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마리 고양이와 돼지 11마리 고양이 시리즈 3
바바 노보루 지음, 이장선 옮김 / 꿈소담이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괘씸한 개구쟁이 고양이가 하늘을 날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3] 바바 노보루, 《11마리 고양이와 돼지》(꿈소담이,2006)



 네 살 첫째 아이는 세 살 적부터 “11마리 고양이” 그림책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펼쳐서 읽어 주기도 하지만, 여러 차례 읽어 준 뒤에 혼자서 이 그림책을 넘기곤 합니다. 빛느낌이 좋기 때문일까요. 이 그림책에 나오는 고양이라든지 나무라든지 풀이라든지 바람이라든지 하늘이라든지 집이라든지 쓰레기통이라든지 사진이라든지 꽃이라든지 빠방(자동차)이라든지, 아이가 알 만한 모습을 아기자기하게 그려 넣었기 때문일까요.

 《11마리 고양이와 돼지》(꿈소담이,2006)는 일본에서 1976년에 나왔으니까, 1970년대에 이 그림책을 볼 어린이라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첫무렵에 태어난 일본 어린이입니다. 생각해 봅니다. 이 그림책을 보고 자란 어린이가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은 다음에, 제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 그림책이 일본에서 처음 태어날 때에 처음 알아보며 즐기던 아이가 더 자라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된 다음, 손자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이 그림책을 읽어 줄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자그마치 마흔 살 가까운 그림책이 오늘날에도 퍽 사랑받으니까, 앞으로 스무 해 뒤가 되면 이렇게 될 만하겠구나 싶어요.


.. “우와, 정말 반짝반짝 깨끗해졌다.” “멋진 집으로 변신했어.” “얘들아, 이 집을 우리의 보금자리로 하는 게 어때?” “와! 찬성이야.” ..  (8∼9쪽)


 아직 우리 나라에는 서른 해나 마흔 해를 내리 사랑받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대물림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손녀한테 읽힐 그림책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창작그림책 발자국이 짧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일군 그림책을 널리 읽히지 못하기도 해요. 그림결이나 빛느낌이나 줄거리나 이야기나 얼거리에서 일본 그림책이나 서양 그림책만큼 알뜰하거나 알차지 못합니다. 앞으로 스무 해쯤 지난다면 스무 해 앞서부터 사랑받던 그림책이 대물림하면서 사랑받을 만하고, 서른 해쯤 지난다면 열 해 앞서부터 사랑받던 그림책이 대물림하면서 사랑받을 만하겠지요. 마땅한 노릇일 수밖에 없으니, 섣불리 바라기보다는, 좀 어설프거나 이래저래 모자라더라도 예쁘게 받아들이면서 즐겨야 하지 않을까 싶고, 정 아쉬울 때에는 예쁜 그림책으로 빚지 못하더라도 아이하고 그림종이를 펼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놀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꼭 낱권책으로 나온 그림책을 읽혀야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이하고 그림을 함께 그리면서 이야기 살을 붙이고 이야기 실마리를 풀면 되니까요. 아이하고 살아가는 나날을 아이랑 그림종이에 찬찬히 옮기면 되니까요. 아이가 꿈나라에서 꿈날개를 펼칠 수 있게끔 어버이가 슬기로이 이끌면 되니까요.

 더 멋스레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예뻐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훌륭해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더 뜻있게 보여야 하는 그림책이 아닙니다.

 사랑을 담아 빚는 그림책이고, 사랑을 담아 읽는 그림책이며, 사랑을 담아 대물림하는 그림책이에요. 아이는 어버이하고 그림책을 함께 읽고 즐기면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아이는 그림책을 읽을 때에 앎조각을 받아먹지 않아요. 아이는 혼자 그림책을 펼칠 때에 사랑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는 앎조각을 늘리거나 넓히려고 그림책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 “여기는 11마리 고양이의 집이에요.” 야옹 야옹 야옹 야옹. “꿀꿀꿀, 멀리서 찾아왔는데 좀 들어가도 되나요?” 야용. 대장 고양이가 양팔을 벌리고 돼지 앞을 가로막습니다. “여기는 11마리 고양이의 집!” … “꿀꿀, 우리 할아버지 댁이 어디지? 확실히 이 근처였는데.” ..  (13∼15쪽)


