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왔는가 제1권력 1
히로세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아이한테는 돈 아닌 사랑을 물려주고 싶다
 [책읽기 삶읽기 30] 히로세 다카시, 《제1권력》



 일본사람 히로세 다카시 님이 쓴 책 가운데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소 하나가 터지며 생긴 끔찍한 일이 사람들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가를 다룬 빼어난 작품입니다. ‘원자력발전소는 안 돼!’ 하는 외침이 아니라 ‘원자력발전소는 이렇고, 원자력발전소를 다루는 정치권력은 이런 모습이야.’ 하고 들려주는 작품입니다. 일본에서 1986년에 처음 나오고, 2010년 3월에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옮겨진 《제1권력 :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책은 영화가 아닌 ‘영화산업’이 전쟁 아닌 ‘전쟁산업’하고 어떻게 맞물려 떨어지는 가운데, 이러한 ‘산업’은 미국 정치나 사회하고는 어떻게 맞닿았는가를 찬찬히 파헤칩니다(이 책은 1991년에 《억만장자는 헐리우드를 죽인다》(두레)라는 이름으로 한 번 나온 적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결국 어느 쪽이 대통령이 되든 돈의 흐름은 한 방향뿐이어서 끝내는 깔때기의 주둥이가 그들이 석유나 금광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게 되어 있다(344쪽).”로 갈무리할 만한 560쪽짜리 두툼한 이야기인데요, 이 책을 읽다 보면 “전쟁 전과 전쟁중,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반도의 독점 지배 회사나 마찬가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 관리 회사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모건의 내셔널시티은행이었다(288쪽).” 같은 대목을 만납니다.

 꼼꼼하게 파헤친 뿌리요, 찬찬히 들여다본 밑둥입니다.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니고, 역사를 바로 알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우리 삶이 이루어진 얼개를 옳게 살피면서, 우리 삶을 꾸리는 바른 길을 가다듬자는 목소리를 담습니다.

 《제1권력》,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책 하나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면, 겉으로 드러난 얼굴에 감추어 놓은 속마음을 헤아리는 눈썰미와 마음밭을 가다듬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어두운 극장엔 즐길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여기에서 에디슨은 다시 한 번 그만의 능력을 발휘했는데, 새로운 기계나 전등을 발명한 게 아니라, 이번엔 에로티시즘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발명한 것이다 … 에디슨연구소는 영화계에서 추방된 보상으로 모처럼만에 모건에게서 새로운 직무를 부여받고 군함용 전화, 대포의 조준과 발사 장치, 연막용 발연통 등을 잇달아 개발하여 듀폰과 호흡을 맞추며 살인 병기의 발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31, 118쪽)


 교과서이니까 배워야 하는 책이 아닙니다. 교과서는 제도권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시험성적을 판가름할 때에 쓰는 장치입니다. 교과서가 아주 그릇된 지식이라 할 수 없으나, 교과서가 아주 바른 지식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교과서는 그저 ‘교과서’라는 이름이 붙은 ‘시험 성적 재는 장치’입니다. 모든 아이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워 놓기에 쓸 만한 장치예요.

 교과서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과서는 시험 교재입니다. 교과서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읽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배워 외울 뿐입니다. 교과서 지식으로는 이 땅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교과서로는 시험성적 등수 매기기나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교과서로 시험성적을 가늠하고, 대학교에서는 다른 교재로 학과성적을 가늠한달지라도, 이러저러하여 높은 성적을 거둔 아이가 회사나 공장에 들어가 본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새로 익혀야 합니다. 교과서라는 장치는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제대로 지식을 외워 받아들일 만하느냐’를 따지는 잣대이기 때문에, 이런 잣대 나누기에서 평점이 좋다면, 회사나 공장에 들어가서도 ‘새로운 교과서와 같은 장치에 따라 새로운 지식을 가르칠 때에도 한결 빨리 받아들여 더 빠르게 회사사람이나 공장사람이 될 만한가’를 헤아립니다.

