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책읽기


 나는 내가 읽고 나서 좋았다고 느낀 책을 덮으면, 나 스스로 참 좋구나 하고 느낀 넋으로 좋은 사랑을 담는 느낌글을 씁니다. 이와 함께, 내가 읽으며 참 얄궂구나 싶은 책이 있을 때에는, 이 얄궂구나 싶은 책을 바라보는 슬프며 괴로운 느낌글을 쓰고야 맙니다.

 달팽이는 빨간 열매를 먹으면 빨간 똥을 눕니다. 달팽이는 푸른 잎사귀를 먹으면 푸른 똥을 눕니다. 달팽이는 노란 꽃을 먹으면 노란 똥을 눕니다. 사람도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똥빛과 똥내와 똥꼴이 달라집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랑 이웃으로 지내느냐에 따라 말과 글과 넋과 꿈이 달라지겠지요.

 빨간 열매를 먹고 나서 하얀 똥을 누기를 바랄 수 없고 바라서도 안 되는데, 어떠한 책을 읽더라도 어떠한 사람을 마주하더라도 어떠한 일을 겪더라도, 내 몸에서 샘솟는 웃음과 눈물을 사랑말과 믿음글로 가다듬을 수 있는 삶이 되자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내 책읽기가 사랑읽기로 거듭나고, 내 글쓰기가 사랑쓰기로 새로워질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7.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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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만지기


 날마다 세 시간 남짓 책을 만진다. 바닥에 신문종이 두 장을 깔고, 책을 스물다섯 권쯤 얹은 다음, 다시 신문종이 두 장을 위에 얹는다. 지난해에 쓰고 나서 갈무리한 끈뭉치를 다시 끄집어 내어 책을 천천히 묶는다.

 끈으로 묶은 책뭉치가 도서관 한쪽에 차츰 쌓인다. 한 해 만에 책을 다시 묶는다. 집일을 하는 틈을 쪼개어 조금씩 책을 묶는다. 책을 묶다가도 이내 집으로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하니까 느긋하지 않다. 책을 묶으며 이 책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샀고, 이 책을 읽으며 어떠했던가 하고 돌아보지 못한다. 그저 바삐 묶고 다시 묶으며 쌓을 뿐이다.

 집에서는 집에서대로 아이랑 집일이랑 복닥여야 하고,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에서대로 책묶기에 매달려야 한다. 하루에 한 쪽씩 꼬박꼬박 읽자고 다짐했던 삶인데, 요 며칠 동안 한 쪽조차 못 읽고 지나가는 하루가 되고 만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책이 내 삶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눈코 뜰 사이 없는 사람은 무슨 책을 손에 쥘 만할까. 사람이 새벽부터 밤까지 쉴 겨를이 조금조차 없다면, 이 사람한테는 무슨 기쁨과 보람이 있다 할 만할까.

 느긋하거나 한갓지지 않다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하리라. 바빠도 바쁜 틈을 쪼개어 책을 읽는다 하리라. 그런데, 책이란 뭘까. 책 하나는 힘겹거나 고단한 사람한테 어떻게 마음밥이 될 만한가. 네 살 첫째 아이가 아버지가 책을 묶는 곁에서 뛰고 노래하면서 논다. 집일하는 보금자리에서는 혼자 그림책을 무릎에 얹어서 펼친다. 스스로 놀고 스스로 읽는 아이가 대견하다. 일하는 아버지 곁에서 놀고 읽는 아이가 고맙다. 등허리를 쿵쿵 두들기며 사진기를 살짝 들어 아이가 놀거나 읽는 모습을 사진으로 한두 장 적바림하면서 내 책읽기로 삼는다. (4344.7.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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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집게 어린이


 둘째 기저귀를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려고 나오면, 첫째는 어느새 알아차리고 신을 꿰고는 아버지를 따라나온다. 아버지가 기저귀를 한 장씩 들어 탕탕 털고 널 때면 아이는 빨래집게를 한손에 하나씩 쥐고는 딱딱거리다가는 한꺼번에 내민다.

