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 따뜻한 나날의 조각들
레아 글.사진 / 한빛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언제나 마음찍기
 [찾아 읽는 사진책 42] 레아,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한빛미디어,2010)



 사진책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한빛미디어,2010)는 첫 번째 이야기 다음에 나온 책입니다. ‘감성(感性)사진’이라는 말마디를 쓰는데, ‘감성’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한다고 적힙니다. ‘자극(刺戟)’이란 “외부에서 작용을 주어 감각이나 마음에 반응이 일어나게 함”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감성사진’이란 “마음이 움직이도록 건드리는 사진”이거나 “사람들 스스로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라는 뜻입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내놓은 레아 님은 “책 한 권 읽지 않고 사진을 시작했어요. 누군가의 책을 읽으면 누군가의 사진을 따라하게 될까 봐. 내 사진 속에 내 마음이 담기지 않게 될까 봐(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다른 이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일은 그리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사람인데 굳이 다른 사람 길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아 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려 한다면, 레아 님이 내놓은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또한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을 까닭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레아 님이 빚어서 나누려 하는 ‘감성사진’은 ‘레아 님 스스로 당신 길을 고이 걸어가려 하는 사진’인 만큼, ‘레아 님 사진책을 읽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레아 님이 걸어간 길을 따르거나 젖어들거나 길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기를 씁니다. 사진기는 ‘다른 누군가’가 만듭니다. ‘내가 만든 내 사진기’로 ‘나만이 선보이는 사진’을 찍는 사람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을 담는 내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나 스스로 나만이 보는 빛느낌이란 없습니다. ‘나만 본다고 생각하는 빛느낌’이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든 사진기를 쓰지 않고, 내가 손수 만든 사진기를 쓰더라도 ‘사진기라는 틀을 만든 사람’이 일군 빛느낌 담는 그릇이라는 테두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고, 우리는 누구나 목숨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고, 우리는 누구나 믿음입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만화를 그리든 노래를 부르든 춤을 추든 모두 똑같습니다. 어느 갈래에서든 ‘나만 남달리 하는 길’이란 없습니다. ‘내가 내 삶을 즐겁게 살찌우면서 하는 길’만 있습니다.

 레아 님이 맨 처음에는 다른 사진책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다른 사진책을 찬찬히 살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사진책을 잔뜩 들여다보더라도 ‘레아 님 나름대로 걷는 길이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더 단단해지거나 더 야물어지거나 더 빛나야 옳’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럽습니다. 느낄 대목은 느끼고, 배울 대목은 배우며, 나눌 대목은 나누면 됩니다.

 나한테 더 있으니 기쁘게 나눕니다. 나한테 모자라니 즐거이 받아들입니다. 나한테 힘이 있으니 예쁘게 씁니다. 나한테 힘이 없으니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다른 사람 사진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란,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소리하고 똑같습니다.

 책이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책은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마디를 담은 종이그릇입니다. 언제라도 다시 되새길 만한 말마디를 엮은 슬기그릇입니다. 따라하거나 배우거나 좇으라고 하는 책이란 없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아름다이 살아내면서 깨우치거나 느낀 좋은 슬기와 넋과 빛느낌을 스스럼없이 나누면서 서로서로 다 다른 사진길을 사랑스레 북돋우자고 해서 태어나는 사진책입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사진에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 설명서 같은 글이 싫어진 나는 갇혀 있던 감정을 사진과 함게 풀어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30, 229쪽).”라는 이야기를 가만히 되새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까닭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밥을 먹으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을 자려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 잠을 잡니다.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나눕니다. 살아가는 내내 웃고 울며 떠듭니다. 누구나 살아숨쉬는 나날 언제나 ‘마음을 보여주고 마음을 읽으며 마음을 어깨동무합’니다. 어쩌면, 레아 님으로서는 “갇혔던 마음을 사진과 함께 풀어낸”다기보다, 이제껏 스스로 제대로 몰랐던 마음을 시나브로 찾아나서는 사진찍기와 사진에 글 붙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사진이든 마음이 담기고, 어떠한 글이든 마음이 실리거든요.