 교과서 지식만큼 시험성적이나 학과성적은 덧없는 숫자놀음이고, 대학교 졸업장이든 중·고등학교 졸업장이든 어느 한 사람 삶이나 넋을 판가름하는 틀이 되지 못합니다.

 아주 마땅한 소리인데, 교과서를 달달 외워 시험성적이 잘 나온들 똑똑한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교과서 지식을 잘 추슬렀다뿐입니다. 또한 아주 마땅한 소리로, 교과서를 잘 못 외워 시험성적이 떨어진다 해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에요. 교과서는 시험성적 재는 잣대이지, 삶을 읽는 슬기가 아니거든요.

 시험을 잘 치는 아이가 시를 잘 쓰거나 자동차를 잘 몰거나 착한 사람이거나 책을 옳게 잘 꿰뚫어볼 줄 알지 않습니다. 시험도 잘 치고 소설도 잘 쓰는 아이가 더러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시험은 시험이고 교과서는 교과서이며, 책은 책입니다. 이런 테두리를 찬찬히 가누는 눈썰미로 《제1권력》을 집어들어야 합니다. 《제1권력》은 내 마음에 아로새겨졌을는지 모를 섣부른 ‘굽은 지식(선입관과 편견)’을 반반하게 펴도록 돕는 책입니다.


.. 모건과 록펠러가 부를 독점해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을 매고, 그들이 보낸 폭력단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당대의 모건 일당은 이를 동물계의 약육강식 원리라고 버젓이 주장했던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다윈이 설파한 적자생존의 원리를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무지막지한 인간의 행동도 모두 자연의 섭리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사회진화론이었다 … 록펠러는 세간의 비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판소의 명령대로 스탠더드오일을 몇 개로 분할했지만, 설령 천 개 회사로 분리해도 그 주식을 록펠러가 쥐고 있는 한 트러스트 해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잠자코 있어도 금고의 돈다발이 30%나 불어나는 묘한 현상만을 목격할 따름이었다 … 〈게르니카〉로 반골 정신을 한껏 보여준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록펠러 센터의 벽화 의뢰를 왜 신경질적으로 거절했겠는가? ..  (98∼99, 113, 115쪽)


 돈을 많이 번다고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가운데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돈과 사람됨은 사뭇 다릅니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슬기롭거나 아름다운 사람이지는 않아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착하거나 멋스러운 사람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누군가는 100억을 그러모았으나 100조를 거머쥐려고 끝없이 돈굴리기를 합니다. 누군가는 100권을 읽었으나 1만 권을 읽거나 10만 권을 읽어치우려고 책읽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돈굴리기로 나아가는 사람은 돈을 긁어모으면서 참답거나 착하거나 고운 삶을 잃거나 놓치거나 내버립니다. 책굴리기로 뻗어가는 사람은 책을 읽어치우면서 참답거나 착하거나 고운 삶을 잊거나 놓거나 걷어찹니다. 돈을 긁느라 사람다이 살아가지 못하고, 책을 그러모으느라 사람답게 살아내지 못합니다.


.. 모건상사가 무솔리니에게 거금을 융자하던 1925년, US스틸 중역실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때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따로 진행되던 수사국의 권력 확대와 파시즘의 대두가 일거에 결합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그것이다 … 전쟁은 당연히 투기사업이지만, 학살도 역시 세세한 과정에 이르기까지 투기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인간을 대량으로 죽여야 한다면, 이 일을 청부하는 자들이 하는 일은 어엿한 비즈니스여야 된다. 따라서 그저 이유도 없이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게 아니다 … 이 하버드대학의 총장은 오래전 무고한 노동자 사코와 반제티를 전기의자에 앉히라는 최후의 권고를 한 인물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발표를 받아서 록펠러의 파트너로부터 은밀한 지원을 받으며 백악관에 입성한 트루먼 대통령이 나치스로부터 십자공로훈장을 받은 포드재단의 총재 호프만을 마셜플랜의 책임자로 임명했고 ..  (136, 186, 253쪽)


