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사랑하는 배두나 씨


 연기를 하면서 살아가는 배두나 씨는 2006년에 《두나's 런던놀이》라는 책을 내놓습니다. 이윽고 2007년에는 《두나's 도쿄놀이》라는 책을 내놓고, 이듬해인 2008년에는 《두나's 서울놀이》라는 책을 내놓습니다.

 배두나 씨를 좋아하는 분이건 배두나 씨를 좋아하지 않는 분이건, 세 가지 책을 가만히 살펴본 분은 잘 알아차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배두나 씨는 ‘놀이’라는 한국말을 쓰지, ‘play’라는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다만, 배두나 씨는 ‘play’를 쓰지 않으나 ‘두나's’라고 하면서 영어 말투를 씁니다.

 더 들여다보면, 배두나 씨는 여느 지식쟁이처럼 ‘-의’를 붙이지 않습니다. “두나의 런던놀이”가 아니라 “두나's 런던놀이”예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얄궂겠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오늘날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줄 뿐입니다. 가게이름은 ‘Kim's club’이지, ‘김씨의 가게’나 ‘김씨 가게’가 아니에요. 그러나, ‘김가네 김밥’이요, ‘김가의 김밥’이나 ‘김가's 김밥’이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주고받을 한국말을 옳게 살피면서 쓸 줄 아는 곳에서는 ‘김가의 김밥’이나 ‘김가's 김밥’이 아닌 ‘김가네 김밥’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두나's 런던play”라고 이름을 붙여야 알맞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니면, “duna's London play”처럼 모조리 알파벳으로 적든지요. 《두나's 런던놀이》를 사서 읽거나 즐기는 분 가운데 이 책에 붙은 이름을 얄궂다고 느낀다거나 잘못됐다고 여긴다거나 알맞지 않다고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책을 내놓은 출판사부터 그래요. 책마을 일꾼 스스로 가슴으로 우리 말글을 느끼지 않습니다.

 《두나's 서울놀이》를 들여다봅니다. “배두나의 취미는 베이킹과 꽃꽂이다(21쪽).” 하는 글월이 있습니다. 배두나 씨는 ‘베이킹’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따진다면, ‘빵굽기’ 아닌 ‘베이킹’을 좋아한다면 ‘꽃꽂이’ 아닌 ‘플라워잉’을 좋아해야 걸맞지 않으랴 싶습니다. “배두나는 타고난 패셔니스타다(21쪽).”라고도 하는데, 한 마디로 하자면, 배두나 씨는 ‘옷을 잘 입는 사람’이거나 ‘옷을 멋있게 입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배두나 씨는 “최근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 친구가 스케치북에 드로잉하는 것을 보았는데(5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무가 ‘그림을 그리’지 않고 ‘드로잉’을 하기 때문에 배두나 씨가 ‘드로잉’을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드로잉을 하지만 ‘미술’에 눈길을 둔다고 말합니다. 드로잉을 한다면 ‘아트’나 ‘페인텅’에 눈길을 두어야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헤아린다면, 사람들 누구나 그림을 그리는 종이를 묶은 것을 가리킬 때에 ‘스케치북’이라고 합니다. ‘그림책’이나 ‘그림종이책’이나 ‘그림그리기책’이라 하지 않아요.

 사진을 좋아하고 사진기 모으기 또한 좋아한다는 배두나 씨는 “취미이기 때문에 하드웨어의 재미를 더욱 다양하고 느끼고(78쪽)” 싶어 한답니다. ‘하드웨어의 재미’란 ‘사진기 모으는 재미’라는 소리일 테지요.

 배두나 씨한테는 ‘절친’과 함께 ‘베스트 프렌드’가 있다(131,133쪽)고 하는데, 베스트 프렌드 가운데에는 ‘넘버원 베스트 프렌드’가 있다고 해요. ‘친구’와 ‘동무’와 ‘너나들이’ 같은 낱말이 있으니, 이런 낱말을 알뜰살뜰 잘 써야 한다 이야기할 수 있고, ‘사랑동무’나 ‘으뜸동무’나 ‘참동무’처럼 말할 수 있는데, 연기하는 사람들 말씨가 참 얄궂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하는 사람에 앞서, 이 나라 행정을 다스리는 분들은 ‘비즈니스 프렌들리’ 같은 영어를 아무렇지 않게 읊어요. 누구를 탓한다거나 아무개를 더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상 & 연우(130쪽)”처럼 쓰는 글월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and)’는 우리 말이 아닌 줄 느끼지 않거든요. 우리 말로 옳게 하자면 “원상과 연우”나 “원상이랑 연우”나 “원상하고 연우”라 해야 하는 줄 생각하지 않아요.

