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보는 눈 167 : 책을 읽는 마음


 나라 안팎으로 이름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님이 쓴 글을 그러모은 《영혼의 시선》(열화당,2006)을 읽었습니다. 브레송 님은 “사진기는 환경을 존중해야 하고, 사회적 배경을 묘사하는 삶의 환경을 포함시켜야 한다(29쪽).”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고 무척 맞는 이야기입니다. 사람과 삶과 삶터를 바라볼 줄 아는 눈길이기에 사진 하나 어여삐 빚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는 브레송 님만 꺼내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이름나지 않은 수많은 여느 사람들도 한결같이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삶터를 알아야 합니’다.

 내 삶을 사랑하지 않고서야 ‘무상급식’이 어떠한 일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정치꾼들이 시끄러이 떠들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 깨달아야 할 ‘무상급식’입니다. 경제꾼들이 어수선하게 외치지 않더라도 내 머리와 마음으로 알아채야 할 ‘4대강사업’입니다. 경찰과 판검사가 읊어야 할 만한 ‘국가보안법’일 수 없습니다. 신문기자가 쓰는 글을 읽고서야 ‘진보와 보수’를 판가름한다면 벌써 늦습니다.

 조 신타 님이 그리고 데라무라 데루오 님이 글을 쓴 그림책 《임금님과 수다쟁이 달걀 부침》(돌베개어린이,2003)을 읽습니다. 그림책 임금님은 높직하게 올려세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에서 살아갑니다. 임금님이 성벽 밖으로 나갈 일이란 아주 드물 뿐 아니라 거의 없습니다. 성벽 안쪽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임금님이 성벽 바깥 터전이나 사람이나 자연을 알 길이란 없습니다. 성벽 안쪽에는 냇물도 바람도 멧자락도 푸나무라든지 숲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만든 돌길에 돌집에 돌방이 있습니다. 창과 방패를 든 무시무시한 군인들이 가득 있습니다. 임금님이 이곳 성벽 안쪽에서 닭장 문을 함부로 열어 모든 닭이 빠져나오는데, 임금님은 당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앗, 큰일났다.’ 임금님은 깜짝 놀라 도망쳤습니다(8쪽).”라는 말마따나 그냥 냅다 내빼면서 당신 잘못을 숨깁니다.

 어리숙한 임금님을 섣불리 탓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은 자연을 모르고 자연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자연하고 벗삼으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볼 줄 모르고 느낄 줄 모르며 알 줄 모르는데, 임금님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길은 하나입니다. 임금님이 무거운 금관을 벗고 무거운 비단옷을 벗으며 맨몸 맨발로 성벽 밖으로 뛰쳐나가 냇물로 뛰어들어 멱을 감거나 풀숲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꽁초니 쓰레기니 아무 데나 버릴 뿐 아니라, 발을 밟거나 어깨를 툭 치고도 ‘잘못했습니다’ 하고 고개숙일 줄 모르는 모습을 어찌 꾸짖을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며 사랑을 모르는데, 어떻게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참이며 무엇이 빛인’ 줄 알아차릴까요.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은 책을 읽을 틈이 없습니다. 시골에는 책방이 없습니다. 시골은 인터넷도 느리고, 아예 안 들어오기까지 합니다.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거나 가게를 꾸리는 사람은 돈벌이에 바빠 책을 들출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책방이 많고 인터넷도 빠릅니다. 책을 손에 쥐고 책을 읽는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을 사랑하려는 몸짓일까요. (4344.8.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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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뚜라미 소리와 책읽기


 하루 내내 귀뚜라미 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귀뚜라미 소리만 듣지 않습니다. 내가 이름을 아는 풀벌레가 많지 않아 제대로 모른다뿐, 하루 내내 수많은 풀벌레가 자아내는 수많은 소리를 듣습니다.

 풀벌레는 사람 들으라고 노래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사람 들으라며 노래를 하지 않는달 수 있습니다. 듣기 나름일 테지요.