 ‘돈굴리기’와 함께 ‘책굴리기’라 했습니다만, 책굴리기란 ‘지식굴리기’입니다. 나날이 지식 쌓는 사람 많고, 지식 늘어난 사람 많습니다만, 삶을 올바로 읽는 지식이라거나 삶을 알차게 살찌우는 지식으로는 거듭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소식과 저런 이야기는 훤히 꿴다지만, 정작 이런 소식과 저런 이야기하고 얽힌 속내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지식이란 덧없다고 느낍니다. 운전면허시험에서 100점을 맞는다고 자동차를 몰 때에 느긋하거나 알맞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니라 내 살림을 나누거나 쪼개어 이웃사랑을 아름다이 펼치는 삶이어야 아름답습니다. 내가 날마다 받아드는 밥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찬찬히 살피어 내 밥거리를 내 손으로 일구어 보려고 힘쓰는 삶일 때에 즐겁습니다.

 우리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는 일이란 썩 나쁘지는 않다고 느끼지만, 돈만 물려줄 수 있는 어버이라면 너무 슬픈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어느 무엇보다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과 꿈과 나눔과 해맑음과 아름다움을 물려줄 수 있을 때에 참으로 기쁜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아이한테 사랑 한 줌 믿음 한 줄기 꿈 한 포기 나눔 한 소쿠리 해맑음 한 바구니 아름다움 한 자락 나눌 수 없으면 얼마나 쓸쓸하거나 덧없으랴 싶습니다. 아이한테 대학 졸업장만 남긴다든지, 아이한테 아파트 한 채만 남긴다든지, 아이한테 자동차 열쇠만 남긴다든지 하는 어버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우랴 싶어요.


.. 결국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한창 유명해지고 있는 와중에 〈킹콩〉이 등장한 것이다. 〈환호의 선풍〉의 아역배우 셜리 템플은 은행총재의 딸이었다 … 〈그린 베레〉 같은 메시지가 있는 작품보다는 〈킹콩〉이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오락물이야말로 월가의 주가를 높이고 비즈니스를 쉽게 만들어 주는 작품일 것이다 … 이 풍요로운 한 줌의 미국인이 하는 일이란, 이들 자원을 이용하여 무기를 제조하고 또 다른 자원 확보를 위해 해외 침략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분명 미국 국가 예산의 70%가 ‘국가안전보장’이란 명목하에 쓰였던 1960년대까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해도, 오늘날에도 역시 약 30%가 군사비로 책정된다 … 문제는 그 70%가 30%로 떨어지면서 대량의 실업사태를 낳았다는 점이다. 전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참으로 가련한 국민이 되고 만 것이다 ..  (168, 169, 475쪽)


 《제1권력》이라는 책은 “자본, 그들은 어떻게 역사를 소유해 왔는가”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 나왔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올 때에 붙은 이름은 “억만장자는 헐리우드를 죽인다”입니다. 억만장자는 당신들 돈과 이름과 힘을 더욱 부풀리는 가운데 당신들 돈과 이름과 힘에 다가서려는 이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려고 헐리우드를 만들었으나, 나중에 이 헐리우드를 무너뜨리려고 라디오방송과 텔레비전방송을 키웠습니다. 헐리우드 배우와 영화작품이 돈과 이름과 힘을 비웃는 한편 돈과 이름과 힘이 어떻게 태어나서 커지는가를 파헤쳐 꾸짖었거든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라디오방송과 텔레비전방송이 태어났을 무렵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 방송 매체가 ‘돈과 이름과 힘’하고 동떨어진 길을 걸어 본 적은 없다고 느낍니다. 권력과 가까이 손을 잡거나 권력자 손아귀에서 춤추는 방송 매체 틀이지, 권력을 감시한다거나 권력을 비판한다거나 권력 밑바탕을 캐내어 사회를 밝히려 하는 방송 매체라고 느낄 만한 때는 아직 없다고 봅니다. 방송 매체란 돈이 되고 이름이 되며 힘이 되는 길만 걷거든요.