 “11마리 고양이” 이야기 가운데 다른 그림책은 ‘요 꾀쟁이 고양이들이 괘씸해 보이는(?) 짓’을 일삼아서 살짝 밉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그림책을 읽히면서, 음, 참, 개구쟁이 고양이일세 하고 생각했어요. 《11마리 고양이와 돼지》에서도 이 느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짐차에 열한 마리가 빼곡하게 탄 채 멀디먼 나들이를 떠나는 고양이가 어느 멧골자락에서 빈 집을 하나 봅니다. 이 고양이들은 빈 집을 말끔하게 치워 저희가 지낼 곳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빈 집’이라기보다 ‘할배 돼지가 숨을 거두었기에 비게 된 집’이에요. 임자가 없어 아무나 살아도 되는 집이 아니라, 새 임자를 기다리는 집이에요.

 그러니까, 열한 마리 고양이는 이 집이 ‘누구네 어떤 집’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벽에 멀쩡히 걸린 사진을 바라보면 ‘할배 돼지 집’인 줄 알 수 있어요. 할배 돼지가 이제 숨을 거두어 이 집이 비었구나 생각하면서 ‘할배 돼지네 아이나 손자가 찾아올 때까지 살짝 머물겠습니다’ 하고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요. 열한 마리 고양이는 고마워 할 줄 모르고, 고마워 해야겠다고 여기지 않으며, 고마움조차 느끼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할배 돼지 손자가 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에 매몰차게 내쫓습니다. 나중에 좀 미안하다 느껴 손자 돼지를 이 집으로 불러들이지만, 손자 돼지가 이 집에서 고양이들이 지내니 저는 다른 새 집을 지으려 할 때에 열한 마리 고양이는 일손을 거드는데, 정작 돼지네 새 집을 짓고 나서 ‘새로 지은 집이니까, 이 새 집은 우리 열한 마리 고양이가 차지하겠어!’ 하고 고개를 빳빳이 세웁니다.


.. “꿀꿀꿀, 꿀꿀꿀. 이층에는 베란다도 만들 거야.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예쁜 새 집이 생긴다.” … 그랬습니다. 11마리 고양이는 돼지네 새 집이 너무너무 훌륭해 그냥 주기 아까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돼지는 고양이네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꿀꿀, 그래 괜찮아. 원래 여기가 우리 할아버지 집이었잖아.” ..  (30∼35쪽)


 당돌하지요. 뻔뻔하지요. 건방지지요. 얄궂지요.

 손자 돼지는 열한 마리 고양이한테 골을 내지 않습니다. 거칠거나 막된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아요. 그저 받아들이고, 그예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며 새로 지은 집이 흔들거리다가 기둥이 뽑히고 지붕이 날아갑니다. 열한 마리 고양이가 타고 다니던 짐차가 하늘에 붕 뜹니다. 열한 마리 고양이도 하늘로 붕 뜹니다. 할배 돼지가 살던 집은 비바람에 끄덕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할배 돼지가 죽고 빈 집이라 하지만, 집안에 거미줄이 잔뜩 치도록 빈 동안에 숱하게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겠지요. 그러나 이 집은 언제나 끄덕없었으니 거미줄은 잔뜩 치고 먼지가 가득 쌓였어도 예쁘게 살아남았을 테지요. 열한 마리 고양이가 ‘겉보기로 멋들어져 보이는 새 집’에 욕심을 품으면서 꾀바른 짓을 일삼았으니, 아주 보기좋게 한 방 먹는 셈입니다.


.. 아아, 고양이들이 하늘로 날아갑니다. 날아갑니다 ..  (43쪽)


 아이는 마지막 대목에서 “날아. 고양이가 날아.” 하고 이야기합니다. 혼자 그림책을 볼 때에도 “고양이가 날아가.” 하고 으레 말하기에 뭐를 말하나 싶었는데, 이 그림책을 펼치면서 마지막 쪽 모습을 말한 셈이었습니다.

