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머리카락 세 올


 둘째 아이가 아침에 똥을 조금 눈다. 밤새 몸이 끈적끈적하니까 아침부터 일찍 씻기자고 한다. 보일러를 돌린다. 새벽에 빤 기저귀를 방바닥에 펼친다. 아침까지 나온 기저귀를 빨래한다. 어느덧 물이 다 덥혀진다. 아이를 안고 씻는방으로 온다.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손닦개로 목부터 닦는다. 목이 접힐 수밖에 없는 갓난쟁이는 여름날 목에 땀띠가 나서 몹시 애먹는다. 어쩌겠니. 얼른 자라서 목이 잘 열려야 땀띠가 안 나지. 올여름을 잘 견디어 주렴. 목을 요리조리 돌리고 열면서 물을 묻혀 닦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세 올이 나온다. 갓난쟁이 자그맣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다. 네 누나도 너만 할 때에 씻기면서 들여다보면 고 자그마한 머리카락에 목에 끼곤 하던데,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너도 고운 목숨이고 네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겠지. 다 씻기고 마른 기저귀 하나로 몸을 싸서 자리에 눕힌 다음 아랫도리를 살짝 말리라고 두면서 방바닥에 넌 기저귀를 차곡차곡 개는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가 쉬를 눈다. 쉬를 누며 이불을 적신다. 얼른 이불을 걷고 기저귀로 댄다. 요새 장마철이라 이불을 빨면 끔찍하게 안 마르는데 어떡하니. 오줌 젖은 데만 물로 헹구어 짠다. 부디 오늘은 비가 멎는 때가 길기를 빈다. 아무쪼록 이 이불이 잘 말라 냄새가 배지 않기를 바란다. (4344.7.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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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5 09:22   좋아요 0 | URL
아오, 이뻐라.
여름이라 고생하겠네요, 땀띠도 많겠구.. 저런.
하지만 쳐다보는 눈매가 어쩜 저리 똘망하죠. 정말 너무너무 이쁘네요.

파란놀 2011-07-15 16:54   좋아요 0 | URL
올 한여름만 잘 넘기면 이제 제법 크면서 뒤집고 엎드리고 기고 서고 하겠지요~
에궁...

울보 2011-07-15 10:39   좋아요 0 | URL
정말 장마철에 요렇게 귀여운 녀석이 고생이겠어요, 무더우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빨래가 잘 안말라서,,
후후 아가 보니 우리 딸 어릴적 모습이 보여요 저 올록볼록이 ㅎㅎ 귀엽다,,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기저귀 빨아서 대느라 아주 죽어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했으니 뭐...
이렇게 기저귀를 빨아서 대며 키우니
'귀한 아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카스피 2011-07-15 12:13   좋아요 0 | URL
ㅎㅎ 아이가 넘 이쁘네요.그나저나 좀 있으면 푹푹찌는 무더위가 올텐데 아이가 더위에 고생좀 하겠네요.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장마철보다는 나으리라 믿어요 ^^;;;;;;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11호가 나왔습니다. 11호부터는 인쇄까지 혼자서 합니다 -_-;;;  

책방에 배본하지 않고, 오직 정기구독만 받는 책입니다~~~

.. 

머리말 : 아이들과 살아가며 책방마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납니다. 아이가 일어날 때면 부시럭거리는 소리하고 콩콩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 아버지는 새벽에 먼저 일어납니다. 아이가 깬 동안에는 도무지 글쓰기나 책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벽 두어 시부터 너덧 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몸이 괜찮으면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고, 몸이 고단하면 너덧 시에 일어나며, 몸이 아주 힘들면 여섯 시에 일어납니다.

 예전에 혼자 살며 신문돌리기를 하던 나날에는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렸습니다. 저는 새벽 한두 시에 신문을 더 일찍 돌린 다음 이른새벽을 호젓하게 글쓰기와 책읽기로 보내고 싶었지만, 제가 돌리던 신문은 새벽 두 시나 되어야 겨우 신문이 왔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새벽 네 시가 되어야 갖다 주어서 새벽일 하기 퍽 고달팠습니다. 그래도 이무렵부터 새벽 두 시 언저리에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하는 버릇을 들였어요. 새벽에 일어나면 새벽별도 곱고 마을도 조용합니다.

 아직 넉 돌이 안 된 우리 집 첫딸은 제 어버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따라하듯이 배웁니다. 어버이가 옳고 착한 말을 하면 아이 또한 옳고 착한 말을 하며, 어버이가 호미를 쥐면 아이도 호미를 쥐며, 어버이가 셈틀 앞에 앉으면 저도 셈틀 앞에 앉으려고 합니다.