 그러나,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억만장자이든 엄청난 권력자이든, 이런저런 부자나 권력자 아닌 여느 사람이든, 오늘날 삶자락을 살피면 한결같이 돈바라기와 이름바라기와 힘바라기로 기울어집니다. 사랑바라기나 믿음바라기나 나눔바라기하고는 좀처럼 가까이하려 하지 않습니다. 내 밥그릇이 더 커지기를 바라지, 이웃하고 나눌 밥그릇을 마련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 자동차가 더 커지기를 꿈꾸지, 이웃한테 길을 내주거나 내 자동차를 버릴 꿈을 꾸지 않습니다. 내 아파트가 너 커지기를 꾀하지, 아파트를 떠나 시골이나 도시 골목동네 자그마한 보금자리에서 어깨동무하기를 꾀하지 않아요.

 미국땅에서 미국을 주무를 뿐 아니라 온누리 구석구석을 주무르면서 돈이랑 이름이랑 힘을 거머쥐는 두 재벌 봉우리인 ‘록펠러’하고 ‘모건’이라 합니다. 《제1권력》이라는 책은 이 두 재벌 봉우리 맡바탕과 속내를 샅샅이 들추면서 빈틈없이 들여다봅니다. 이들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나 끔찍한 짓을 따로 다루지는 않되, 이들이 어떻게 오늘날 자리에 올라섰는가를 밝힙니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다르게 바라보며 다루었다면 ‘성공신화 자기계발서’가 되었겠지요. 또 다른 눈길로 바라보며 다룬다면 ‘노동자 탄압 역사’를 쓸 수 있었을 테고, 또 다른 눈매로 살피며 다룬다면 ‘미국 사회를 보며 한국 사회 읽기’를 쓸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궁금합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데에 바쁜 그분들께서는 당신들 바쁜 나날이 얼마나 즐거울는지요. 돈 버는 재미 하나로만 이 땅에 태어나 흙으로 돌아갈는지요.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펼치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재미나 즐거움이란 하나도 모르는 채 한삶을 마무리한다면 그지없이 불쌍한 노릇이 아닐는지요. 아이들한테 고작 돈굴리기 하나를 물려준다면, 이와 같은 삶이란 얼마나 슬플까 궁금합니다. (4343.12.18.흙.ㅎㄲㅅㄱ)


― 제1권력 (히로세 다카시 글,이규원 옮김,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2010.3.20./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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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0607 2011-02-28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 잘 읽었습니다. 몇몇 문장을 소리내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네요.
이런 좋은 글을 만나는 아침엔... 갑자기 없던 힘마저 납니다.
누군가 나와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좋은 친구 혹은 스승을 만났다는
기쁨에 배가 부르네요 ^^ 기분 좋게 일 시작하렵니다 ^^

숲노래 2011-02-28 11:18   좋아요 0 | URL
언제나 새로운 하루 기쁘게 맞이하셔요.
곧 삼월이 되는군요~
따스하면서 넉넉한 봄이 찾아오겠네요~~~
 


 눈빛과 글쓰기


 여러 날 바깥마실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니 물이 얼었다. 물꼭지를 더 틀었어야 하나 보다. 언 물은 좀처럼 녹아 주려 하지 않는다. 보일러는 돈다. 어디에서 얼었을까. 무거운 몸으로 집과 보일러방을 오가며 수선을 피우지만 끝내 두 손을 들고 자리에 눕는다. 이동안 날은 풀릴 낌새가 없이 새눈이 보슬보슬 내린다. 눈은 소리없이 내린다. 아니, 새눈은 아주 고즈넉히 내린다. 빨랫줄과 마당과 멧기슭과 나무와 텃밭과 계단논과 지붕에 아주 조용조용 내린다. 집하고 보일러방을 오가던 내 머리와 어깨와 발등에까지 사뿐사뿐 내린다. 어느새 되쌓이고 어느덧 뽀독뽀독 소리가 난다. 요사이는 시골에서도 사람 다니는 길이 아닌 자동차 다니는 길로 바뀐 나머지, 사람이 걸어다니면서 뽀독뽀독 소리를 즐기며 겨울눈을 맞아들이기 어렵다. 서울 같은 도시 찻길은 얼른 ‘화학방정식 소금’을 뿌리니까 눈밭이 없고, 인천 같은 도시 골목길은 바삐 연탄을 깨부수니까 눈밭이 없으며, 시골길에는 흙을 뿌리니까 눈밭이 없다.