 약삭빠르게 굴던 열한 마리 고양이가 비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마지막 쪽을 보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참 잘된 일이야, 아주 샘통이야, 요 녀석들 매운맛을 보는구나.

 혼자 중얼중얼 하면서 그림책을 덮다가 더 생각합니다. 고양이들은 멀디먼 나들이를 나오던 그대로 비바람에 휩쓸려 ‘멀디먼 새 나들이’를 떠납(?)니다. 이 고양이는 비바람에 휩쓸리며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그저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2층으로 지은 새 집 밑기둥까지 함께 어우러지면서 멀리멀리 날아가요. 큰 물고기를 덮치다가도 하늘 높이 치솟으며 물에 풍덩 빠지곤 했는데, 손자 돼지한테 괘씸한 짓을 잔뜩 저지르더니 톡톡히 값을 치릅니다. 그렇지만, 어찌 보면, 이 고양이들은 이렇게 저희 좋을 대로 마음껏 온누리를 누비면서 장난도 치고 못된 짓도 부리다가 또 어디론가 가면서 새 동무를 사귀거나 새 이야기를 일구겠지요.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면서 새로운 꿈을 키우고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겠지요. 파란하늘과 하얀구름을 사귀면서 차츰차츰 맑거나 밝은 사랑을 품을 수 있겠지요. (4344.7.15.쇠.ㅎㄲㅅㄱ)


― 11마리 고양이와 돼지 (바바 노보루 글·그림,꿈소담이 펴냄,2006.6.20./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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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머리카락 세 올


 둘째 아이가 아침에 똥을 조금 눈다. 밤새 몸이 끈적끈적하니까 아침부터 일찍 씻기자고 한다. 보일러를 돌린다. 새벽에 빤 기저귀를 방바닥에 펼친다. 아침까지 나온 기저귀를 빨래한다. 어느덧 물이 다 덥혀진다. 아이를 안고 씻는방으로 온다.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손닦개로 목부터 닦는다. 목이 접힐 수밖에 없는 갓난쟁이는 여름날 목에 땀띠가 나서 몹시 애먹는다. 어쩌겠니. 얼른 자라서 목이 잘 열려야 땀띠가 안 나지. 올여름을 잘 견디어 주렴. 목을 요리조리 돌리고 열면서 물을 묻혀 닦는데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세 올이 나온다. 갓난쟁이 자그맣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다. 네 누나도 너만 할 때에 씻기면서 들여다보면 고 자그마한 머리카락에 목에 끼곤 하던데,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너도 고운 목숨이고 네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겠지. 다 씻기고 마른 기저귀 하나로 몸을 싸서 자리에 눕힌 다음 아랫도리를 살짝 말리라고 두면서 방바닥에 넌 기저귀를 차곡차곡 개는데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이가 쉬를 눈다. 쉬를 누며 이불을 적신다. 얼른 이불을 걷고 기저귀로 댄다. 요새 장마철이라 이불을 빨면 끔찍하게 안 마르는데 어떡하니. 오줌 젖은 데만 물로 헹구어 짠다. 부디 오늘은 비가 멎는 때가 길기를 빈다. 아무쪼록 이 이불이 잘 말라 냄새가 배지 않기를 바란다. (4344.7.15.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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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5 09:22   좋아요 0 | URL
아오, 이뻐라.
여름이라 고생하겠네요, 땀띠도 많겠구.. 저런.
하지만 쳐다보는 눈매가 어쩜 저리 똘망하죠. 정말 너무너무 이쁘네요.

파란놀 2011-07-15 16:54   좋아요 0 | URL
올 한여름만 잘 넘기면 이제 제법 크면서 뒤집고 엎드리고 기고 서고 하겠지요~
에궁...

울보 2011-07-15 10:39   좋아요 0 | URL
정말 장마철에 요렇게 귀여운 녀석이 고생이겠어요, 무더우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빨래가 잘 안말라서,,
후후 아가 보니 우리 딸 어릴적 모습이 보여요 저 올록볼록이 ㅎㅎ 귀엽다,,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기저귀 빨아서 대느라 아주 죽어납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했으니 뭐...
이렇게 기저귀를 빨아서 대며 키우니
'귀한 아이'라 할 만하구나 싶어요...