 아이하고 책방마실을 할 때면 아이 또한 책방마실을 즐깁니다. 아이하고 골목마실을 하자면 아이 또한 골목마실을 즐겨요. 제 어버이가 흐뭇한 낯빛과 몸짓으로 즐기는 삶을 아이 또한 흐뭇하게 받아들입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한테 이모저모 가르친다 할 테지만, 어버이 또한 아이한테 여러모로 배웁니다. 어버이가 아이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이가 앞으로 자라날 길이 사뭇 다릅니다. 어버이가 사람을 바라보며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집일은 여자가 해야 해.’ 하는 생각이라면, 제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어버이 생각을 똑같이 물려받습니다. 요즈음 온누리는 남녀평등이니 무어니 말들은 하지만, 막상 사람들 넋이나 삶은 그닥 달라지지 않아요. 얄궂은 모습이 어버이한테서 아이한테 남김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른 스스로 먼저 바꾸지 않는데 아이보고 먼저 바꾸라 할 수 없습니다. 웃물이 흘러 아랫물이 되고, 아랫물은 어느덧 또다른 웃물이 되어 제 아랫물한테 물을 흘립니다. 돌고 도는 물입니다. 웃물 스스로 맑은 물이 되어야지, 아랫물만 앞으로 맑은 물이 되라 할 수 없어요. 바로 오늘부터 어른 된 사람 스스로 맑고 착하며 참다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책방마실을 하기란 몹시 힘들어, 《우리 말과 헌책방》을 제때 맞추어 내놓기가 참으로 벅찹니다. 그러나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제때에 맞추어 11호 12호 꼬박꼬박 채우기만 해서는 사람들하고 살가이 나눌 책삶 헌책방삶 말삶을 아름다이 여미지 못할 수 있어요. 빨리 가거나 더디 가거나 할 《우리 말과 헌책방》이 아니라, 한 권 두 권 알뜰히 속살을 가다듬으면서 나눌 잡지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 11권째를 내놓으면서 생각합니다. 어젯밤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면서 둘째 아이 태어나면 또 어떻게 내 삶을 바꾸며 새로 태어나야 할까 헤아리다가, 나 스스로한테 글월 하나 띄우자는 생각으로 ‘이 땅 푸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과 같은 ‘아이 키우는 아버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느낍니다. 둘째가 태어나기 앞서 이 나라 푸름이한테 ‘어버이 되는 길’ 이야기를 글 하나로 갈무리해 남기고 싶습니다. 잡지를 받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 

차례

머리말 : 아이들과 살아가며 책방마실

가. 책방마실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지만 마음 들여 애써 간다
   부리나케 고르고 사서, 아이 재우고 힘겹게 읽기
   숱한 책 골고루 사기, 책을 읽는 눈썰미 넓히기
   음성 읍내 책방 1
   음성 읍내 책방 2

나. 헌책방
   헌책방 〈책밭서점〉 발자국
   헌책방 〈책밭서점〉 길그림
   헌책방 일꾼하고 이야기나눔
   헌책방 〈책밭서점〉 나들이
   사진 하나 말 하나

다. 책과 삶
  김규항과 진중권 · 아껴 아껴 책읽기 · 귀지를 파는 아빠
  나무를 담은 그림책 · 이향원
  찬물 빨래 하고 나서 책읽기 · 셈을 못하는 사람
  사라지는 책은 슬프지 않다 · 어머니
  뜨개책 · 단풍씨 · 당근풀 · 사람과 삶과 사랑

라. 우리 말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말
    : 사진찍기 · 잔소리 · 밥하기 · 어버이 · 낮잠 · 말괄돼지 ·
      어른 · 쪽지가 왔습니다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 화제의
   ‘-적’ 없애야 말 된다 : 민족주의적
   좋은 말 새로 읽기

꼬리말 :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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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목 책읽기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 몸과 마음을 하나도 모릅니다. 아픈 사람은 안 아픈 사람이 마음껏 뛸 때에 몸과 마음이 어떠한가를 조금도 모릅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없는 사람 고단한 삶을 터럭만큼도 모릅니다. 돈없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 넉넉한 삶을 모래알만큼도 모릅니다.