 화학방정식 소금물이 흐르는 큰도시 찻길과 거님길은 질퍽질퍽하다. 이런 데에서 자칫 미끄러지면 옷을 모조리 버린다. 눈 내린 길을 거닐며 냄새도 좋지 않다. 연탄재로 얼룩덜룩한 길은 살짝 미끌미끌하지만, 이 길에서 미끄러져도 옷이 그닥 버리지는 않는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 눈 내음을 살짝 맡는다. 흙 깔린 시골길에서 넘어지면 툭툭 털면 그만이다. 곱다시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빛 하얀 솜이불 누리에서 내 눈빛이 맑을 수 있도록 다독이고 싶구나. (4343.12.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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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부터 17일까지 인천과 서울을 오락가락하는 마실을 마치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물이 얼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기에 설마 얼랴 싶었는데 얼고 말았다. 아직까지 안 녹는다. 몸은 무척 무겁다. 하루를 자고 따뜻한 낮에 햇빛 받는 사진으로 새로 찍거나 스캐너로 긁어야지. 이번 책은 다음주쯤에나 알라딘 목록에 뜨려나. 아직까지 책방에는 안 들어가네... 

  


책을 내놓으며 붙인 꼬리말 : 삶을 사랑하는 글쓰기


 삶을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목숨을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책을 사랑하고 노래를 사랑하며 사진을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풀과 나무와 꽃과 나비와 벌레 모두를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자전거와 하늘과 바닷물과 물고기를 사랑하는 글쓰기입니다.

 꾸미고 싶지 않은 글쓰기입니다. 가꾸고 싶은 글쓰기입니다. 덧바르고 싶지 않은 글쓰기입니다. 껴안고 싶은 글쓰기입니다. 내세우고 싶지 않은 글쓰기입니다. 토닥이며 어루만지고픈 글쓰기입니다.

 《사랑하는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대로 살피지 않으며 엉뚱하게 잘못 쓰는 겹말’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겹말을 바로잡는 이야기를 펼치며 붙인 “사랑하는 글쓰기”라는 이름은 자칫 너무 크거나 동떨어졌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아니, 참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사랑하는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집식구와 이웃과 동무와 둘레 사람들 누구나 우리 말글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을 담아 글 한 줄을 쓰고, 내 사랑을 실어 말 한 마디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담는 글이 아닌 사랑을 담는 글로 거듭나면 고맙겠습니다. 가르침을 밀어넣는 말이 아닌 사랑으로 함께 배우는 말로 새로워지면 반갑겠습니다.

 국어학이나 언어학이라는 틀에 사로잡히기보다, 내가 사랑할 말과 내가 좋아할 글이라는 고운 보금자리 마련하면 기쁘겠습니다. “우리 말 달인”이라거나 “우리 말 상식”이라거나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울타리에 매이기보다, 서로서로 사랑할 삶과 다 함께 어깨동무할 터전이라는 어여쁜 마음밭 일구면 보람차겠습니다.
 

..  

 그동안 나온 내 낱권책들

<사랑하는 글쓰기>(호미,2010)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양철북,2010)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내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은 2007년부터 2010년 12월까지 모두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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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빨래 개는 옆에서 빨래 개기를 따라하는 어린이.

 - 201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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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11번가’ 바보짓


 내 새 책 《사랑하는 글쓰기》가 나왔다. 제때에 나오지 못했으나, 이렇게 종이에 곱게 찍혀 태어난 모습을 보니 눈물이 글썽하다. 이 아이는 나와 내 둘레 사람들이 얼마나 아끼거나 사랑할 수 있으려나. 책이 새로 나오기도 했고, 옆지기가 인천에 오랜만에 마실을 하고프다고 말한다. 애 아빠는 이런저런 볼일로 지난달에 인천으로 마실을 했지만, 옆지기는 넉 달 만에 인천으로 마실을 한다. 아이랑 모두 인천으로 마실을 다니기도 넉 달 만이다.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는 길에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온몸이 찌뿌둥하다. 아주 잠깐조차 쉬지 않으며 놀아대려 하는 아이를 전철에 얌전히 앉힐 수 없다. 뛰놀고픈 아이는 전철 같은 데가 얼마나 갑갑할까. 콩콩 통통 튀고플 텐데.

