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79] 마당, 게시판, 센터, 코너

 어느덧 ‘열린마당’ 같은 이름이 퍽 널리 쓰입니다. 이와 함께 ‘열린게시판’ 같은 이름도 쓰이는데, 그냥 영어로 ‘오픈캐스트’를 쓰기도 합니다. 영어 쓰기 좋아하는 버릇은 동사무소를 ‘동주민센터’처럼 바꾸고, 파출소를 ‘치안센터’로 바꾸는 데에서 엿보는데, 닭집을 일컬어 ‘치킨센터’라 하는 데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부정부패처럼 지저분한 일을 밝히자 하는 자리를 가리키는 이름을 ‘클린신고센터’처럼 붙입니다. ‘열린신고마당’이라든지 ‘맑은신고마당’처럼 이름을 붙이지 못해요. 한편, ‘센터’ 못지않게 ‘코너’라는 영어를 곳곳에 씁니다. 방송에서도 무슨 코너 요 코너라 할 뿐입니다. ‘생활공감정책코너’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곳은 ‘게시판’이라 해도 될 텐데요. 게시판을 가르는 큰 이름이 ‘열린마당’이니까 ‘생활공감정책마당’이라 해도 됩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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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넨과 거즈 2
아이자와 하루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어설픈 대로 재미나며 기쁜 나날
 [만화책 즐겨읽기 49] 아이자와 하루카, 《리넨과 거즈 (2)》


 이레 동안 이어진 비가 여드레째 살짝 멎습니다. 빗줄기가 그치지 않던 이레 동안 숲속에서는 빗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를 하나도 들을 수 없고, 다른 모습 또한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한결같이 빗소리이고, 한결같이 빗줄기입니다.

 빗줄기가 멎었을 때에는 하늘을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구름을 올려다보다가 멧새 소리를 듣고 개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에는 시골길에서 하얀나비를 만납니다.

 빗줄기가 퍼붓는 동안 텃밭에서 오이를 딸까 말까 망설입니다. 볕이 잘 드는 날 따야 더 맛나다 하는데, 텃밭 오이는 어른 팔뚝만 하도록 굵어집니다. 오늘 드디어 하루 살짝 개는 날이 될 듯하니, 얼른 따 송송 썰어 밥상에 올려야겠습니다.

 비가 멎은 저녁나절에 갓난쟁이를 안고 바깥바람을 쐬러 나옵니다. 한 달을 지난 아이는 바깥으로 나오니 저녁때에도 눈이 부신지 살짝 찡그리지만, 이내 바깥바람에 익숙해지면서 눈을 말똥말똥하다가는 숲바람을 마시면서 새근새근 잠듭니다.

 해 떨어지고 어두운 저녁에 개똥벌레 몇을 봅니다. 다른 불빛이 없기에 개똥벌레 불빛은 더 곱다고 느낍니다. 천천히 깜빡깜빡 날갯짓하는 개똥벌레는 천천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품에서 잠드느라 개똥벌레를 못 보지만, 첫째는 길에서 폴짝폴짝 뛰고 달리면서 개똥벌레를 바라봅니다. 개똥벌레는 우리 바로 옆을 살며시 스치고 날아갑니다.


- ‘알 수 없는 용기가 샘솟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쓸 뭔가를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도 기쁘고 특별한 일이었다니.’ (4쪽)
- ‘만드는 일을 통해 내가 용기를 얻는 것처럼, 내가 만든 물건 덕분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 있다. 정신없이 손을 움직이다 보면, 괴로운 일도 잊을 수 있어. 다행이야. 숨을 쉴 수 있으니.’ (40∼41쪽)


 장마도 하늘이 내리고 햇살도 하늘이 내립니다. 흙기운을 머금으며 오이랑 가지랑 토마토랑 당근이랑 텃밭에서 예쁘게 자라지만, 흙기운을 머금자면 하늘이 내린 햇살을 받아야 합니다. 햇살 없이 북돋울 흙기운이란 없습니다.

 책은 사람이 만듭니다. 책을 이루는 종이는 사람이 만듭니다. 책종이에 적히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사람이 만듭니다. 그러나 책이든 종이이든 글이든 무엇이든, 햇살이 곱게 드리우면서 지구별을 보듬지 않는다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아침을 차리고 낮밥을 차리며 저녁을 차립니다. 쌀을 씻고 미역국을 끓이며 반찬을 마련합니다. 빨래를 하고, 방을 쓸고 닦으며, 아이를 토닥입니다. 모두 어버이가 하는 일이라거나 사람이 하는 일이라 할 테지만, 고운 햇살을 받아먹는 목숨으로서 하는 일입니다.