 딱딱하다는 신문글이든 논문글이든 평론글이든, 이러한 글 어디에라도 마음이 안 담길 수 없습니다. 적어도 ‘딱딱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깁니다. 학문에만 파묻혀 둘레 사람들 따순 손길이나 눈길을 읽지 못하는 딱닥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담겨요.

 착한 마음만 마음일 수 없습니다. 맑은 마음만 마음이지 않습니다. 생채기를 입은 마음도 마음입니다. 다친 마음도 마음일 뿐 아니라, 아픈 마음과 슬픈 마음과 메마른 마음과 기운 꺾인 마음도 모조리 마음이에요. 굳은 마음이든 모진 마음이든 미운 마음이든 한결같이 마음입니다. 그저, 이 숱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어느 마음이 더 좋거나 더 나쁘다고 함부로 자르거나 잴 수 없어요.

 “우리가 걷는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훌륭한 피사체가 될 수 있습니다 … 책과 인터넷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명한 관광지를 따라 타인이 걸었던 발자국을 쫓으며 허덕이는 대신 골목과 사람과 빛에 마음을 열어 보세요(167, 201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레아 님은 레아 님만이 바라보는 눈길대로 삶을 일구고 사진을 사랑하려 합니다. 앞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진책을 읽건 안 읽건 대단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읽는대서 이 사진책을 내놓은 사람 틀에 갇힐 까닭이 없듯이, 이름난 관광지를 간대서 내 마음이 따분해지거나 칙칙해지지 않습니다. 사람 발길이 뜸한 데를 찾아간다 해서 내 마음이 촉촉해지거나 해맑아지지 않아요. 언제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있더라도 내 마음은 늘 내 마음 그대로입니다. 시골자락에서 포근한 마음이 될 때에는 몸 또한 포근한 몸일 텐데, 복닥거리는 도시 한복판에서 포근하지 못한 몸이 되더라도, 마음은 포근하게 살릴 수 있어요. 몸이 힘들면 마음 또한 힘들지만, 몸이 힘들기에 마음은 한결 씩씩하게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살뜰히 살아숨쉬는 고운 목숨이면서 사진기를 손에 쥔 멋진 사진동무입니다.

 이리하여, 레아 님은 어쩔 수 없이 “이럴 때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카메라가 필요해진 거야.’(277쪽)”처럼 이야기하고야 맙니다.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사진마다 아래쪽에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하나하나 밝히는데, 굳이 이렇게 밝힐 까닭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밝히는 뜻은 레아 님 나름대로 좋은 느낌과 넋과 매무새였다고 생각합니다만, 레아 님 사진책을 읽을 여느 사람한테는 ‘아하, 이런 사진을 찍으려면 이런 사진기를 써야 하는가 보구나.’ 하고 여기도록 이끕니다. 사진을 ‘마음’이 아닌 ‘사진기’로 찍도록 내몹니다.

 레아 님 스스로 ‘마음을 찍는 사진’이요 ‘마음을 나누는 사진’이라고 여긴다면, 사진마다 밝히는 ‘어떤 장비를 썼느냐’ 하는 대목을 잘라야 합니다. 아무 사진기를 쓰면 어떻고, 어떤 사진기를 썼다고 밝히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사진은 사진 그대로 바라보면서 즐겨야지요.

 레아 님이 어느 대학교를 다녔는지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더 잘 헤아리거나 더욱 살가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다. 레아 님이 어느 마을에서 태어나 어느 동네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를 알아야 레아 님 사진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장비병’이 잘못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장비로 일구지만, 내가 텃밭을 일구며 호미를 쓴다 해서 호미한테 휘둘리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손에 쥔 호미일 뿐입니다. 할배가 쓰던 호미를 쓴들 내가 저잣거리에서 사온 호미를 쓴들, 풀을 뽑을 때에는 똑같습니다. 내가 쓰든 호미를 내 딸아이가 물려받아서 쓴들, 딸아이가 나중에 커서 스스로 호미를 장만해서 쓴들, 딸아이가 밭에서 무를 캘 때에는 똑같습니다.