 아주 어렴풋하지만, 내가 첫째만 한 나이였을 어린 나날, 어머니가 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 때에 뒤에서 알짱거리면서 빨래집게를 쥐어 내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깡총 뛰어도 손에 닿지 않는 높다란 빨랫줄을 올려다보면서 어머니가 빨래를 너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이에 앞서 어머니가 빨래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으며, 다 널고 난 다음 빈 통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라든지, 저녁에 다 마른 빨래를 걷어 갤 때라든지, 늘 곁에서 함께 보았다고 느낀다. 한낮에는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빨래를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하늘빛과 햇볕을 느꼈다.

 둘째가 크고 나면, 누나랑 어머니랑 아버지 빨래를 빨랫줄에 널 때에 이렇게 빨래집게통을 들고 따라나서면서 일손을 거들겠다고 할까. (4344.7.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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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1-07-03 09:34   좋아요 0 | URL
사름벼리가 참 재미있어 보여요. 산들보라도 많이 컸겠네요. 나서 한달동안 꽤 많이 크던데요. 사진으로 보면 차이가 확 느껴지지요~~

파란놀 2011-07-03 16:26   좋아요 0 | URL
둘째를 돌보고, 집 옮길 준비를 하느라 첫째랑 제대로 못 놀아서 날마다 많이 심심해 한답니다 ^^;;;;;
 
웅덩이 관찰 일기 - 자연 - 먹이사슬 똑똑똑 과학 그림책 12
황보연 지음, 윤봉선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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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덩이를 밀어내고 아파트 세우는 나라에서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2] 윤봉선·황보연, 《웅덩이 관찰일기》(웅진주니어,2007)


 그림책 《웅덩이 관찰일기》(웅진주니어,2007)는 웅덩이를 가만히 지켜본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알맞게 풀어서 적고 그린 이야기책입니다. 초등학교 3·5·6학년 과학 교과서에 맞추어 여러 가지 자연 이야기를 알기 쉽도록 보여준다고 할 만합니다.

 생각해 보니, 어린 날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자연 교과서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시험을 치를 때에 알뜰히 외워서 빈틈없이 맞추도록 했기 때문에 골이 아팠습니다. 숲이나 들이나 멧자락에서 웅덩이나 늪을 찾아다니며 뭇 목숨을 즐거이 찾아보거나 살피거나 함께 놀도록 이끄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먹이사슬을 다루는 교과서입니다. 먹이사슬에 따라 누가 아래에 있고 누가 위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사람은 먹이사슬에서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는 교과서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라는 곳은 먹이사슬이 끊어지거나 사라진 지 오래인데, 아이들로서는 몸소 겪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과서입니다.

 그림책 《웅덩이 관찰일기》는 웅덩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얼마나 알뜰히 엮이거나 얽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누가 무엇을 잡아먹고, 누가 누구한테 잡아먹히는가를 보여줍니다. 웅덩이는 어떠한 터전이며, 이러한 웅덩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밝힙니다.

 다만, ‘웅덩이 살펴보기’를 보여주면서 웅덩이를 왜 살펴야 하는가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웅덩이 살펴보기’를 밝히면서 웅덩이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를 밝히지는 못합니다.


.. 바람이 불어 멸구가 물 위로 떨어지자, 다리가 긴 소금쟁이가 재빨리 달려와 멸구를 잡아먹었어요. 곧 작은 박새가 날아와 소금쟁이를 낚아챘어요. 박새가 소금쟁이를 물고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새매가 나타나 박새를 채어 쌩하니 숲으로 날아갔어요 … 동물은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지 못해서, 식물이나 다른 동물을 먹고 살아요. 그래서 동물을 ‘소비자’라고 한대요. 나도 밥과 고기, 채소를 먹고 사는 소비자예요 ..  (4∼6, 10쪽)


 그림책 《웅덩이 관찰일기》가 나쁘다거나 모자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저, 교과서 과학 학습 틀에 매이지 않을 수 있으면 한결 어여쁘면서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합니다. 웅덩이를 살펴보자는 그림책이라면, 맨 먼저 웅덩이가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웅덩이가 얼마나 줄었고, 웅덩이가 있던 자리는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웅덩이 얼거리를 보여주거나 밝힌다 해서 아름답게 빛날 그림책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웅덩이는 수많은 목숨들이 어우러지는 삶터이면서, 아이들한테는 재미난 놀이터가 되거든요.