 푸른 잎사귀로 우거지는 나무도, 나무 사이에 보금자리를 틀어 우짖는 새도, 파랗게 올려다보이는 하늘도, 어느 하나 따스한 햇살 품에서 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가 시금치를 먹든 감자를 먹든 두부를 먹든, 무엇 하나 햇살이 펼치는 따사로운 손길을 받아먹기 마련입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햇살 깃든 숨결을 어여삐 물려주는 이음고리라 할 만합니다.


- ‘내 마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리란 걸, 생각도 못하다니.’ (38쪽)
- ‘데리러 와 준 것만으로 이렇게 기뻐해 주다니. 그 미소가 내겐 가장 좋은 약이야. 이렇게 어린아이에게까지 걱정 끼치지 말고, 어서 기운 차리고 싶은데.’ (51쪽)
- ‘혼자 슬픈 감정에 잠겨, 주위 사람들을 전혀 보지 못 했어. 이렇게 매사에 열심인, 이 작은 아이에게서 얼마나 큰 위안을 얻는지.’ (80∼81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 2권을 들여다보니, 책 끄트머리에 ‘그린이 말’이 붙습니다. 그린이 말에는 그린이가 ‘시집을 가서 보내는 나날’을 적바림합니다. 그린이는 시집가기 앞서까지 당신 어버이랑 살다가 제금을 처음 나서 지낼 때에 “통금도 없고 실컷 놀고 게으름 피워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188쪽)” 한때를 누렸는데, “이 생활이 아이가 생기면 180도 돌변하리(188쪽)”라 생각하지 못했고, 넋을 차리고 보니 아이가 둘인 고단한 나날이 되었다 합니다. 지난날까지는 “만화가답게 올빼미형이었지만, 밤 8∼9시에 아이들을 재우면서 나도 함께 잠(191쪽)”들고, 아침에 아주 일찍 일어나서 만화를 그린다고 합니다.

 그린이는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북적거리느라 나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일도 조금밖에 못하지만, 재미있다, 그런 나날입니다(191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마지막 그림을 보면, 딸아이가 뒤에서 지켜보며 “엄마 그림 되게 못 그린다. 내가 훨씬 낫다!” 하고 말합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리넨과 거즈》를 그린 아이자와 하루카 님 만화결은 그닥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그냥 ‘못 그린 그림’이라 해도 됩니다. 예쁘장하게 그리려 애썼지만, 아직은 좀 못 그리는 그림이라 해도 틀리지 않아요.

 그렇지만, 만화결이 빼어나든 좀 어설프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주 훌륭히 잘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만화가 재미나거나 신나거나 즐겁지는 않으니까요. 만화는 ‘잘 그린 그림’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청소년문학이면서 영화로도 나온 《로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잘 나옵니다. 곽운천 선생은 고아명 그림이 아주 좋으면서 아름답다고 말해요. 고아명은 ‘사물을 빈틈없이 옮겨 그리지 못할’ 뿐 아니라, ‘사물을 판박이처럼 옮겨 그릴 마음이 없’습니다. 고아명은 저 스스로 바라보는 대로 그리는데다가, 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그립니다. 기쁠 때에는 기쁜 빛을, 슬플 때에는 슬픈 빛을, 아플 때에는 아픈 빛을, 벅찰 때에는 벅찬 빛을, 천천히 거침없이 그림으로 옮깁니다. 고아명 그림을 보면서 ‘구도나 명암이나 채도가 엉터리’라 말하지 않고, 말할 까닭이 없어요. 그림에 깃든 이야기와 삶을 읽으면 돼요.


- “코코미 말이야, 지금은 저렇게 씩씩하지만, 셋이 함께 살 때, 그 사람은 툭하면 외박에 나도 술 마시고 늘 신경이 곤두서 있고, 그러다 코코미한테 화풀이도 많이 했어. 그무렵부터 애가 별로 웃지도 않고 혼을 내도 듣는 둥 마는 둥하고, 다 내 탓이란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이를 예뻐할 여유가 없었어.” (116∼117쪽)
- “이제야 좀 알겠네. 당신 정말 둔하군요! 남의 기분 따윈 생각도 안 해요? 그러니 허락도 없이 여자 방에 들어가는 무신경한 짓을 하지. 멋대로 내 동생 남친인 양 굴지 않나! 내 동생이 곤란해 하는 거 몰라요?” (175쪽)


 만화책 《리넨과 거즈》는 그린이 이야기와 삶을 읽는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이니 만화결도 살펴야 할 테지만, 만화결이야 조금 모자라면 어떤가요. 글책을 읽을 때에도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좀 틀린다 한들, 때로는 문장부호나 말투가 어수룩하다 한들, 그다지 마음쓰이지 않습니다. 글줄에 깃든 넋과 얼과 꿈과 땀을 읽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이리하여, 사진에서도 똑같이 말해요. 사진틀이 좀 삐끗하거나 초점이 덜 맞거나 살짝 흔들렸다 하더라도, 사진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와 삶이 아름답거나 좋을 때에 아름다운 사진이라 하거나 좋은 사진이라 합니다.