 아이하고 복닥이다가 살짝 숨을 돌리려고 머리를 창문에 기댄다. 히유 하고 한숨을 쉬는데, 오른쪽 위에 대롱대롱 달린 광고판이 보인다. 전철이든 버스이든, 이런 탈거리 구석구석은 눈을 쉴 곳이 없이 광고판이다. 버스나 전철이 사람 눈길이 닿는 데마다 이렇게 광고판을 덕지덕지 붙인다면, 이들 회사가 광고삯 받는 만큼 버스삯이나 전철삯을 안 받아야 옳지 않으려나. 광고삯은 광고삯대로 받으며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흔들면서 찻삯은 또 찻삯대로 다 받으니 얼마나 몹쓸 노릇인가.

 광고판 그림에는 책을 잔뜩 그려 놓았다. 책 그림 옆으로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선다. 사이에 잔글씨로 무어라무어라 적었구나. 안경을 쓰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번 주 베스트셀러는 무조건 무료 배송 …….” 아, ‘싸게’ 살 뿐더러 집에 드러누워 거저로 받아 보기까지 하는 이 책들이란 ‘읽는’ 책인가, ‘사서 쓰고 버리는’ 책인가. 모든 책은 적어도 10% 에누리에 적립금까지 몇 퍼센트가 되는데, 이 몫은 누가 내지? 책값에 이 몫이 담기는가, 출판사가 피를 뱉어야 하는가, 책방이 살을 깎는가? 내 삶을 밝히며 내 넋을 살찌우는 책을 나누는 좋은 책방 이야기란 어디론가 숨고, 이처럼 서로서로 더 싸게 많이 팔아치우는 장사꾼들 놀음놀이만 번쩍번쩍 춤을 추어야 하는가?

 그러나, 책방들이 이렇게 춤을 추면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이 춤 가락에 맞춘다. 한두 사람이 아닌 참 많은 사람이 이 가락에 이 춤을 추고 저 가락에 저 노래를 부른다. 책을 장만해서 읽는 사람이란 차츰 사라지면서, 1회용품 같은 싸구려 물건을 늘 새롭게 장만해서 쓰고 버리는 사람만 자꾸 늘어난다. 책이 태어나지 못하고, 책이 읽히지 못하며, 책이 녹아들지 못한다. 바보짓이 바보짓이 아닌 듯 뿌리를 내리고, 바보짓을 할수록 돈을 거머쥘 뿐 아니라, 바보짓 막놀이가 온누리를 휘감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 살던 동안에 당신 책이 ‘느낌표 책’으로든 무슨 책으로든 뽑혀서 불티나게 팔리는 일을 두려워 했다. 가만히 보면, ‘느낌표 책’으로뿐 아니라 무슨무슨 추천도서나 필독도서나 권장도서로 뽑히는 일도 두렵다. 책은 기관이나 단체나 교사가 ‘좋은 책’이랍시고 뽑아서 이름표를 붙일 수 없다. 책은 책을 장만해서 읽는 사람 스스로 가슴으로 마주하고 사랑으로 껴안으며 나무처럼 가지를 벌리고 잎을 틔우며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해리포터·하루키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이오덕·리영희는 지성인이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이원수·권정생은 추천명작이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책은 삶으로 자리를 잡고, 삶은 책으로 다시 살아숨쉬며, 사람은 책을 책다이 가꾸는 가운데, 사람은 삶을 삶다이 일구어야 한다. 바보짓 사람들이 바보짓을 멈추지 않으니 ‘도서 11번가’는 바보짓을 그치지 않을 뿐더러, 앞으로도 새삼스러이 바보짓을 벌일밖에 없다. 책방들이 책방 구실을 하도록,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 구실을 옳고 착하며 예쁘게 해야 한다. (4343.12.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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