 냇물에서 여러 목숨붙이를 살펴볼 수 있겠지요. 들판과 논에서 온갖 목숨붙이를 들여다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냇물에서는 냇물놀이를 즐기면서 여러 목숨붙이를 살펴보아야지요. 냇물에서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냇물을 알뜰히 건사하거나 보듬으면서 이곳 목숨붙이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지요.

 들판과 논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들판과 논이 어떠한 곳인가를 차근차근 느끼면서 이곳에서 숱한 목숨붙이를 하나하나 받아들이도록 이끌어야 아름다운 그림책으로 마무리됩니다. 지식을 다루거나 정보를 드러낸대서 ‘괜찮은 과학 그림책’이나 ‘볼 만한 지식 그림책’이 될 수 없어요.

 아이들이라면 웅덩이를 보았을 때 맨발이든 긴신을 신었든 첨벙첨벙 뛰어들어야 걸맞거든요. 물을 만지고 흙을 만지면서 햇볕을 즐겨야 아이들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 며칠 동안 웅덩이에서 관찰한 동물들의 먹이를 그림으로 그려 보았어요. 이번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혔어요. 동물들이 한 가지만 먹는 것이 아니라 여러 먹이를 먹기 때문이에요 … 고라니, 토끼, 풀벌레들이 풀을 먹는 것도 보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걱정이 생겼어요. 동물들이 풀을 다 먹어 버리면 어떡하지? ..  (22, 26쪽)


 그림책 《웅덩이 관찰일기》는 책이름부터 ‘관찰일기’로 못박았으니까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살펴보는 일기’라 하더라도, 놀면서 살필 수 있습니다. 살펴보는 일기이니까, 웅덩이에서 재미나게 놀면서 실컷 살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살펴보기만 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겠지요. 맛난 밥을 가만히 살펴보기만 하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겠지요. 참말로, ‘살펴보기’란 곰곰이 헤아리면서 들여다보는 일이 돼요. 참말, ‘살펴보기’란 여태껏 잘 모르거나 잘못 알던 일을 바로잡는 노릇을 해요.


.. 나는 웅덩이를 관찰하면서 여러 동물과 식물이 먹고 먹히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작은 풀 한 포기에서 커다란 동물까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서로 이어져 있는 거예요  ..  (30쪽)


 오늘날 어른과 아이가 살아가는 숱한 아파트는 바로 웅덩이를 밀고 지었습니다. 아파트가 선 땅은 바다였고 멧자락이었으며 냇물이었고 논밭이었습니다. 아파트는 갯벌에도 서고 모래땅에도 섭니다.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이 다닥다닥 모인 동네를 밀어내며 서기도 합니다. 아파트는 능금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가 우거지던 과일밭을 밀어내며 서기도 합니다. 아파트뿐 아닙니다. 기찻길이든 고속도로이든 똑같습니다. 이웃사람이 조용히 살던 호젓한 터를 밀며 짓는 아파트이고 공장이며 기찻길인 한편 고속도로입니다. 숱한 크고작은 짐승과 벌레와 푸나무를 짓밟아 죽인 자리에 세우는 도시예요.

 ‘웅덩이 살펴보기’는 어디에 어떻게 살아남은 웅덩이를 누가 어떻게 살펴보는 일이 될까 궁금합니다. 웅덩이를 살펴보기 앞서하고 웅덩이를 살펴보고 난 다음, 어른과 아이 삶은 어떻게 바뀌거나 거듭날는지 궁금합니다. 웅덩이를 밀어 공원이나 체육관이나 극장이나 쇼핑센터나 학교나 공공기관을 세우는 일이 누구보다 우리 사람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거나 즐거운 삶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4344.7.2.흙.ㅎㄲㅅㄱ)


― 웅덩이 관찰일기 (윤봉선 그림,황보연 글,웅진주니어 펴냄,2007.1.1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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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모자 - 한 줄 명작 동화 2
엠마누엘라 부솔라티 그림, 로베르토 피우미니 지음, 김윤화 옮김 / 꼬마Media2.0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옛이야기에 깃든 옛날 어린이 삶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71] 엠마누엘라 부솔라티·로베르토 피유미니, 《한 줄 명작 동화 2 : 빨간 모자》(꼬마media2.0,2004)



 ‘한 줄 명작동화’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책 《빨간 모자》(꼬마media2.0,2004)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익히 알려지고 널리 읽히는 옛이야기인 《빨간 모자》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느낌과 생각을 담아 수많은 이야기책이나 그림책으로 다시 엮습니다. 어린이가 보는 영화로 나오기도 하는 《빨간 모자》예요. 그닥 길지 않은 옛이야기 하나가 씨앗이 되어 온갖 새이야기가 태어나는구나 싶고, 옛이야기 한 자락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즐기면서 대물림하는구나 싶습니다.