 그림결까지 빼어나다면 더 좋을는지 모르지만, 그림결은 이 만해도 넉넉하며, 앞으로 차츰 발돋움하면 됩니다. 모든 만화쟁이가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이나 예순에 그림결을 마무리짓지 않으니까요. 또한, 일흔이나 여든이 되어도 새로운 그림결을 찾아나설 수 있어요.

 내 아이가 젓가락질을 말끔히 잘하며 밥알 하나 안 흘려야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걸음마나 뜀박질을 빈틈없이 잘해야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빗질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좀 삐져나오면 어떻습니까. 고무줄로 머리를 묶는데 머리카락 몇 올 풀리면 어떻습니까. 사랑으로 빗고 사랑으로 묶으면 돼요.

 좋아하는 마음이 되어 좋아하는 삶이 되면 즐거워요.


- ‘언젠가 갖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장소.’ (122쪽)


 누구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삶을 아낌없이 껴안을 수 있는 나날을 꿈꿉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살피며, 어떻게 좋아하며 나눌 때에 아름다울까를 깨달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착하고 참다우면서 고운 삶길을 저마다 알뜰살뜰 걸어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 리넨과 거즈 2 (아이자와 하루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6.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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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책읽기


 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대입니다. 새벽 여섯 시 오십 분에 첫차가 있고, 저녁 일곱 시 반에 막차가 있습니다. 하루에 여섯 대입니다. 시골에는 사람이 적게 살고, 읍내를 오갈 볼일이 적습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는 읍내에 있습니다. 시골마을에는 따로 가게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시골마을에서 술 한 병 라면 한 봉지를 사자 하더라도 읍내를 다녀와야 합니다.

 요즈음은 집집마다 자가용 없는 집이 드뭅니다. 이곳 시골마을에도 자가용 없는 집이 드문드문 있으나, 아주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는 집이 아니라면 으레 자가용에 경운기에 짐차를 갖춥니다. 굳이 두 시간에 한 번 오는 시골버스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자가용을 몰고 술 한 병 라면 한 봉지를 사올 수 있습니다.

 시골마을에는 도서관도 책방도 없습니다. 새책방도 헌책방도 따로 없습니다. 읍내에는 문방구 노릇을 하는 조그마한 책방이 한 군데 있습니다. 읍내에는 군청이 있는 터라, 어쩌면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읍내에서 살아가는 분이라면 읍내에 있을 도서관으로 마실할 수 있을 테지만,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이가 도서관마실을 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책을 빌리러 버스를 타고 오가기부터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넋이라면 이쯤이야 대수롭지 않을 뿐더러, 도서관 한 곳 있는 일을 참으로 고맙다고 여기리라 봅니다.

 시골집에서 책을 읽습니다. 시골로 들어오기 앞서 도시에서 장만한 책입니다. 이 책들을 엮거나 만든 곳은 도시에 깃듭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고, 책을 사거나 빌려서 읽는 거의 모든 사람들 또한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시골에 깃을 두고 시골살이나 시골넋을 글로 담아 책으로 엮는 곳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 숫자와 어울릴 만큼 있겠지요. 거의 모든 책이 도시사람 눈높이와 눈썰미에 맞출 수밖에 없고, 거의 모든 책이 도시에서 사고팔릴밖에 없으며, 거의 모든 책이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다룰밖에 없습니다. 장마비가 살짝 멎으며 눅눅함이나 축축함이 가신 오늘은 숲이 바라보이는 마당에 기저귀 빨래를 널 수 있겠습니다. (4344.6.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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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6-28 10:29   좋아요 0 | URL
글과 상관없이 볕에 마르고 있는 기저귀들을 생각하니 볕에 마른 면 냄새가 생각나며 절로 기분이 좋아지네요. 오늘 서울은 흐리거든요.