 마음으로 주고받는 사진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말 그대로 마음만 보여주셔요. 마음이 아닌 자잘한 부스러기는 사진을 나누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꽃피우는 길에 그저 걸림돌입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마음찍기였습니다. 다큐사진도 마음찍기요 상업사진도 마음찍기입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을 꾸며 다 다른 삶을 일구는 마음찍기입니다. (4344.7.30.흙.ㅎㄲㅅㄱ)


― 레아의 감성사진 두 번째 이야기 (레아 글·사진,한빛미디어,2010.8.31./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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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미네 포도
후쿠다 이와오 그림, 미노시마 사유미 글, 양선하 옮김 / 현암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착한 네 살 어린이와 어머니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85] 후쿠다 이와오·미노시마 사유미, 《사유미네 포도》(현암사,2002)


 네 살 어린이는 동무나 이웃이랑 먹을거리를 얼마나 알뜰살뜰 나누어 먹을 수 있을까요. 네 살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동무나 이웃이랑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는 삶결 그대로 네 살 어린이 또한 똑같이 나누어 먹을까요.

 네 살 어린이는 무슨 노래를 즐겁게 부를까요. 네 살 어린이하고 함께 지내는 어버이가 언제나 즐거이 부르는 노래를 즐거이 부를까요.

 네 살 어린이는 제 입에 맛나다 여기는 밥이 있을 때에 어떻게 하나요. 혼자 먹어치우나요, 동무나 어버이나 이웃이나 둘레 사람을 불러 조금씩 나누어 먹는가요.

 네 살 어린이가 읊는 말은 한 살 적부터 배운 말인가요, 머리속에 깃들던 말인가요, 네 살까지 살아오며 둘레 어버이와 어른과 동무가 들려주던 말인가요.


.. 그렇지만, 뭐 친구들도 모두 놀러 와도 돼! 사유미네 포도, 조금씩은 나눠 줄 수 있으니까! ..  (29쪽)


 그림책 《사유미네 포도》(현암사,2002)를 읽습니다. 아버지가 읽기 앞서, 어머니랑 네 살 딸아이가 함께 읽습니다. 올들어 포도 구경을 아직 못 했다고 생각하는데, 시골집에서 살아가지만 이제 겨우 한 해밖에 안 되었으니 밭가에 심은 살구나무에서 꽃이 피기도 멀고, 포도나무는 이듬해에나 심을 수 있을 듯하며, 읍내 과일집에서 사다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를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읽으며 포도를 나누어 먹지 못하니 서운하지만, 비가 그치면 네 살 딸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에 다녀오기로 하고, 나중에 포도맛을 즐기자 생각하며 《사유미네 포도》를 읽습니다.


.. 가장 많이 먹은 건 곰이에요. 말랑말랑 반들반들한 포도를 꿀꺽! 먹어 버렸어요 ..  (23쪽)


 그림책 《사유미네 포도》는 네 살 어린이가 글을 썼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어린이 사유미도 네 살일까 궁금한데, 노는 모습을 보면 네 살인 듯하고, 다섯 살이나 여섯 살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유치원에도 다니는 사유미요, 다람쥐와 새와 곰이 포도나무 포도를 깊은 밤에 슬쩍 따먹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유미입니다.