 그제 아침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래하는데 왼손목이 찌릿하면서 조금도 힘을 줄 수 없습니다. 왼손목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비빔질이나 헹굼질뿐 아니라 바가지로 물을 뜰 수조차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왼손으로 도마를 들어 씻는다든지, 왼손으로 그릇이나 접시를 들어 오른손에는 수세미를 들 때에 왼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칫 그릇이나 접시를 놓칠 뻔할 뿐 아니라 자꾸 아파서 아예 들지를 못합니다. 어찌저찌 다 한 빨래를 짤 수도 없고 털 수도 없습니다. 다 끓인 미역국을 그릇에 담아 들어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런 손으로 무얼 할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겉보기로는 멀쩡하다지만 속에서 망가졌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픈 왼손목으로 책짐 싸기는 그대로 합니다. 비질을 하며 방을 씁니다. 기저귀 빨래도 그대로 하고, 밥도 고스란히 합니다. 첫째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마실을 다녀옵니다.

 이틀이 지난 아침, 왼손목이 찌릿찌릿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럭저럭 쓸 수는 있습니다. 아니, 안 쓰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안 쓴다면 우리 집일을 할 사람이 없고, 갓난쟁이 기저귀를 댈 수 없을 뿐 아니라, 첫째랑 옆지기한테 밥을 먹일 수 없습니다. 이 왼손목을 어찌저찌 쓰지 않는다면 우리 집안 밥벌이 노릇까지 하는 글쓰기나 사진찍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제와 어제 잠자리에 누워 왼손목을 오른손으로 살며시 쥐고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왼손목이 아프니 집일을 하는 데에 품이 더 들고, 품이 더 드니 더 고단해서 그야말로 하루 한 쪽 책읽기조차 아예 생각을 못합니다. 손목이 아프면 가벼운 책을 들 때에도 찌릿하면서 눈물이 찔끔 납니다. 무겁다 싶도록 만든 책은 이런 손목으로는 들어서 읽을 수 없기도 하지만, 들어서 나를 수 없기도 합니다. 가벼운 종이로 조그맣게 만드는 책이 아니라면, 손목이 아픈 사람은 차마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읽도록 만드는 책이라는 어린이책은 으레 겉을 두껍게 합니다. 그림책은 겉종이가 꽤 두껍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거칠게 보니까 이렇게 만든다지만, 아이들은 처음부터 책을 거칠게 보지 않습니다. 제 어버이가 책을 보드라이 매만지면서 읽으면,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보드라이 매만지면서 예쁘게 건사합니다. 아이들은 겉종이가 두꺼운 책을 들면서 무겁다고 느낍니다. 어른 가운데에도 손목이 아픈 사람은 겉종이가 두껍거나 무거운 책은 참으로 무겁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겉종이가 얇고 가벼워도 예쁘고 정갈히 건사할 줄 알 뿐 아니라, 어버이나 어른한테서 이렇게 책을 다루어야 하는 줄 배워야 합니다. 거칠게 다루고 많이 넘기니까 두껍게 겉종이를 댄다고 하지만, 가볍고 얇게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곱고 알뜰히 건사해서 오래오래 즐길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책을 어떻게 다루고 넘기며 즐겨야 하는가를 아이들 스스로 깨닫도록 마음밥부터 찬찬히 먹이는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4.7.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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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s Feininger (Paperback)
Andreas Feininger / Stern Portfolio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진책은 뜨지 않기에,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사진삶을 알 수 있는 다른 책에 걸어 놓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나이 들면 ‘추상’에 젖는다만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0] 안드레아스 파이닝거(Andreas Feininger), 《TREES》(Rizzoli,1991)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사진길을 걸어온 ‘사진밭 어르신’은 나이가 들수록 ‘추상’ 사진을 찍곤 합니다. 나이가 아직 많이 안 들었어도 제법 이름을 알린 뒤에는 추상 사진을 즐기곤 합니다. 돌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시골 논자락을 보거나 물을 보거나 풀을 보거나 하면서 추상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림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구상’이 있기에 추상이 있고, 추상이 있으면서 구상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구상이든 추상이든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애써 구상이나 추상으로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할 뿐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사진책 《TREES》(Rizzoli,1991)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TREES》를 내놓은 이는 ‘Andreas Feininger’ 님입니다. 한글로 이 이름을 어떻게 적어야 좋을는지 모르겠는데, ‘안드레아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고 ‘앙드레아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으며 ‘안드레아스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어요. 어쩌면 ‘앤드래이어스 파이닝거’라고 적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어느 쪽이 맞게 부르는 이름인지 알쏭달쏭하기에 ‘안드레아스 파이닝거’로 읽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책 《나무들》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은 적잖은 사진비평을 썼고, 이분 사진비평은 1970∼80년대에 곧잘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고 2000년대와 2010년대가 된 오늘날에는 이분 사진비평을 찾아보기 몹시 어렵고, 이제 이분 사진비평을 들면서 사진을 살피거나 배우는 흐름은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예전 사람이요 예전 이야기이며 예전 사진이니까 이렇게 잊을 만하거나 손사래쳐도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어느 한때에만 읽거나 살필 만하고 다른 한때에는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읽거나 살필 만하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읽거나 살필 만합니다.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하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해요.