카스피 2011-07-15 12:13   좋아요 0 | URL
ㅎㅎ 아이가 넘 이쁘네요.그나저나 좀 있으면 푹푹찌는 무더위가 올텐데 아이가 더위에 고생좀 하겠네요.

파란놀 2011-07-15 16:55   좋아요 0 | URL
장마철보다는 나으리라 믿어요 ^^;;;;;;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11호가 나왔습니다. 11호부터는 인쇄까지 혼자서 합니다 -_-;;;  

책방에 배본하지 않고, 오직 정기구독만 받는 책입니다~~~

.. 

머리말 : 아이들과 살아가며 책방마실


 아이가 아침에 일어납니다. 아이가 일어날 때면 부시럭거리는 소리하고 콩콩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 아버지는 새벽에 먼저 일어납니다. 아이가 깬 동안에는 도무지 글쓰기나 책읽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벽 두어 시부터 너덧 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몸이 괜찮으면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고, 몸이 고단하면 너덧 시에 일어나며, 몸이 아주 힘들면 여섯 시에 일어납니다.

 예전에 혼자 살며 신문돌리기를 하던 나날에는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렸습니다. 저는 새벽 한두 시에 신문을 더 일찍 돌린 다음 이른새벽을 호젓하게 글쓰기와 책읽기로 보내고 싶었지만, 제가 돌리던 신문은 새벽 두 시나 되어야 겨우 신문이 왔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새벽 네 시가 되어야 갖다 주어서 새벽일 하기 퍽 고달팠습니다. 그래도 이무렵부터 새벽 두 시 언저리에 일어나서 하루를 맞이하는 버릇을 들였어요. 새벽에 일어나면 새벽별도 곱고 마을도 조용합니다.

 아직 넉 돌이 안 된 우리 집 첫딸은 제 어버이가 살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고스란히 따라하듯이 배웁니다. 어버이가 옳고 착한 말을 하면 아이 또한 옳고 착한 말을 하며, 어버이가 호미를 쥐면 아이도 호미를 쥐며, 어버이가 셈틀 앞에 앉으면 저도 셈틀 앞에 앉으려고 합니다.

 아이하고 책방마실을 할 때면 아이 또한 책방마실을 즐깁니다. 아이하고 골목마실을 하자면 아이 또한 골목마실을 즐겨요. 제 어버이가 흐뭇한 낯빛과 몸짓으로 즐기는 삶을 아이 또한 흐뭇하게 받아들입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한테 이모저모 가르친다 할 테지만, 어버이 또한 아이한테 여러모로 배웁니다. 어버이가 아이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아이가 앞으로 자라날 길이 사뭇 다릅니다. 어버이가 사람을 바라보며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집일은 여자가 해야 해.’ 하는 생각이라면, 제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이런 어버이 생각을 똑같이 물려받습니다. 요즈음 온누리는 남녀평등이니 무어니 말들은 하지만, 막상 사람들 넋이나 삶은 그닥 달라지지 않아요. 얄궂은 모습이 어버이한테서 아이한테 남김없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른 스스로 먼저 바꾸지 않는데 아이보고 먼저 바꾸라 할 수 없습니다. 웃물이 흘러 아랫물이 되고, 아랫물은 어느덧 또다른 웃물이 되어 제 아랫물한테 물을 흘립니다. 돌고 도는 물입니다. 웃물 스스로 맑은 물이 되어야지, 아랫물만 앞으로 맑은 물이 되라 할 수 없어요. 바로 오늘부터 어른 된 사람 스스로 맑고 착하며 참다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책방마실을 하기란 몹시 힘들어, 《우리 말과 헌책방》을 제때 맞추어 내놓기가 참으로 벅찹니다. 그러나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제때에 맞추어 11호 12호 꼬박꼬박 채우기만 해서는 사람들하고 살가이 나눌 책삶 헌책방삶 말삶을 아름다이 여미지 못할 수 있어요. 빨리 가거나 더디 가거나 할 《우리 말과 헌책방》이 아니라, 한 권 두 권 알뜰히 속살을 가다듬으면서 나눌 잡지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 11권째를 내놓으면서 생각합니다. 어젯밤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면서 둘째 아이 태어나면 또 어떻게 내 삶을 바꾸며 새로 태어나야 할까 헤아리다가, 나 스스로한테 글월 하나 띄우자는 생각으로 ‘이 땅 푸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과 같은 ‘아이 키우는 아버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느낍니다. 둘째가 태어나기 앞서 이 나라 푸름이한테 ‘어버이 되는 길’ 이야기를 글 하나로 갈무리해 남기고 싶습니다. 잡지를 받는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 