 그림책 겉을 보면 줄거리가 어떻게 될는지 훤히 헤아릴 만합니다. 사유미는 곰이랑 다람쥐랑 새랑 포도덩쿨 밑에 둘러앉아 서로서로 조금씩 포도를 나누어 먹습니다. 그런데, 그림책 겉그림이랑 속그림이 조금 다릅니다. 어쩌면, 잘못 앉혔을 수 있고, 일본에서 나온 책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릅니다만, 사유미는 ‘머리 왼쪽을 고무줄로 묶었’습니다. 그림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겉그림은 거꾸로입니다. 29쪽에 모두 나오는 그림에서는 곰이 사유미 왼쪽에 앉습니다. 겉에서는 사유미 오른쪽에 앉아요. 왜 이렇게 뒤집어졌을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뒤집힌 그림은 그림책을 읽으며 그닥 걸리적거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피면서 받아들일 마음은 주렁주렁 달린 포도송이를 올려다보며 어머니 말씀을 듣고 얌전히 기다린 착한 사유미 삶입니다.


.. 날이 더워졌어요. 포도가 보랏빛을 띄었어요. 이제 먹어도 돼요? 조금 더 기다리자꾸나. 단맛이 들 때까지. 엄마가 말씀하셔서 더 기다렸어요 ..  (10쪽)


 그림책을 보면 사유미만 나오고 사유미네 어머니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목소리로만 나옵니다. 포도덩쿨 둘레에서 사유미랑 사유미네 어머니랑 함께 손을 잡고 포도송이를 올려다보거나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는다거나, 포도잎을 만진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사유미랑 포도꽃을 함께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이렇게 사유미만 나와서 날씨에 따라 옷차림이 바뀌거나 노는 모습이 달라지는 그림을 넣는 얼거리도 예쁘장하면서 좋지만, 곁에서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든 밥을 하든 청소를 하든 동생을 돌보면서 젖을 물리든, 어머니가 함께 나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에 한결 아름답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조금 더 ‘사람 사는 이야기 맛과 멋’을 펼칠 수 있지 않느냐 싶어요.

 어찌 보면, 마리 홀 에츠 님 그림책 《숲속에서》처럼, 어린이가 바라보는 누리는 어린이 눈길로 바라보는 누리일 뿐, 어른들 눈길로는 바라보지 못할 수 있어요. 사유미는 포도가 익는 모습을 눈으로 바라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혀로 군침을 흘립니다. 사유미네 어머니는 똑같은 어른인 탓에 멀찍이 떨어져 ‘머리로 날짜를 어림’하면서 더 기다리자고만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곰이랑 둘러앉아 포도를 나누어 먹자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직박구리나 종달새나 꾀꼬리하고 포도를 나누어 먹자고 꿈꿀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다람쥐와 멧쥐와 들쥐하고 포도를 나누어 먹자고 그릴 수 있을까요.

 사유미네 어머니는 사유미한테 “포도는 내년에도 또 열릴(27쪽)”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유미는 “그럼 그땐 내가 먼저 실컷 먹(27쪽)”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유미는 “너무 슬퍼서 그만 눈물이 핑그루루(25쪽)” 흘렀는걸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다시 기다렸는데, 기다린 사유미한테 돌아온 포도송이란, 짐승들이 먹다 남은 찌끄레기인걸요.

 사유미는 착한 아이입니다. 어머니 말씀을 잘 듣기에 착한 아이가 아닙니다. 소담스레 익은 굵직한 포도알을 누가 요렇게 얌체처럼 먹었는지 훤히 알지만, 모두들 불러 이듬해에 함께 나누어 먹자고 생각하기에 착한 아이입니다. 사유미는 예쁜 아이입니다. 해마다 고맙게 포도알을 맺어 나누어 주는 포도나무를 살포시 쓰다듬을 줄 아는 예쁜 아이입니다.

 사유미네 어머니도 사유미만 한 나이였을 때에, 이렇게 사유미처럼 생각하고 꿈꾸며 눈물을 짓다가는 밝게 웃었을까요. (4344.7.29.쇠.ㅎㄲㅅㄱ)


― 사유미네 포도 (후쿠다 이와오 그림,미노시마 사유미 글,양선하 옮김,현암사 펴냄,2002.7.2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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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속에 숨은 약초
김형찬 지음 / 그물코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풀’ 먹기, 풀 먹고 ‘좋게 살기’
 [환경책 읽기 31] 김형찬, 《텃밭 속에 숨은 약초》



- 책이름 : 텃밭 속에 숨은 약초
- 글·사진 : 김형찬
- 펴낸곳 : 그물코 (2010.11.30.)
- 책값 : 18000원



 (1) 풀씨


 밭에서 기르는 푸성귀는 잎이 여립니다. 밭에서 거두는 푸성귀는 잎이 보드랍습니다. 사람들이 밥상에 올리는 푸성귀는 달근합니다.