파란놀 2011-06-28 20:0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서울은 날이 맑아도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맑다는 느낌이 잘 안 드는구나 싶어요 ^^;;;;;
 



 밥먹기와 책읽기


 통계청이 다섯 해마다 한다는 생활시간조사(2009)에서 혼인한 두 어른이 집에서 집일을 얼마나 나누어 맡는가를 들여다본다. 맞벌이 부부가 하루에 집일을 하는 시간은 여성은 2시간 38분, 남성은 24분이란다. 홀벌이 부부일 때에 여성은 4시간 11분, 남성은 19분이란다. 나는 집에서 날마다 집일을 몇 시간쯤 하는지 어림해 본다. 얼추 어림해도 예닐곱 시간이 훌쩍 넘는다. 가만히 따지니 일고여덟 시간은 넉넉히 된다. 제대로 집일을 하자면 하루 여덟아홉 시간이나 열 시간쯤은 들여야 한다.

 홀벌이 집안에서 여성이 맡는 4시간 11분이란 ‘줄잡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참말 집에서 집일과 집살림만 하는 어머니라 할 때에는 나처럼 일고여덟 시간을 들이든지, 나보다 훨씬 품을 들여 열 시간 남짓 들인다 할 테지.

 아침을 차리고 낮밥을 차리며 저녁을 차리기만 하더라도 세 시간은 가볍게 든다. 푸성귀를 손질하고 나물을 무치며 김치를 담근다든지, 이것저것 한다면 밥먹기에 바치는 하루 품만 너덧 시간은 가뿐하다.

 예부터 집안에서 어머니는 책을 읽지 못했다. 예부터 집안에서 여자한테 책을 읽히지 않았다. 집안에서 어머니는 수많은 일을 떠안도록 했고, 집안에서 여자가 책에 마음을 사로잡히면 집일을 누가 해야 했을까. 어린 날부터 집일을 안 하거나 모르는 남자가 했을까.

 집일이란 참 대단하다. 그런데 이 대단한 집일을 거뜬히 해내는 남자란 없다. 어느 누구도 집일에 온삶을 바치지 못한다. 여느 여자라도 힘들고 슬프다 말하면서 집일을 짊어지지만, 대단한 남자라도 웃거나 노래하며 집일을 짊어지지 못한다.

 곰곰이 생각한다. 허난설헌도 신사임당도 집일이나 집살림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집일이나 집살림 이야기를 글로 쓰는 여자도 남자도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없겠지. 집일 하는 사람은 책도 못 읽고 책도 못 쓴다. (4344.6.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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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1-07-03 09: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살림을 하다보면 책을 잡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전 살림보다 "책읽기"가 먼저예요. 제 살림살이가 어떨지 아시겠지요? ㅋㅋㅋ

파란놀 2011-07-03 16:26   좋아요 0 | URL
오... 다른 집식구가 맡아서 하면 되지요 ^^;;
 
Paul Strand (Hardcover)
Mark Haworth-Booth / Aperture / 1997년 9월
평점 :
품절




 사진은 홀로 거룩할 수 없습니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폴 스트랜드(Paul Strand), 《Paul Strand》(Aperture,1987)



 먹고 싶지 않은 밥을 먹으면서 맛을 살피거나 가누어야 하는 요리비평가라면 무척 따분하면서 괴로우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밥먹기나 맛보기를 즐기지 않으면서 요리비평으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만, 오직 돈벌이로 요리비평을 하는 일이란 참 고단하겠지요.

 키우고 싶지 않던 아이를 낳았다는 어버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합니다. 혼인을 해서 제금을 나면 두 어른이 집일과 집살림을 도맡아야 하는데, 제금을 나기 앞서까지 집에서 일이나 살림을 몸소 안 할 뿐더러 배우지 못하는 남자 어른은 집식구가 집일과 집살림을 나누어 맡으라 이야기할 때에 어떤 마음일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스스로 쓰고 싶지 않으나 돈을 벌어야 하거나 이름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적잖은 신문기자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기자가 되지는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만화를 그리는 사람 가운데 그림이나 만화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림쟁이나 만화쟁이가 된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찍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진쟁이 한길을 걷겠다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진찍기를 돈벌이로 삼으면서 틈틈이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책 《Paul Strand》(Aperture,1987)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둡니다. 1987년에 나온 《Paul Strand》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삶을 기려 96쪽으로 간추린 작은 책입니다. 이 한 권으로 여든여섯 해에 걸친 폴 스트랜드 님 삶을 모두 그러모은다든지 낱낱이 보여준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이 조그마한 사진책으로 폴 스트랜드 님이 ‘얼마나 거룩한 사진쟁이인가?’라든지 ‘새로운 사진밭을 어떻게 일구었는가?’를 밝힐 수 없습니다. 그저 ‘폴 스트랜드 님이 좋아하며 즐긴 사진’ 가운데 ‘폴 스트랜드 님이 죽고 난 다음, 뒷사람 눈으로 바라볼 때에 더욱 좋아하며 즐기는 사진’이 무엇인가를 몇 가지 들출 뿐입니다.

