ 마지막 무렵에 어린 나날을 보냈다고 하는 마르제나 소바 님이 쓴 글에 만화라는 옷을 입힌 《마르지 1984∼1987》(세미콜론,2011) 1권을 읽습니다. 책날개에는 “《쥐》,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마르지》! 우리에게 가려진 역사인 동유럽, 한 소녀의 눈을 통해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고 적힙니다.

 책날개에 적는 글은 출판사에서 붙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얼마든지 이처럼 적을 만합니다. 그러나, 만화책 《쥐》와 《페르세폴리스》를 읽은 사람으로서 만화책 《마르지》를 펼쳤을 때에, 이 세 가지를 함께 놓을 만한지는 아리송합니다. 아니, 이 세 가지 만화책을 함께 묶을 만한 이음고리가 있는지부터 알쏭달쏭합니다. 세 가지 만화는 어느 대목에서도 겹치지 않습니다. 다만, ‘프랑스에서 퍽 사랑받으면서 알려진 작품’이라는 이음고리를 찾는다면, 요 하나는 얽힙니다.


- 나는 아빠와 빵을 사러 간다. 사는 데는 별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이 동네에 하나뿐인 빵집인지라 거기도 줄이 길긴 마찬가지다. (35쪽)


 프랑스에서 사는 사람이 프랑스에서 다니는 학교에서 듣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하는 역사를 《쥐》와 《페르세폴리스》와 《마르지》가 알려줄 수 있다고 말할 때에는 틀리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땅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세 가지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한국땅 세계사 교과서에서 ‘폴란드 이야기’를 한 줄이나마 제대로 적는다고 여길 수 없지만, 한국땅 한국사 교과서에서 ‘한국 이야기’를 얼마나 제대로 적는다고 여길 만할까요. 내 어머니와 내 할아버지가 살아온 나날 가운데 어느 대목이 한국땅 한국사 교과서에 실릴까요.

 이른바 ‘한국 문화’란, ‘한국 전통문화’란 무엇을 가리키는가요. 우리가 안다는 ‘한국 역사’는 얼마나 ‘한국다운’ ‘역사 이야기’라 할는지요.


- 아침이 되면 따스한 햇살이 날 깨운다. 할머니는 늘 먼저 일어나 있다. 난 이 방이 참 좋다. (51쪽)


 나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폴란드 삶·사람·삶터’를 사진으로 담은 두툼한 책을 몇 권 장만했습니다. 폴란드 사진책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사진책과 덴마크 사진책과 쿠바 사진책과 아르헨티나 사진책과 뉴질랜드 사진책도 장만했습니다. 스웨덴 사진책과 일본 사진책과 버마 사진책과 네팔 사진책 또한 장만했어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오는 동안, 열두 해에 걸쳐 제도권학교를 다닐 때에, 폴란드도 체코슬로바키아도 덴마크도 쿠바도 아르헨티나도 뉴질랜드도 스웨덴도 일본도 버마도 네팔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요. 제대로 가르칠 교과서부터 없지만, 제대로 가르칠 교사조차 없어요. 오직 나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오로지 나 스스로 찾아다니며 알아야 합니다.

 두툼한 사진책 몇 가지를 장만해서 읽는들 ‘옳게 잘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겉으로 훑을 뿐입니다. 터키 사진책을 장만해서 넘기는 동안 ‘이야, 터키사람은 이렇게 눈부신 빛깔로 무늬를 아로새긴 아름다운 옷을 좋아하며 즐겨입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폴란드 사진책을 넘길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와, 폴란드는 이렇게 갖은 빛깔이 무지개처럼 어우러지면서 붉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대단한 나라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네덜란드땅 사람들이 귤빛으로 드러나는 눈부신 빛깔을 사랑하듯, 폴란드땅 사람들은 ‘공산주의’고 아니고를 떠나 붉은 빛깔 옷을 사랑합니다(2002년 한·일월드컵 때 폴란드 관중이 입은 옷을 떠올리면 조금은 짚힐 테지요). 무엇보다 어느 한두 가지 빛깔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맑고 밝은 빛깔을 좋아해요.