 “그외의 FAVORITE LIST(121쪽)” 같은 글월 또한 무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인터넷창에는 ‘FAVORITE’ 아닌 ‘즐겨찾기’라는 말마디만 적히지만, 영어로 이야기하고 영어로 들으며 영어로 생각하는 멋을 찾는 사람들한테 영어를 아무 데나 쓰지 말라고 할 수 없는 삶자락이니까요.

 “엄마가 자갈로 박아 놓은 아버지의 이니셜 J.D.BAE(203쪽)” 같은 글월을 곱씹습니다. 어른이든 아이이든, 교사이든 학생이든, 지식인이든 여느 사람이든, 제 이름을 ‘한글 머릿글’을 따서 쓰는 분이 몹시 드뭅니다. ‘ㅊㅈㄱ’처럼 쓰는 사람은 참으로 적어요. 그저 ‘CJG’처럼 적습니다. 책등에 적는 이름이든 공책이나 수첩에 적는 이름이든, 으레 알파벳이에요. 한글이 아닙니다. 한글이 아닌 알파벳을 적으니 ‘이니셜’이 되겠지요. ‘머릿글’이 아닙니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한테 밥을 먹기 앞서나 밥을 먹고 나서 ‘입가심’이나 ‘주전부리’를 줄 때가 있어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니까요. 배두나 씨로서는 “두나's 서울놀이”라 말하는 삶이기 때문에 “디저트로 마신 핫초코의 맛(227쪽)”이라고 말할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여느 사람들로서는 그저 ‘디저트’예요. 한자말로 ‘후식’이라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배두나 씨는 “난 이곳의 브런치를 좋아한다(227쪽).”고 말하면서 무엇이 어떻게 흔들리거나 무너지는가를 헤아리거나 살필 수 없습니다.

 먹는 이야기를 덧붙이면 “산마 얹은 참치를 애피타이저로 먹은 후, 메인 메뉴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265쪽).”에서 ‘애피타이저’라는 낱말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먹기 앞서 애피타이저요, 먹은 다음 디저트예요. 이럴 때에는 먹기 앞서 입씻이라 하거나 먹고 나서 입가심이라 할 수 있겠지요. 먹고 나서 주전부리라 할 수 있을 테고요. 그런데, 한국사람 스스로 ‘메인 메뉴’와 ‘사이드 메뉴’를 생각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이러한 밥차림을 가리켜야 좋을는지를 알 길이 없어요.

 이렁저렁 책을 마무리지으면서, 배두나 씨는 ‘EPILOGUE’를 쓰고 ‘THANKS TO’를 붙입니다. ‘맺음말’이나 ‘끝말’이나 ‘마무리말’이 아닙니다. ‘고마운 분’이나 ‘고마운 이름’이나 ‘고마운 사람들’ 또한 아니에요. 책 맨 마지막에는 “Written by Hooney”가 붙습니다. “since ○○○○”처럼 간판 옆에 적바림하는 글씀씀이하고 같습니다. “아무개 적음”이나 “아무개 씀”이 아닌 “Written by 아무개”예요.

 영어를 사랑하는 배두나 씨라 할 만하지만, 오늘날 사람들 말매무새를 톺아본다면 딱히 영어를 사랑한다기보다 ‘누구나 흔히 쓰는 말을 배두나 씨도 똑같이 쓸 뿐’이라 할 수 있어요. 배두나 씨 책을 내놓은 출판사 이름은 ‘중앙books’입니다. (4344.6.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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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 이불 노란 똥 노란 빨래