차례

머리말 : 아이들과 살아가며 책방마실

가. 책방마실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지만 마음 들여 애써 간다
   부리나케 고르고 사서, 아이 재우고 힘겹게 읽기
   숱한 책 골고루 사기, 책을 읽는 눈썰미 넓히기
   음성 읍내 책방 1
   음성 읍내 책방 2

나. 헌책방
   헌책방 〈책밭서점〉 발자국
   헌책방 〈책밭서점〉 길그림
   헌책방 일꾼하고 이야기나눔
   헌책방 〈책밭서점〉 나들이
   사진 하나 말 하나

다. 책과 삶
  김규항과 진중권 · 아껴 아껴 책읽기 · 귀지를 파는 아빠
  나무를 담은 그림책 · 이향원
  찬물 빨래 하고 나서 책읽기 · 셈을 못하는 사람
  사라지는 책은 슬프지 않다 · 어머니
  뜨개책 · 단풍씨 · 당근풀 · 사람과 삶과 사랑

라. 우리 말
   ‘합니다’와 ‘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말
    : 사진찍기 · 잔소리 · 밥하기 · 어버이 · 낮잠 · 말괄돼지 ·
      어른 · 쪽지가 왔습니다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 화제의
   ‘-적’ 없애야 말 된다 : 민족주의적
   좋은 말 새로 읽기

꼬리말 :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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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목 책읽기


 아프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 몸과 마음을 하나도 모릅니다. 아픈 사람은 안 아픈 사람이 마음껏 뛸 때에 몸과 마음이 어떠한가를 조금도 모릅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없는 사람 고단한 삶을 터럭만큼도 모릅니다. 돈없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 넉넉한 삶을 모래알만큼도 모릅니다.

 그제 아침 둘째 오줌기저귀를 빨래하는데 왼손목이 찌릿하면서 조금도 힘을 줄 수 없습니다. 왼손목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비빔질이나 헹굼질뿐 아니라 바가지로 물을 뜰 수조차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왼손으로 도마를 들어 씻는다든지, 왼손으로 그릇이나 접시를 들어 오른손에는 수세미를 들 때에 왼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칫 그릇이나 접시를 놓칠 뻔할 뿐 아니라 자꾸 아파서 아예 들지를 못합니다. 어찌저찌 다 한 빨래를 짤 수도 없고 털 수도 없습니다. 다 끓인 미역국을 그릇에 담아 들어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런 손으로 무얼 할 수 있나 모르겠습니다. 겉보기로는 멀쩡하다지만 속에서 망가졌는데,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픈 왼손목으로 책짐 싸기는 그대로 합니다. 비질을 하며 방을 씁니다. 기저귀 빨래도 그대로 하고, 밥도 고스란히 합니다. 첫째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마실을 다녀옵니다.

 이틀이 지난 아침, 왼손목이 찌릿찌릿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그럭저럭 쓸 수는 있습니다. 아니, 안 쓰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안 쓴다면 우리 집일을 할 사람이 없고, 갓난쟁이 기저귀를 댈 수 없을 뿐 아니라, 첫째랑 옆지기한테 밥을 먹일 수 없습니다. 이 왼손목을 어찌저찌 쓰지 않는다면 우리 집안 밥벌이 노릇까지 하는 글쓰기나 사진찍기를 할 수 없습니다.

