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과 책읽기


 1980년대 국민학생이 맞이한 소풍은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찾아왔습니다. 먼저 학교에 모인 다음, 학년과 반에 따라 줄을 맞추어 재잘재잘 떠들며 걸어서 갔습니다. 으레 가까운 데로 가고, 으레 여러 학교에서 같은 날 찾아가니까, 소풍날 찾아가는 곳은 북적북적거립니다. 가까운 데이든 먼 데이든 버스를 타고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늘 걸었습니다.

 걸어서 가자면 꽤 걸리기 때문에 아침 일찍 학교에 모입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 길디길게 이어지고 나서 학년에 따라 차례차례 학교를 나섭니다. 담임을 맡은 이는 줄이 흐트러질 때마다 소리를 빽 지르며 다그치지만, 소풍날에는 빽빽 다그치는 소리도 노래처럼 들립니다.

 학교를 벗어나 놀러가는 길이기 때문인지, 한 시간을 걷고 두 시간 가까이 걷더라도 그리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여느 때에는 늘 시멘트 성냥갑 교실에서 지내지만, 소풍날만큼은 아침 여덟 시에도 아홉 시에도 열 시에도 동네를 걸어서 지나갑니다. 학교 바깥 동네 아침 모습을 느끼며 걷는 일은 새삼스럽고 놀라우며 즐거웠습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꼭 한 차례씩 버스를 빌려 꽤 먼 데까지 수학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마실을 다닙니다. 버스를 타고 먼 데를 다닐 때에는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지만, 창밖 모습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아니, 창밖을 내다볼 겨를이 없이 버스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느니 도시락을 까먹어야 하느니 하면서 부산스럽습니다. 기운이 넘치는 신나는 아이들은 몸이나 다리를 쓸 일이 없는 버스에서 그야말로 시끄러울 뿐입니다.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머나먼 곳에서는 돌아볼 곳이 많다고 합니다. 빨리빨리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고, 이곳에서 사진 한 장 저곳에서 사진 두 장을 찍어야 합니다. 무엇을 더 생각하거나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걸어서 찾아가던 소풍 놀이터에서는 서둘러 사진을 찍을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닥이기는 하지만, 한갓지거나 느긋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이야 따로 안 찍어도, 또 소풍날이 아니어도 으레 찾아가는 곳이니까, 굳이 사진으로 뭔가를 남기기보다는 마음껏 뛰고 놀며 즐깁니다.

 집에서 책을 읽습니다. 읽던 책을 다시 넘기고, 보던 책을 새삼스레 꺼냅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읽을 책이란 꼭 새로운 책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읽던 책을 다시 넘겨도 기쁘고, 보던 책을 새삼스레 꺼내도 즐겁습니다.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한 번 보고 스윽 지나치기만 한다면, 내 마음에건 가슴에건 생각에건 머리에건 깃들지 않습니다. 노상 곁에 둘 만한 책일 때에 언제라도 읽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잡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도서관이라는 곳은 더 많은 책이나 더 새로운 책을 갖추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언제라도 다시 읽거나 거듭 읽으면서 내 넋과 얼을 어여삐 보듬는 맑고 밝은 책으로 살가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도서관이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품이든 아버지 품이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모레와 글피라고 다를 수 없어요. 늘 같은 품이면서 사랑스럽고, 언제나 같은 품으로서 빛납니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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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63] 하루맞이