 잠자리에 든 뒤에도 풀벌레 소리는 내 온몸을 감쌉니다. 쌀을 씻어 불릴 때이든, 국을 끓일 때이든, 걸레를 들어 방바닥을 훔칠 때이든, 빗자루를 들어 방바닥을 쓸 때이든, 언제나 풀벌레 소리를 듣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풀벌레 소리보다 멧새 지저귀는 소리를 훨씬 자주 더 길게 들었습니다. 아직 늦여름이라 할는지 모르나 살갗으로는 이른가을이라 느낍니다. 아무튼, 봄과 여름 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벽과 밤에도, 노상 멧새 소리가 내 온몸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골목동네 한복판에 깃들던 인천땅 보금자리에서는 깊은 새벽에도 째지는 듯한 자동차 소리를 들으며 설핏 잠을 깨야 했습니다. 깊은 골목동네 한복판에서도 깊은 밤 고요함을 깨뜨리는 술 얹힌 사람들 흐느끼거나 지껄이는 목소리에 자꾸 잠을 깨야 했습니다. 멧새이든 풀벌레이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습니다. 개구리이든 매미이든 신나게 울어댑니다. 그런데, 멧새와 풀벌레와 개구리와 매미가 이루는 소리마디는 내 잠을 깨우지 않습니다. 잠이 깊이 들도록 이끕니다. 잠이 달콤하도록 돕습니다.

 시골 하늘을 흐르는 바람은 내 숨결을 보살핍니다. 시골 흙바닥을 흐르는 물은 내 뼈마디를 돌봅니다. 시골 터전을 채우는 소리는 내 넋과 얼을 어루만집니다.

 첫째 아이가 고단한데다 졸린 몸으로 끝없이 놀고 뛰며 노래하다가는 이내 두툼한 책 하나를 배에 깔고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아이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풀벌레 소리 고즈넉히 스며듭니다. 좋은 한낮입니다. (4344.8.2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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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생태마을을 읽는다 갓골문고 4
조나단 도슨 지음, 이소영 옮김 / 그물코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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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답게 살아갈 길이란
 [책읽기 삶읽기 72] 조나단 도슨, 《지금 다시 생태마을을 읽는다》(그물코,2011)



 ‘생태마을’이나 ‘자연마을’이나 ‘환경마을’ 같은 이름이 붙어야 살 만한 터전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살 만한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린(green)’이니 ‘초록(草綠)’이니 하는 말도 곧잘 씁니다. 그러나, 이런 낱말이든 저런 낱말이든 그닥 대수롭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떤 낱말을 쓰든 이 낱말들이 무엇을 뜻하거나 가리키는가를 옳게 깨우쳐야 합니다.

 먼저, ‘생태(生態)’란 “살아가는 모습”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자연(自然)’이란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진 목숨과 터전”을 일컫는 한자말입니다. ‘환경(環境)’이란 “살아가는 곳 둘레 모습”을 가리키는 한자말입니다. 이러한 낱말을 쓴대서 딱히 남다르다 싶은 이야기가 샘솟지 않습니다. 아니, 이러한 낱말을 쓰면서 더 살 만하거나 더 깨끗하거나 더 아름답거나 더 슬기롭거나 더 사랑스러운 터전을 나타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영어 ‘그린’이든 한자말 ‘초록’ 또는 ‘녹색’이든 뜻은 하나입니다. 우리 말로 이야기하자면 ‘푸름’이나 ‘풀빛’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어느 쪽이라 하든 “푸르게 살자”는 소리요, “풀과 나무를 아끼면서 살자”는 움직임입니다. 자연을 보살피든, 자연스럽게 살아가든, 삶터를 일구든, 사랑스러운 모둠마을을 돌보든, 풀과 나무를 아끼면서 살아가는 매무새가 밑바탕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푸른마을’을 가꾸려 한달 수 있습니다.


.. 인류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는 좀더 깊이 있고 넓은 범위에서 생활양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  (16쪽)


 오늘날 한국땅 곳곳에 서는 아파트를 살피면, ‘푸른마을’ 같은 이름을 붙이는 데가 꽤 많습니다. 아파트를 잔뜩 세우고는 ‘무슨무슨 마을’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들이 퍽 많이 모여 살아가니 ‘마을’이라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참말 아파트덩어리를 놓고 ‘마을’이라 해도 좋은지 알쏭달쏭합니다. 아파트가 많이 모인 곳을 두고 ‘아파트숲’이라고도 합니다만, ‘숲’이라는 낱말하고 ‘아파트’라는 곳이 어울릴 수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잘 살아도 마을이요 못 살아도 마을이겠지요. 돈에 굶주려도 마을일 테고 사랑을 나누어도 마을일 테지요. 이웃하고 따사로이 어깨동무를 해도 마을이며 이웃하고 등지며 나 몰라라 할 때에도 마을입니다.