 그제와 어제 잠자리에 누워 왼손목을 오른손으로 살며시 쥐고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왼손목이 아프니 집일을 하는 데에 품이 더 들고, 품이 더 드니 더 고단해서 그야말로 하루 한 쪽 책읽기조차 아예 생각을 못합니다. 손목이 아프면 가벼운 책을 들 때에도 찌릿하면서 눈물이 찔끔 납니다. 무겁다 싶도록 만든 책은 이런 손목으로는 들어서 읽을 수 없기도 하지만, 들어서 나를 수 없기도 합니다. 가벼운 종이로 조그맣게 만드는 책이 아니라면, 손목이 아픈 사람은 차마 건드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읽도록 만드는 책이라는 어린이책은 으레 겉을 두껍게 합니다. 그림책은 겉종이가 꽤 두껍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거칠게 보니까 이렇게 만든다지만, 아이들은 처음부터 책을 거칠게 보지 않습니다. 제 어버이가 책을 보드라이 매만지면서 읽으면,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책을 보드라이 매만지면서 예쁘게 건사합니다. 아이들은 겉종이가 두꺼운 책을 들면서 무겁다고 느낍니다. 어른 가운데에도 손목이 아픈 사람은 겉종이가 두껍거나 무거운 책은 참으로 무겁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겉종이가 얇고 가벼워도 예쁘고 정갈히 건사할 줄 알 뿐 아니라, 어버이나 어른한테서 이렇게 책을 다루어야 하는 줄 배워야 합니다. 거칠게 다루고 많이 넘기니까 두껍게 겉종이를 댄다고 하지만, 가볍고 얇게 만든 책이라 하더라도 곱고 알뜰히 건사해서 오래오래 즐길 수 있도록 만들 뿐 아니라, 책을 어떻게 다루고 넘기며 즐겨야 하는가를 아이들 스스로 깨닫도록 마음밥부터 찬찬히 먹이는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4.7.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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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s Feininger (Paperback)
Andreas Feininger / Stern Portfolio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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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이야기하려는 사진책은 뜨지 않기에,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사진삶을 알 수 있는 다른 책에 걸어 놓습니다.



 한국 사진쟁이는 나이 들면 ‘추상’에 젖는다만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30] 안드레아스 파이닝거(Andreas Feininger), 《TREES》(Rizzoli,1991)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사진길을 걸어온 ‘사진밭 어르신’은 나이가 들수록 ‘추상’ 사진을 찍곤 합니다. 나이가 아직 많이 안 들었어도 제법 이름을 알린 뒤에는 추상 사진을 즐기곤 합니다. 돌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시골 논자락을 보거나 물을 보거나 풀을 보거나 하면서 추상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림이든 글이든 사진이든 ‘구상’이 있기에 추상이 있고, 추상이 있으면서 구상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구상이든 추상이든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애써 구상이나 추상으로 나눌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할 뿐이요,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사진책 《TREES》(Rizzoli,1991)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TREES》를 내놓은 이는 ‘Andreas Feininger’ 님입니다. 한글로 이 이름을 어떻게 적어야 좋을는지 모르겠는데, ‘안드레아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고 ‘앙드레아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으며 ‘안드레아스 파이닝거’라 적는 분이 있어요. 어쩌면 ‘앤드래이어스 파이닝거’라고 적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저로서는 어느 쪽이 맞게 부르는 이름인지 알쏭달쏭하기에 ‘안드레아스 파이닝거’로 읽기로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책 《나무들》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은 적잖은 사진비평을 썼고, 이분 사진비평은 1970∼80년대에 곧잘 한국말로 옮겨졌습니다. 1990년대로 접어들고 2000년대와 2010년대가 된 오늘날에는 이분 사진비평을 찾아보기 몹시 어렵고, 이제 이분 사진비평을 들면서 사진을 살피거나 배우는 흐름은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예전 사람이요 예전 이야기이며 예전 사진이니까 이렇게 잊을 만하거나 손사래쳐도 괜찮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어느 한때에만 읽거나 살필 만하고 다른 한때에는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읽거나 살필 만하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읽거나 살필 만합니다.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하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안 읽거나 안 살필 만해요.