 첫 아이가 우리 집에 찾아온 날부터 하루맞이는 남다릅니다. 첫 아이를 맞아들이고부터 아이보다 훨씬 일찍 깊은 새벽에 일어나 아이 기저귀를 살핍니다. 이러고 나서 밤새 쌓인 오줌기저귀를 천천히 빨래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빨래한 기저귀와 옷가지가 어느 만큼 말랐는가 만지고는, 다 말랐으면 개고, 이 자리에는 새벽에 새로 빤 기저귀와 옷가지를 넙니다. 이윽고, 아침맞이 글쓰기를 조금 하다가, 곧 일어날 식구들 먹일 밥을 어떻게 차릴까를 생각하며 쌀을 씻어 불립니다. 머잖아 아이가 깨어나면 이때부터 쏜살같이 흐르는 하루는 온 넋과 얼을 쏘옥 빼며 해가 하늘 높이 떴는지 저쪽으로 기울었는지 모르는 채 휙휙 흐릅니다. 저녁이나 밤에 아이를 재우고 나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무는구나 돌아보면서 하루마감을 해 보고 싶지만, 내 몸에 남아난 기운이 거의 없어 어느새 아이 곁에서 폭 고꾸라집니다. 오늘 하루도 여느 날과 똑같이 엽니다. 하루맞이는 새벽빨래부터입니다. 빨래를 마친 옷가지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비벼서 물기를 짜고 탕탕 텁니다. 손에서 물기 마를 틈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낳아 어버이로 살아온 이 땅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하루맞이를 이렇게 했겠지, 하고 돌아봅니다. 고마운 하루맞이입니다. 퍽 힘에 부치지만 보람차면서 아름다운 하루마감을 꿈꿉니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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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伊兵衛昭和を寫す〈1〉戰前と戰後 (ちくま文庫) (文庫)
木村 伊兵衛 / 筑摩書房 / 1995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찾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筑摩書房,1995)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어떤 나날인가를 돌아보면서 나눈 사진이 살포시 실린 사진책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筑摩書房,1995)를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소설 《스물네 개의 눈동자》에 나오는 쇼도지마섬 작은 학교 작은 아이들을 맡은 작은 교사는 스물네 눈동자를 맑게 빛나는 열두 아이하고 나란히 서서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교사와 아이들은 사진 열석 장을 하나씩 나누어 갖고, 이 사진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면서 지난날을 그립니다. 일본 정부가 대동아전쟁이니 태평양전쟁이니 자꾸자꾸 일으키면서 아이들까지 ‘전쟁 바보’로 만들어 싸움터로 내몰아 죽고 죽이는 짓을 일삼도록 하지만, 작은 섬 작은 학교 작은 교사는 아이들한테 ‘충은 보국’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무렵 작은 섬 작은 학교 작은 교사 둘레에 ‘일본이 일으키는 전쟁이 얼마나 덧없으면서 나쁜가’를 함께 느끼면서 나무라는 이웃이란 없습니다. 초롱초롱 눈망울을 맑게 빛내던 열두 아이조차 저희 어버이가 ‘일본 정부가 시키는 제국주의 교육과 정책’에 젖어들며 저희를 키우기 때문에, 이러한 틀에서 쉬 헤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이 빚은 사진으로 엮은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는 어떤 사진이라 할 만할까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와 ‘전쟁을 끝마친 다음’에 보이는 모습이 담긴 이 사진책은 사진쟁이 어떠한 넋을 실었다 할 만할까요.

 사진이란 ‘기록하는 사진’일까요. 사진은 ‘기록하는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을까요. 사진이란 ‘예술하는 사진’인가요. 사진은 ‘예술하는 노릇’을 하자며 만들었나요.

 어쩌면, 사진을 처음 만들어 널리 퍼뜨린 사람들은 ‘기록하는 사진’과 ‘예술하는 사진’을 함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돈을 버는 사진’이라든지 ‘외치는 사진’이 차근차근 샘솟았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은 이 가운데 어디 갈래에도 들지 않습니다.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에 담긴 사진은 ‘1920년대 일본’이나 ‘1940년대 일본’이나 ‘1960년대 일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이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조그마한 사진책에는 ‘일본에서 살아간 사람들 나날’이 담길 뿐입니다. 기록도 증언도 인문지리도 아닙니다. 문화도 예술도 멋도 호사 취미도 아닙니다. 오직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옮길 뿐이에요.

 원자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날아간 나가사키 천주교회당 사진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가카시 천주교회당과 천주교마을 이야기는 나가이 다카시 님이 쓴 《영원한 것을》이라는 이야기책에 잘 나왔습니다. 시골사람들이 조용한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천천히 일군 자그마한 마을 자그마한 예배당이 나가사키 천주교회당입니다.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역사가 오래된 물건이라서 섬기지 않을 뿐더러, 곁에서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옆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보살피는 믿음집이 나가사키 천주교회당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곳에도 원자폭탄은 떨어져 너나 가리지 않고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2011년 봄날, 후쿠시마 작은 마을이 난데없이 사라진 일하고 엇비슷합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도 밉게 살던 사람도 곱게 살던 사람도 짓궂게 살던 사람도 똑같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요. 폭격기에서 떨구는 폭탄 때문에 죽든, 바닷물이 크게 불어 마을을 휘감으면서 죽든,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든, 차에 치어 죽든, 죽음은 사람을 고르지 않습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 손길을 거쳐 사진으로 옮겨진 삶이 그러모인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다시금 헤아립니다. 바닷마을 사내들이 배를 바다에 띄우는 모습에서라든지, 바닷마을 아가씨들이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에서라든지, 바나나송이를 이고 장마당을 걷는 뒷모습이라든지, 검불을 모으는 아이들 모습이라든지, 베틀을 밟는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모습이라든지, 사진마다 이 사진에 깃든 사람들 이야기가 고스란히 어우러집니다. 돋보이고자 찍은 사진이 아니요, 내보이려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무슨 인문지리 연구를 한다며 찍는 사진이 아니며, 가난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겠다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예 나랑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차분히 마주하면서 이야기꽃 함께 피우는 사진입니다.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진은 무엇을 하면 아름다울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하자며 사진길을 걸을 수 있나요. 사진으로 무엇을 하면서 아름다움을 서로 나누는가요.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야 좋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져야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실린다거나 박물관 잘 보이는 자리에 걸려야 거룩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웃음이 나게 이끌고 눈물이 나게 끌어당길 때에 사진입니다. 웃음이 나게 읽혀야 글이고, 눈물이 나게 보여져야 그림입니다. 웃으면서 부르는 노래요, 울면서 추는 춤입니다. 모든 삶은 모든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는 어떤 길을 걷는지 궁금합니다. 2000년대에는 어떤 길을 걸었고, 1990년대에는 어떤 길을 걸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은 어찌저찌 걸었을지라도 2010년대와 2020년대를 새롭게 걸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2030년대에는 2030년대대로 아름다운 꿈을 찾고, 2040년대에는 2040년대대로 아름다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곁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한테는 내가 아름다운 님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내 삶자리에서 찍습니다. 내 삶자리를 사랑할 때에 내 둘레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나한테서 사랑스러운 빛을 느껴 고운 사진을 시나브로 이룹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찾아 멀리 떠날 수 없고,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지 않는다면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무엇이 아름다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4344.7.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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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더위 빨래