 노란 이불에 노란 똥을 누는 둘째 아이. 다른 빨래거리가 넘치는데 이불까지 한 채 빨아야 한다. 첫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첫째가 아직 뒤집기조차 못하던 때, 이불 빨래를 얼마나 신나게 해대야 했던가 떠올린다. 첫째 낮오줌 가리기를 하던 무렵에도 이불 빨래는 참으로 신나게 해대야 했다. 새로 빤 지 며칠 안 된 데에다 또 똥을 누었다면 기운이 쪽 빠진다. 쓴 지 제법 되어 빨아야 할 때를 맞이한 이불을 아이가 똥을 눈 김에 빨래한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노란 이불에 묻은 노란 똥을 북북 비벼 빨면 노란 똥물이 줄줄 흐르고, 노란 똥내가 내 손에 곱게 배어든다. 흙을 만지는 일꾼 손에는 흙내가 배고, 기름을 만지는 일꾼 손에는 기름내가 배며,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 손에는 똥내가 밴다. (4344.6.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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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쓰는 끈으로 책을 묶기


 1995년부터 책을 끈으로 묶는 솜씨를 익혔습니다. 1995년에는 옥매듭 짓기를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1998년과 1999년에도 아직 서툴었습니다. 그러나 옥매듭 짓기가 서툴든 익숙하든 살림집을 옮겨야 했고 책을 묶어야 했습니다. 2000년 2001년 2002년이 되면서 옥매듭 짓기는 차츰 발돋움합니다. 해마다 잔뜩 늘어나는 책살림을 해마다 다시 묶고 풀면서 시나브로 손바닥에 굳은살이 두껍게 박힙니다. 2003년 2005년에는 손바닥 굳은살이 더 두꺼워지고, 책 묶는 솜씨는 한결 발돋움합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더는 책을 묶고 싶지 않았으나 또 책을 묶고 나르면서 옥매듭 짓기는 더욱 나아졌고, 2009년과 2010년에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여기면서 또 묶고 또 풀면서 손바닥이 통째로 굳은살이 됩니다. 2008년에 태어난 첫째 똥오줌기저귀를 날마다 수십 장씩 빨면서 굳은살이 아주 단단해집니다.

 이제 내 손이 좀 쉬면서 책묶기 아닌 책읽기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2011년 다시 책묶기를 합니다. 묶고 풀기를 되풀이하면서 책을 다루는 매무새는 차츰 거듭나는데, 나는 책을 사고파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인데, 책을 다루는 매무새가 이렇게 거듭나는 일이란 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책을 묶으며 땀방울이 이마에서 툭툭 떨어져 신문종이를 적시는 동안,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머니는 하루 내내 아이 곁에 붙어서 젖을 물리고 재우며 노래합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아닌 한 해 두 해 세 해입니다. 아이는 세 해쯤 되니 이제 스스로 마음껏 뛰놀며 제 살아갈 길을 찾아나서려는 모양새가 엿보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이 스스로 뭔가 일거리를 찾을 수 없으니, 더 오래 어버이가 곁에서 밥과 옷과 집을 사랑과 믿음으로 베풀어야겠지요.

 2011년에 또다시 책묶기를 하며 예전에 쓰던 끈을 꺼냅니다. 1995년부터 쓰던 끈 가운데 버린 끈은 얼마 안 됩니다. 너무 오래되거나 낡아 끊어지면 버리지만, 웬만해서는 안 버리고 1995년 끈까지 꽤 남아, 이 끈을 새로 잇고 덧대면서 2011년까지 고이 씁니다. 예전 끈을 늘 되쓰지만 되쓰는 끈으로는 해마다 새로 책묶기를 할 때면 으레 많이 모자라서, 지난날 쓰던 끈하고 견주면 곱배기로 장만해서 씁니다. 2010년에는 푸른끈을 아마 80개쯤 사다 썼지 싶어요.

 고뿔을 앓는 첫째는 새벽녘에 코피를 잔뜩 쏟고도 그냥 곯아떨어집니다. 얼굴 닦는 천에 물을 묻혀 아이 얼굴과 코 둘레를 닦고 코에 물을 몇 방울 넣습니다. 태어나던 병원에서 억지로 맞힌 철분제와 항생제 주사 때문에 몸앓이를 하는 둘째는 밤새 끄에끄에 소리를 내면서 잠투정을 하고 잠꼬대를 합니다. 아침이 되어서도 끄에끄에 소리는 그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토닥이며 젖을 물려 새근새근 재웁니다. 이제 아버지는 간밤 똥오줌기저귀 빨래를 신나게 해대면서 아침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해야겠지요. (4344.6.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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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숲길 어린이