 어찌 바라보면 사진책 《나무들》 또한 추상 사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들》을 추상 사진으로 넣는 일은 썩 옳지 않다고 느껴요.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이 추상 사진이 아니듯,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사진도 추상이 아니요, 또 구상이 아닌, 그예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책 《나무들》에는 나무들을 사진으로 담은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글이 퍽 길게 많이 깃듭니다.

 무슨 할 말이 이다지도 많아 ‘사진쟁이’가 사진 아닌 글로 이야기를 일구어 사진책을 내놓을까요. 사진쟁이가 사진 아닌 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얼마나 사진쟁이답거나 사진책을 잘 일구었다 할 만할까요.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 처음과 끝을 보여주어야 옳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은 사진이니까 사진이 아닌 글로 처음과 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글이나 그림도 이와 똑같습니다. 글은 글이기에 글로 모두 보여줄 수 있지만, 글을 줄이거나 덜어 그림이나 사진을 넣으면서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림에서도 그림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나, 그림을 줄이거나 덜며 사진이나 글이 어우러지도록 이야기를 엮을 수 있어요.

 사랑은 사랑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에 깃들까요. 사랑은 무엇으로 보여주거나 무엇으로 느끼게 할까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차리는 밥 한 그릇에 사랑이 깃듭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입히는 옷을 빨아서 곱게 널어 보송보송 말릴 때에 사랑이 깃듭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는 포근한 보금자리에 사랑이 깃듭니다.

 사진쟁이가 사람 삶을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된다 하지만, 사진쟁이가 무당벌레 삶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됩니다. 사진쟁이가 가난한 사람들 마을에서 오래오래 지내면서 사진을 찍을 적에도 다큐사진이 된다 할 테지만, 사진쟁이가 쑥이나 질경이 한살이를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돼요.

 다큐사진에는 어떠한 틀이 없습니다. 사진에는 이런저런 울타리가 없습니다. 다큐글도 아무런 틀이 없고, 글 또한 구지레한 울타리가 없어요. 오직 삶으로 말합니다. 오로지 삶을 사랑하는 넋으로 말합니다. 온통 삶을 사랑하는 넋을 따스히 어루만지면서 말해요.

 사진책 《나무들》을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거듭거듭 되뇝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진길을 걷는 숱한 어르신들이 사진책 《나무들》에 어떠한 손길과 마음길과 눈길이 깃드는가를 차분히 느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고 거듭거듭 되뇝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람들 눈동자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스며들면서 어깨동무하지 않을 때에는 겉치레로 그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찍어도 나뭇잎 한 장이 아니라 등걸과 나이테와 꽃송이 깊디깊게 스며들어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은 숱하게 쓴 사진비평으로 사진길 걷는 사람들한테 좋은 이슬떨이가 되었는데, 사진비평을 《나무들》 같은 사진책에 살포시 녹이면서 ‘머리로 하는 이론’이나 ‘머리로 만드는 사진’이 아닌, ‘삶으로 나누는 말’과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나무숲에 들어가 보셔요. 가까이에 나무숲이 없다면,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한테 둘러싸인 외로운 나무 곁에 서 보셔요.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든 외로운 나무 곁에서든, 나무 한 그루가 자라온 나날이 아로새겨진 굵직한 줄기를 쓰다듬으면서 나무가 사람 손을 거쳐 나누려 하는 따스한 기운을 받아들여 보셔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어 보셔요. 우람한 나무에 내려앉아 다리쉼을 하는 온갖 새를 바라보고, 이 온갖 새가 지저귀는 끝없는 노래를 들어 보셔요.