 집안에 넌 기저귀 빨래가 아주 금세 뻣뻣해지도록 마른다. 틈틈이 빨래를 해서 집안에 널어 둔다. 몹시 무더운 날, 이제 쉰 날을 살아낸 아이는 살이 접히는 데가 퍽 힘들 텐데, 장마철 사이에 날이 좋기 때문인지 하루하루 무럭무럭 잘 자란다고 느낀다. 도랑물 흐르는 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 마실을 자주 못하지만, 집안에 누워서도 들리는 뻐꾸기 소리와 바람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운 마음 고운 꿈을 키울 수 있기를 비손한다. 무더운 날씨라 하더라도 아이 오줌기저귀를 찬물로 빨고 나면 무척 시원하다. (4344.7.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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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바이 책읽기


 어릴 적 처음 오토바이를 타던 날을 떠올립니다. 동네 아저씨는 동네 아이들을 하나둘 오토바이에 태워 경인고속도로 들머리에 깃든 집부터 송도유원지까지 태워 주었습니다. 요즈음 이 길에는 신호등이 몇 군데 생겼으나 1980년대 끝무렵까지 송도유원지로 가는 길에는 건널목이고 신호등이고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송도유원지까지 가는 길은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갯벌이요, 이 바닷가에는 여러 겹으로 쇠가시그물을 세워 군인이 지키고 섰거든요. 자동차이든 자전거이든 사람이든 이 길에서는 멈추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동네 아저씨 오토바이에 얻어타며 송도유원지를 다녀오는 길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너무 빨라서 앞을 볼 수 없습니다. 아저씨는 오토바이를 몰며 어떻게 앞을 볼 수 있는지 놀랐습니다. 40, 60, 80, 속도계 바늘은 자꾸 올라가고, 바늘이 올라갈수록 눈을 감은 채 달려야 했으며, 머리카락이 뽑힐까 걱정스럽기까지 할 만큼 아팠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면 오르막을 오르막이라 느끼지 않으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면 오르막에서도 시원하게 바람을 쐬면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탈 때에도 이와 똑같겠지요.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은 오르막이 얼마나 고단한지 알 수 없습니다. 오토바이가 오르막을 땀 한 방울 안 흘리며 오를 때에는 배기가스를 더욱 짙고 구리게 내뿜습니다. 자전거로 오르막을 오르거나 두 다리로 오르막을 오르던 사람은 오토바이가 옆에서 지나갈 때에 숨이 막히면서 재채기가 납니다. 오르막을 오르는 자전거나 두 다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헉헉거리는데, 오토바이가 더 짙고 구리게 내뿜는 배기가스 때문에 숨까지 막히며 재채기가 나니 죽을맛입니다.

 오토바이는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에 이르면 더 빠르게 내달립니다. 오토바이를 타면, 오르막에서 땀을 안 흘리며 시원하게 바람을 쐬고 내리막에서 내리막이 얼마나 고마우며 시원한가를 느끼지 않으면서 그냥 찬바람을 잔뜩 쐽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가 오토바이를 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가 오토바이를 함부로 얻어서 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가 책을 더 빨리 많이 읽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가 남보다 책을 더 빨리 많이 읽기보다는, 아이 손에 굳은살이 더 단단히 박히고 아이 다리에 힘살이 더 튼튼히 오르면서, 이 땅을 씩씩하게 디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집 아이가 더 좋다 할 만한 책을 더 손쉽게 알아채거나 받아들이거나 물려받아 책읽기를 즐기는 삶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집 아이가 제 몸뚱이를 움직여 일하는 고단한 보람과 일을 마친 힘겨운 웃음과 눈물을 고이 받아들이면서 책 하나에 서리는 기쁨과 슬픔을 달콤하면서 쌉싸름하게 맞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7.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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