 아이를 자전거에 태워 면사무소를 다녀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논둑길로 접어든다. 더 빠른 길로 달리지 않는다. 자동차는 아예 들어서지 못할 논둑길에서 자전거를 달린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른다. “벼리 걸을래.” 하고 노래한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서 내린다. 아이는 흙길을 하얀 고무신으로 달리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걷다가 멈추다가 노래하다가 걷는다. 논둑에서 자라는 풀은 어느새 아이 키보다 훌쩍 자랐고 어른 키만큼 된다. 이 풀이 처음 씨앗에서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린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고작 두 달만에 이만큼 자란다. 아이한테 이 논둑길 풀숲이 어떻게 느껴질까. 논둑길 풀숲 사이로 걷는 아이 마음에는 무엇이 자랄 수 있을까. 아이 아버지는 요즈음 아이한테 그림책을 거의 못 읽힌다. 읽힐 만한 그림책이 잘 안 보인다. (4344.6.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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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1
이철수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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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64



고운 손길로 즐거운 일을 가르치고 배워요

―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이철수·박현희·송승훈·배경내·하종강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1.5.16. 12000원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청와대이든 국회의사당이든 삼성이나 에스케이 회장실이든 쓸고 닦는 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여느 살림집이든 높직한 수십 층짜리 시멘트집이든, 날마다 쓸고 닦지 않고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만하지 않습니다.


  대학교 건물이나 잔디밭이든, 서울 신촌이나 홍대 앞 술집골목이든, 어김없이 쓸고 닦으며 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청소 일꾼이 없으면 대학교이든 신촌이나 홍대이든 어마어마하게 지저분하겠지요.


  그렇지만, 언제나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입니다. 버리는 사람은, 치우는 사람 아들이나 딸일 수 있습니다. 치우는 사람은, 버리는 사람 아버지나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청소 일꾼을 이 사회에서 깎아내리든 하찮게 여기든, 이 나라 어디에나 청소 일꾼은 대단히 많으며, 이들 청소 일꾼이 없을 때에는 도시 문명 사회는 쓰레기 사회로 나뒹굴고 맙니다.


  청소 일꾼은 아주 적은 일삯을 받습니다. 청소 일꾼은 무척 오래 일합니다. 청소 일꾼 이름을 떠올리거나 되새기는 지식인이나 기자나 정치꾼은 없습니다. 청소 일꾼 이야기를 위인전이나 전기나 평전으로 쓰려는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없습니다.


  청소 일꾼한테는 쉼터가 따로 없습니다. 도심지 길을 쓸고 치우는 일꾼은 길바닥 아무 데나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쉽니다. 땡볕이든 그늘이든 가릴 몸이 안 됩니다. 그나마 몇 분쯤 느긋하게 쉬어도 된다는 겨를이 마땅히 없습니다. 치워야 할 몫은 날마다 못박히지만, 몇 분 일하고 몇 분 쉰다는 말미란 딱히 없습니다. 기계 아닌 사람인 청소 일꾼이지만, 주어진 일만 하도록 내몰립니다.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라든지, 일터에서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라든지, 이들이 집에서 정갈하게 쓸고 닦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밖에서는 지저분해도 안에서는 정갈할는지 모르고, 밖에서는 정갈하다지만 안에서는 지저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는 예부터 학교에서 학생한테 모든 청소를 맡깁니다. 뒷간부터 책걸상과 교무실과 교장실과 창고까지, 온통 학생이 쓸고 닦으며 치워야 합니다. 너른 운동장에 날리는 비닐봉지나 돌도 주워야 합니다. 학교 문 둘레 널브러진 쓰레기도 치워야 합니다. 교실을 비롯해 골마루 유리창까지 말끔히 닦아야 합니다. 요사이는 옛날처럼 마구 두들겨패지는 않겠지요. 예전에는 국민학교에서도 유리창이나 창틀에 자그마한 티끌 하나 묻으면 어김없이 몽둥이나 빗자루나 주먹발길이 날아오곤 했습니다. 티끌 하나 때문에 청소를 한 시간 더 해야 하기 일쑤였습니다. 즐겁게 하는 청소가 아니라 지겹고 짜증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짐덩이였습니다.