 여느 들이나 벌이나 멧자락에서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며 씨를 내고 뿌리를 내리며 잎을 틔우는 풀은 잎이 여리지 않습니다. 잎이 보드랍지 않고, 사람 혀에 썩 달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러서 먹는다는 푸성귀는 사람 손길을 타며 조금씩 달라졌을 테고, 따로 씨앗을 사고팝니다. 유전자를 건드리는 씨앗이 많습니다.

 여느 들이나 벌이나 멧자락에서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며 자라는 풀은 해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풀씨를 내지만, 이 풀씨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풀을 없애려고 사람들이 숱하게 약을 치거나 낫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하거나 쟁기질을 한다지만, 이 풀은 이듬해에 틀림없이 다시 납니다.

 사람들이 냉이 씨앗을 뿌릴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질경이 씨앗을 뿌릴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며느리밑씻개 씨앗을 뿌리지 않아요.


.. 감은 성질이 차갑기 때문에 열을 내려주고 갈증을 멎게 합니다. 또한 단맛으로 음식 맛을 나게 하지만, 지나치게 먹으면 탈이 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감의 차가운 성질을 다스리기 위해 불에 말리거나 볕에 말려서 쓰는데, 매실을 말려 오매나 백매로 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 그 오얏나무가 자두나무라는 것을 안 것은 그 이야기를 읽고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  (25, 139쪽)


 시골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자라는 풀 가운데 이름이 붙지 않은 풀이란 거의 없습니다. 옛사람은 들판과 멧자락에서 자라는 풀을 알뜰히 알아야 살아갈 수 있었고, 흔한 풀이든 드문 풀이든 어디에 어떻게 쓰며, 맛이나 냄새를 옳게 알아야 살림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들판과 멧자락에서 자라는 풀을 거의 모릅니다.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식구가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겨서 살아간다지만, 들판을 가득 채우는 풀마다 무슨 풀인지 낱낱이 가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풀이름이 무엇인지 욀 수 있대서 풀을 아는 일이 아닙니다. 풀이름은 모르더라도 이 풀을 먹으면 맛이 어떻고 내음이 어떠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풀을 안다 할 만합니다. 풀을 즐겨 뜯고 즐겨 먹을 때라야 비로소 풀을 안다 할 만해요.

 아무개 이름이 무엇이라 욀 수 있대서 아무개를 알지 않습니다. 아무개 나이를 어림하거나 아무개가 다닌 학교를 왼대서 아무개 삶을 알지 않습니다. 아무개 얼굴이나 몸짓이나 매무새를 들여다본대서 아무개 넋이나 얼을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 바라보거나 살피는 일이랑 속으로 사귀거나 어깨동무하는 일은 사뭇 다릅니다.


.. 밭 한구석에 무성하게 자라는 쇠무릎을 다른 작물들 못 자라게 한다고 뽑아버리곤 했는데, 어머니께 말씀드려 한쪽에 키워 무릎과 허리 아픈데 차나 약술로 쓰시도록 했습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장부의 기능이 약해지고 이에 따라 뼈와 근육도 약해집니다. 무릎과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에게 쇠무릎 약차와 약술을 드시게 하면 좋겠습니다 … 약재로 쓰는 (개나리) 열매껍질은 옛 기록처럼 오래된 나무에서만 열리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열에 한 그루 정도가 열릴 정도로 귀하기 때문에, 지금 쓰이는 개나리 열매껍질은 거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  (34, 100쪽)