 나무 숨소리와 나무 노랫소리를 나무 푸른그늘과 함께 맞아들일 수 있으면, 누구나 《나무들》 같은 사진책을 예쁘게 일구며 흐뭇하게 웃습니다. (4344.7.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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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내 고향은 영어를 참 좋아한다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인천입니다. 서울 옆에 있다지만 인천은 인천입니다. 부천은 부천이고 수원은 수원이며 안산은 안산이에요. 서울 둘레에 있대서 서울하고 한동아리일 수 없고, 서울을 쉬 찾아갈 수 있대서 서울 문화를 누릴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하고 곁에 있어서 그런지, 인천사람은 퍽 예전부터 서울을 자주 드나듭니다. 똑똑하다 싶은 아이라면 일찌감치 서울로 보내서 가르쳐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대학교를 다녀도 인천에 있는 대학교가 아닌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야 공부 좀 한다고 여기며, 일자리를 얻어도 인천 아닌 서울에서 얻어야 제대로 일하는 줄 여겨 버릇합니다. 이런 탓인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서울에서 하면 인천도 뒤따르고 마는 요즈음 흐름입니다. 서울시에서 ‘Hi Seoul’이라고 내세우니 인천시에서는 ‘Fly Incheon’을 내세웁니다. 다만, 서울시 누리집을 들어가면 서울시는 ‘서울특별시’라고 한글로 적고 나서 누리집 맨 아래쪽에 ‘Hi Seoul’이라는 글월을 넣지만, 인천시는 누리집 대문 가장 잘 보이는 데부터 ‘Fly Incheon’을 넣습니다. 누리집 맨 아래쪽에서야 비로소 한글로 ‘인천광역시’라고 적어요.

 우리 나라는 무엇이든 서울로 쏠립니다. 우리 나라는 서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는 소식이 되고, 큰 신문사이든 방송사이든 출판사이든 회사이든 서울에 모이기만 합니다. 서울에 있대서 잘못이 아니라, 서울에만 있으니 골칫거리이거나 말썽거리가 됩니다. 이리하여, 서울시가 ‘Hi Seoul’이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썼을 때에 언론사마다 날카롭게 꾸짖으면서 이래서야 이 나라 얼굴이 제대로 서겠느냐고 따졌으나, 서울하고 맞붙은 인천시에서 아예 ‘인천광역시’라는 이름조차 뒤로 숨기거나 안 쓰면서 ‘Fly Incheon’이라고만 쓸 때에는 어느 누구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어요. 아니, 이렇게 이름을 쓰는 줄 몰랐겠지요. 이러다가 한글날 즈음 되어서야 비로소 인천시가 ‘Fly Incheon’을 쓰는 일을 나무라고, 대전시가 ‘It's Daejeon’을 떠벌이는 모습을 꾸짖습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다달이 《굿모닝 인천》이라는 소식지를 받아보니까, 이 소식지를 들여다보면서 인천시가 얼마나 영어를 사랑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요 한두 달 사이에 나온 소식지를 들추다가 2011년 5월치가 눈에 뜨여 빙그레 웃으면서 펼칩니다. 강원도 평창에서는 겨울올림픽을 이끌었다면서 기뻐 하는데, 인천에서는 2014년에 아시아 경기대회를 이끌었다며 즐거워 합니다. 2011년 5월치에는 겉에 이 소식이 하나 나옵니다. 다만, ‘아시아 경기대회’나 ‘아시안 게임’이라 안 쓰고 ‘AG’라 쓰는군요.

- 굿모닝 인천 Good Morning INCHEON

 그러고 보면, 소식지 이름은 《굿모닝 인천》이지만, 이렇게 알파벳으로 “Good Morning INCHEON”이라고 덧답니다. 나라밖 사람들, 그러니까 외국사람도 읽을 소식지라면 이렇게 알파벳 이름을 함께 붙일 만하겠지요. 그렇지만, 《굿모닝 인천》은 한글로 만드는 소식지입니다. 영어로 기사를 넣지 않아요.

 다른 지자체나 관공서나 회사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지자체 소식지이든 관공서 소식지이든 회사 소식지이든, 알파벳으로 소식지 이름을 밝힐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 대한민국은 ‘우리 말을 한글로 적으면서 생각을 나누는’ 곳이지, ‘영어를 알파벳으로 적으면서 생각을 나누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식지 겉에 적힌 몇 가지 눈에 뜨이는 글을 알리는 대목을 봅니다.

- Special
- 인천 孝
- 2014 인천AG
- Old But New 용현동

 한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인천’과 ‘용현동’만큼은 알파벳으로 적으면 알아보기 더 힘드니까 한글로 적은 듯해요.

 소식지를 넘깁니다. 첫 쪽부터 ‘차례’가 아닌 ‘Contents’라 적습니다. 그러네요. 이제 이런저런 소식지이든 잡지이든 으레 ‘차례’나 ‘벼리’ 같은 말마디는 구지레하다 여기면서 이처럼 ‘Contents’라 적기 일쑤예요.