.. 나중에 올려 주면 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최저임금 이상으로 돈을 주었어야 하는 거죠. 일자리를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라면서 법이 정한 최저 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조건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 학생들 이름표는 왜 이렇게 박음질되어 있을까요? 눈에 띄기 쉬워야 통제하기가 쉽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학생이라는 점을 끊임없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학생이 죄수와 같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  (115, 131쪽/배경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나 학교에서 숱하게 이루어지는 몽둥이찜질은 조금 줄었습니다. 아마 예전처럼 학생한테 끔찍하게 청소를 시킨다면 인권을 짓밟았대서 금세 시끄럽겠지요. 알맞게 함께하는 청소라면 좋습니다. 교사와 학생이 나란히 즐기며 맞아들이는 청소라면 아름답습니다. 학생한테만 억지로 시키는 청소는 늘 나쁩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기 앞서, 학생은 학교에서 배우는 자리에 서기 앞서, 저마다 살림집에서 쓸고 닦으며 치울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들든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들든 대학교에 들든 다르지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대서 못할 청소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면 어린 나이에 걸맞게 할 만한 청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살아가니까 모든 사람은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학교라는 곳은 돈벌이를 하는 솜씨나 매무새만 키우는 데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슬기와 매무새를 다스리는 곳이어야 해요.


  돈을 벌어야 하는 까닭은 밥과 옷과 집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돈을 벌어 밥을 사고 옷을 사며 집을 삽니다. 으레 바깥밥을 사먹으며, 저잣거리가 되든 할인마트가 되든 먹을거리를 돈을 치러 장만한 다음 집에서 요모조모 손질해서 먹습니다.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않아요. 돈을 안 벌 수 없습니다. 돈을 안 벌면 굶어죽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돈만 번대서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잠을 잘 수 있지 않습니다.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옷을 빨고 널어 말린 다음 개서 갈무리합니다. 바느질을 하거나 뜨개질을 합니다. 집안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 돌아봅니다. 늘 새 물건을 사다 쓰지 않고, 헌 물건을 잘 손질해서 오래오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알뜰히 씁니다.


  누구나 집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집에서 살림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나 푸름이라고 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안 하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옷을 입으며 잠을 자잖아요.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어야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집일을 건사할 줄 알고 집살림을 보살필 줄 알아야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집일이 어떠하고 집살림은 어떠한가를 또렷이 깨달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만합니다. 여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니고, 여자 아닌 남자만 해서 될 집일이 아닙니다. 집식구라면 누구나 할 집일입니다. 집일이 없이는 밥·옷·집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집살림이 있어야 아이키우기·함께살기·사랑하기가 이루어집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집일과 집살림을 배워야 합니다. 영어나 한자를 일찍부터 깨칠 노릇이 아니라, 걸레질과 빨래와 설거지와 개키기와 자리깔기 들을 일찍부터 옳게 배울 노릇입니다. 걷는 매무새와 절하는 몸가짐과 말하는 숨결을 알뜰히 다스릴 노릇입니다. 먼저 착하고 참다우며 어여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틀을 깨우쳐야, 이러한 밑틀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을 찾아들여 어떻게 즐기며 살아가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핀란드의 부자들은 수입의 60%까지, 스웨덴에서는 85%까지 세금으로 내요. 부자들은 그렇게 세금을 많이 내도 여전히 부자예요. 이런 나라들은 기업 경영이 투명해지고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결국 높은 세금이 나라 경제에 유익한 영향을 미쳤어요 …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한국의 대학생들이 자기 부모의 노동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초·중·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거의 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 지위가 높거나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비정상적인 현상이에요 ..  (하종강/178, 192, 197쪽)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철수와영희,2011)라는 책을 읽습니다. 서울 한쪽에 자리한 길담서원이라는 책방에서 마련한 청소년인문학교에서 이루어진 이야기마당을 갈무리해서 엮은 책을 읽습니다. 여러 어른이 푸름이 앞에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는구나 싶은데, 이런 이야기는 따로 마련하는 청소년인문학교가 아닌 ‘여느 집과 여느 학교’에서 먼저 들을 노릇이지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보금자리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집에서 어머니랑 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따스히 들려주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여느 어버이가 들려줄 이야기이고, 학교에서는 여느 교사가 들려줄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따로 ‘청소년인문학교 이야기책’을 엮어야 합니다. 조금 더 헤아려 본다면, 이런 청소년인문 강의가 있기에 ‘집에서 배울 대목을 못 배우는 아이들이 삶을 배우는 길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할 만하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부자가 세금을 더 내는 나라가 아닙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사람마다 제 깜냥과 재주껏 ‘일삯을 누릴 줄’ 아는 나라입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이지 않습니다. 세금을 많이 내도 똑같이 부자라면, 가난뱅이는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안 내더라도 똑같이 가난뱅이가 되겠지요?