- 그래서 아빠는 원래 있는 사진을 빼고, 결말을 바꾸어 말해 준다. 물론 우린 그게 사실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끝나는 게 좋다. 이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86쪽)


 만화책 《마르지 1984∼1987》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날개 아닌 책겉에 적힌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라는 글줄이 못마땅합니다. 마르지라는 어린이한테는 ‘공산 폴란드’가 아닌 ‘그냥 폴란드’입니다. 전쟁도 혁명도 공산주의도 경제도 모르는 ‘놀기 좋아하는 어린이’ 마르지는 당신 어린 나날을 보낸 이야기를 수수하게 들려줍니다. 이 이야기에 ‘어른들’이, 이를테면 ‘프랑스 어른들’이 ‘공산 폴란드 옛이야기’라는 이름표를 붙일는지 모르지만, 마르지한테는 ‘내 고향나라 고향마을 살아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만화책 《페르세폴리스》는 삶과 사회와 사랑에 눈을 뜬 푸름이가 바라본 고향나라 이란 이야기입니다. 만화책 《쥐》는 길디긴 나날이 흘러도 가슴에 아로새겨져서 잊을 수 없는 크디큰 생채기인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페르세폴리스》를 그린 사람이든 《쥐》를 그린 사람이든, 이 만화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퍽 넉넉하게 살림을 일굽니다. 《마르지》도 이런 틀과 다르지 않아요.

 그렇다고 모든 만화나 문학이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많은 숫자인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가난한 사람들 입과 눈과 코와 귀와 가슴’을 거쳐 만화나 문학으로 태어난 적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 과수원은 정말 넓고, 채소와 과일로 가득하다. 난 과일 따는 걸 좋아한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도 좋아한다. 내가 여기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기도 하다. (130쪽)


 《마르지》를 그린 실뱅 사부아 님은 이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 앞서까지 폴란드를 간 적이 없다고 밝힙니다. 만화를 그리고 나서부터 폴란드땅을 처음으로 밟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마주보면서 그림결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를 느끼기도 했을 테지만, 폴란드땅을 밟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폴란드라는 나라를 생각조차 한 적이 없지 않느냐 싶어요. 왜냐하면, 폴란드라는 나라는, 땅도 사람도 터전도 자연도 푸성귀도 무엇도 ‘칙칙한 잿빛’이 아니거든요. 폴란드사람이 참 오랫동안 머물며 비손을 드리는 성당 건물 또한 조금도 ‘칙칙한 잿빛’이 아닙니다. 눈부신 무지개빛입니다.

 만화책 《마르지》에 감도는 빛깔은 처음부터 끝까지 ‘칙칙한 잿빛’ 바탕입니다. 일부러 이렇게 그렸을 텐데, 누군가, 그러니까 한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프랑스로 옮겨 살아가는 누군가, 당신 고향나라인 대한민국과 서울을 그리면서 프랑스에서 만화로 그린다고 할 때에, 이처럼 ‘칙칙한 잿빛’ 바탕으로 한국과 서울을 그린다 한다면, 한국에서 살거나 서울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한국땅을 칙칙한 잿빛으로 그려도 될까요. 서울이 자동차 끔찍하게 많고 아파트로 꽉 찬 칙칙한 땅이라고는 하나, 이렇다 하더라도 칙칙한 잿빛으로 서울을 그리는 일을 올바르다 할 만할까요.

 ‘마르지가 좋아하는 햇살’과 능금빛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 바라보는 푸르디푸른 들판과 밭뙈기와 멧자락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차라리 빛깔을 입히려 하지 말고 흑백 만화로 그렸다면, 《마르지》 느낌과 이야기가 퍽 많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합니다. 폴란드 빛깔을 옳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렇게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인다면, 폴란드 삶과 사람과 터전을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스스로 찾아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마르지》를 손에 쥐어 펼칠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안다고 할까 근심스럽습니다.

 《쥐》와 《페르세폴리스》는 이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한테 ‘어떤 빛깔과 느낌’을 밀어넣지 않습니다. ‘강요’하거나 ‘주입’하지 않아요. 그러나, 만화책 《마르지》는 칙칙한 빛깔 때문에 그만 ‘수수하면서 사랑스러운 내 고향나라 고향마을 이야기’를 샛길로 빠지게끔 밀어넣고야 맙니다.