 ‘Contents’라는 자리에 어떤 말을 쓰는지만 돌아보더라도, 인천에서 내는 소식지 빛깔을 알겠다고 새삼스레 느낍니다. ‘Contents’는 이렇게 짜였습니다. 하나하나 읽다가 입에 쩍 벌어집니다.

- Event : 5월 페스티벌
- INCHEON 2014 : AG 포스터
- Special : 어린이 꿈제작소
- 가정의 달 5월 : 인천 孝
- 책 읽는 인천 : 독서가족
- 2014 인천AG : Tibet, 라싸
- Old But New : 용현동
- Culture News : 문화뉴스, 이달의 공연전시
- 사람과 사람 : 조학영, 김효민
- Civic News : 시정뉴스
- Council News : 의정뉴스
- Infobox : 생활정보
- Spot the Difference : 틀린그림 찾기
- Reader's Photo : 김치찰칵
- 모닝커피 한잔 :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페스티벌’과 ‘포스터’와 ‘뉴스’는 왜 한글로 적는지 궁금합니다. ‘Tibet’은 알파벳으로 적는데 ‘라싸’는 왜 한글로 적을까요. 인천시에서 내놓는 이 소식지를 읽는 사람은 차례 아닌 Contents에 실린 이런저런 이름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좋을까 궁금합니다. 한국으로 찾아온 외국사람이 한글을 신나게 배우면서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힘쓰는데, 인천시에 살 집을 마련해서 인천시 소식지를 펼치면서 이러한 Contents를 읽어야 할 때에 무슨 생각을 할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소식지 간기 자리를 봅니다. 한글로는 따로 적는 말이 없이 “Incheon monthly magazine vol.209”라고만 적습니다. ‘209호’라고 적는 줄 몰라서 ‘vol.209’로 적었을까요. ‘인천시 월간지’라고 적을 줄 몰라서 ‘Incheon monthly magazin’로 적었을는지요.

 소식지 겉에 실은 사진을 이야기하면서 ‘Cover Story’라 적습니다. 그렇군요. ‘Cover Story’가 되겠네요. 우리 나라 중앙일간지 가운데 신문이름을 한글로 붙인 곳에서 내는 주간잡지에도 ‘커버스토리’가 실립니다. 다만, 이 주간잡지에서는 알파벳으로 ‘Cover Story’라 하지 않고 한글로 ‘커버스토리’라 합니다.

 인천시가 다달이 내는 소식지를 찬찬히 읽으며 생각합니다. 차례 자리를 비롯해 소식지에 실은 글에도 영어는 곳곳에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하나 들자면 끝이 없겠다고 느낍니다. 히유 한숨을 내쉬고는 소식지를 덮습니다. 인천시가 내세운 상징이름이라 할 ‘Fly Incheon’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인천시는 꼭 이렇게 영어로 상징이름을 지어야 했을까 알쏭달쏭합니다. ‘날자 인천’이라든지 ‘난다 인천’이라든지 ‘나는 인천’처럼 이름을 붙일 수 없었나 아리송합니다.

 모르는 노릇이기는 한데, ‘나는 인천’이라 이름을 붙였다면, “하늘을 나는 인천”이면서 “나라는 사람은 바로 인천”이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며 일하는 모든 삶이 곧 인천이니까, 나 스스로를 자랑스레 여기면서 씩씩하고 사랑스레 아끼자는 뜻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렇지만 ‘Fly Incheon’일 때에는 그저 영어 이름이요, 한국사람한테나 인천사람한테나 그다지 가슴으로 와닿을 만한 아름다움이 깃들기는 힘들지 않겠느냐 싶어요.

 독일사람은 독일말로 상징이름을 짓습니다. 프랑스사람은 프랑스말로 상징이름을 지어요. 네덜란드사람은 네덜란드말을 쓰고, 스웨덴사람은 스웨덴말을 씁니다. 베트남사람은 베트남말을 쓰고, 스리랑카사람은 스리랑카말을 써요. 모두들 제 나라 제 겨레 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김치’를 ‘기무치’라고 고쳐서 말할 때에 못마땅해 합니다만, 정작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거나 사랑스럽거나 착하거나 참답게 쓰지 않아요.

 아, 저는 제 고향을 사랑해야 할까요. 우리 말글은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보듬거나 돌볼 줄 모르는 이 고향을 사랑해야 하나요. (4344.7.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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