 그렇지만, 마을이라는 이름을, 숲이라는 이름을, 자연이라는 이름을, 푸름이라는 이름을 아무 데에나 쓰는 일이란, 내 삶과 네 삶과 우리 삶을 얼마나 보듬거나 보살피려는 몸짓이 될까요. 좋은 뜻을 드러낸다는 이름만 쓰면 되는 삶인가요. 멋있거나 훌륭하다는 이름을 붙이면 끝인 삶인지요.


.. 모든 생태마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자신들의 운명이 달린 그들의 자원을 스스로 관리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자원 관리와 관련하여 마을공동체와 기업들 사이에 뚜렷한 선을 두고 있다 … 많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에 북반구의 많은 나라에서도 똑같은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도시 바깥은 대형마트 때문에 지역경제가 무너지고, 소비자들은 노동자를 업신여기고, 생태계를 파괴시킨 생산품을 사는 일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마을공동체는 노동과 환경 관련 규제를 없애려는 원거리 대기업들이 제공하는 일자리에 점차 기대게 된다. 문화는 점점 획일화·표준화되며 최소 공통분모의 하나로 지나치게 단순화된다 ..  (60∼61쪽)


 조나단 도슨 님이 빚은 《지금 다시 생태마을을 읽는다》(그물코,2011)라는 환경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지구별 곳곳에 자리한 돋보이는 생태마을을 살핀 이야기를 들여다보며 곱씹습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구별 곳곳에서 저마다 애쓰고 힘쓰며 땀흘립니다. 나라와 겨레를 넘어 사랑과 믿음이 어우러질 좋은 삶자락을 길어올리고 싶어서 꿈꾸고 노래하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곰곰이 돌아봅니다. 생태마을이라 하는 곳은 어디에서나 시골마을입니다. 도시마을이면서 생태마을인 곳은 없습니다. 도시에서는 생태마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생태마을이 태어날 수 없는 도시이지만, 생태마을 비슷하게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 길을 더는 내지 않고, 집을 더는 짓지 않으면서, 텃밭을 차츰 늘릴 때에는 생태마을 비슷하게 나아갑니다. 텃밭을 차츰 늘리다가는 조그맣게라도 논을 보듬는다면, 텃밭 가장자리에 나무를 한 그루씩 심으면서 조그마한 수풀을 이룬다면, 숲까지 이르지는 못하나 우람한 나무가 줄지어 자라도록 마음을 기울이고 빈터를 돌볼 수 있다면, 이때에는 생태마을 비슷하게 나아갑니다.

 환경이나 생태나 자연을 다룬 책을 읽는대서 생태마을이 되지 않습니다. 환경책 몇 권 읽는대서 환경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생태마을을 꿈꾸거나 환경사랑을 이루고 싶으면, 맨 먼저 자가용을 버려야지요. 조그마한 마을에서 ‘함께 쓰는 자동차’ 한 대나 두 대만 남겨야지요. 써야 할 때에만 알맞게 쓰되, 여느 때에는 쓰지 않는 자동차가 되도록 해야지요.

 사람들 맨손으로도 얼마든지 벼포기를 뜯을 수 있습니다. 다만, 품과 땀이 많이 듭니다. 낫을 쓰면 벼포기는 더 수월히 거둘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한나절 벼베기를 하는 만큼,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살붙이들 함께 먹을 나락이 나옵니다. 벼를 베는 기계를 기름을 넣어 움직이면 한 시간 만에 열 사람이나 스무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나락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시간 만에 열 사람이나 스무 사람이 한 해 동안 먹을 나락을 거두는 만큼, 기름을 써서 공해덩이 먼지를 빚는 한편, 이렇게 커다란 기계를 만드느라 물과 바람과 흙을 더럽힙니다.