 “잡초는 없다”라는 이름을 걸며 책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잡초는 없다”라는 말은 어느 한편으로 보면 맞습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말이라거나 옳게 읊는 말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아무 풀(잡풀)’이든 ‘아무 사람(잡사람)’이든 따로 없습니다. 다 다른 목숨이면서 다 다른 빛깔인 풀이요 사람입니다. 온누리에 다 다른 학교는 다 다른 빛깔대로 아름답습니다. 학력평가를 해서 학교마다 등급이나 점수를 매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 돈벌이를 헤아려 누구는 1등급이고 누구는 100등급라고 나눌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잡초는 없다”가 아니라 “풀이 있다”라고 말해야 알맞습니다.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다 풀이야”입니다. “모두 사람이에요”입니다.

 사랑 아닌 삶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삶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입니다. 모든 풀은 고마운 목숨이고, 모든 풀은 고마운 밥이며, 모든 풀은 고마운 동무입니다. 사람들은 풀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들이 숨을 거두면 풀씨가 더욱 기운이 나게끔 흙으로 돌아가 거름 구실을 합니다. 대통령도 한 사람 몫 거름입니다. 임금님 또한 한 사람 몫 거름입니다. 흙일꾼이든 고기잡이이든 똑같이 한 사람 몫 거름입니다. 대통령도 밥 한 그릇으로 배가 부르고, 임금님도 밥 한 그릇으로 배가 부릅니다. 흙일꾼이든 고기잡이이든 똑같이 밥 한 그릇으로 배가 부릅니다.


.. 대부분의 가을걷이를 마친 밭의 색은 흙색입니다 ..  (433쪽)


 풀씨는 목숨씨입니다. 풀씨는 삶씨입니다. 풀씨는 흙씨이면서 사람씨가 되는 사랑씨입니다.


 (2) 사람씨


 《텃밭 속에 숨은 약초》(그물코,2010)를 읽습니다. 책이름 그대로 텃밭에 깃든 약풀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사람 몸을 살리는 풀이란 어디 멀미던 두메에 깃들지 않고, 바로 내 살림집 곁에 있는 여느 밭자락에서 자란다고 이야기합니다.

 더없이 옳습니다. 굳이 멀리까지 찾아나서야 할 약풀이 아닙니다. 풀마다 쓰임새가 어떠한가를 가만히 살피면서 하나하나 받아들이면 약풀 아닐 풀이란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모든 풀은 저마다 달리 쓰임새가 있습니다.


.. 어린 시절을 온통 시골에서 지낸 저는 자연에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때 실습이나 방학숙제도 늘 주위를 둘러싼 논과 밭 그리고 산에서 대부분 해결했습니다 … 지금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버스 타고 학원에 가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수업이 끝나면 집에다 책가방 벗어 놓고 나가 노는 게 일이었습니다 ..  (53, 185쪽)


 풀을 먹는 짐승은 온갖 풀을 골고루 뜯어서 먹습니다. 겨울에는 어쩔 수 없이 ‘말린 풀’이나 다른 먹이를 먹지만, 봄부터 온 들판과 멧자락을 신나게 누비며 온갖 풀을 뜯어서 먹습니다.

 풀을 먹는 짐승은 풀마다 맛과 내음과 쓰임이 어떠한가를 익히 압니다. 풀을 먹는 짐승이니까 풀을 모를 수 없고, 풀을 몰라서 안 됩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들은 풀마다 맛과 내음과 쓰임이 어떠한가를 아주 모릅니다. 저 또한 참말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풀맛과 풀내를 옳게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밥상에 올리는 여느 풀을 제대로 듣거나 보거나 살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회사나 공공기관에서 풀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풀을 다루지 않습니다. 풀을 먹으면서도 ‘풀먹기’를 말하지 않고 온통 ‘채식(菜食)’입니다. 이제는 ‘베지테리안’이라고 읊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막상 풀을 먹어도 풀을 모릅니다. 애써 풀을 먹지만 풀을 알려 하지 않습니다. 고기에 곁들여 풀을 먹는들 풀맛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나물을 하거나 김치를 하더라도 어떠한 풀이 우리한테 고마운 목숨으로 찾아드는가를 깨닫지 않습니다.