 어찌 바라보면 사진책 《나무들》 또한 추상 사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들》을 추상 사진으로 넣는 일은 썩 옳지 않다고 느껴요.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이 추상 사진이 아니듯,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사진도 추상이 아니요, 또 구상이 아닌, 그예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책 《나무들》에는 나무들을 사진으로 담은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 글이 퍽 길게 많이 깃듭니다.

 무슨 할 말이 이다지도 많아 ‘사진쟁이’가 사진 아닌 글로 이야기를 일구어 사진책을 내놓을까요. 사진쟁이가 사진 아닌 글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얼마나 사진쟁이답거나 사진책을 잘 일구었다 할 만할까요.

 사진은 사진이기에 사진으로 처음과 끝을 보여주어야 옳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은 사진이니까 사진이 아닌 글로 처음과 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글이나 그림도 이와 똑같습니다. 글은 글이기에 글로 모두 보여줄 수 있지만, 글을 줄이거나 덜어 그림이나 사진을 넣으면서 보여줄 수 있어요. 그림에서도 그림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나, 그림을 줄이거나 덜며 사진이나 글이 어우러지도록 이야기를 엮을 수 있어요.

 사랑은 사랑으로 보여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에 깃들까요. 사랑은 무엇으로 보여주거나 무엇으로 느끼게 할까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차리는 밥 한 그릇에 사랑이 깃듭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입히는 옷을 빨아서 곱게 널어 보송보송 말릴 때에 사랑이 깃듭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는 포근한 보금자리에 사랑이 깃듭니다.

 사진쟁이가 사람 삶을 차근차근 돌아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된다 하지만, 사진쟁이가 무당벌레 삶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됩니다. 사진쟁이가 가난한 사람들 마을에서 오래오래 지내면서 사진을 찍을 적에도 다큐사진이 된다 할 테지만, 사진쟁이가 쑥이나 질경이 한살이를 곰곰이 들여다보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도 다큐사진이 돼요.

 다큐사진에는 어떠한 틀이 없습니다. 사진에는 이런저런 울타리가 없습니다. 다큐글도 아무런 틀이 없고, 글 또한 구지레한 울타리가 없어요. 오직 삶으로 말합니다. 오로지 삶을 사랑하는 넋으로 말합니다. 온통 삶을 사랑하는 넋을 따스히 어루만지면서 말해요.

 사진책 《나무들》을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거듭거듭 되뇝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진길을 걷는 숱한 어르신들이 사진책 《나무들》에 어떠한 손길과 마음길과 눈길이 깃드는가를 차분히 느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고 거듭거듭 되뇝니다. 사람을 찍어도 사람들 눈동자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스며들면서 어깨동무하지 않을 때에는 겉치레로 그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찍어도 나뭇잎 한 장이 아니라 등걸과 나이테와 꽃송이 깊디깊게 스며들어 어깨동무할 때라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안드레아스 파이닝거 님은 숱하게 쓴 사진비평으로 사진길 걷는 사람들한테 좋은 이슬떨이가 되었는데, 사진비평을 《나무들》 같은 사진책에 살포시 녹이면서 ‘머리로 하는 이론’이나 ‘머리로 만드는 사진’이 아닌, ‘삶으로 나누는 말’과 ‘마음으로 찍는 사진’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나무숲에 들어가 보셔요. 가까이에 나무숲이 없다면, 도시 한복판에서 자동차한테 둘러싸인 외로운 나무 곁에 서 보셔요.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든 외로운 나무 곁에서든, 나무 한 그루가 자라온 나날이 아로새겨진 굵직한 줄기를 쓰다듬으면서 나무가 사람 손을 거쳐 나누려 하는 따스한 기운을 받아들여 보셔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어 보셔요. 우람한 나무에 내려앉아 다리쉼을 하는 온갖 새를 바라보고, 이 온갖 새가 지저귀는 끝없는 노래를 들어 보셔요.

 나무 숨소리와 나무 노랫소리를 나무 푸른그늘과 함께 맞아들일 수 있으면, 누구나 《나무들》 같은 사진책을 예쁘게 일구며 흐뭇하게 웃습니다. (4344.7.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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