.. 생태마을이 작을수록 모든 구성원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명료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생태마을이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이러한 의사결정은 점차 어렵게 되어 소수가 여전히 이의를 제기하는데도 결정을 내어 버리는 간접민주주의 형태로 변질되고 있다. 위원회나 소규모 전문 집단이 의사결정 과정을 대신하는 추세가 점차 늘어가고 ..  (97쪽)


 자동차를 알맞게 써야 하듯, 기계를 쓸 때에도 알맞게 써야 합니다. 기계에 기대는 삶이 되어서는 내 삶도 네 삶도 우리 삶도 알뜰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맨 나중에는 아무런 기계조차 안 쓰는 내 삶과 네 삶과 우리 삶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풀과 나무를 아끼는 삶이란, 돈을 더 벌어들일 삶이 아니라, 나와 이웃과 살붙이와 동무 모두 조용하면서 조촐히 어우러질 웃음과 눈물을 아끼는 삶일 테니까요.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면서 내 몸이 태어나서 돌아갈 흙을 껴안는 삶일 때에 비로소 생태이니 자연이니 환경이니 하는 이름하고 걸맞을 테니까요.

 자가용을 탄 사람들은 자가용 바퀴가 사마귀를 밟아서 죽여도 느끼지 못합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싱싱 내달리면 메뚜기를 밟아서 죽여도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 바삐 살아가는 사람은 구두나 운동신을 신은 발로 나비를 밟아서 죽여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생태마을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오늘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찬찬히 되짚어야 합니다. (4344.8.26.쇠.ㅎㄲㅅㄱ)


― 지금 다시 생태마을을 읽는다 (조나단 도슨 글,이소영 옮김,그물코 펴냄,2011.5.30./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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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에 맞는 빨래


 하루하루 나이를 더 먹으면서 이제는 더 젊을 적보다 힘을 더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늙는’ 아버지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한창 젊은’ 때로 접어드는 두 아이 빨래를 하면서 생각합니다. 첫째를 낳아 첫째 기저귀를 빨 때처럼 둘째를 낳고 살아가는 이즈음 첫째 기저귀를 빨 때처럼 빨래를 하지 못합니다. 첫째 때에는 오줌기저귀 한두 장만 쌓여도 새벽 한 시이고 두 시이고 세 시이고 네 시이고 그때그때 빨래를 했습니다. 이제는 새벽에 한두 차례 겨우 빨래를 합니다. 때로는 새벽 내내 그저 대야에 오줌기저귀를 담근 다음 아침에 일어나서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몸에 맞게 빨래를 합니다. 제 빨래에 제 몸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잖은 사람들은 당신들 몸을 당신들 빨래한테 맞추거나 당신들 빨래기계에 맞춥니다.

 책을 읽을 때에 책에 내 몸을 맞출 수 없습니다. 딱딱하며 메마른 글로 싱거우며 덧없는 이야기를 담은 책에 내 몸을 맞출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삶을 알뜰살뜰 일구고픈 내 몸에 맞는 책을 찾아서 읽고 싶습니다. 억지로 온갖 지식을 내 머리에 쑤셔넣거나 억척스레 갖은 정보를 내 몸에 꿰어맞추고 싶지 않습니다.

 어버이 틀에 맞추어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라고 느끼면서 아이는 아이 몸에 맞게 하루하루 즐거이 맞아들이도록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빨래를 즐깁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책을 읽습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아이하고 살아갑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자전거를 타고, 장마당 마실을 하며,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고, 좋은 벗님을 사귑니다.

 아침에 빨래를 하면 첫째 아이가 도와줍니다. 빨래를 다 마치고 통에 담아 마당으로 나오면 아이는 싱긋 웃으며 조용히 따라나옵니다. 마당에 놓은 걸상에 빨래통을 올립니다. 아이는 앙증맞은 손으로 빨래를 한 점씩 집어 아버지한테 건넵니다. 아버지는 빨래를 한 점씩 빨랫줄에 넙니다. 빨랫줄에 줄지어 앉던 잠자리가 날아오릅니다. 빨래를 널 무렵, 첫째 아이는 빨래집게를 둘 집어 아버지한테 건넵니다. 아버지는 빨래집게를 받아 천천히 빨래에 집습니다. 우리 아이도 차츰 크서 팔뚝에 힘이 붙고 키가 더 자라면, 아버지가 많이 힘들거나 고단할 때에 빨래를 맡아 해 주겠지요. (4344.8.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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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3] 윤광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은 윤광준 님이 이태 뒤 새롭게 내놓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을 읽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추장스럽다(3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남다르다 싶은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배우려고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이나 인문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다르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부질없듯이, ‘잘 찍었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덧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진삶을 이태 뒤에는 어느 만큼 곰삭였을까 궁금해서 《아름다운 디카 세상》을 펼칩니다. 사진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이들이 윤광준 님 책을 퍽 즐겨읽을 뿐 아니라, 사진길을 그럭저럭 걷는 이 또한 윤광준 님 책을 꽤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진말을 낳으며 사진꿈을 키우는 윤광준 님이기 때문에 “브레송과 같은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낼 확률은 거의 없다(8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은 ‘어떤 열정’을 바쳤을까요. ‘평생에 걸쳐 결정스럽다 싶은 순간을 붙잡아야 할 까닭’이 꼭 있는가요.