.. 아주 가까운 곳만 돌아봐도 모르는 것이 많고, 세심히 살피면 일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요즘 텃밭을 나다니며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일은 지금 달래장과 돌나물, 시금치나물이 밥상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 쇠비름 사진을 찍는데, 따라나오신 어머니께서 그 옆에 있는 풀을 가리키며 참비름이라고 하십니다. 줄기는 쇠비름과 비슷한데 색이 다르고 잎 모양과 꽃도 다릅니다 ..  (215, 282쪽)


 《텃밭 속에 숨은 약초》를 곰곰이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텃밭에 깃든 약풀을 이야기한달 수 있는 한편, 약풀이란 텃밭이든 너른 밭이든 들판이든 멧자락이든 똑같이 골고루 마음껏 자라니까, 그냥 ‘약이 되는 풀’을 이야기한달 수 있습니다.

 개나리라든지 오얏이라든지 살구는 ‘텃밭에 깃드는 약풀’이 아닙니다. 곧, 한의학에서 약으로 삼는 풀과 나무와 열매를 골고루 이야기하는 책인 《텃밭 속에 숨은 약초》입니다. 그래서 백 가지에 이르는 ‘약이 되는 풀과 나무와 열매’가 어떻게 사람 몸에 좋거나 도움이 되는가를 다룹니다. 풀에 얽힌 옛이야기랑 풀이름에 맺힌 옛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 상업적 목적이건 언론에서 조명을 받아서건 여름날 소나기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건강식품들의 유행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그럼 30년 뒤에도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건강식품의 트렌드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  (354쪽)


 책을 덮습니다. 텃밭을 예쁘게 일구고, 텃밭에서 예쁘게 풀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러한 책처럼 텃밭을 일구려는 사람은 무척 적습니다. 시골사람이 아니고서는 텃밭일 일구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꽃밭이나 마당을 두더라도 텃밭을 일구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니, 도시에서는 자동차를 둘 자리를 마련해야지, 텃밭을 마련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드넓은 터에 자동차를 빽빽하게 세웁니다. 도시에서는 드넓은 터를 자동차가 바삐 오가는 아스팔트길로 바꿀 뿐입니다.

 도시에는 드넓은 숲공원이나 놀이공원이 있습니다. 도시에는 드넓은 논이나 밭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드넓은 쇼핑센터나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이 많습니다. 도시에는 조그마한 텃밭이든 널따란 밭자락이든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자동차로 오가야 할 뿐, 두 다리나 자전거로 오갈 만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는 손바닥만 한 좁은 땅뙈기에 겨우 뿌리를 내립니다. 도시에서는 흙을 밟을 일이 없고, 풀포기가 예쁘게 고개를 내밀기 벅찹니다.

 도시가 나쁘고 시골이 좋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들 스스로 풀을 먹으면서도 풀이 자랄 터를 곱게 마련하거나 즐거이 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돈을 벌고, 사람들은 그저 돈을 쓸 뿐입니다.

 좋은 풀을 먹는대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려 하면서 풀 한 포기 사랑하는 마음밭이 되어야 합니다. (4344.7.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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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7-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가지고 있는데 참 좋더군요.
나무를 베어 만드는 게 아깝지 않은 책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얘기 같더군요.

그쵸,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우유를 뱀은 독을 만드니까 말이죠~^^

파란놀 2011-07-30 06:45   좋아요 0 | URL
괜찮은 책이라고는 느끼지만
그렇게까지 좋은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왜냐하면, '텃밭 속에 숨은 풀'이란
텃밭에서 자라는 모든 풀을 골고루 먹으면
약이고 밥이고를 따지지 않아도
내 몸이 튼튼해진다는 뜻이고,
참말 이와 같거든요.

이래저래 따지거나 알지 않더라도
그저 풀과 열매와 꽃 모두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모두 고마운 목숨이에요.