  핀란드와 스웨덴은 가난뱅이가 되든 부자가 되든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나 괴롭힘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누구나 밑삶을 꾸릴 틀거리가 잘 마련되었고, 이러한 밑틀에 따라 돈을 더 벌고 싶으면 돈을 더 벌 수 있고,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귀고 싶으면 아름다운 숲과 사람을 사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벌어들이는 돈에서 85%나 세금으로 바치는’ 셈이 아니라, ‘15%를 벌든 1%를 벌든 부자 삶이든 가난뱅이 삶이든 즐거이 맞아들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벌어들인 돈 100%를 세금으로 내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는 곳이 핀란드와 스웨덴이라는 뜻입니다.



- 제가 거둔 ‘이철수 표 쌀’이라고 비싸게 사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요. 옆집 할아버지 거나 제 거나 똑같은 쌀일 뿐입니다. (26쪽/이철수)


- 인류의 조상은 원래 일을 안 했어요. 풀뿌리, 나무 열매 등 자연물을 채취하며 살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어요. (59쪽/박현희)


- 여러분들도 잘 아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 씨가 거기에 자원봉사를 갔다 와서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고도 감회-부여신궁어조영 봉사 작업에 다녀와서〉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217쪽)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대한민국 살림집과 배움터에서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일과 살림과 사랑과 삶을 참다이 들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기란 어렵기만 할 노릇일까요?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무슨 일 하며 살아야 할까?》 같은 책이 없어도 저마다 집에서 삶을 가르치고 배울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 예쁜 책을 곁에 두면서 삶을 슬기롭게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철수 쌀과 할아버지 쌀은 똑같지 않을 텐데요. 어느 모로 보면 똑같은 쌀이라 할 수 있지만, 같은 쌀이라 하더라도 논자락 자리에 따라 다 달라요. 같은 마을 논이라 하더라도 흙일꾼마다 논에 바치거나 들이는 땀과 품이 달라요. 약을 안 치는 사람과 약을 더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쌀이란 있을 수 없지요. 다만, 마음으로 고이 여기면서 사랑할 수 있다면 모든 쌀은 사랑스러운 쌀이 돼요.


  그리고 이원수 님을 놓고 조금 더 깊이 헤아려 보아야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한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친일시를 썼습니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 님이 푸름이일 때에 썼고요.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해방 뒤에 독재정권 해바라기를 안 한 사람은 오직 이원수 님입니다. 친일시를 쓴 사람 가운데 서슬퍼런 독재정권 때에 권력바라기를 안 하면서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지키거나 이루려고 땀흘리거나 피흘린 사람으로 누가 있을까요. 오로지 이원수 님입니다.


  이원수 님은 1980년에 병으로 숨을 거두기 앞서 ‘반성문’을 안 썼을 뿐입니다. 반성문을 쓰지 못하고 죽었대서 이원수 님을 친일작가로만 내모는 일은 너무 섣부른 몸짓이리라 느낍니다. 이원수 님이 해방 뒤에 보인 몸짓이나, 해방 뒤에 아이들한테 들려준 수많은 창작동화와 번역동화는 바로 ‘반성문 쓰기와 같은 삶’이라고 바라볼 만하리라 느낍니다. 1970년대 서울 청계천에서 전태일 님이 몸을 불사르면서 노동자 권리를 외칠 적에, 이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에 씩씩하게 맨 처음으로 쓴 사람은 바로 이원수 님입니다. 요즈음은 누구나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쓰지만 서슬퍼런 독재정권이 휘몰아치던 때에 전태일 님 이야기를 어린이문학으로 써서 널리 알리려 한 사람이 이원수 님인 줄 오늘날 푸름이도 잘 알아야지 싶어요. 2011.6.20.달/2016.2.1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청소년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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