 우리네 옛이야기 가운데에는 〈청개구리〉가 무척 널리 읽히고 익히 알려졌습니다. 이야기책으로든 그림책으로든 〈청개구리〉를 새롭게 엮곤 합니다. 그렇지만, 〈청개구리〉를 알차며 빛나는 만화영화나 어린이영화로 새롭게 빚으려 한다든지, 그림책이나 이야기책에 새멋이나 새맛을 담으려고 힘쓰지는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오래된 사랑과 삶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한편, 한겨레 넋과 얼을 오늘 아이들한테 어떻게 나누거나 대물림하면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울까를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 엄마가 심부름을 시킵니다. “이걸 숲 저편 할머니께 드리고 오겠니?” ..  (6쪽)


 이 나라 옛이야기를 살피거나 서양 옛이야기를 돌아보거나 일본이나 중국 옛이야기를 더듬으면, 이 옛이야기는 하나같이 시골마을이나 두메자락 삶을 다루곤 합니다. 도시나 커다란 마을에서 이루어진 옛이야기가 아예 없지는 않으나 몹시 드물다 할 만합니다. 여느 시골마을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사람들 복닥이는 조그마한 삶을 옛이야기로 삼아 대물림하곤 합니다.

 그림책 《빨간 모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메자락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집에서 아버지는 나무꾼 노릇을 하고, 어머니는 집일을 건사하면서 딸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깊고 우거진 숲속에서 숱한 멧짐승을 두려워 할 만하지만, 어린 딸아이는 씩씩하게 홀로 심부름길을 떠나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서양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옛이야기 《빨간 모자》에 나오는 어린이는 몹시 어립니다. 열 살이 채 안 되었지 싶어요.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어린 아이한테 숲 저편을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킵니다. 자가용도 자전거도 없이 두 다리로 숲을 가로질러야 하는 길이니, 퍽 오래 걸릴 테며 꽤 힘들다 할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기 앞서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하니까, 할머니 댁에까지 가는 데에만 한나절은 넉넉히 걸린다 하겠지요. 그러니까, 서너 시간쯤 걸어가서 볼일을 보고, 다시 서너 시간쯤 걸어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 빨간 모자는 바구니를 들고 랄랄라 신나게 걸어갔어요. 시원한 그늘과 따뜻한 햇볕, 지저귀는 작은 새들과 버섯, 오랑캐꽃이 있는 숲에서 빨간 모자는 버찌와 딸기를 따서 먹었어요 ..  (8쪽)


 요즈음 아이들한테 꼭 한 시간만 걸어가서 딱 한 시간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심부름을 시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요즈음 아이들이 한 시간쯤 걷기라도 할 일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를 아기수레에 태우지 않고 걸리는 어버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이를 자가용에 태우지 않고 어버이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어버이는 얼마나 있을까요. 아이가 한참 걸어 다리가 아프기 때문에 안아 주다가는, 얼마쯤 지나 다리를 쉬었다 싶을 때에 다시 땅에 내려놓고 걸리는 어버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자가용이 있으니까 ‘걸어서 오가는 심부름’을 시킬 까닭이 없다고 여길 만한가요. 버스를 타면 되지, 뭐 하러 걸어서 다니느냐고 생각할 만한가요.