 1915년에 찍었기에 ‘첫무렵 사진밭을 일군’ 작품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1953년에 찍었으니 ‘2053년에 누군가 찍을 사진’과 견주어 더 나은 작품이라 여길 수 없습니다. 폴 스트랜드 님은 1890년에 태어나 1976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1915년에도 사진을 찍고 1953년에도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폴 스트랜드 님이 몸과 마음에 기운이 감돌며 한창 신나게 온누리 곳곳을 씩씩하게 밟으면서 마주한 사람과 삶과 사랑을 사진이라는 이야기로 갈무리했을 뿐입니다.

 어린이를 바라보면 보드랍고 탱탱한 살결이 아름답습니다. 늙은이를 바라보면 깊이 패거나 퀭한 주름살과 눈자위가 아름답습니다. 가느다란 풀잎에 살짝 생채기가 나는 버섯이 아름답습니다. 풀잎에 곧게 나는 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사람들 살림살이를 만들건 전쟁무기를 만들건, 무언가를 만드는 공장 기계가 아름답습니다.

 파란하늘 하얀구름이 아름답습니다. 돌길을 아이를 안고 맨발로 걷는 아주머니가 아름답습니다. 장님이라는 이름패를 목에 건 할머니 목 언저리에 붙인 인증딱지가 아름답습니다. 내리쬐는 햇살이 건물에 살짝살짝 가리며 새삼스레 이루어지는 그림자와 빛무늬가 아름답습니다. 울타리가 아름답고 살림집 창문과 문턱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곳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뿌리내려 살아가는 보금자리가 아름답습니다.

 사진에는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이란 부질없습니다. 패션에는 유행이 있어 열 해나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돌고 돈다는데, 사진에도 이런 물결이 있어 돌고 돌는지 모르지만, 무슨무슨 주의나 주장에 따라 찍는 사진이란 참 덧없습니다. 내 삶이나 사랑이나 사람 이야기가 아닌 주의나 주장을 사진에 담으면 재미없습니다. 몸을 돌보려고 입는 옷이고, 몸을 살찌우려고 먹는 밥이며, 몸을 쉬려고 보살피는 집입니다.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집을 건사하는 사람들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과 땀으로 삶을 일굽니다. 다 다른 사진쟁이가 다 다른 사진기를 손에 쥐고는, 다 다른 삶을 어떠한 꿈과 땀으로 일구는지를 찬찬히 살피면서 천천히 담습니다.

 홀로 거룩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거룩하게 살아가는 이웃과 함께 거룩한 사진입니다. 홀로 아름다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아름다이 지내는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맑은 눈으로 맑게 바라보는 사람이 맑은 사진을 얻을는지 모릅니다. 밝은 눈썰미로 밝게 알아채는 사람이 밝은 사진을 이룰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맑게 바라보든 흐리멍텅하게 바라보든, 내가 바라보는 곳에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늘 그대로 있습니다. 밝게 알아채든 알아보든 알아내든, 내가 알아채거나 알아보거나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연은 언제나 고스란히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았기에 더 거룩하거나 뜻있거나 값있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지 못했기에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습니다.

 가슴으로 느낄 사진이라면 가슴으로 찍으면 됩니다. 가슴으로 찍은 사진을 가슴으로 느끼면 넉넉합니다. 역사에 적바림하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사진을 역사에 적바림하려 하지 말고, 내 마음에 찬찬히 아로새기면서 좋아하면 기쁩니다. 새로운 흐름이나 물결을 만들려고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내 삶이라고 느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바라보면 좋은 사진입니다. 새로운 바람이 되거나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 되는 사진이란 없어요. 한 번 보고 휙 덮는 사진이 아닌, 우리 집 가장 시원한 벽 한켠에 예쁘게 붙여 언제까지나 바라볼 사진이 있습니다.

 어느 사진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가 좋아하면서 즐기는 어여쁜 삶을 사랑스레 담을 뿐입니다. 2500년대나 3000년대를 살아갈 뒷사람이 보기에는, 1900년대를 가로지르는 폴 스트랜드 님 사진이든 2000년대를 아우를 오늘 우리들 사진이든 똑같습니다. (4344.6.27.달.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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