 1권을 덮었으니 2권을 읽으며 마무리를 지어야 할 텐데, 2권까지 살 생각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마르지 1984∼1987 (1) (실뱅 사부아 그림,마르제나 소바 글,세미콜론 펴냄,2011.7.29./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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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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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을 만져야 내 몸이 살아난다
 [책읽기 삶읽기 77] 데이비드 몽고메리,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



 혼자 책을 짊어지며 살아가던 지난날에는 언제나 ‘책을 둘 곳’을 헤아리면서 내 살림집을 찾았습니다. 책을 둘 만한 넉넉하고 볕 잘 드는 곳인가를 생각했고, 여러 책방을 가까이 찾아가기에 괜찮은 목인가를 돌아보았습니다. 내 몸이 느긋하게 쉴 곳인가는 거의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 만한 집인가보다 책이 깃들기에 좋은 데인가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는 요즈음은 달리 생각합니다. 책은 어떻게든 곰팡이가 피지 않는 데에 둘 수 있기를 바라면서, 네 식구 깃들 사랑스러운 터전을 헤아립니다. 네 식구가 먼저 사랑스레 살아갈 만한 터전이어야 좋은 보금자리로 여겨 옮기지, 네 식구가 살가이 지내기 힘든 데라면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없는 살림으로는 꿈처럼 바라는 곳으로 가기 힘듭니다. 짐차를 불러 옮기는 값부터 만만하지 않으나, 좋은 시골자락 터란, 땅과 집을 장만해서 옮겨야지, 빌려서 들어가면 애써 잘 꾸며 살 만하게 고치면, 금세 집임자나 땅임자한테 쫓겨납니다. 이러다 보니 선뜻 꿈을 꾸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해요.

 어찌해야 좋을까를 놓고 여러 달 망설이고 알아봅니다. 이곳으로 우리 깜냥껏 옮길 만한지 가늠하고, 저곳에서 우리를 불러 주는데, 우리가 옮겨도 될 만한가 어림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마땅한 집터와 책터를 찾기까지는 퍽 품을 들여야겠지요. 오래오래 눌러살 생각이라면, 네 식구가 모조리 가볍게 짐을 싼 뒤 ‘우리가 좋아할 만한’ 마을로 찾아가서 방을 하나 얻은 다음, 좋은 살림집을 찾기까지 눌러지내야겠지요.


.. 흉작일 때 아무런 구제책이 없는 소작농들은 기근 동안 음식을 구경할 수 없었지만, 시중에는 먹을거리가 많았다. 생계 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살 수 없었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정부들은 곡물을 수출했고, 그렇게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소비에트 농부들은 1930년대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중앙정부가 농부들이 수확한 것으로 도시를 먹이고 해외시장에 내다 팔아서 번 돈으로 산업화의 비용을 댔기 때문이다 … 기근이 이어지는 동안 19세기 말 무렵에 유럽 나라들은 대개 수입 식품으로 국민들을 먹였다 ..  (154∼155쪽)


 옆지기와 함께 읽는 ‘아나스타시아’를 떠올립니다. 러시아 타이가 잣나무숲에서 살아가는 아나스타시아는 식구들이 살아갈 보금자리는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둘째로 좋거나 셋째로 좋은 데가 아닌 가장 좋다고 여기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요.

 첫째로 좋다고 여길 만한 데라기보다 둘째나 셋째로 괜찮다고 여길 만한 데로 옮기려고 생각하던 매무새를 가다듬습니다. 넷째나 다섯째 자리라 하더라도 마음을 느긋하게 내려놓을 데라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첫째가 아니고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한 번 받은 고마운 목숨을 살아가는 나날인데, 돈 걱정이나 집 걱정에 앞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가 아닌가를 따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하루하루 자라면서 보고 들으며 부대낄 좋은 보금자리인가 아닌가를 아로새겨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늘 즐거운 터전이어야 합니다. 낮에 신나게 뛰놀고 밤에 새까만 별하늘을 올려다볼 터전이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을 마실 수 있고, 너른 멧자락과 파란 바다를 이웃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이 잘 뚫린 데라든지, 이름나거나 훌륭하다는 학교가 가까이 있다 한들 부질없습니다. 아이 삶을 보건대, 이런 물질과 문명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지식이 덧없습니다. 아이 삶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날마다 숨쉬고 마시며 먹는 자연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 흙의 침식이 고대사회들을 무너뜨렸고 오늘날의 사회도 심각하게 뒤흔들 수 있다는 무시 못 할 증거 앞에서도 지구적인 흙의 위기와 식량 부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경고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미 1980년대 초반에 농업경제학자 레스터 브라운은 현대 문명이 석유보다 먼저 흙을 다 써 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어진 그런 불안한 예측들을 한귀로 흘려 버리면서 전통적인 자원경제학자들은 흙의 침식이 식량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을 지나쳤다. 그러나 침식 탓에 농경지에서 흙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흙이 사라지는 현실에서 그런 관점은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흙의 유실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는 때가 2010년이냐 2100년이냐 하는 논쟁은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  (246쪽)