.. 빨간 모자는 한참 놀다가 갑자기 엄마 말씀이 생각나서 가던 길을 재촉했어요. 하지만 데이지꽃을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어요? 빨간 모자는 두 손 가득 꽃을 꺾었어요. 가는 내내 이것도 먹어 보고 저것도 꺾어 보고 하나는 입에 넣고 하나는 바구니에 담고 ..  (10쪽)


 〈청개구리〉이든 《빨간 모자》이든 줄거리는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줄거리를 알리려고 이러한 옛이야기를 들려준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옛이야기 줄거리를 줄줄 꿰거나 옛이야기 가르침을 깊이 아로새겨야 한다고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예 옛이야기를 즐기면서 옛이야기가 이루어지던 옛사람 옛삶을 가만히 느끼며 가슴으로 담으면 즐거운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빨간 모자’는 심부름이 싫지 않습니다. 아니, 빨간 모자는 심부름이 반갑습니다. 빨간 모자가 좋아하는 할머니도 만나고, 심부름길에 이 놀이와 저 놀이를 마음껏 즐기거든요. 숲에서는 어머니 눈치를 안 보면서 오래오래 뛰놀아도 됩니다. 옷에 흙이 묻든 말든 뒹굴 수 있고, 흙이 좀 묻었으면 털면 돼요. 옷이 지저분해졌다면 어머니하고 냇가에 가서 신나게 빨래를 하면서 물놀이를 합니다.

 모든 삶이 놀이가 되면서 일입니다. 모든 일이 놀이가 되면서 삶입니다.

 다만, 옛이야기 《빨간 모자》에 나오는 아이는 어머니 말씀을 까맣게 잊은 나머지 목숨을 잃습니다. 할머니마저 목숨을 잃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지난날 숲에서는 멧짐승이나 들짐승한테 잡아먹히는 일이 곧잘 일어나니까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까지 범한테든 늑대한테든 잡아먹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옛이야기 《빨간 모자》는 ‘그러니까, 어머니 말씀을 잘 들으라구!’ 하는 뜻으로 읽히거나 생각하면 될까요. ‘그러게, 그 아슬아슬한 숲길에서 심부름을 시키는 멍청한 어머니가 어디 있어!’ 하는 뜻으로 곱새기면 될까요.


.. 달고 맛있는 체리 하나는 햇볕을 위해서, 또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서, 또 하나는 용감한 시냥꾼 아저씨를 위해서, 마지막 하나는 빨간 모자를 위해서 ..  (40쪽)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그림책 《빨간 모자》에 나오는 앙증맞은 그림을 좋아합니다. “한 줄 명작 동화”라는 이름에 걸맞게 글 한 줄마다 꼬마그림을 한 줄씩 길다랗게 붙입니다. 글로 살을 붙인 옛이야기가 아닌, 그림으로 살을 붙이면서 ‘빨간 모자라는 아이 삶과 발자국과 움직임’을 더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빨간 모자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모양이요 어떤 이야기인가를 조곤조곤 마주하도록 이끕니다.

 자가용은커녕 텔레비전이나 전기조차 없는 깊은 숲속 빨간 모자는 들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들딸기를 마음껏 따먹으면서 집식구를 생각합니다. 파란 빛깔 하늘을 머리에 이고 푸른 빛깔 들판을 두 다리로 밟습니다. 착하면서 예쁘게 일구는 삶을 할머니와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습니다. 씩씩하며 다부지게 가꾸는 온몸을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이어받습니다.

 숲은 봄부터 겨울까지 노상 다른 빛깔과 이야기입니다. 눈이 녹으면서 차츰 푸른빛으로 바뀌는 멧자락 숲은 새로 움트는 고운 목숨들이 있어 사람들 누구나 고운 목숨을 고맙게 잇는 줄 느끼도록 합니다. 한껏 푸른빛을 뽐내는 여름을 지나 겨우내 즐거이 먹을 갖은 곡식과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가을에는 새삼스러운 가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살뜰히 보여줍니다. 온통 하얗게 바뀌는 겨울에는 조그마한 집 하나를 아끼는 매무새를 북돋우고, 집식구가 도란도란 길디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따스히 보내는 꿈을 키웁니다.

 사랑스러운 터에서 사랑스러운 사람과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랑스러운 삶을 다스립니다. 언제나 사랑꽃이 피기 때문에 옛날 옛적 사람들은 오순도순 어우러지면서 이야기열매를 맺어 대물림합니다. 두 다리로 걷고 두 팔로 일하면서 땀흘리는 나날을 옛이야기 한 자락에 살포시 담아 물려줍니다. (4344.7.2.흙.ㅎㄲㅅㄱ)


― 한 줄 명작 동화 2 : 빨간 모자 (엠마누엘라 부솔라티 그림,로베르토 피유미니 글,김윤화 옮김,꼬마media2.0 펴냄,2004.6.18./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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