이 책에서는 이 대목을 살짝 건드릴 듯하다가
그예 다루지 못하고 말아서,
아쉽지만 별을 셋만 붙였답니다...

뱀을 나쁘게 보시면 안 돼요.
뱀을 나쁘게 보는 사람이 나쁩니다......
 



 아이들한테 책 읽히는 어머니


 둘째가 찡얼거린다. 첫째는 칭얼거린다. 둘째를 돌보던 어머니가 첫째가 건넨 그림책을 받는다. 두 아이가 드러누워 함께 책을 들여다본다. 두 달을 조금 지난 갓난쟁이가 무슨 책을 알까 싶지만, 어머니랑 누나가 곁에 누워서 좋은지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면서 좋아한다. 어머니랑 누나가 어느 한쪽을 들여다보니 저도 책을 읽는 듯 들여다본다. 책을 읽을 때에는 혼자 읽고 혼자 삭인다. 책을 읽힐 때에는 서로 읽고 함께 받아들인다. (4344.7.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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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19:33   좋아요 0 | URL
된장님께서 사진을 애정깊게 찍으시네요.
항상 마음이 풀어짐을 느낍니다.

파란놀 2011-07-29 05:13   좋아요 0 | URL
늘 곁에 있으니까,
곁에 있는 대로 찍어요~
 



 푸른개구리


 작은방에 푸른개구리가 들어왔다. 조그마한 푸른개구리는 어떻게 이리로 들어올 수 있었을까. 새벽 네 시 반에 퍼뜩 깬다. 작은방에 불을 켜고 뜨개질을 하던 옆지기가 불러서 벌떡 일어나 두리번두리번 살피어 조그마한 푸른개구리를 한손에 살며시 쥐어 문을 열고 마당으로 휙 던진다. 푸른개구리는 펼친 손에서 펄쩍 뛰어 저리로 날아가듯 뛴다. 푸른개구리 등짝과 다리는 촉촉하다. 이 촉촉한 살결로 제 목숨을 고이 잇겠지.

 옆지기가 개구리 치워 달라며 큰소리를 낸 탓에 첫째 아이도 그만 깬다. “개구리가? 나왔어?” 하며 묻던 첫째는 다시 재우려 해도 잠들지 않는다.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다 잤어.”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밤 열한 시 가까이 되어 잠든 네 녀석이 새벽 네 시 반 조금 넘은 때에 다 잤다고 일어나면 말이 되니.

 아버지는 새벽 세 시 반에 잠에서 깨어 방바닥에 기저귀를 잔뜩 펼쳤다. 간밤에 방 온도가 1℃ 떨어지면서 보일러가 돌아갔고, 뜨끈뜨끈한 방바닥이니 비로소 기저귀도 제대로 마르겠다 싶어, 부리나케 온 바닥을 기저귀 판으로 만든다. 이러고 나서 어젯밤 빨아 애벌로 헹군 기저귀를 마저 헹군다. 어젯밤에 다 빨기는 했어도 널 자리가 없어 그냥 두었기에, 이렇게 방바닥에 잔뜩 넌 김에 이 녀석들을 헹구어 벽에 잔뜩 걸어야지.

 애벌로 헹군 기저귀를 마저 헹구고 나서 첫째 옷가지랑 옆지기 옷가지를 빨래한다. 다 마친 빨래는 차근차근 빈 자리를 찾아 넌다. 이렇게 하고 나서 겨우 잠들었다 싶을 무렵 옆지기가 불러서 잠이 사라졌다. 푸른개구리야, 넌 하루라도 빨래를 그때그때 하지 않으면 살림을 꾸릴 수 없는 이 조그마한 집에 무슨 일로 찾아왔니. 방바닥에 펼친 기저귀가 다 말랐으니, 이 녀석은 얼른 개고 방바닥에 미처 펼치지 못한 다른 기저귀를 펼치라는 뜻을 일러 주려고 찾아왔니. (4344.7.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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