 이야기책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2010)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서양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동양사람들은 흙을 거룩하게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는 동양사람들 가운데 퍽 많은 이들이 서양사람들처럼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흙을 하찮게 여깁니다. 도시에서 보금자리를 얻어 지낸다고 할 때부터 흙을 하찮게 여기고 맙니다.

 흙은 문명도 물질도 과학도 아닙니다. 흙은 오로지 자연이고 삶이며 목숨입니다.

 사람은 문명이나 물질이나 과학이라는 옷을 입으면, 몸을 덜 쓰거나 땀을 안 흘리면서 돈은 넉넉히 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라 하더라도 밥을 먹어야 하고 숨을 쉬어야 하며 물을 들이켜야 합니다. 밥·숨·물이 없이 어떤 사람이 몇 초나 살아숨쉴 수 있겠습니까. 밥·숨·물이 없는데 돈·힘·이름으로 무얼 할 수 있는가요.


.. 우리는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8쪽)


 이야기책 《흙》은  수많은 보기를 오랜 발자국을 더듬으면서 하나하나 알뜰히 짚습니다. 바보스레 살아온 서양 문명 사회를 낱낱이 꼬집거나 나무랍니다. 384쪽에 이르는 줄거리는 한결같습니다. 머리말에 한 줄로 적은 말마디처럼, 《흙》은 예나 이제나 “우리 두 발과 집, 도시, 논밭을 떠받치고 있는 땅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슬프며 안타까운 사람들 근심스럽고 안쓰러운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흙을 먹고 흙을 입으며 흙에 몸을 누여 살아가는 목숨입니다. 흙을 잊는다면 사람은 사람 구실을 못 합니다. 흙하고 멀어지면 몸은 자질구레한 못난 것들이 스며들어 무너지기 때문에 자주 아프고 오래 앓습니다. 흙을 만져야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습니다. 적어도 텃밭을 돌보거나 조그마한 꽃그릇을 건사해야 사람다움을 살포시 잇습니다. (4344.9.10.흙.ㅎㄲㅅㄱ)


―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씀,이수영 옮김,삼천리 펴냄,2010.11.26./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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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둑길 사진찍기


 첫째 아이하고 읍내 마실을 가려면 시골버스 타는 데로 가거나 자전거수레에 태워야 한다. 오늘은 모처럼 첫째 아이 손을 잡고 시골버스 타는 데로 걸어가기로 한다. 빗방울이 듣기에 큰 사진기는 내려놓고 비오는 날에도 쓸 수 있는 작은 사진기를 목에 건다. 아이는 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망가진 필름사진기’를 손목에 걸고 걷는다. 아이는 함께 걷는 내내 틈틈이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준다. 망가진 필름사진기에는 필름이 없기도 하지만, 망가졌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러나 첫째 아이는 신나게 사진기를 들여다보면서 즐거이 단추를 누른다. 나는 아이 곁에서 아이가 사진을 찍으며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사진기가 두 대라면 참 재미있다. (4344.9.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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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0원


 둘째 아이 백날을 맞이해서 흰떡을 뽑은 다음, 이 떡을 음성 읍내에서 자주 마주하면서 고맙다고 여기는 분들한테 찾아가서 하나씩 드렸다. 이 가운데 음성 시외버스 타는 곳에서 표를 파는 아주머니한테도 하나 드렸는데, 오늘 첫째 아이하고 읍내마실을 나오면서 표를 한 장 끊으려고(우리 마을을 오가는 광벌 버스표) 하는데, “어, 백일떡 잘 먹었어요. 잠깐만요. 이거(돈) 받는 거 아니에요. (표) 하나 줄게요.”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때에 끊을 표를 그냥 내주신다. 내가 내민 돈을 고스란히 돌려주신다. (4344.9.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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