 윤광준 님은 “사진이란 게 꼭 좋은 화질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의식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 아닌가(139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한테 묻지 않습니다. 윤광준 님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도 디지털사진기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틀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지만, 막상 값싸고 가벼운 똑딱이를 즐겨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쓸 때에도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에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스며들 뿐 아니라, 사진 한 장을 빚는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깃듭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이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쓰는 글은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평’이 되는데, 서평 가운데에서도 ‘주례사 서평’이 되고 맙니다. 이야기 없이 만든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어찌 문학 테두리에 든달지라도 이야기가 없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을 왜 읽겠습니까. 이야기 있는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 있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있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 할 때에는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며 찍은 사진은 ‘빈틈없이 찍었다’ 할 만한 사진이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꾸밈말을 넣어 말을 하자면, ‘잘 찍은’ 사진이란, 구도가 어긋나거나 초점이 흔들리거나 빛이 모자라거나 빛깔이 어수룩하거나 그늘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사진입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빚은 사진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이면서 ‘빈틈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드시 ‘열정을 바쳐야’ 브레송다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아끼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으로 그러모을 꿈을 건사할 때에,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비싼 사진기이든 값싼 사진기이든,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따사로운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 찍을 대상이 걷거나 뛰면 나 역시 그와 같이 움직이며 사진의 리얼리티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옳다 싶은 말입니다. 다만, ‘사실성 짙은 느낌을 나타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로 적는 ‘事實’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분이 너무 적은데요,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가리키면 “꾸밈없이”입니다. “본 그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이고, “덧붙이거나 깎거나 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하고 ‘같이 움직이는’ 일은 틀림없이 잘 살필 매무새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멈추어 가만히 지켜보아도 돼요. 굳이 같이 뛰어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라하기’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어울려 놀거나 사는 모습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살면’ 넉넉해요.

 같이 살아가는 고운 벗이기 때문에, 고운 벗하고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더라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만납니다. 같은 자리에서 두 눈을 마주보지 못하더라도 깊은 마음으로는 언제나 함께 지냅니다. 사진으로 담을 넋이란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모습을 넘어, 마음으로 아끼는 사랑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기쁨입니다.

 윤광준 님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라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자면, 이에 앞서 ‘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이 터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샘솟아 ‘아름다운 사진’이 꽃피웁니다.

 어떤 장비를 쓰든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기에 글을 쓰면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에 아름다움이 깃들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사진이 아름답거나 필름사진기가 아름답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젓가락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나지 않습니다. 밥그릇이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차린 손길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납니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흘린 흙일꾼 손마디가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누며 즐기는 사람들 삶 밑자락을 건드리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 밝히거나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를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윤광준 님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만큼 아들녀석과 나와의 이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2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사진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사진기와 놀이기계입니다. 윤광준 님 아들아이는 놀이기계로 디지털사진기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사진기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른 만큼 사진이 다릅니다. 아니, 사진이 아닌 놀이라 할 테지요.

 사진기 하나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줄 느껴야 합니다. 살아가며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줄 헤아려야 합니다. 온누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매무새가 다른 줄 살펴야 합니다.

 사진이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때에 이 다 다른 꿈결을 살뜰히 보듬는 어여쁜 손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4344.8.25.나무.ㅎㄲㅅㄱ)


―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글·사진,웅진닷컴 펴냄,2004.4.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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